칼라너 묵상 및 기도
가상 칠언 중 첫째 말씀에 대한 묵상기도
시릴로1004
2009. 7. 9. 13:20

"아버지,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루가 23,34)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거기에 못박았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이 기둥으로부터
당신은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 몸에 있는 상처는 타는 듯 아프고
가시관으로 머리는 쓰라리고 눈은 피로 젖어 있습니다.
당신의 양손과 양발의 상처는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쇠로 구멍이 뚫려있는 듯하구요.
그리고 당신의 영혼은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바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야기한 사람들이 당신의 십자가 아래 서 있습니다.
그들은 떠나가지도 않아
당신이 최소한 홀로 죽는 것조차 허락하질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았노라고
바로 당신의 상태가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행했던 몹쓸짓이 거룩한 정의의 실현이며
그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예식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모독합니다.
그런 악에 대한 회의가 몸의 모든 고통보다도 더 끔찍하게
당신을 칩니다.
그렇게 비열할 수 있는 인간들이 있단 말입니까?
당신과 그들 사이에 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단 말입니까?
한 사람이 다른 한 인간을 그렇게 죽도록 괴롭혀도 되는 건가요?
거짓과 비열함과 배신과 기만과 간계로 그토록 고통을 주고도
올바른 자의 가면과 무죄한 사람의 표정과
공평한 재판관의 포즈를 취할 수 있다니요.
..................
그런데도 당신은 말합니다:
아버지,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오니
그들을 용서하소서.
예수여, 당신은 진정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그 괴로운, 고통으로 찢겨진 영혼의 어디에
이런 말이 생겨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정녕 불가해한 분이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시는군요.
당신은 그들을 위해 당신의 아버지에게 권고하고 기도하십니다.
오, 주님 당신을 정녕 모독하는 말이 아니라면:
당신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변호로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
당신은 그들이 한 일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확실히 한가지는 그들이 몰랐지요.
그것은 바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영혼만이 선사받은 사랑에 눈뜰 수 있기에.
주님, 당신의 불가해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의 말씀을
죄많은 제게도 해 주소서!
저를 위해서도 아버지께 말씀해주소서:
그는 그가 했던 일을 모르오니 그를 용서하소서.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러나 한 가지, 당신의 사랑만은 알지 못했지요.
................
-삶의 기도(Gebete des Lebens) / 칼 라너(Karl Rahner)
-우리말 옮김/ 이은희
최 인호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때 이런 말을 했지요.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남긴 이 마지말 유언을 보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죠. 예수는 "하느님, 저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니 제가 저들을 용서합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왜 하느님께 용서를 미뤄
버렸는가 말입니다. 예수조차 용서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내가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저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는 용서받은 존재이다' 라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용서라고 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과 미움이 가득한데 교회에 가면 용서해야 한다는 말만 들으니 부담감과 상처만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내가 악마에 씐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줘야 할텐데 이렇게 되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없지요.
그게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저 시어머니일지라도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다' 이렇게
하느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게 우리의 용서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나 같은 사람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로구나' 라고 깨닫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회개이겠지요. 뉘우침이 전제되었을 때 "나 같은 사람도 용서받았고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저 사람도 용서받은 존재이니 서로 미워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이때 우리에게 용서의 기쁨이 다가올 수 있죠. 이건 가능한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