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 글모음
가을바람 편지
시릴로1004
2009. 10. 17. 09:05
가을바람 편지/이해인
내 안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무어라 이름 지울 수 없는 빛깔입니다.
하얀 나비와 노란나비의 중간 쯤일 것 같은 빛,
어쩌면 슬픔을 닮은 눈부신 빛.
바람은 나에게 자꾸만 속삭이네요.
이제는 진정 서늘해 져야지요.
가벼워 져야지요.
다른 존재를 부수어버리는
죽음의 바람이 아니라 키우고 익히는
생명의 바람이 되어 멀리 떠나야지요.
나는 이제 어디로숨을 수도 없네.
혼자서 생각하며 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습니다.
이 가을을 한껏 겸허하고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내 안의 바람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고 슬그머니 겁이 납니다.
이제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어떤 빛깔일까요?
담백한 물빛?
은은한 달빛?
아니면 향기롭게 익어가는 탱자빛?
터질듯한 석류빛?
무슨 빛깔이라도 좋으니 아름답게 가꾸시고 행복하시고
제게도 좀 보내주실래요?
우리 모두 바람 속에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깊어져서
이 가을이 끝날 때 쯤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