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와 그 역사적 배경

시릴로1004 2010. 2. 11. 11:06
Ⅰ.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와 그 역사적 배경  

Ⅰ.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와 그 역사적 배경

1. 생애
성 베네딕도의 영성 

베네딕도 성인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자료는 성인이 쓴 수도규칙서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쓴 성인전 밖에 없다 성 그레고리오, 베네딕또 성인전, 손태섭, 분도출판사, 1980, 5쪽.
.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출생 연월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태어난 연도는 서기 48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의 청년기에 관해서도 한 가지만을 알리고 있다. 청년이 된 베네딕도는 학업을 닦기 위해 로마로 보내어 졌다는 점과 거기서 그는 쓰라린 체험을 했다는 점이다. 분명히 그는 일체의 학업에 몹시 환멸을 느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베네딕도는 자신이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였음을 알았다. 그는 지식만으로는 참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베네딕도는 학교를 물러난 뒤 유모와 함께 엔피데(Enfide)로 이사하였다. 이 엔피데에서 사소한 사고가 있었다. 유모가 이웃집에서 점토(粘土)로 만든 체를 빌어 왔었는데, 이것을 사용하다가 탁자에서 떨어뜨려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 뒤에 슬퍼하는 유모 앞으로 흠하나 없는 온전한 체를 가지고 되돌아 왔으며 이 일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네딕도는 그 일로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베네딕도는 남몰래 엔피데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베네딕도는 세상을 등지고 고독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로마에서 40마일 떨어진 수비아꼬에서 수도자 로마누스를 만나 그의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베네딕도의 은수생활은 얼마 지나면 다시 꺼져버릴 짚단의 불길 같은 일시적 변덕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그는 극심한 유혹을 홀로 외롭게 이겨내야 했다. 베네딕도는 만 3년 동안 은수자로서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수도생활을 하던 동굴로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의 장상이 되어달라고 청하였다. 물론 베네딕도는 단호히 거절하였으나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 집요하였고, 그리하여 베네딕도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수도자들은 이 불쾌한 은수자를 수도원에 끌어들인 것을 몹시 후회하였으며 그를 독살(毒殺)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베네딕도의 생애에서 두 번째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첫 번째는 로마에서 학업을 포기하였을 때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수도원을 지도해 보려던 시도마저 명백히 실패했던 것이다. 두 번 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위(無爲)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자기 동굴 안에서 홀로 관상생활을 하며 그렇게 숨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차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동굴 안에서 지내는 그의 은수 생활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자기들도 같은 생활을 하려는 욕구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 비록 아주 작은 규모이기는 했지만 새로운 수도원이 형성되었다.
베네딕도는 아마 평신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신학을 연찬하여 조예가 깊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 그는 이미 의식적인 무식을 표방하여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니까 그는 한갓 평신도의 신분으로 수도원을 지도했던 것이다. 어떤 성직자가 여기에 대해 질투하였으며, 그 사제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다시 로마를 거쳐 남쪽으로 행했다. 거기서 베네딕도는 하나의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몬떼 까시노”였다. 훗날 까시노는 서양 정신사의 한 상징이 된다.
그레고리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네딕도는 앞일을 예언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다. 또한 베네딕도는 신비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였다. 여성에 대한 베네딕도의 태도는 딱딱하지도 않았고 부자연스럽지도 않았다. 베네딕도는 젊었을 때부터 누이동생 스콜라스띠까와 매우 의가 좋았다. 그것은 이를 테면 상호이해의 관계요, 성애(性愛)와는 무관한 여성관계였다. 베네딕도와 그의 누이동생 스콜라스띠까와의 사이가 바로 그러한 관계였다.
베네딕도는 일부 성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독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다. 그는 엿새 전에 자기 무덤을 정비케 하였다. 이윽고 지독한 열병이 그를 덮쳐, 극심한 신열에 시달리었다. 병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는 너무 쇠약해져 혼자서는 서 있을 수도 없는데도 자리에서 일으켜 달라고 했다. 수사들은 에워싸 그를 부축했다. 베네딕도는 하늘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두 손을 들고 기도를 드리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Walter Nigg,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김윤주, 분도출판사, 1980, 18-50쪽.
530년의 어느날로 추정된다.
2. 역사적, 신학적 배경
베네딕도 전(前) 시기(4-5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침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게르만 왕국의 성립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고, 종교적으로도 그리스도교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시기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문명제국들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야만족들은 기근과 페스트에 시달렸으며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국력은 심하게 약화되어 제국은 분할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위기에 처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교회 생활이 완전히 정지된 것은 아니었다. 김성태, 세계교회사I (신학총서11), 성바오로출판사, 1982, 298쪽.

베네딕도 당시 갈리아에서는 로마 문명이 붕괴되고 야만족들이 북쪽 지방을 침략하였고, 반달족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이탈리아 역시 5세기 고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베네딕도 성인이 태어날 당시의 야만족 지도자는 오토아젤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동고트 왕국의 황제 테오도리코에 의해서 물러나게 되었다. 테오도리코의 통치기간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베네딕도 서거 이후, 526년 테오도리코가 죽은 이후부터 동방의 황제 유스티노는 서방을 정복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으며, 동고트족의 멸망(553년)이 있기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은 전쟁의 불길로 끊이지 않았다.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는 끊임없는 이단들과의 논쟁을 벌여왔다.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네스토리우스파)으로 인해 교회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수도생활에까지 영향을 주어 수도생활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국가와 교계의 권위자들은 무질서와 비정통주의 경향에 대항하여 좀더 제도화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도원 생활은 점차 조직화, 제도화되었으며, 수도원내에 구체적인 많은 규정들과 규율의 엄격화를 현저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한국 베네딕도 수도회 연합, 성 베네딕도 규칙 입문(코이노니아 제7집-1983년 가을호), 76-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