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

갈멜의 영성가들의 이야기

시릴로1004 2009. 9. 5. 18:51

갈멜의 영성가들의 이야기




들어가는 말


山(산)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귀를 기울이고 기도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공간과 고독을 나타낸다. 첫 번째 갈멜인들은 (갈멜)산에서 모였다. 그 산은 풍부한 성서적 의미를 내포하며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탁월한 아름다움의 산이다. 산은 또한 사막과 연결이 되며 갈멜 식구들을 사로잡는 도전의 자리였다. 사막은 웅대하고 신비스럽다. 사막은 우리가 여행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도전받고 정화되는 곳이기도 하 다. 때때로 사막으로의 여정은 지루하고 길게 여겨지고 익숙한 표징들과 위로가 없어서 상실감을 자아낼 수도 있다. 오늘 날 도시 안에서, 기술적인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사막이 필요하고 산이 필요하다. 산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오르는 원칙과 훈련이 매우 필요한 곳이다. 산의 크기는 우리를 압도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산은 위험한 곳일 수 있고,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단 정상에 오르면, 그곳에는 안도, 평화 그리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다는 어마어마한 느낌이 생겨난다. 빛과 평정이 그곳 에 있다. 산의 정상에서 우리는 다만 기도 할 뿐이다.


갈멜의 전통은 질식할 것 같은 실존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분리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갈멜의 전통은 광야의 고독, 산의 침묵, 사막의 장엄함으로 초대한다. 고독 속에서, 떨어진 곳에서, 우리, 탐색 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의 갈망에 더 선명하게 귀를 기울이고 삶을 뒤엎고, 꿈꾸며, 숨겨진 샘에 의해 키워 지고 다른 사람들이 위대한 확신을 갖고 말하는 존재와 만나려는 희망을 갖는다. 갈멜의 전통에 이끌리 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끌리는 순례자들이며 똑같은 오래된 길을 간 사람들의 증언을 신뢰한 다.


초기 갈멜인들은 12세기 말에 갈멜산에 정착한 순례자들이요 은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가난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풍부한 역사와 상징의 보고인 산 위에서 살았다. 갈멜산은 예언자 엘리야의 집이었고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하느님의 은총의 관대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였다. 그 산은 또한 떨어진 곳이고, 사막의 오아시스이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생명의 샘으로부터 마실 수 있는 생명수의 자리였다. 처음 갈멜인들은 갈멜산에 정착할 수 없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들을 흩어지게 했지만, 그들은 갈멜의 전통을 수시로 쇄신하도록 도와주는 창조적 원천에 대한 기억을 항상 지녔다.


갈멜회의 영감은 가난한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곧은 마음으로 따르는 것이다. 기도와 단출한 삶이 갈멜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중세의 갈멜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근원을 기억하였고 개혁의 모든 사 도들은 기도에 대한 충실함과 공동체 생활의 성실한 실천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법제화와 권고만으로 는 쇄신을 실제로 이룰 수 없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갈멜의 본래 비젼과 통찰의 쇄신이었다. 무엇인가 상상력을 흔들어 놓는 일이 필요했다.


신비의길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들인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은 갈멜에 쇄신의 추진력을 마련하였고, 동시에 전체 그리스도교에도 훌륭한 유산을 남겼다. 그들은 갈멜 역사에서 지속성과 진취성을 대표하고 있다.


16세기는 격동, 발견과 변화의 시기였다. 종교 개혁의 세기였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인도제도를 발견 했던 때였다. 르네상스가 최고에 달하여 예술이 융성했고 현대과학이 부상했다. 스페인에서는 북아프리카 의 무슬림인 무어인들이 수세기 동안의 정복 후 추방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권력과 팽창이 일어난 시기였다. 국가 차원의 일치가 확립되었고, 필립 2세의 통치아래 정치 종교 지배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배는 종교재판에 의해 실행되었는데 종교재판은 교회보다 국가의 통치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가 의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이런 시대 상황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존 소레토와 니콜라스 오데트는 요한과 데레사의 길을 터 주었다. 존 소레토의 격려는 갈멜 여자 공동체 들이 융성해지도록 했고, 16세기 초에 아빌라에서 여자 갈멜 수도회가 창설된 것도 그러한 개혁정책 덕분 이었다. 또한 데레사와 요한 역시, 현대용어로 하자면,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이미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 은 흥미로운 일이다. 데레사와 요한 모두가 ‘순수한 핏줄’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유대인 조상을 둔 혈통이었고 이 가계 때문에라도 의심과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데레사는 1535년 육화수도원에 입회했고, 그 후 약 20년 동안 탐색, 질병과 사별의 시기를 보냈다. 데레사 는 1554년 사순 절기에 회심을 체험했다. 그때 데레사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상처 입은 인성을 깨닫고 자기 존재를 속속들이 보게 되었다. 육화수도원은 너무 크고 너무 바빴으며, 자원의 결핍은 공동체 생활이 충만 해지는 것을 방해했다. 데레사는 고독가운데의 기도생활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갈멜산의 삶이 지닌 핵 심, 정수를 다시 발견하고 싶었다. 데레사는 우정과 간결한 생활 방식의 작은 공동체를 원했다. 그렇게 하 여 경제문제가 가난의 삶을 압도하지 말아야했다. 특권과 지위가 가족 같은 공동체에 길을 내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데레사는 이런 상황에 있는 수녀들에게 글을 쓰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삶을 나누는 자 신의 체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데레사는 1562년에 <삶>을 그리고 1565년에 <완덕의 길>을 끝냈다.


데레사는 선명하게 썼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었고 그런 척을 한 적도 결코 없었다. 그는 성서학자가 아니었기에 성서를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고 그의 경험과 증언이 유효하다고 느꼈으며 그것들을 기쁘게 나누었다. 사람들의 영적 여정에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갈망, 특히 요셉수도원의 수녀들을 돕고 싶은 것이 <완덕의 길>에 숨겨진 통찰이다. 갈멜인 으로서 데레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결단했고, 그분께 충선을 맹세하며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 요셉수도원의 철저한 고독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침잠하며 데레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을 열었다. 그렇게 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가 그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기도의 스승이 된 다.


데레사는 결코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글쓰기는 경험, 따스함으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선명한 지침을 주고 주제는 거침없는 표현과 더불어 부상한다. 그의 회심의 경험에 의하여 인간이라 는 확고한 기반으로부터 성장해야 한다고 깨닫는다. 기도는 실제적 사랑의 삶으로부터, 이탈과 겸손으로 부터 온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사랑스럽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말할 수 없으며, 우리에겐 현실주의, 그리고 우리 삶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웃 사랑은 우정을 의미하고, 인간 우정의 따스함이 데레사의 기조이다. 데레사의 개혁에 있어 기본적인 부분은 인간의 차원이 존중되고 수녀들이 우정 안에 살아가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과의 우정, 그리고 삼위일체 삶에 참여하는 것이 <완덕의 길>에 나타나는 여정의 끝이다. 데레사는 먼저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가까움을 의식한다. 다시 한 번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데레사에겐 길이다. 그리스도는 스승이시고 ‘우리 아버지’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기도이다. 데레사는 생애 마지막까지 수도원을 창설하기 위하여 일했고, 죽던 해인 1582년에도 마지막으로 부르고스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렇게 일하는 가운데에 데레사는 <영혼의 성>을 썼다. 이 책은 신비가가 쓴 영적 삶에 관한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심으로 가는 여정에 관한 글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충만한 친 교, 일치를 이루는 그 지점에 이르는 여정에 관한 책이다. 데레사는 망상과 환상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또한 자신은 환시를 경험하면서도 거기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데레사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할 수 있지만 그의 갈망은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으며, 우리의 쉴 수 없음을 치유할 유일한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의 신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 길 필요가 있다. 마음은 휴식을 찾을 수 없고 우리는 여전히 갈망하고 숨겨져 있는 사랑을 찾아 나서고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를 탐색하고 있다. 데레사가 말하고 있는 일치는 십자가의 요한이 그의 시에서 말하고 있는 일치이다.


요한은 데레사보다 25년 쯤 아래였고, 스페인의 한가운데 지점인 카스틸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사회적 소외계층 출신이므로 그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집안이었다. 요한은 기초교육을 받은 후 간호보조로 병원에서 일했다. 많은 환자들이 전염병으로 죽 어가고 있었고 요한은 열심히 정성껏 간호했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랑을 느끼도록 음악을 활용하기도 했다. 병원의 원목은 요한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 지역 메다니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3년간 그는 대학에서 문학, 고전과 철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그는 문학 적 양성을 받았다. 장차 詩人이 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563년 요한은 메디나에 있는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다. 왜 갈멜을 택했는가? 아마 아버지 집안의 어떤 사람들이 톨레도의 갈멜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567년 요한은 사제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아빌라에서 데레사를 만난다. 이때쯤 요한은 더 관상적 삶을 살고 싶어 카르투시안회에 입회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데레사는 이 수줍어하는 수도자에게 감명을 받고 살라망가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라고 설득했다. 데레사는 요한에 관해 그의 키를 놀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몸은 조그맣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는 위대하지요“.


아빌라에 머문 5년 동안은 요한과 데레사에게 상호적으로 풍부함의 시간이었다. 이때에 데레사는 신비생활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데레사는 하느님의 친밀함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데레사는 요한에게 많은 통찰 과 경험을 나누었고, 요한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심오한 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의 우정은 소중한 선물이었고 아마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창의적인 친밀함의 가치를 인식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과 데레사는 분명히 서로에게 이끌렸을 것이지만, 서로의 역할과 삶의 여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1577년 요한의 삶은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바깥의 사건들 때문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왕의 간섭과 카스틸의 개혁수사들과 기존의 수사들 사이에 심각한 오해와 갈등이 발생했다. 이 갈등의 한 가운데에서 요한은 무죄한 희생자가 되었고 불순명의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톨레도의 수도원에 감금되었고 아 홉 달 동안 비참한 상황 속에 탈출하게 될 때까지 있었다. 1581년 갈등은 가라앉았으나 요한은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이고 잔혹한 시간동안 요한은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그것을 탁월 한 시로 표현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의 감금생활은 그를 하느님과 더 가까이 있게 해 주었고 위대한 예술 능력을 깨어나게 해 주었다.


감옥에서 어둡고 자기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라는 놀라운 체험을 겪었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워서 마치도 육체적 일치와 흡사할 정도였다. 요한은 이 체험을 나누고 싶어 했고 그 결과가 시로 표현되었다. 이 시는 스페인 언어로 된 가장 훌륭한 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거룩한 존재와의 이 깊은 일체감은 자주 요한의 신비적 체험이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삶 에서도 하느님의 실재를 느껴보는 체험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요한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그의 시를 통해 접근해 보고 그 다음에 긴 해석 산문을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시들은 절제된 형식으로 쓰여 진 훌륭한 서정시이다. 요한은 표현할 말들과 영상들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그 냥 왔을 따름이었다. 물론 ‘어둔 밤’과 ‘영적 찬가’는 성경에 대한 관심과 무엇보다도 아가서에 대한 요한 의 사랑을 보여준다. 아가서는 인간 사랑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노래하는 성경의 시서이다. 하느님에 대 한 갈망은 오로지 그분과의 일치로써 채워질 수 있으며, 그 여정의 느낌은 마치도 엘리야가 동쪽으로 크 릿의 생명의 샘으로 가는 것과 같다.


요한은 네 개의 위대한 산문을 썼다. 이 글들은 한 측면에서 보면 그가 쓴 시들에 대한 해설이고,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 일치를 달성하는가에 대한 그의 비전을 제시해 준다. 네 개의 작 품들은 <갈멜의 산길>, <어둔 밤>, <영적 찬가>, <사랑의 불꼿> 이다. 이 글들은 1578년부터 1586년 사 이에 쓰여 졌고 개혁 갈멜의 수사들과 수녀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글들은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과 매우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는 아직껏 신앙의 세계였고 수녀들과 수사들에게 갈멜의 회규 는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 핵심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또한 요한은 많은 주해가 필요한 학문적 용어 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중심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우리의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있으며 가 장 어두운 때에도 하느님의 초월성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요한의 산문 스타일은 매우 어렵다. 그의 문장들은 길고, 많은 할 일들 사에서 써서 자주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어둔 밤’의 개념을 소개하는데, 이 어둔 밤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그 는 자기가 말해야 할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기이한 스타일’에 대하여 사과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이런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개혁의 수사들과 수녀들- 을 위하여 쓰고 있음을 강조 한다.


우리는 요한이 ‘어둔 밤’을 하느님이 주도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그 과정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둔 밤’의 또 다른 측면은 이 밤 에 깊이 빠져든 사람은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상태는 그냥 겉으로만 하 느님의 부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으로부터 , 하느님이 참으로 물러선 것이 아니다. 다 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모든 사람이 다 ‘어둔 밤’을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어둔 밤’의 과정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역할을 해야 한다. 요한은 우리의 기본적인 자유나 이성 의 사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기쁨은 소수의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은 강박적인 것이 사라지고, 신앙, 신뢰, 그리고 사랑이 꽃피는 자유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인간 발전과 자유가 실현되어 하느님께 다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 안에서 참다운 성숙에 이른다면 상대방을 더 부드럽고 더 이해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요한의 삶은 사랑과 우정에 공간과 시 간을 주었다. 요한은 친밀함 속에서 자유를 느꼈다. 그는 소유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소유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우정을 기뻐할 수도 있었고, 그러한 관계들이 가져오는 기쁨에 대하서도 정직했다. 신비가들 은 하느님의 사랑의 지혜에 열려있고 영적자유가 주는 사랑을 허용함으로 창조적이고, 예민하며 자발적 인 인간성을 획득한다. 십자가의 요한 같은 교사가 주는 위대한 기여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스러운 신뢰가 자라나는 길을 지적하고 그분의 무조건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면서, 사람들이 온전한 사랑의 우정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오늘날처럼 관계에 대해 많은 말을 한 적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이루는 것이 이처럼 힘들었던 시기도 역사상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이러한 상황이 일으키는 상처와 분노는 너무나 크다. 요한의 無가 사랑과 깊은 관계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全 으로 이끌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요한은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움 속에 있는 ‘타 존재’를 발견하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1591년에 죽었으며, 그 때 쯤에 개혁은 꽃이 피고 있었다. 갈등과 긴장은 여전히 있었으나 개혁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가에 대한 불일치에서 오는 마찰이었다. 실제로, 요한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개혁에서 오는 갈등과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힘들었다. 그러나 요한과 데레사로부터 흘러나오는 비젼과 선물은 갈멜을 새롭게 만들었다. 슬프게도 개혁은 점차 모체로부터 갈라져 별도의 수도회가 되었다. 하지 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령이 생명 안에 있는 두 위대한 스승들을 통하여,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 과 아름다운 인간성에 의해 풍요로와졌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현대 갈멜회는 이 두 성인들에 의해 갈멜 이 얼마나 아름답게 원동력을 얻게 되었는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현존에 사로잡히다.
- 부활의 로렌스 수사(로렌스 형제)


니콜라스 허만은 1614년에 블란서 로렌 지방에서 태어났고 1640년에 파리에서 맨발의 갈멜회 수사가 되었다. 룩셈부르크 근처에 있었던 수도원은 블란서의 맨발의 갈멜회 수사들의 양성을 위하여 당시 설립된 좋은 집이었다. 니콜라스는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군대를 떠났다. 그는 파리 수도원에서 평신도 수사로 입회하였고 ‘부활의 로렌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로렌스는 처음 수 년 동안 수도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신학을 공부한 똑똑한 젊은 친구들에 비해 자 신은 거칠고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부엌에서 음식준비에 긴 시간을 보냈다. 이 초기에 큰 공동체 안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외에 로렌스 역시 길고도 어둔 밤을 경험 했다. 그는 내면에서 비참한 소용돌이의 상태에 있었다. 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으나,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절대로 자기는 사랑하는 존재 옆에 가까이 갈 만큼 선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오로지 부정적인 빛으로만 볼 수 잇을 뿐이었다. 구원이 자기만 제외시킬 것 같이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전환지점에 도달했고 영적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 무 슨 일이일어 났는가를 밝힌다.


“이런 문제들과 불안으로 저의 삶을 고통 받으며 보내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그렇다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기는커녕 오로지 저의 믿음만 더 커지는데- 제 자신이 갑자기 변화하는 것 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영혼은 그때까지 항상 혼동 속에 있었던, 마치도 중심을 발견하고 휴식의 자 리를 찾은 것처럼 깊은 내적 평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하느님 앞에서 단순한 믿음으로 겸손하고도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일하고,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며, 아니면 그분을 기쁘게 하지 않을 모든 것을 피하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저에게 하시기를 희망합니다. ...


저는 요구되지 않는 모든 신심행위와 기도를 포기하고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안에 항상 머룰려고만 노력하고 거기에 헌신할 따름입니다. 저는 단순한 주의를 기울여 그분의 현존 안에 제 자신을 두고 하느님에 대 한 일반적인 사랑의 자각을 가지는데, 저는 이것을 ‘하느님이 실제로 현존하심’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더 나은 표현은 하느님과 영혼과의 고요하고도 비밀스러운 대화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대화 는 때때로 내적인 결과나 외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 만족과 기쁨은 얼마나 크든지 저는 어린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심 깊은 모습보다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기쁨과 만족을 다 스리고 그것들을 바깥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럽니다. ...“


로렌스 수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상태, 그러한 실제가 그의 삶에 의 미를 주었고 가르침의 본질이 되었다. 로렌스는 파리의 갈멜 공동체에서 50년을 살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부엌일이 힘들어서 말년에는 샌들 만드는 일을 하였다. 세월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은 로렌스를 안내자요 친구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 갈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점차 영감, 거룩함, 그리고 지혜의 사람이라 는 평판이 퍼져 나갔다. 아마도 그는 본성으로는 거칠은 사람이었지만 은총의 힘으로 섬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로렌스 수사에 관해서 또한 그의 저술이 알려지게 된 것은 죠셉 드 보포르 사제의 보살핌과 우 정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성적이고 자기 확신이 강한 사제는 1666년 로렌스의 친구가 되었고 분명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 로렌스는 쉽게 어울릴 수 있고 따뜻하며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유연성이 있지만, 성실함도 컸다. 그는 모든 사람과 편안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초기 수줍음과 기이함은 사라져 갔다. 오랜 갈멜 생활은 로렌스에게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의 저술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었고 동료들과 지적 대화를 즐길 수도 있었다. 로렌스는 평화로운 해방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며칠 안에 그분을 만나는 자비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한후 6일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로렌스가 죽은 후 보포르는 그의 저술과 서신 등을 모아 편집했다. 바로 이 작은 모음집이 현재 알려진 < 하느님의 현존 연습> 이다. 로렌스의 저술은 슬프게도 블란서에서는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적주의에 관한 논쟁에 잘못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정적주의는 당시 단죄되었는데 완전이 란 하느님 앞에서 영혼의 수동성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정적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는 의지가 금지되었으므로 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까지 주장하였다. 1699년 교황 인노센트 12세가 이 정적주의자들을 단죄했고 그 결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던 로렌스수사도 정적주의와 연 결됐다는 오해를 받았다. 로렌스 역시 유죄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정적주의에 대 한 반대가 신비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까지 발생시켰고 오늘날에야 겨우 회복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 은 로렌스 책의 영어 번역판이 죤 웨슬리의 주의를 끌었다는 점이다. 웨슬리는 로렌스의 책을 읽고 감명 을 받았다. 영어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렌스의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프란시스 드 살레의 책과 함께 고전서가 되었다.


모든 갈멜 작가들과 교사들처럼 로렌스도 우리가 이 지상의 삶에서부터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한 부분이다. 로렌스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순전히 선물이라고 인식했다. 보물 은 주어졌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만 우리의 꿈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는 억압받고 삶이 조각난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기를 원했다. 그는 복잡한 방식의 기도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한 시간과 능력이 부족한 것을 보며 사람들은 기도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활을 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로렌스는 우리에게 오로지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현존 하시도록 우리가 허용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내적 생명이 있으며, 그곳에 하느님이 기꺼이 머무신다는 사실을 믿는 순간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했다. 그것은 아무리 바쁜 날에도 갑작스레 자유로워지는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그런 순간들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교통 체증에 걸리거나 기차가 아무 이유 없이 멈출 때, 우리는 두려움의 순간을 은총의 때로 바꿀 수 있다.


로렌스에게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에 더 머물수록, 우리의 삶에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더 고정되고 초점이 맞추어진다. 하느님의 현존의 빛 속에서 우리는 필요로 하는 변화들을 인식하고 우리의 삶을 형성해가는 데에 하느님의 관점을 얻게 된다. 하느님과의 친밀함은 또한 부정적인 자기-의식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오고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눌 무엇인가 좋은 것 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연결점을 가져 다 준다. 즉, 모든 것이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니, 하느님의 사람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너무나 자주 사로잡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태도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 느님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리도록 하는 근원적인 신뢰를 필요로 한다. 확실하게, 로렌스의 삶을 보 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의 일과 관계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거칠음 에 대해 혹은 지적 배경이 부족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현존을 얻기 위한 수단들 - 첫 번째 수단은 삶의 위대한 순결함이다. 두 번째 수단은 이 현존의 실천과 영혼 안에 하느님에 대해 깨달음을 양성시키는 일을 매우 충실하게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 업은 산만하거나 불안해서는 안 되며 부드럽게 온유하게 사랑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이 하느님 현존에 관 한 연습은 처음에 어렵지만 어느 사이에 놀라운 영향을 영혼에 미치고, 주님으로부터 풍요로운 은총을 가져온다. 충실하게 연습할 때, 감지할 수 없게 이 단순한 깨달음으로 이끌린다. 모든 곳에 현존하는 하느님께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편안하고 가장 효율적인 기도형태이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들의 절제가 먼저 요구된다. 왜냐하면 피조물에서 아직도 만족을 발견하는 영혼이 이 거룩한 현존을 완전히 즐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우 리들은 피조물들을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로렌스의 많은 가르침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반향 하지만, 그의 사랑, 신뢰, 단순함에 대한 감각은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와 새로운 갈멜의 전통의 상황을 미리예고하고 있다. 저술과 삶이 교회에 의해 즉시 받아들여졌던 리지외의 데레사와 달리, 로렌스와 17세기 갈멜 동료인 세인트 삼손의 요한은 정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그늘에 묻혔다. 요한과 로렌스는 갈멜과 사회전반에 동 시대 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17세기 말에는 그들의 작업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날 그 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갈멜의 영성의 오랜 전통 안에 확고하게 잘 잡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심장 안에 있는 사랑
-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작은 꽃으로 잘 알려진 데레사 마르뎅은 비교적 최근에 교회의 박사로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데레사는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반열에 서 있다. 데레사는 어거스틴 처럼 위대 한 저술가는 아니었으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영성과 신학을 다시 한 번 모으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말과 삶으로써 기도의 중심성과 신학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교회가 신비가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17세기 이후로 지나치게 지적인 차원에서 신학에 접근해 왔던 추세를 되돌리게 하는 중대한 자극이 되고 있다. 정적주의에 대한 반동이 마침내 표현되고 있다.


데레사는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많은 삶의 고비들을 뛰어 넘어야했고, 죽은 후에도 그의 진정한 자아 는 거의 숨겨질 뻔했다. 그는 1873년 노르만디 지방이 신심이 두터운 로마 카톨릭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 당시 불란서의 로마 카톨릭은 매우 방어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카톨릭 자신들은 그들이 이성주의적 이고 반성직주의 세계 속에 포위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강한 성채교회’로 물러서며 가톨릭들은 자 주 경건 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심과 경건함으로 물러서고, 안전한 공간속으로 도피하는, 거의 사적 인 세계에 몰두하는 신앙이었다. 세속사회에 불안정에 대항하여 함께 동맹하고, 구체제에 대한 향수에 빠 진 카톨릭들은 소위 중산층이 체면과 위신을 맹력히 추구하는 성향을 추구하였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생각할 것인가?’ 하는 것이 거의 모든 행동의 잣대였다. 이러한 태도들은 데레사의 가족한테서도 그리고 물 론 그가 생애 마지막 9년을 보냈던 갈멜의 공동체 생활에서도 보여진다. 이렇게 남의 눈에 정당하게 보이려는 정신으로 테레사의 언니가 데레사의 일기를 편집했기 때문에 자서전 <영혼의 이야기> 초본은 급격 한 수정작업으로 태어났다. 1950년 이후로 본래의 기록이 가능했고, 더 활기 있고 진짜 인간적인 모습의 데레사를 보여주는 본래의 사진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데레사의 생활과 직분에 있어 놀라운 측면은 그가 성숙함과 창의성으로 갈멜에서 살 수가 있었다는 측면 이다. 데레사는 삶에 대한 비젼을 스스로 만든 장본인이었고 그가 썼고 살았던 모습에는 참으로 창의성 이 탁월했다. 데레사는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사실에서 갈멜인이었다. 예수님이 그의 안내자였다. 슬프게도 데레사는 회규의 정신에 따라 성경에 스스로 몰두하여 살 수 없었다. 그 당시 불란서 교회에서 성경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부르죠아의 예민한 감수성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지나치게 노골 적이고, 좋지 않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후기 얀세니즘적인 사고에서 보면 인간본성의 실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데레사는 신약을 읽을 수 있었고 차차 성경 도 얻게 되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가 갈멜을 창립했을 때 우정이 피어나고 단출한 생활이 실현될 수 있는 공동체를 원 했다. 그는 공동체들이 너무 커지지 않기를 원했다. 기관이 커지면 활력이 줄어들고 경제문제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지외의 갈멜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원했던 그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공동체는 25명쯤 있었고 어떤 수녀들은 힘든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회규는 엄격하게 해석되어 기본적인 인간성 을 놓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데레사가 아플 때 공동체가 본성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떤 한 이유로든 간에 결핵은 당시 부끄러운 질병이었다. - 오늘날 에이즈 감염자들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데레사가 성취한 큰 성과는 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너무나 창의적이고 올곧게 그리고 침착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놀라운 자율성을 가지고 살았고, 호감을 주고 과단성이 있으며, 재치 있고 이상 을 추구했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는 언니들에게 의존할 수 있었거나,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게임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있어야 할 고유한 자리를 발견했다.


데레사는 우리 모두가 기도와 복음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갈멜의 전통의 중심에 선다. 이것이 테레사의 ‘작은 길’에 관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삶의 모 든 측면에 사랑을 불어넣음으로써 하느님께 다다른다. ‘작은 길’은 하나님께 어린이와 같은 신뢰를 갖는 것이지만, 그것은 유치하고 천진난만한 것과 다르며 이상화된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순수성을 찾는 것도 아니다. 테레사는 이미 어린 시절과 사춘기 초기에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결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 는 신뢰와 일관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성숙을 얻었으며, 하느님께 대한 진심의 결단으로 이 신뢰 와 견실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고 숨겨진 관계를 원했다.


테레사는 그러한 사랑의 신뢰 속에서 하느님께 갈 수 있었다.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리치외 테레사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리스도교의 심장에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랑과 행복의 원천 이었다. 성경이 그의 책이었다.


그러나 테레사의 가장 심오한 영감은 생애 마지막 18개월 동안에 찾아왔다. 그의 병세는 1896년 부활절기 에 극에 달했고 고통과 무기력감은 더욱 심해졌다. 이 마지막 기간 동안 테레사는 정신의 어둔 밤을 겪었다. 그에게 이 경험은 연옥의 정화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기가 어둠속에 버려졌으며 믿음은 망상이었다고 느꼈다. 천국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투쟁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불경한 생각뿐만 아니 라 불경스러운 말들이 내면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던 때였다 조롱하는 소리들이 그에게 말했다. 마지막 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에게 말하는 소리였다. - 모든 것이 허상이고 망상이었다. - 그는 과학이 모 든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되어 하느님의 존재를 내쫓아 버리는 설명을 하면서 끝장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성주의의 힘들이 마치도 거대한 파도처럼 믿음의 흔적들을 다 쓸어버릴 것이라고 느꼈다. 그에게 더욱 더 무섭고 비참하게 다가오는 생각은 고통을 끝내야겠다는 자살의 충동과 무력감이었다.


‘조심스럽게 감시하십시오. 어머니, 폭력적인 고통에 먹이 감인 환자들이 있을 때 독이 있는 그 어떤 약도 그들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확신하건대, 사람이 자기 이성을 잃을 만큼 심하게 고통 받을 때는 1초면 충분합니다. 그때 그는 쉽사리 독을 들이킬 수 있지요.’


그러나, 죽기 바로 전에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제게 신앙이 없었다면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자살했을 것입니다.


<테레사, 교회의 심장에 있는 사랑> 이라는 영감이 풍부한 연구에서 크리스 오도넬은 테레사의 경험들이 불치의 병에 대해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죽음의 실제에 관해 많은 것을 부인하는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직면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의심과 시련은 지나간다. 그리고 테레사의 저술에 보면 암흑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는다. 그 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관해 살아있는 해설이 되고 있다.


시련과 투쟁의 이 시기동안 테레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매달렸고 시와 공동체와 맺는 관계속에서 그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다. 거의 죽음에 임박해서야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그의 투쟁을 알게 되었고, 아마 그때 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것이다.


테레사의 위대함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현재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포착하는 능력에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영감을 받는다면, 그 공동체는 항상 열려있고 창의적이 될 것이다. 그는 사랑에의 부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던 그 순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시기는 예루살렘과 갈보리로 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예수님처럼 그녀는 비참한 암흑의 시기에 삶을 마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그의 충실한 따름으로 예수님에 대한 충실함을 완 수하였다.


오늘날, 우리를 위해 테레사가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그의 공동체를 위하여 내놓는 자기 희생적인 사 랑이다. 삶으로써 테레사는 그 사랑의 초상이 되었고 기관 그 이상인 교회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크리스 오도넬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가르치는 데에 매우 핵심적인 어떤 변화된 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쇄신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를 원한다면 단순히 조직과 구조적 차원의 변화로부터 돌아서고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예술의 작업’에 관하여 말해준다. 테레사는 그 불멸 의 다이아몬드이다. 고통 속에서 그리고 생명을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안에서 사랑으로 키워진 보석이 다.


그녀는 갈멜의 회규를 살고, 성경을 사랑함으로써 갈멜의 전통 안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리야처럼, 테레사도 하느님과의 고유한 만남의 여정을 걸어갔다. 예언자처럼, 그도 온갖 방식을 다하여 끝까지 그 여 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예언자는 크릿 시내에서 호렙산 위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테레사도 그리스도와 함께 갔고 영원한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에 도달했을 것이다.


진리와 예언의 직분
- 에디트 슈타인과 티투스 브랜스마


20세기는 가장 모순된 시기로 보여 질 수 있다. 지식의 한계가 우리의 꿈을 넘어서도록 팽창되었고, 질병 과 굶주림이 정복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멸망의 가장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다. 세기는 인권선 언을 발표했으나 또한 대학살의 시기였다. 이 격동의 시기에 갈멜 가족은 새로워진 활력과 16세기에 발생 된 손실이 치유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갈멜인들, 티투스 브랜스마와 에디트 슈타인은 20세 기의 돌출한 인물들이며 그들의 삶은 이 고통의 상황 속에서 갈멜 전통의 중요한 요소들을 표현한다.


티투스(디도, Titus) 브랜스마는 1881년 네덜란드의 프리스랜드에서 태어나 1942년 다카우에서 죽었다. 나치에 의해 ‘위험한 꼬마 수도승’이라고 분류된 그는 동료형제들에게는 기도와 심오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신체적으로는 강해 본적이 없었지만 일에 대한 엄청난 역량과 진리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티투스는 1898년에 갈멜인이 되었고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지만 아직도 유쾌한 청년이었다. 회규의 기본가치들은 그가 가장 바쁠 때에도 그리고 물론 나치감옥의 마지막 날에도 함께 있었다.


블란서 혁명과 함께 시작된 격변 속에서 갈멜 수도승들은 고통을 겪었고 19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만연된 반 성직법 아래에서도 그 고통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수도생활에 대한 이 공격의 과정에 합류 하지 않았으므로 네덜란드의 갈멜인들은 수도회를 재정비하는 선두에 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티투스는 수도자로써 기초양성을 받았다.


로마에서 공부한 후, 티투스는 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1923년에는 니메겐 카톨릭 대학교를 창립하는데 합류했다. 그는 학교에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았다. 대학생활에 관여하는 것 은 중세기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갈멜인들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여는 갈멜 전통의 중요 한 측면이다. 티투스에게 대학생활은 순전히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일까지 포함했다. 그는 항상 귀를 귀울이고, 충고하고 옹호자가 되었다. 철학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티투스는 항 상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른 나라 신비가들을 또한 유명한 갈멜의 선지자들을 깊이 사랑했다. 신비에 대한 깨우침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했고 대중 앞에서 비학문적인 수위에 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5년 그는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에서 강의를 하였고 워싱톤의 한 강 의에서 다음과 같은 관상적 삶의 사도직에 관해 말했다.


‘엘리야는 강렬한 행동의 삶 한 가운데에서 기도생활을 하도록 요청받았으나,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다. 엘리야의 삶과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가 그의 삶에 힘이었다고 말해준다. 따라서 갈멜 인의 관상기도는 또한 활동적인 사도직분의 힘이다. 관상적 영혼의 영향은 사도직분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관상가들이 기도와 희생은 높은 가치의 유기체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관상적 삶과 행동적 삶은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적 삶에 큰 지지가 된다. 신비적 삶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사도적이다. 행위 없이도 관상적 삶은 가장 위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빌라의 테레사 특히 리 지외의 성녀 소화 테레사는 기도가 사도직분임을 가르쳐 준다. 많은 갈멜인들은 복음전파를 실제 삶의 중 심 으로 여겼었다. 그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관상적 삶 때문에 그렇다.’


티투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솔기 없는 삶이라고 믿었다. -기도와 활동이 하나인 전체의 부분들 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하여 침묵과 고독으로부터 나와야할 때 그는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떠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1935년 그는 네덜란드의 카톨릭 져널리스트의 지도신부가 되었고 나치 세력이 부상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다카우에서 갈보리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티투스는 져널리스트들에게 단지 신앙의 문제에 관해서만 의견을 준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작업조건을 위해 싸우도록 격려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지지했다. 또한 티투스는 학교에서도 나치 이념 뒤에 잇는 거짓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나치의 이교주의 부흥과 인종 차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니메겐 대학교 의 신학대학 학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소신과 전략을 요약해 밝힌다.


1940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침공한 후에도 티투스는 져널리스트들과 일을 계속했다. 대주교와 협력하며 그는 카톨릭 계통의 출판사들이 나치의 선전기구와 협력하지 않도록 그들의 결심을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1941년 후반과 1942년 초기에 티투스는 전국을 순회하며 편집자들과 경영자들에게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나치의 광고나 선전물을 접수하지 말아달라고 격려했다. 그것은 나치당국을 배신하는 일처럼 보였고 1942년 1월 그는 마침내 체포되었다. 그때 나이는 60살이 넘었고, 사는 동안 내내 건강해 본적이 없었던 그의 건강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심문과 감금은 티투스에게 관상적 고독의 경험을 허락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감금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위대한 상담자인 십자가의 요한을 반영한다.


티투스는 처음에 경찰 감옥에 갇혔고, 그는 완전한 고립상태에서 평화와 고독을 발견했다. 그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인 ‘아무 것도 너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무섭게 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느님 홀로 충분하다’를 계속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1942년 1월 27일 감옥에 대해 쓴 편지에서 티투스는 말한다; ‘복되다, 고독이여’ 나는 이 작은 감방에서 이미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합니다. 아직껏 이곳에 싫증이 나 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물론 나는 혼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처럼 저에게 가까이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기뻐 소리칠 지경입니다. 제가 그분을 완전하게 찾을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보러 나갈 수도 없고 사람들이 저를 보러 올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곳에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슈베닌겐, 1942년 1월 27일


1942년 봄, 티투스는 아메르스푸르트로 옮겨갔다. 이곳은 네덜란드의 각 계 각층으로 부터 끌려온 800여명 의 죄수들이 수용된 임시캠프였다. 저항투사들, 지식인들과 성직자등이었다. 환경은 열악했고 이질이 유행했고 모든 죄수들은 뻣뻣한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티투스는 동료 죄수들에게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병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백성사를 주었다. 성 금요일 밤에 그는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신비주의에 관해 하느님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통 받는 하느님을 깨닫는 것에 관하여 말했다. 그때 티투스의 모습은 거룩한 변모와 같았고 자 신들의 비참한 현실에 고뇌하며 모인 사람 하나하나에게 감명을 주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열쇠를 주었고,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열쇠였다.


티투스가 다카우로 이동되었고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살아갔던 그의 마지막 시기는 매우 짧았다. 그는 곧 감옥병동으로 옮겨졌다. 갈멜산의 모후 축일인 7월16일후 얼마 안 되어, 비가 오는 서늘한 어느 아침, 그는 간수들에게 매를 맞았다. 함께 있던 동료 갈멜인 라파엘 수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며칠 동안 그는 다 소진된 채 허약하게 누워있었고 의사들은 그를 실험했으며 마침 내 7월26일 오후 2시에 한 간호원이 그에게 독극물을 주사했다. 티투스의 마지막 행동은 간호원을 도우려 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 그 간호원을 사랑으로 하느님께로 데려가려했다. 그의 마지막 행동은 사랑을 묵상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티투스의 마지막 노력이 이 여성을 하느님께 데려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년이 지난 후 그 간호원은 한 갈멜 공동체를 방문했고 화해와 용서를 청했던 것이다.


티투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소명을 의식하면서 외로운 길을 걸어갔다. 리지외의 데레사처럼 교회 안에서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는 진리를 위해 섰고, 반 유대주의를 거부하고 화해를 희망했다. 심문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독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고 평화와 우정이 다시 일어서는 날을 고대했다. 티투스가 죽었을 때 구름이 어두워졌고 나치는 유대계 로마 카톨릭 사제들을 색출하면서 저항 세력을 절대 용납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보복을 취했다. 생애 내내 티투스는 끊임없이 하느님 의 사랑의 샘을 열었으나, 유럽에서는 애석하게도 반유대주의라는 암이 죽음의 문화를 발생시켰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침묵한 것처럼 보였으나, 빛은 어둠에 의해 결코 정복된 적이 없다.


티투스는 복음의 가치관이 공격을 받았을 때 예언자로서 외쳤다. 엘리야처럼, 그는 기존 상황을 직면하고 도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나는 티투스가 자신의 소명이 이 사회 - 예언적인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사 실을 의식했다고 믿는다. 티투스는 철학자였으므로, 나치 이념의 오류를 인식했으나 갈멜인이었기 때문 에 다른 신앙인들이 저항하도록 돕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여정은 엘리야처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부활의 신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체제적인 잔인함을 통하여 정화되었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룩했다. 그의 신앙의 샘을 만질 수 있어서 암흑을 넘어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여정에서도 그는 이웃들에게 열 려 있었고 말과 성사의 직분에 의해 그들의 신앙을 확인해 주었다.


다카우에서 티투스 브랜스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철학자이며 갈멜 수녀인 에디트 슈타인이 체포되었고 며칠 후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비록 로마 카톨릭이었지만 태생이 유대인이었고 나치들은 네덜란드 의 주교들이 티투스의 영감을 받아 반유대주의에 반대선언을 했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를 공격하고 있었다. 에디트 슈타인은 티투스처럼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기도 중에 에디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자신 을 동일시했으므로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에디트는 1891년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신심이 깊은 유대가족의 열한 번째 막내아이로 태어났다. 가족 은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였으나, 에디트가 2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죽은 비극이 발생했다. 다행히 에디트의 어머니는 재주가 많고 활력 있는 사람이어서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어머니인 어귀스트는 힘든 일 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큰 신뢰를 두었다.


에디트는 사려 깊은 아이였으나 어쨌든 사춘기 때에 흔들렸다. 13세 때부터 21세 때까지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어느 때는 학교를 그만 두기도 했으나 일 년 후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고 철학을 가까이 하기 시 작하였다. 스무 살쯤에 철학은 그의 삶에 중심에 있었고 쾨팅겐 대학교에서 후설과 현상학을 발견했다. 에디트에게 후설은 스승이었고, ‘동감’에 대한 박사논문을 끈 낸 후 후설의 조교로 일했다. 친구들은 에디트가 진리에 열정을 가지고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관대하고 친절한 따스한 사람임을 발견했다. 그는 매력적인 품성을 지녔고, 따뜻한 마음으로 더욱 더 매력을 발했다. <유대가족의 삶> 이라는 글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떠오르고 있는 그의 삶의 비젼을 보이며, 특히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열정적인 투신을 볼 수 있게 한다.


쾨팅겐에서의 시절 동안 에디트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성경과 키에르케고오르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덴마크의 이 철학자가 개인과 하느님에 관한 비전에서 주춤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에디트에게 전 환의 때는 친구와 함께 머물고 있다가 아빌라의 데레사의 책 <삶>을 집어 들었던 때였다. 거기에서 에디트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그는 또한 데레사와 한 식구처럼 느껴졌고, 데레사의 정직함과 올곧음 에 반했다. 마침내 그는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1922년 1월에 에디트는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 소식에 울음을 터뜨렸으나, 하느님께서 그의 딸에게 무엇을 하시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에디트에 게 개종은 또한 유대적 뿌리를 살아나게 해주었으며 수년 동안 집에 갈 때마다 오히려 유대교 회당에 열 심히 참여하곤 했다.


에디트의 개종은 그에게 학자로서 미래가 열려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때에 이루어졌다. 여성들은 대 학교에 자리가 날 때마다 밀려났다. 그래서 에디트는 스페이어에 있는 도미니코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 했다. 11년 동안 에디트는 가르치고 강의하고 공부하고 기도했다. 그의 삶은 무한히 채워지고 지적인 수평선도 늘 상 넓혀지고 있었다. 그는 뉴먼 추기경의 저술을 발견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들도 번역하기 시 작했다. 그는 이제 학문적인 능력을 하느님을 섬기는 길로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우선성을 깨달았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 수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찬 지식의 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비가였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 에 불어 넣은 지혜가 다른 모든 것을 지푸라기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1933년경에 에디트는 갈멜에 들어갈 결심을 굳혔다. 개종 후 10년 동안 에디트는 집중적인 기도생활로 예수님을 따랐고, 여성을 위한 활동은 아빌라 데레사의 용기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 에디트 를 예언자의 길로 표현하게 할 또 다른 현실이 부상했다. -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와 그것의 반유대주의 전략이었다. 에디트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유대 민족의 박해를 예고하고 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애국적인 독일인이었으나 유대의 유산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 그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재산 을 공격하는 것이 어디에서 가능할 것인지 그 징후를 보았다. 새로운 명령에 의해 에디트는 뮨스터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에디트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갈멜에 들어갈 때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일치함으로써 유대 민족에게 강요된 십자가를 자신이 지고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의 가족은 갈멜 입회가 박해를 겪고 있는 유대민족을 거의 버리는 행위라고 간주했다. 84세가 된 그 의 어머니는 고통스러워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어머니를 위로 할 수도 없었고 에디트는 이때가 ‘신앙의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내딛을 수밖에 없는 한 걸음’ 이었다고 말한다.


에디트는 1933년 10월 꼴로뉴 갈멜에 입회했다. 그것은 강사요 교육자로부터 수련자로,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꼴로뉴 갈멜은 에디트에게 적절한 공동체였다.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일들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장상들은 그를 존중했고 계속 글을 쓰도록 허락했다. 꼴로뉴에서 지낸 기간은 깊은 성 장과 자유의 시기였으나, 항상 나치 체제의 커져가는 어둠에 대비하는 때였다.


꼴로뉴의 생활 초기에 에디트는 철학논문인 <유일한 실존과 영원한 실존> 을 썼다. 이 작업에서 그는 현 상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연구로부터 얻은 영감을 한데 모았다. 그는 인간존재의 구조에 매력을 느꼈고, 개인에 대한 연구를 모든 창조된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 있어 기초로 삼았다. 에디트에게 있어 개별 인간은 고유한 영적가치를 육화하는데 그 영적 가치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길로부터 태어난 다. 그는 현상학이 길을 튼 객관성에 대한 깨우침을 즐겼다. 그는 사물을 나타내는 모양대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존재의 토대로부터 바라보는 변화를 원했다. 즉 사물의 정수로부터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에디트에게 하느님의 실재에,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들의 원천인 하느님께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존재를 육체, 정신, 그리고 영의 혼합체로 보았다. 인간존재는 영이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설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한 즉각적인 체험의 물체들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가 현상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을 종합하려고 했을 때, 형이상학을 피하고 있는 이두 사상가에게 실망하였으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에디트의 개방성은 기도생활,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로부터 온 것이 다. 그는 더 이상 철학을 순수하게 지적 연습으로 볼 수 없었다. 인간존재의 ‘타인’에 대한 열림의 깨달음, 공동체에 대한 감각, 그리고 그의 초월성의 포용 등 모든 것은 기도로부터 왔다. 그는 기도하는 동안 영혼 이 자신을 발견하고 목적이 창조주와의 일치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이해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는 에디트에게 토마스 아퀴나스가 근본적으로 신학자요 신비가이며, 철학은 아퀴나스가 신앙이 체험으로부터 일어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도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이 철학 연구는 발간되지 않았다. 1936년경에 나치는 비 아리안계의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 시에 에디트는 신비주의적인 깨달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갈멜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는 그리스도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따라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만 그분께 계속 매달려 잇을 수 있다.’ 에디트는 아빌라의 데레사가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할 수 있는 ‘내면의 성’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된 것에 경탄하였다. 데레사는 엘리야의 정신에 충실했다. 그것은 만군의 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불타는 정신이었다. 에디트에게 데레사는 교회의 기도생활에 있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신비 의 흐름을 나타낸다. 이 흐름은 교회의 실존에 매우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슬프게도 오랫동안 교회는 그 삶과 실천에 있어 이러한 깨달음이 없었다.


<유일한 실존과 영원한 실존>에서 에디트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신비가는 단순히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실험적 지식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즉 하느님께서 영혼 안 에 머 무신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신비가가 가는 똑 같은 길을 택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것이다. 그는 감각의 영역, 기억의 영상들과 지성의 자연적 기능으로 부터 물러나고 내적인 자아의 황량한 고독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비록 감추어 있지만 항상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의 단순한 사랑의 시선으로 신앙의 어둠속에 머물기 위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내적인 자 아 속에서 그는 심오한 평화 속에 마치도 ’휴식의 자리‘인 것처럼 머물 것이며, 주님께서 그의 믿음을 볼 수 있도록 변화시키고 결심하실 때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리지외의 데레사처럼 에디트는 영성과 교회의 삶을 다시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에디트에게 모든 참된 기도는 교회의 기도이다. 1942년 성령강림절에 그가 쓴 다음 시는 십자가의 요 한의 정신 속에서 어떻게 성령이 그의 기도생활을 가능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저를 풍요롭게 채워주시고
제 마음의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시는
달콤한 빛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머니의 손처럼 저를 인도하십니다.
당신이 저를 그냥 내버려두시면,
저는 한 걸음도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저의 존재를 둘러싸고 품고 계시는
공간이십니다.
당신 없이는 끝없는 허무의 나락으로 떨러져 버릴 것이지만
당신께서는 그 나락으로부터 저를 일으키시어 존재하게 합니다.
제 자신보다 저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
저의 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이 계시는 분
그래도 여전히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모든 이름의 테두리를 깨뜨리시는 분

성령 - 영원한 사랑!

1936년 에디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딸은 결코 완전히 화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는 회복되었다. 어머니는 유대민족에 대한 야만적 학살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독일을 빠져나갔고 에디트의 가족들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에디트의 언니들인 로사와 프리 다 그리고 오빠 폴은 건너가지 못했다. 아마도 에스터처럼, 그도 그의 백성을 위하여 탄원하고 중재해야 할지도 모른다. 새해가 되기 전날 에디트는 꼴로뉴 수도원을 떠났고 네덜란드에 있는 에히트 수녀원에 가 기 위하여 국경을 건넜다. 그의 장상들은 제 3제국의 경계선 바깥이 더 안전하게 느꼈다.


에디트는 새 공동체 생활에 곧 적응했다. 에히트 갈멜은 꼴로뉴 공동체보다 보수적 이었으나, 에디트는 저 술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점점 더 부활의 신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십자가와 고통 의 신비를 그리스도 안의 삶에 매우 필요한 에너지로 보았다. 그는 예수님을 어둔 밤을 온전히 살 수 있었던 존재로 보았다. 그는 수난에 관해 성찰했고, 이사야서에 ‘멸시받고 슬픔에 익숙한 사람’으로 묘사된 고 통 받는 종이 예언직분을 수행했던 예수님의 길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나 의 하나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라고 소리치며 경험했던 버려진 느낌을 이해했다.


수 년 전 1931년에 했던 강의에서 그는 크리스마스의 신비와 구세주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말했다. 우리를 목자에게 이끄는 사랑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님을 따르도록 이끌고 있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과 함께 끝까지 가야한다. 그들은 성숙해야 하고 어른이 되어야 한 다. 그들은 언젠가 겟세마네와 골고다로 가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외적인 고통은 거룩한 빛이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을 때 겪는 영혼의 어둔 밤에 비하 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그곳에 계시지만, 숨어 있고 침묵하고 계신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에디트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말하고 있다. - 우리는 하느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느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는 말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어둔 밤에도 하느님께 속해있던 사람은 바위처럼 굳건히 붙어 있을 것이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그렇게 견딜 것이다,, ’ 하느님의 육화하신 아들 의 길은 십자가와 고통을 거쳐 부활의 영광으로 가고 있다‘ 사람의 아들과 함께 고통과 죽음을 거쳐 이 부 활의 찬란한 영광에 이르는 것은 우리 각자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1936년 이후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갈등은 어둠과 고통의 장막을 드리웠다. 에디트는 유대 민족에 대한 박해가 더 커져 가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지배아래 있는 네덜란드에서 비 밀 경찰이 결국 그를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니 로사와 함께 있었는데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 한 로사는 에디트에 와서 외부 수녀로 있었다.


1942년 에히트의 새 원장 안토니아 수녀는 십자가의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글을 쓰도록 에디트에게 청하였다. 에디트는 기쁘게 수락했다. 수년 동안 요한의 저술에 관해 성찰 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는 비판적인 연구서를 쓰기 위하여 몇 개의 자료를 갖고 있었으나, <십자가의 학문>은 요한의 인 성, 요한의 존재에 관한 통합적인 영감을 통하여 요한을 파악해 보려는 시도였다. 에디트는 요한의 저술, 요한의 삶과 기도를 하나의 전체로 모아보고자 노력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요 한에 매료되었고, 고통 받는 그리스도가 이미 부활의 힘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디트는 이 연구 를 끝내지 못했고, 적어 놓은 것을 다시 수정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저서에서 십자가 의 진리와 예수님이 사랑의 순명으로 죽음으로써 성취한 구원사업에 관하여 많은 것을 보았다. 그는 어 둔 밤을 우리가 부활의 신비로 들어가는 길로 보았고 분명한 실패와 버림받음의 여정이 새롭고도 전혀 꿈꾸지 못한 삶, 다시 말하자면 부활로 가는 길임을 알았다. 그는 십자가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어둠을 통하여, 빛나고 있음을 보았다. 에디트는 요한이 톨레도에 갇혔을 때 느낀 고통 받고 비참한 어 둠을, 심지어 회의마저 느끼게 했던 그 끔찍한 오해를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에디트는 오해와 악의가 빚어 낸 고통을 요한이 마지막 시기에 경험했으며 그것은 십자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측면을 이해했다.


이글을 쓸 때 나치는 그녀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죽음의 그림자가 임박해 있었다. 이제 그는 자기의 고통 과 요한의 고통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살아가는 길이라고 여겼다. 갈멜인으로서 에디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살아내고 그것을 다시 탄생시켰으며, 무엇보다도 이 세계 권력과 갈보리로 가는 마지막 길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을 다시 재현하였던 것이다.


1942년 8월 2일 에디트와 로사는 비밀경찰에 끌려갔고 8월 9일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으로 끝날 여정을 시 작했다. 그들이 수도원을 떠날 때 에디트는 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 언니 가요, 우리는 우리민족을 위하여 가고 있는 겁니다.’ 에디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었다. 그가 체포된 것은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나 치 체제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유대출신의 카톨릭들은 죽어야 했다. 에디트와 로사 이외에도 가족 중 두 사람인 언니 프라다와 오빠 폴도 아우수비츠에서 죽었다.


티투스처럼 에디트도 진리에 대한 열정을 지녔고, 그것을 끝까지 탁월한 지적 선물을 사용하면서 살아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실제를 경험하고 사막과 암흑의 시기를 알게 되었다 는 점이다. 그는 현대 여성이었고, 따스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갈망으로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에 디 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었고 그 사실이 중요하다. 그가 무신론을 넘어 주님의 산에 오른 후 하느 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디트 슈타인을 성인으로 인 정한다고 해서그것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완성이라고 쉽사리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전 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길이고,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계속 살아간다. 이처 럼 유대인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유대인들에 의해 ‘완성’으로 보여 질 수 없다. 더 적절한 말로 하자면, 그의 개종이 그리스도교-유대교 간의 대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에디트 슈타인으로 하여금 죽음 후에도 진리를 위해 일하도록 허용하기를 바란다.


마침말
- 갈멜의 영성과 후기 현대세계


갈멜의 전통이 후기 현대 세계에 본질적인 영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과 물질주의의 의미를 지닌 ‘현대세계’는 끝났다. 어떤 면에서 정착되지 않고 유동적이며 피상적인 측면도 있지만, 창조적이고 20 세기의 비참한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갈망이 또한 존재하고 있다. 고립되고 자아에 몰두 하는 개인으로 살지 않고 자아를 넘어 궁극적인 가치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일상 경험과 하느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이 떠오르고 있다.


20세기 끝 무렵에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삶의 방식은 표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다. 우리는 이미지와 소리 에 둘러싸여 있으며, 무엇인가 새롭고 감각적인 것을 쉴 사이 없이 찾아다닌다. 에너지가 수액처럼 빠져 나간다. 이런 삶의 방식은 경이로움을 앗아가고 내적인 깨달음의 역량도 빼앗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정 으로 인간답고 삶을 강화시키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 우리는 경이로움에 놀라고 추구 하며 가장 깊은 감정, 연민에 귀 기울이고 경험하는 역량을 무시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에 자유를 돌려주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연결시키고 진짜로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시적인 감각을 발달시켜 삶을 기념하고 상상력이 꽃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의 감각 과 개방성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개인을 형성해 가는 일에 관여하고 이 개인의 완전한 잠재력을 개발시키고 어거스틴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 갈 때까지 쉴 수가 없다’ 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라는 초대를 받고 있음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잇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적인 자아-도취 안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굶주림과 필요로 가득한 세계로 나아가는 활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마음속으로 여정을 떠나면서 우리는 내적인 풍요로움을 인식하고 현재의 문화적 정통성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 을 깨닫는다.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한다.


갈멜의 전통이 후기 현대 세계의 감수성을 일깨우고 세계의 필요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리의 세계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과 세계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희망을 필요로 한다. 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이미지와 조각소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경청하는 기술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듣기, 숙고하기, 마음의 보물에 잠기기 등은 갈멜인들에게 중요한 가치들이다. 회규는 갈멜인들이 성경 속에 잠기라 고 요구한다. 이러한 형태의 경청은 하느님이시고, 무조건의 사랑이신 신비의 현존 앞에 우리를 열게 한 다. 한결같은 경청, 신비에 주의를 기울임이 바로 관상의 의미이다. 그러나 경청의 전제조건은 고독과 침묵이다. 우리는 단순히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존재하기 위하여 멈추고 그 자리를 찾아야 한 다. 허지만, 침묵과 열림 속에 하느님이신 신비와 대면하는 것이 우리에게 자아-도취나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 한다. 경청으로부터 오는 빛은 우리에게 이기주의로부터 멀어지는 에너지를 준다.


오늘 날 갈멜의 전통은 그러므로, 경청하는 것, 마음의 지혜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를 그런 관상의 상태로 이끌고 가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현존에 우리를 열리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통은 또한 이런 관상의 상태가 어떤 한 방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배양하고 하느님 의 말씀을 우리 양성에 중요한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기꺼움을 키우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 의 사랑의 선물에 우리를 열리게 하는 이 관상적 기도는 이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연대로 이끈다.


처음에 ‘타인’에의 열림은 우정의 공동체가 지닌 따스함 속에서 보여 지나 그리고 나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 들, 수많은 다양한 필요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연민의 행위로 표현되는 사랑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요청받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는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 의 예민한 사랑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사랑은, 리지외의 데레사가 말했듯이 모두가 무상이다. ‘모든 것이 은총이다’ 그랫 우리의 응답도 또한 자발적인 관대함을 가져야 한다.


두 사람의 현대 갈멜인들, 키스 와이만과 죤 웰치가 말하기를, 갈멜인은 여관집주인이고 그리스도께서 병 든 이와 상처 입은 이를 데리고 오셔서 그들을 돌보아 주라고 청하는데,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돌아오실 것이고 그때 주인은 값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와 상처를 돌보라는 요청을 받는다. 불편함을 일으키는 이 요청은 갈멜인들이 모두 자기이익 중심적인 것으로 부터 나오기를 요구하며 삶이 뒤범벅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도록 한다. 영성은 무슨 세련된 선택이 아니라 자주 어둡고 어려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이다.


‘갈멜인들이 거의 8백 년 동안 관상하여온
하느님의 현존은 인도하는 밤이요,
드러나는 부재이고 치유하는 불길이다.

갈멜의 전통은 영혼에게 우리 삶 깊숙이
있는 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언어를 제공한다. 그것은 결국 주의 깊은

고요함의 말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다가옴을
기다리고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께 신의를

다하여 살아가려는 시도로부터 태어난
이 갈멜의 방식은 오늘날의 순례를 위한
오래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