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승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수도승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허성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신부)
1. 들어가는 말
요즈음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오는 온갖 질병, 스트레스, 걱정, 그리고 불안한 미래에 대해 정신적인 안정과 육체적인 건강을 찾고자 유사영성 운동에 가담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1)
좋은 것, 기적, 환시, 또는 유사영성 운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참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크게 위협할 수 있고, 또한 우리를 참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서를 읽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 없으며, 죽은 문자로 남아있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 안에 결코 말씀이 ‘강생’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 말씀은 의미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쳐버릴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직시하면서 수도 전통 안에서 훌륭히 꽃핀 성서에 대한 접근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성독)2) 수행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2.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12세기 카르투시오회의 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ues II)가 그의 저서 The Ladder of Monks에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로 독서(lectio)-묵상(meditatio)-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의 단계이다. 귀고에 따르면, 성독의 제일 첫 단계인 독서는 자신의 온 힘을 집중하여 성서를 주의 깊게 읽음으로써 묵상에 사용할 자료를 발견하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인 묵상은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깨닫는 단계를 말한다. 셋째 단계인 기도는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고 관상의 감미로움을 청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넷째 단계인 관상은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들어올려져,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독에서 이러한 단계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질 수 있고, 묵상 없는 기도는 쉬이 냉담해질 수 있으며, 기도 없이 관상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3. 수도 전통 안에서의 성서 독서
1) 능동적인 독서
중세 수도 전통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이셨던 베네딕도회의 장 르끄레르 신부는 고대나 중세 수도 전통 안에서 어떻게 성서 독서를 했는지 구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수도자들은 성서를 읽을 때,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눈과 머리만 이용해서 대충 그리고 빨리 읽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성서 독서 시간에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이나 구조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단순하게 천천히 눈으로 본 내용을 입술로 작게 소리 내어 직접 귀로 듣고 또 그것을 기억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 존재를 활용하는 능동적인 독서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여름철 동안 제4-6시3)까지 수도자들이 자유롭게 성서 독서를 하도록 배려하였고, 더욱이 제6시경 뒤에 식사를 마치면 형제들은 침묵 중에 휴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원하는 사람은 독서를 하되 남에게 방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베네딕토 규칙서」, 48,4-5).
곧 수도자들은 먼저 성서를 손으로 펼쳐서(손) 성서의 말씀을 보고(눈) 그것을 작은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입) 동시에 그 말씀을 듣게 된다(귀). 그리고 그것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하루 내내 계속해서 그 말씀을 되뇌게 되는데, 이것이 수도 전통에서 행해졌던 단순한 묵상, 곧 반추기도이다.4)
2) 들음
초기 수도승 작품들을 보면 독서(lectio)와 들음(auditio)이라는 두 용어가 자주 동의어로 사용되곤 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동시에 귀 기울여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의 독서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읽는 수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귀 기울여 듣는 수행이었다. 장 르끄레르 신부는 이러한 수행을 일컬어서 “청각적인 독서”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베네딕토 성인 역시 수도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계속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베네딕토 규칙서」, 머리말 9절).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 모임이나 전례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자주 성서를 읽거나 듣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선포되자마자 물거품처럼 곧 사라지게 됨을 종종 체험하곤 한다. 이것은 성서를 읽고 귀 기울여 듣는 수행이 잘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메아리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행이 깊어질 때, 성서의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우리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3) 기억
추론적인 묵상 방법들이 인간의 지성과 상상을 강조하는 반면에, 초기 수도 전통은 모든 종류의 상상이나 개념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특별히 기억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서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에 간직하였고, 끊임없이 그 말씀을 암송하는 단순한 묵상을 실천하였다. 이렇게 수도자들에게 기억은 수도생활에서 아주 기본적으로 요구되었던 요소였는데, 그것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기억 속에 간직된 하느님의 말씀을 암송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집트의 안토니오 성인은 그의 기억 속에 성서 전체를 간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초기 수도 전통에서 그토록 강조되었던 기억의 중요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수도 전통에서는 성서 독서가 우리의 기억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곧 성서 독서는 기억을 통해서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으로 나아가게 되고, 기억은 성서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는 거룩한 곳이 되어 그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된다.
4. 수도 전통 안에서의 성서 묵상
우리는 고대 수도자들이 행했던 단순한 성서 묵상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상상과 추리를 요구하는 다양한 추론적인 묵상 방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대 수도 전통에서 가르쳐주는 묵상 방법은 구조화되지 않고 체계화되지 않은 단순한 묵상법이다. 여기에서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냥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성서의 말씀을 되뇌라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라틴어 ‘meditari’(묵상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그리스어 ‘meletan’에서 왔으며, 이것은 어떤 것을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림을 뜻하는 히브리어 ‘haga’에서 왔다. 그러므로 고대나 중세 때 수도자들이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기억된 성서 본문에 대한 암송으로써 온 마음으로 그 구절의 충만한 의미를 배우는 것이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까지만 해도 ‘묵상’과 ‘되새김’은 별 차이 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스콜라 학문이 발전하면서, 묵상의 개념이 더욱 지성적인 측면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 묵상의 개념은 이제 생각하는 것(cogitatio), 고려하는 것(consideratio), 그리고 연구하는 것(studium)과 같은 지성적인 의미들을 포함하게 되었고, 조금씩 이러한 의미들로 대체되어 갔다. 그리고 근세 이후에는 묵상에 더 합리적이고 추론적인 요소들이 많이 첨가됨으로써 점점 더 묵상과 되새김은 분리되었고, 더욱이 후자는 거의 잊히게 되었다. 이로써 수도 전통 안에서 단순하게 그리고 독특하게 행해져 오던 성서 묵상인 되새김(ruminatio) 수행이 오늘날 거의 잊히게 된 것은 교회 안에 크나큰 손실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5. 반추기도(ruminating prayer)의 개념
반추기도(ruminating prayer) 란 귀고 2세 원장이 이야기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 가운데 둘째 단계인 성서 묵상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구절을 반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반추동물이 삼킨 음식물을 토출(吐出)하고, 재저작(再詛嚼), 재혼합(再混合), 그리고 재연하(再嚥下)하여 완전히 자신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과 같다. 마찬가지로 반추기도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나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독특한 수행이다. 고대 수도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기억에 간직해 두었다가 일터에서 또는 혼자 산책하거나 기도할 때 그 말씀을 토출해 내어 신. 망. 애 안에서 다시 천천히 되씹고 그 말씀을 마음에 재연하시킴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단순하고 독특한 묵상을 실천하였다. 이것이 바로 반추기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온 마음으로 되뇌어야 한다. 신·망·애 안에서 이러한 수행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덧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말씀과 하나 되게 된다. 우리는 시편 저자의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밤을 새워가며 당신 생각뿐, 나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시편 63,6-7).
6. 성독의 효과
1) 성독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고대 수도자들이 행했던 성독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기도이기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러한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도 단순하게 된다.
2) 다른 기도와 달리 성독은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독 수행을 충실히 해나가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3) 말씀을 온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다 보면, 성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요한 가시아노는 「담화집」 제14권에서 이러한 수행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gnosis)을 얻게 해준다고 강조하였다.
4) 성독 수행을 충실히 하다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됨으로써 말씀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게 된다. 이때 개개인에 따라서 통회의 눈물이나 신체적, 정신적 치유도 일어날 수 있으며, 내적 통찰력도 생기게 된다.
5)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생겨 정신 통일이 가능해지고 마음이 고요하게 되어 내적 고요의 상태로 인도된다. 이러한 수행은 흐트러진 생각들과 무질서한 관심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말씀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6) 성독은 죄와 사탄의 유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줄 수 있으며, 또한 방황하는 마음과 정신을 고요하게 만드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에바그리오는 그의 저서 「프락티코스」(The Praktikos)에서 8가지 악덕을 거슬러 싸우는 여러 수행들을 제시하면서, 특별히 성독을 방황하는 정신의 치료제들 중의 하나로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요한 가시아노는 「제도서」 제5권에서 탐식의 악덕을 거스르는 수행들 중의 하나로서 성독을 권고하고 있으며, 또한 「담화집」에서도 성독이 온갖 탐욕, 육신의 유혹, 슬픔 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줌을 강조하고 있다.
7) 성독은 온갖 분심 잡념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요한 가시아노는 「담화집」 제1권에서 모세 압바의 영적 권고를 전해주고 있다. 모세 압바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분심과 나쁜 생각들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주 성서를 읽고, 끊임없이 묵상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8)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시기와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라앉게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게 한다. 그럼으로써 사랑, 평화, 기쁨, 온유, 절제, 인내, 친절, 너그러움 등과 같은 영적인 열매들이 자라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동시에 모든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희망을 갖게 된다.
9) 성독 수행을 통해 바쁜 활동 중에서도 고요함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으며, 고요함 가운데서도 분주히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게 되면, 하느님 말씀과 분리되지 않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독 수행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우리 삶의 중심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말씀을 통한 크고 작은 체험들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많은 영적인 열매들을 가져다준다.
7. 사목 현장에서의 적용
1) 미사 시작 전 공동체가 함께하는 렉시오 디비나
하루 중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점은 무엇보다도 미사이다. 특별히 날마다 미사 중에 선포되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메시지들이다. 그러므로 그날의 미사의 말씀들을 공동체가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잘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부록 2>에서 제시한 공동 독서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 특별히 주일미사를 시작하기 15분이나 20분 전부터 해설자가 그날 선포될 말씀을 공동 독서의 순서에 따라 천천히 반복해서 봉독한다면 아마도 공동체가 함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미사를 준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2) 회합 시작 전 공동체가 함께하는 렉시오 디비나
본당의 여러 모임에서 회합을 시작할 때에도 <부록 2>에서 제시한 공동 독서를 시도해 볼 수 있는데, 각 공동체의 상황이나 모임의 성격에 따라 공동 독서의 내용이나 순서를 수정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공동 렉시오 디비나는 회합의 중심이 하느님의 말씀이 되게 하며, 또한 구성원들에게 말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이끌 것이다.
3)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공동 기도 모임(반추기도)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가장 적합한 시간에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성서 묵상인 반추기도 모임을 갖는다. 기도 묵상실이나 경당을 최대한 활용하면 좋겠지만, 성당이나 회합실을 사용해도 괜찮다. 그러나 어느 장소이건 간에 중앙에는 십자가와 성서 그리고 촛불을 준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모두가 그 둘레에 편하게 앉은 다음 <부록 3>에 제시된 반추기도의 순서에 따라 30-40분간 반추기도 시간을 갖는다.
각자 반추기도 모임에 오기 전에 성서 독서를 하고 마음에 닿는 한 말씀을 미리 선택하면 좋지만, 성서 독서와 성서 묵상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곧 <부록 2>에 제시한 공동 독서의 순서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을 봉독하고 나서 대략 10-20분 정도 깊은 침묵 가운데 반추기도 시간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안내자가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고, 이때 각자는 침묵 중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봉헌한다. 그리고 3-4분 뒤에 다 함께 찬미의 노래로써 “알렐루야”를 봉헌하고 마친다.
이외에도 각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8. 나가는 말
성서학자이자 수도자였던 예로니모(St. Hieronymus, 347-420년) 성인은 “성서를 모르면 결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성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자주 읽고 묵상하지 않기에, 신앙이 자주 흔들리고 기복적으로 변질되거나 아니면 온갖 형태의 유사영성들에 탐닉하려는 유혹을 크게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날마다 가까이하고, 그것을 온 마음으로 순수하게 읽고 묵상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에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하고 구체적으로 우리를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 그 자체로 인도할 것이다. 그때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 현존하게 되며,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거나 유사영성들에 현혹당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고대 수도자들의 단순하고 독특한 말씀에 대한 수행을, 현대 동양 문화권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도원 안에서 본인이 수행해 온 방법이며, 또한 여러 수도 공동체들의 연례 피정을 지도하면서, 부산 명상의 집에서 성독 피정을 지도하면서 함께 나누고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부록 1> 개인 독서(성서 독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4) 성서 말씀을 천천히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다.
5) 성서 말씀 가운데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무른다.
6) 위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성서를 읽어 내려간다.
7)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끝마친다.
* 일어나기 전에 마음에 닿았던 성서구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 구절을 염두에 두거나 쪽지에 간직하고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부록 2> 공동 독서(성서 독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4) 성서 말씀의 같은 본문을 천천히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고 듣는다.
(1)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첫 번째 독서).
* 주의할 점: 각자는 잠시 침묵 가운데 봉독된 성서 말씀을 전체적으로 되새겨 본다.
(2)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두 번째 독서).
* 주의할 점: 각자는 잠시 침묵 중에 마음에 닿는 어떤 성서구절을 선택하고 그것을 머릿속에 간직한다.
(3)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세 번째 독서).
* 주의할 점: 각자는 침묵 중에 자신이 선택한 말씀을 신·망·애 안에서 천천히 반추한다.
5) 나눔(* 나눔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다음 사람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6)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각자는 하나의 선택된 성서구절을 가지고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부록 3> 반추기도(성서 묵상)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개인 독서와 동일함)
4) 성서 말씀을 천천히 반추한다.
(1) 선택한 성서구절을 떠올린다. (토출)
(2) 성서구절을 되씹는다. (재저작/재혼합)
(3) 성서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다. (재연하)
5)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6) “알렐루야”로 끝마친다.
1)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 II」,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년 참조.
2) 필자는 이 글에서 ‘성스러운 독서’, ‘성서 독서’, ‘성령에 따른 독서’라는 의미로 ‘성독’과 ‘렉시오 디비나’라는 용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주교회의 천주교 용어위원회에서는 ‘lectio divina’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기도가 되게 하는” 폭넓은 의미에서 ‘영적 독서’라 번역하고 있으며(「천주교 용어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년, 61면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거룩한 독서’라고 번역하였다. - 편집자 주.
3) 고대에서의 시간 개념은 오늘날의 시간 개념과는 다르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한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루의 일출과 일몰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12 등분하여 오늘날의 1시간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제4-6시는 오늘날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아침 10부터 12시 정도를 의미한다.
4) 이러한 독특한 묵상 방법을 필자는 “반추기도(ruminating prayer)”라 명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수도승 전통에 따른 성서 묵상법 반추기도”, 「신학전망」 제115호, 1996년 겨울, 131-157면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목, 2005년 8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1) "
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마리아 어머니, 뜬금없이 평화신문 지면을 통해 글월 드리니 놀라셨지요?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솔하고 쉽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단지 마리아 어머니께만 드리는 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제 수도생활의 여정에서 만났던 많은 참 신앙인들 모두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저는 몇 년 전부터 거룩한 독서에 대해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제 얘기가 사람들에게 정작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장황하고 식자 연(識者 然)한 이야기로 거룩한 독서의 지극히 단순한 본질을 오히려 가리기나 한 것이 아닌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특히 어머니처럼, 어쩌면 수도자인 저보다 더 진짜 '수도자'의 모습으로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 말씀을 살고 계시는 분들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실 여러 이유로, 거룩한 독서 자체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무한경쟁의 소비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요즘은 영성이나 기도마저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상품'으로 포장되어 진열된 채,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린 사회 안에서 고객을 모으는 '마케팅'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독서를 전파하는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독서라는 '영성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바, 즉 하느님 말씀이 중요할 따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참으로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창세 이래 사람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활동해 오셨습니다. 부디 이 글월이, 하느님 말씀의 기운이 우리 교우들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 널리 세력을 확장하시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지만, 거룩한 독서는 이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거룩한 독서를 배우고자 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기도와 성경 독서가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깊은 기도생활은 성경 독서와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세기 신앙인들 기도는 성경 독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음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말씀드리기로 하고, 거룩한 독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한 마디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저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기도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 독서가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돼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왔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기도하느라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 혹은 '렉시오 디비나'같은 유식하고 대단해 보이는 말투에 주눅 드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이 자연스런 일이 무슨 영적 비법이라도 되는 양 누가 굳이 폼 잡고서 가르쳐 줄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당장 오늘부터 어머니께서도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실 수 있습니다. 실천하시면서 제 말씀을 더욱 잘 알아들으실 뿐 아니라 제 이야기의 부족한 점에 대해 조언해 주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 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기도맛들이기] 거룩한 독서(2) "
말씀 담을 마음과 들을 귀 주소서!
마리아 어머니, 연세에 비하면 아직 건강하시지만 원체 무더워서 고생 많으시지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거룩한 독서는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실 누가 굳이 가르쳐 드릴 필요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십사 몇 가지 더 말씀을 드려 봅니다.
거룩한 독서의 관건은, 어떤 영적 기교의 수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이 성경 본문을 통해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믿음은 새삼스럽게 다시 터득하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바로 이 단순한 믿음으로 성경 본문을 펼치고, 마치 일광욕하는 사람처럼 편안하고 고요하게 이 말씀의 빛 앞에 머무는 일로부터 거룩한 독서는 시작됩니다. 이 순간 굳이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부터 솟는 진실한 몇 마디 기도를 하느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부족한 제가 주님 말씀을 듣고 싶어 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가장 잘 아십니다. 저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영을 보내셔서 말씀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마음, 말씀을 깨칠 줄 아는 눈을 열어 주십시오." 뭐 이 비슷한 기도면 되겠습니다.
'시작기도'의 이 순간이 정해진 기도문을 읊는 순간에 그쳐서는 곤란합니다.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내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통해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벌써 그분의 현존으로 가득차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만큼이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역시 감실 앞에 나아와 앉은 만큼이나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는 기도의 자세가 돼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다듬으면서, 혹은 흠숭의 침묵으로 혹은 성령을 청하는 기도로 이뤄지는 시작기도는 생각보다 많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어둡거나 흐트러져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잠깐 하고 마는 형식이 아니라, 정성스레 진심을 담아 잘 바쳐야 하고 때로 오래 바쳐야 합니다.
그런 다음부터 본문을 읽는 것입니다. 읽되, 아주 천천히, 주의 깊게 읽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되, 눈으로는 그 말씀이 담긴 글자들을 읽는 것입니다. 귀한 사람이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말을 한 자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듣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이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 더욱 좋습니다. 자기 귀로 들어가며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조급하거나 인위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포착하려 조바심 낼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이 늘 우리 머리 위에 떠있듯, 하느님께서는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마리아 어머니와 이미 함께 계십니다. 그저 그분 안에서 쉬며 들을 때, 성령께서 자연스레 마음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느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믿음 안에서 본문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읽다보면 자연히 어떤 구절에 마음이 더 가게 됩니다. 그러면 잠깐 그 구절 앞에서 머무릅니다.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려 주십사 청하는 마음으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면, 그것을 소재로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독서 전체가 이렇게 '기도로 자주 중단'되면서 진행됩니다. 그러다가 마칠 시간이 되면, 방금 들은 이 말씀이 내 마음 깊이 새겨져서 오늘 일상 안에서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말과 행위의 기준이 될 수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간청과 깊은 감사로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어려울 것도 새로울 것도 하나 없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기도맛들이기] 거룩한 독서(3) "
주님 만나는 시간, 장소 꼭 지켜요!
마리아 어머니, 지난주까지 드렸던 제 말씀을 참고삼아 거룩한 독서를 계속 해 오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거룩한 독서의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모든 것이 다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인 거룩한 독서에서도 중요합니다. 우선 시간을 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서도 그 사람과 만날 짬을 못 낼 만큼 바쁘다고 말한다면, 정말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너무 바빠서 성경을 통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일 시간을 못 낸다면, 그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리 소중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심지어 살아계신 분도 아닌 셈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따름입니다.
각자 처한 여건은 다 다르지만,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하느님 말씀 듣는 일에 할애해야 합니다. "삶(일상)이 다 기도"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평범한 많은 이들에게 이 말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일상 중에 기도를 위해 따로 할당된 시간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에 따라 이런 시간은 다 다릅니다. 새벽녘일 수도 있고, 일과를 다 마친 저녁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매일 미사에 참여하시는 분이라면 미사 전후의 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나 시간을 내는 것이 이상적이냐고요? 수도원 전통에서는 보통 '적어도 한 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같은 생활인의 경우 하루 한 시간이 쉽지 않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분이건 30분이건 각자가 하느님 앞에 낼 수 있는 시간만큼 내는 것이지요. 이렇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펼쳐 기도하고 읽는 태도는 '짬이 나면' 기도하겠다는 것과 대단히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나 계시지만, 우리 편에서 하느님 말씀에 더 잘 귀 기울일 수 있는 정해진 장소들이 필요합니다. 꼭 어디여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 고요하고 방해받지 않는 곳이면 가장 좋겠지요. 성당 감실 앞도 좋고, 집 안의 가장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하느님 말씀을 듣는 작은 단(壇)을 차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성화(이콘)를 모시고 촛불도 밝히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말씀을 통해 하느님 현존 앞에 나아오는 마음을 챙기기가 더 수월할 것입니다. 물론 꼭 이런 장소에서 격식을 갖춰야만 거룩한 독서가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지하철 안에서 성경을 펼쳐 읽으며 성독삼매(聖讀三昧)에 빠진 아주머니를 뵌 적이 있습니다. 또 제가 아는 어느 국수집 자매님은 가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틈틈이 성경을 읽으십니다. 그분들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 영의 향기가 주변 공기를 정화시키는 듯 했습니다. 거룩한 독서는 이렇게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어떻든, 하루의 특정 순간 특정 장소에서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기운 앞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수련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날이 갈수록 말씀의 기운은 언제 어디랄 것 없이 일상 전체에로 확산돼 나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해서 일상 전체가 거룩한 독서를 할 때 가동되는 동일한 그 신앙의 눈으로 읽어야 할 일종의 성경 본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사 안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만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뵈옵는 '관상'의 눈도 이런 과정에서 점차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4) "
"주님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마리아 어머니, 오늘은 거룩한 독서에서 '무엇을' 읽고 기도할 것인지에 대해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거룩한 독서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들음'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적 독서'와 '거룩한 독서'를 혼동합니다. 앞의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훌륭한 영성 저술가들이 써 놓으신 좋은 영성 서적을 읽는 일이요, 뒤의 것은 성경에 한정되는 것입니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자명하지요? 수도회 전통 일각에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고대 교부들의 영적 주해도 거룩한 독서의 대상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성경 본문 중에서 어떤 것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지요. 여기서 우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손가는 대로" 즉 즉흥적으로 아무 데나 펼치거나 혹은 읽고 싶은 곳을 골라 읽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속독서'는 거룩한 독서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입니다. 즉, 성경 중 한 권을 선택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사 전례 중에 나오는 독서와 복음이 이런 원칙으로 매일매일 주어지지요. 우리 역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매일의 전례 복음이나 독서를 따라가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선택한 본문을 매일 이어서 읽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연속독서의 원칙은 자기에게 하느님 말씀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느님 말씀에 자기를 맞추는 순명의 훈련을 위해서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초심자들이 거룩한 독서에 더 잘 입문하려면 성경의 어떤 부분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질문도 더러 받습니다. 순 제 생각입니다만, 시편들(특히 '말씀의 시편'이라 할 수 있는 시 119편이나 '하느님 현존의 시편'인 139편 등)이나 복음서, 혹은 바오로 사도의 서한 중 하나가 어떨까요.
그러면 하루에 '얼마만큼' 읽는 것이 좋을까요? "창세기를 뗐다, 요한복음을 뗐다"고 표현할 때처럼 '떼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속도와 분량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읽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습과 통독을 위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 경우에 바오로 서한 전체를 매일 한 시간 기도해서 약 2년 반에 걸쳐 다 마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본문 종류에 따라 기도하는 속도나 방식, 분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레위기나 민수기의 율법 규정들이 나오는 본문과 요한복음 17장 본문을 모두 꼭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룩한 독서를 정말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한 마디로 '듣는 마음'을 갖추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도 제 말만 많이 할 때 소통은 어려워집니다. 그 때 '귀'가 닫혀 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에서 '듣는 일'이 말하는 일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관계인 기도에 있어서도 먼저 듣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느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는 사무엘의 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기본자세를 보여줍니다. 시작기도 단계에 이 기도를 진심으로 바칠 수 있다면, 거룩한 독서의 첫 단추는 이미 꿴 것입니다.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5) "
말씀 통해 하느님이 나를 읽도록
마리아 어머니, 지난주에 이어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흔히 우리 편에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결정적 요소라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듣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관계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성경 읽기가 곧바로 기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읽기'가 사실은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듣는다함은 우선 상대방이 내 앞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주도권은 말씀하시는 하느님께서 쥐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분의 현존 앞에 머무는 일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다기보다는, 거기 기록된 말씀이 내 내면을 '읽으실'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온 제자가 어느 날 스승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스승님, 제가 토라를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그렇다면 토라는 너를 몇 번 꿰뚫어 읽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독서를 하는 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체험 하나를 잘 전해줍니다. 즉, 기도하며 성경을 읽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내가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는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눈이 내 인생 전부를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내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순간은,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이 나를 해석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히브 4,12 참조). 어떤 분의 현존 앞에서 이렇게 선후(先後)가 뒤바뀌고 주객(主客)이 뒤집어지는 체험(요한 15,16 참조)… 이것이 거룩한 독서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 기도에서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이 지점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시선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기도의 문은 열리기도 하고 반대로 닫히기도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까다롭고 깐깐한 '채점자' 혹은 심판자라고 느낄 때 우리 마음은 굳어지고 닫힙니다. 그분 앞에 나를 있는 그대로 펼쳐 놓기가 두려워지고, 절로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는 마음이 되기 십상입니다. 마음 깊은 곳을 그분께 열어드리지 못하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의지력이나 테크닉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피상적 독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동차 기어가 중립에 가 있을 때에는 가속 페달을 아무리 세게 밟아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이 경우 기도는 피곤하기만 하고, 기쁨이 아니라 짜증과 지루함으로 점철된 '극기 훈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시선이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안심하고 영혼의 옷을 벗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의 한 소절처럼 말입니다.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 버렸다."
"[기도맛들이기] 거룩한 독서(6) "
내가 '그분을 좀 아는' 그날까지
마리아 어머니, 지난주까지의 이야기 요지는, 의지의 노력보다 하느님 말씀이 나를 비추실 수 있도록 해 드리는 단순하고 열린 신앙의 마음이 거룩한 독서에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나를 비추실 때 나는 그분께 '알려지게' 됩니다. 내가 그분께 알려질 때, 다시 말해 그분께서 나를 아실 때, 바로 이 순간부터 나도 그분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찾고 뵙는다기보다는, 그분께서 나를 찾아오셨고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그 지점이 바로 기도의 현관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얼마만큼 사랑받고 있는지 아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역시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 자체를 통해 볼 때, 우리 상식에 맞지 않는 이순서야말로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알아드리지 못하던 나타나엘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고 알아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을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알아드리게 되었습니다(요한 1,43-50 참조). 코린토서의 유명한 사랑의 찬가에서도 마지막에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알려지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3,12)고 노래하고 있지요.
거룩한 독서는 사실 그분을 온 몸으로 겪어 아는 '지식'(필립 3,8 참조)의 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평생을 이론이나 책이 아니라 온 몸의 실천을 통해 밑바닥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시므로 혹시 '지식'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틀어 '관상'과 가장 가까운 말이 있다면(성경에는 '관상'이라는 말이 없거든요), 그것은 '지식'입니다. 성경에서 지식 혹은 '앎'이란 말을 쓸 때는, 책상머리에서 생겨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 알아들은 체험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할 때에는, 잠자리를 같이 해서 배가 불러오다가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되는 과정 전체를 뜻하는 것이지요. 어머니,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목적, 나아가 기도와 거룩한 독서의 유일한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말한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더 잘 알아들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스도를 두고 "내가 그분을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척 멉니다. 이 먼 여정을 일러 중세의 스승들은 '변모'(變貌, transformatio)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동화'(同化, conformatio)라고 일컫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습(forma)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점점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더 옛날의 교부들은 이 여정을 단순히 '회심'(悔心, conversio)이라 일컬었습니다. 어떻든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우리도 간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우리 마음의 '큰 바위 얼굴'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바라보는 (혹은 관상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미사 참례와 거룩한 독서를 통해 이뤄지는 이 여정에서 우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시인이 "그가 '꽃'이라고 말할 때 그의 입에서는 꽃향기가 났다"고 노래했는데,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절로 그 사람의 모습을 닮게 마련입니다. 눈에는 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얼비치고, 마음에도 늘 그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기 마련입니다. 거룩한 독서를 통한 '지식'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생기는 일도 얼추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도맛들이기] 거룩한 독서(7) "
내 영적 투쟁에서 주님 승리하시길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리아 어머니, 그동안 제가 드린 말씀으로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을 받으셨을까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오히려 방해되지 않았는지 두렵기까지 하고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기도를 배우는 데 있어서도 결국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내적 스승'이 계실 따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짐짓 안심(安心)을 얻고자 합니다.
성경은 나하고 별 관계가 없는 누군가가 쓴 '책'이 아니라 나를 아주 잘 아는 어떤 분이 나에게 보낸 '편지'에 가깝습니다.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글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낸 사람의 숨결을 느낍니다. 이것은 꼭 편지가 아니라 정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의 글을 읽을 때도 그러하지요.
어머니께서는 언젠가, 제가 드린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집을 읽으시며 속으로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하고 연신 무릎을 치셨노라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이런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글 쓴 사람을 지배하던 같은 정신 혹은 얼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되므로 깊은 감정이입을 체험합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아듣는 것입니다.
잘 통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때, 우리는 상대방이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인지도 알아맞히고 심지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부치신 '편지'인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런 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글의 참된 저자인 성령께서는 오래 전 이 글을 쓰셨던 사람들 안에서 뿐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내 안에서도 똑 같이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수도승 교부였던 요한 카시아누스는, 거룩한 독서에서는 "마치 내 자신이 저자인 것처럼, 글자들을 채 읽기도 전에 그 뜻을 앞질러 알아차리는" 이심전심의 경지에서 읽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본문이 참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마치 내 존재의 일부인양 '탄생'시키게 된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같은 체험을 일러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미처 쓰여지지 않은 성경을 쓴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표현이지요.
결국, 거룩한 독서를 통해 성경을 읽는 일은 사실 '미처 쓰여지지 않은' 성경을 쓰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내 심장(돌 심장이 아닌 살 심장!)에 기록하실 수 있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예레 31,33-34; 2고린 3,3 참조). 물론 이 여정이 금세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무엇보다 말씀에 저항하는 내 안의 '세상'과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영적 투쟁을 감당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세력을 장악하시도록 마음을 허락해 드린다면,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에 끊임없이 새겨지시도록 협조해 드린다면,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 일을 마침내 완성하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신 분께서 내 안에서도 '세상'을 이기실 것입니다.
어머니, 제게 거룩한 독서가 깊은 감동을 동반하는 좋은 '영적 체험'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쉽지 않은 '영적 투쟁'으로 체험된다고 전에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에 왕도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영적 투쟁의 여정에서 충실할 때 시나브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내 안에 간직할 수 있게"(필립 2,5) 될 것입니다.
"[기도맛들이기]거룩한 독서(8-끝) "
주님 높이고 자신은 낮춰
마리아 어머니, 오늘 어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에서 저는 거룩한 독서에서 (나아가 기도 일반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거룩한 독서(혹은 기도)를 잘 하고 있다는 표징은 무엇인지 질문하십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아주 단순한 대답을 얻었습니다. 기도 중에 무슨 체험을 하느냐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법(마태 7,16), 어떤 사람이 기도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오직 그가 맺는 인간관계에서만 검증될 따름입니다.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교회의 친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구성원들 사이 성격이나 노선 혹은 전망의 차이가 아니라 흔히들 '사심'(私心)이라고 표현하는 이기심입니다. 저는 널리 알려진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2,1-11)를 두고 기도하면서 이 점을 더욱 깊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들이 겪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알력의 원인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히, 중심(中心)을 차지하려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교회 바깥 정치 단체는 물론 시민 단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중심을 향해 질주할 때 이웃은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한복판에서는 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자기 자리를 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서 지니셨던 '철부지 어린이'의 마음(루카 9,46-48 참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그 마음'(필리 2,5)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룩한 독서를 참으로 잘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뒤치다꺼리에 충실함을 자기 소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저마다 '성공'하기 위해 온통 중심을 향해서만 질주하며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이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 그 '디아스포라'에 충실히 머무는 태도야말로 거룩한 독서의 열매가 아닐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헤게모니(주도권) 싸움에서 벗어나 이런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이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 삶 구석구석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시게 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저마다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세력들을 말씀의 빛으로 비추는 영적 투쟁 작업을 날마다 충실히 수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저는 거룩한 독서가 바로 이런 작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독서가 '흥행'이 되는 기도 프로그램 중 하나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왜냐면,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교회는 세상에 희망의 표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점점 더 깊이 세상 안에 존재하되 점점 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럴 때에만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도 신빙성과 설득력을 얻습니다.
성경은 무지갯빛 성공을 약속하는 책이 아니라, 근원적 문명비판의 서(書)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교회 안에도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어쩌면 복음 이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의 정신을 알아차리도록, 우리 안에 난무하는 '세상 말들'을 '하느님 말씀'으로 예리하게 식별해 내도록 지치지도 않고 요구하며 훈련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행복은, 우리가 이런 과정을 충실히 거쳐 주변부의 작고 가난한 사람으로 머물 때만 주어지는 것 아닌가요.
마리아 어머니,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께 너무 많은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가 저에게는 이미 복음 단락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알아듣고 자유롭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곁에서 함께 걸어 주시길 기도드리며 이만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