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째 왕의 전설
예수아기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무렵, 그 탄생을 알리는 별이 동방의 슬기로운 세 임금
(박사)뿐 아니라, 광활한 러시아 땅의 한 임금에게도 나타났다. 이 왕은 위풍이 당당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군주도 아니고, 혹은 특별히 부유하거나 남달리 현명하고 마술 같은
것에 능통한 그런 영주도 아니었다. 그는 지조가 곧고 마음이 착하여 어린이 같이 순진하며,
인정이 많고 매우 친절해서 붙임성이 있고, 때로는 농지거리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위인이
었다.
언젠가 하늘에 별이 나타나, 온 세상을 다스리실 최고 지배자의 내림을 알릴 것이고, 그러면
러시아에서 통치하던 왕손은 길을 떠나고 그 훨씬 위대한 주군(主君)을 찾아가서, 이를테면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하리라는 이야기가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와서 이 작은 왕도 그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은 수많은 세대(世代)가 소중히 간직해 왔고, 각 세대는 그것을 다
음 세대에 전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었다.
이 러시아 땅의 작은 왕이 아직 젊은 나이로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그때에, 이 세상
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을 알리는 별이 하늘에 나타났으니, 그는 크나큰 기쁨이 북받쳐 즉시
여행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많은 수행원들의 동행
을 바라지 않았고, 심지어 가장 충직한 하인들조차 한 사람도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위대한 지도자가 어디서 태어나실는지 모르고, 따라서 자기가 얼마나 먼 여행을
하게 될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그분을 찾는 여행길에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애마(愛馬) 와니카에 안장을 얹게 하였다. 군마 같은 큰 말이 아니라,
자그마하지만 그런대로 뚝심이 있는 러시아 토종의 말이었다. 털이 덥수룩하고 앞머리가 늘어져
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주인이 인도해야 할 정도였으나, 먼 여행에는 안성마춤
으로 지구력이 있고 또 온순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작은 왕은 생각했다.
<빈손으로 가서 경의를 표할 수야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분은 보통의 신분 높은 분이 아니라,
지존하신 주님이 아니신가.>
그는 안장의 자루에 넣어서 가져갈 만한 것, 그러니까 자기 나라 백성이 잘 살고 근면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위해 오신 지존하신 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 합당한
선물이 무엇일까 하고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으레 부인의 덕과 근면을 보고 남편의 슬기로움을 판단한다는데 그는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가장 곱고 부드러운 아마포(亞麻浦)를 몇필 마련하였다. 이 아마포는 자기
나라 부인들이 토산 아마포로 짠 것이었다. 그밖에 또 제일 보기좋고 품위있는 모피도 몇장
쌌는데 이것 역시 자기 백성인 사냥꾼들이 겨울에 짐승을 잡아 그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서
빌로오드처럼 반드럽게 손질한 것이었다.
<이걸 보면, 내 백성이 겨울에 비록 하늘나라에서처럼 커다란 난롯가에 앉아서 좋은 과실주
크바스와 절인 오이 맛을 즐기고 있을지라도, 추운 계절이라고 그렇게 빈둥빈둥 게을리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터이니, 하물며 그 전지(全智)하신 예수아기야 단박
아시겠지.>
하고 작은 왕은 생각했다.
왕은 자기 노동자들이 사금(砂金)을 채취하고 있는 여러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금을 넣은
작은 가죽 주머니들을 많이 가져오게 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역(交易)을 지배하는 것이엇다.
또 신하들도 모르고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른 적도 없는 은밀한 여러 광산에서 가장 신뢰
할 수 있는 광부들이 보석을 찾기 위해 시굴(試掘)하고 있었는데, 왕은 그런 산에서 희귀하고
값진 보석들을 급히 가져오게 하여 자기 보고(寶庫)의 재고량을 늘렸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들을 골라 지존하신 분에게 바칠 자기 나라의 선물로 가지고 가기로 했다.
끝으로, 또한 여자의 영리한 말을 따르기로 했다. 왕들의 지혜가 속수무책으로 손을 들어도
여자의 슬기만은 세상일을 꾸려 나간다는 것을 그는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솜털이 많고 둥그스름한 꿀벌들이 러시아 땅의 보리수에서 모아온
꿀을 진흙으로 만든 작은 단지에 넣어 가져가기로 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란 어떠한 아이든
그러한 꽃꿀이 필요하다고 그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태어나실 그 예수아기가 옛부터 전해온 약속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다 할지라도, 이 러시아
보리수의 꿀은 제일 먼저 그 아기의 천상(天上) 본향을 상기시킬 것이라고 했다.
작은 왕이 가지고 가려고 챙긴 선물들은 이상과 같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며
자기가 돌아 올 때까지 서로들 의좋게 지내라고 당부한 뒤, 어느날 밤 애마 와니카를 타고 길을
떠났다. 왜냐하면 바로 그날 밤 그 별이 가장 밝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타고 자기 왕국의 땅 끝까지 갔으나 별은 결코 정지하지 않았다. 그는 국경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할수없이 낯선 땅으로 발을 들여 놓았으나 외국은
물론 낯익은 자기 나라 땅과는 달라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그는 날마다 여행을 계속하였다. 자기가 따라가고 있는 별의 긴 꼬리가 거의 땅에 닿을 것만
같아, 다음 순간 그것을 손으로 움켜잡으면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단번에 그
구원의 장소로 이끌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밤도 여러번 있었다.
하나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가 홀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온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실 가장 위대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열망 때문이었고, 그는
이 간절한 소망으로 마음이 뿌듯하여, 비록 낯선 외국 땅에서 불편하고 당황할 경우가 많더라도,
결코 피곤한 줄도 몰랐고 도무지 잠도 자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 알지도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좋은 일은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 후에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도 같은 일을 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쁜 일들은 자기 나라에서 그런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욱 상심시키고 슬프게 했다.
왜냐하면, 여기 외국 땅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괴로워하거나 착한 사람들이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아무리 동정심이 일어나도 그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경우엔 그런 사람들을 말이나 행동으로 도와주고, 그는 다시 홀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 세상이 새로운 최고 통치자를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가를 진심으로 되씹어 생각
했다. 그 최고 통치자란 정녕 박해받는 이들을 보호해 주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고, 의로운 이들에게 보답을 줄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옛부터 전해 내려온 약속은, 이제
새로 태어나실 그 통치자가 이 모든 일을 실행하시리라고 했고, 또 그 자신도 이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났다.
그는 이미 두서너 달이나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문제의 별이 유난히 찬란한 빛을 내며 하늘을 흘러가고, 그는 애마를 날랜 속보(速步)로
몰면서도 먼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에 애수를 느끼며 별을 뒤따르고
있었던 어느날 밤, 참으로 기묘한 상봉을 했다. 어둠 속에 뭔가 보였는데 처음에 그것은
마치 언덕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다음 가까이 다가가서야, 여행중인 어떤 신분 높은
사람들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일행은 춥기 때문에 밤에도 계속 길을 가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작은 왕과 똑같이 그들 역시 문제의 별을 놓칠세라 뒤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귀인(貴人)들과 그들의 많은 시종 일행은 말이 아니라, 낙타들을 타고 있었다.
이 낙타들은 마치 두툼한 털담요에 휩싸인 모양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으며,
움직이는 언덕으로 생각 되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짐을 잔뜩 실은 그 낙타들의 오똑하게
도드라진 등이었다.
러시아 토종의 작은 말이 날랜 속보로 그 일행을 따라잡았을 때, 그 종자(從者)들은 자기
들의 세 분 상전을 지키려고 그 둘레에 민첩하게 모여들었다. 강도가 아닌가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곧 오해는 풀렸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작은 왕은 본래
붙임성이 있는 위인이라 동행이 생긴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는 세 귀인에게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저희가 오래전에 떠나온 동방의 나라들
이름을 대었다. 작은 왕은 그런 나라들의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구인들의 목적지 -- 그렇다. 바로 그들의 여행 목적지는 작은 왕이 찾아가고 있는 곳과
같았다. 바로 그곳 위에서 문제의 별이 멈추어 설 것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한 아기, 그러니까 영원히 온 세상에 군림하실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지혜
로운 의사, 가장 고귀한 제관이 될 아기가 태어나시리라는 계시를 받았으며, 자기들은 그
아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작은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도 바로 같은 이유로 러시아 땅을 떠나왔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동방에서 온 그 세 귀인도 러시아라는 이름만은 알고 있었으나, 그 들은 러시아를 대단히
음산하고 황량하며 몹시 추운 나라로 생각하고, 그곳 왕이라 했댔자 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 될 때 까지 러시아의 작은 왕은 자기 나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좋은 나라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그는 밤새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온 상대자들을 알아보고는
그만 풀이 죽었다.
낙타 등에서 점잖게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화려하고 위엄있는 모습에 비하면, 그는
한낱 뜨내기와도 같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부지런한 그 많은 하인들을 보자, 자기도
아주 충직한 종 두서너명을 데리고 와서 시중들게 했던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하고 한동안
자문하였다. 비록 그의 성실한 신하들은, 상전들의 눈치를 보며 궁정식(宮廷式)으로 잽싸게
시중들곤 하는, 이 세 귀인의 아첨배 같은 조신들과, 그 친절한 몸가짐에서는 겨눌 수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작은 왕은 닳아 해지고 먼지투성이인 자기 승마용 저고리를 살펴보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위풍이 당당한 세 동방귀인들이 의젓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둠
속에서 큰소리를 하는 자(者)란 밝은 데서는 극히 왜소하게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세 귀인은 도대체, 작은 왕이 이제까지 보아온 중에서도 유달리
기묘한 사람들이었다. 작은 왕은 지난 두서너 달 동안 이미 갖가지 신기한 일들을 보아왔지만,
그들은 정말 별난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스페이드 형의 맵시를 낸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여느 백인(白人)들과 거의 같은 흰 살갗이었다. 그리고 둘째 사람은 보리수 처럼 누런
피부였고, 셋째는 새까만 사람이었다. 그제사 작은 왕은, 지난밤 어둠 속에서 자기가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지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거려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사람은 밤의 어둠 속에서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밤길을 인도하던 별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먼길을 온 그 귀인 일행은 숙소를 찾으려고 했다.
이런 경우 러시아 작은 왕은 대개 들의 곡물창고 뒤 같은 데서 안장을 베개 삼아 눈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날 그들이 잠자리를 찾으려는 마을이 바라보였을 때 앞의 들판
에는 이른 아침의 이슬이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듯한 햇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 귀인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탄성을 연발했다. 이때 작은 왕은 문득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몰골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주위의 낯선 사람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도, 또 한번 잘난체하려고 했다.
“하지만 살기좋은 러시아 땅에서 가져온 진주 몇알이 저 이슬보다는 훨씬 아름답게 반짝
거리지요.”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안장의 자루에 손을 넣어 진주가 들어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진주는 본래 예수아기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온 것인데, 그는 소중한
자기 조국에 대해 품고 있는 긍지와 사랑의 씨를 뿌리듯, 이슬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들판에 커다란 호(弧)를 그리며 진주를 뿌렸다.
세 귀인은 이 뜻밖의 지나친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스페이드 형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거 정말 진주였습니까?”
“물론이지요. 본래 그건.....”
이때에야 그는 그 진주가 새로 태어나실 저 위대한 왕에게 진상할 물건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그걸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고향 땅에는 아직 그런 진주가 많으니까 괜찮아.>
그는 속으로 퉁명스럽게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진주는 눈물이라고 하지 않소."
스페이드 수염의 이방인이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낯선 이국 땅에 당신의 눈물을 뿌립니까?"
“아하, 난 그런 눈물 따윈 초월하고 개의치 않는답니다. 내겐 언제나 웃음이 있으니까요.”
작은 왕은 지각없이 뻔뻔스럽게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겉으로 지껄인 것처럼 그렇게 몰염치하지는 않았다. 말을 타고 마을까지
계속 길을 가면서도 그는 저 세 귀이니 자기가 그들과 같은 목적지글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거나, 아니면 자기가 새로 탄생하실 가장 위대한 왕의 봉신(封臣)이 될 자격이
전혀 없는 하찮은 속물(俗物)로 여기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작은 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세 귀인과 함께 어울려 길을 갔으나 그들이 서로 점잖게 교양있는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도저히 한몫 낄 수 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그 종자(從者)들 중 한 사람과
유쾌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세 귀인이 말탄 종자를 한 사람 미리 보내어, 자기들이 낮에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반의
영접준비를 할 것을 일러 두었던 그 여인숙에 일행이 당도했을 때, 작은 왕은 수다장이라는
그 고약한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세 귀인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군주였고, 그렇다고 그들의 종자들 가운데 섞이어 함께 자기에는 자신의 신분이 너무
높고 러시아의 명예를 위해서도 안될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애마 외니카의 목에
여물자루를 매달아 주고는 이제껏 늘 그렇게 해왔듯이 짐꾸러미와 안장을 풀어서 내려놓고
그것을 베개 삼아 헛간에서 혼자 잠자리에 누웠다.
그는 곤히 잠에 빠져, 마치 자기 고향 집의 러시아 난로 옆에 누워 있는 것처럼 과실주
크바스와 절인 오이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떴을 때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온
세상의 비탄이 한데 뭉쳐진 소리 같았다. 그는 놀라서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 머리를 긁
적거렸다. 자기 혼자인 줄 알았는데. 자기를 뒤따라 누군가 몰래 이 헛간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삭의 여자거지였다. 그래도 햇볕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아래서
몸을 풀까 하고 기어들어와서, 그가 느긋하게 잠들어 있는 동안에 계집애를 분만했던
것이다. 작은 왕 이외에는, 이 산모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작은 왕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허나 그는 마음이 착해서 그 여자거지의
딱한 처지를 모르는 체하고 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인숙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가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는 전날 사람들
한테 동냥을 하나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왕은 자기 가죽주머니에서 두서너 줌의
황금을 꺼내어 여자의 작은 동냥주머니를 두툼하게 채워 주었다. 갓난애기는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왕은 양미간을 모으며 그 가련한 벌거숭이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아, 이 가엾은 것아!"
그는 뜸을 들이고 중얼거렸다.
"네 애비는 난봉꾼이었니. 이 세상에 태어난 너에게 그 얇은 살갗밖에 준 것이 없으니
딱도 하구나. -- 어디 내가 너를 그냥 둘 수 있겠니!”
그리고 그는 자기 짐 있는 데로 가서 안장의 자루를 풀어 고향에서 가져온 아마포를
한 필 꺼냈다. 그걸 여러 자 떼내서 가장 아름다운 강보감을 마련해 주었다.
산모와 갓난애기가 걱정없이 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모두 주선해 주고
나니 벌써 날이 저물어 저녁이었다. 작은 왕은 애마에 안장을 얹고 그 여자거지에게
작별의 말을 했다.
"내 나라에 있었다면, 자넨 좀더 나은 대우를 받았을 걸세."
그는 인심이 후한 러시아 땅의 이야기를 여자에게 해주며, 거기서는 모든 걸인이 어김
없이 자신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거지는 기운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는 바로 나리 같은 분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저에겐
아무런 힘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다만 나리를 제 마음의 임금으로 섬길 뿐이예요. 이 시간
부터 저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거예요.”
작은 왕은 기분이 좋아서 혼잣말을 했다.
<자, 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실 저 위대한 임금님에게 바칠 황금과 아마포에서 내 마음대로
얼마큼 떼어 주었구나. 하지만 그대신 나는 이 낯선 나라에서도 이제 내 자신의 땅을 갖게
되지 않았나. 아마 이런 마음의 영토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거야. 다만 저 위대한 임금님이
용서해 주신다면 말이다....>
그가 자기 말을 끌고 여인숙의 마당으로 가보니, 그곳은 이미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지체높은 세 사람의 이방귀인과 그 일행은 첫별이 빛나기 시작했을 때 벌써 낙타들을 타고
길을 떠났다고 여인숙 사람들이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저 별이 긴 꼬리를 끌며 또 어떤
이상한 목표물을 가리키고 있군 하면서 그 큰 별을 손짓해 보였다.
작은 왕은 머리를 흔들며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긴 여행을 해 왔지만 이때 처음
으로 그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긴 아침부터 그는 자기가 뭔가 잘못하면서 귀중한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울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인숙 사람들에게 그 여자거지와 갓난애기를 잘 보살펴 주라고 다시 한번 부탁한 다음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그는 그 밤도, 또 그 다음날 밤도 계속 말을 몰았다. 그 달 내내 밤마다 길을 재촉했다.
그는 밤길을 가는 자신과 애마 와니카의 지리함을 달래며 기운을 내기 위해 자기가 기억
하고 있는 고향의 노래는 죄다 불러 보았다. 가도 가도 그 동방에서 온 세 임금의 일행
은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땅이 그들을 모두 삼켜버린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을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이 아주
평화롭고 밤에도 집집마다 문을 열어놓고 지낼 만큼 인심이 좋은데, 그 세 임금은 저희
가는 길을 틀리게 가리켜 주도록 일부러 사람들에게 당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그 큰 별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어서 그는 제길을 골라갈 수 있었으니,
결코 낙심하지는 않았다. 그 임금들이야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들과
함께 어울렸으면 그들에게 기꺼이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위풍이
당당하여 기가 질리기 때문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어울려 동행하는 것이 담이 작은 자에
게는 언제나 약간의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낮에 그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은, 그가 유달리 담이 작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늘 명령만 하던 왕으로서의 기품이 몸에 배어 있었다. 왕은 동시에
재판관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몰라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그 지방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더욱 부당하게 생각되었고, 그 지배를 받는 백성들의 신세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갖가지 질병들이 옴처럼 만연하고 있었다. 특히 중환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처지는 비참했다. 일년은 고사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아무런 간호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왕 홀로 다스려야 하는데 채찍으로 통치했고,
사람들은 상품이나 다름없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있었다.
작은 왕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이 세상에 태어나실 저 위대한 새 임금은 이런 나라들에서
그 숱한 일들을 바로잡으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작은 왕은 옛부터 세대마다
그 새 임금을 얼마나 간절히 고대해 왔었는지를 정말 납득할 수 있어싿.
러시아에서 온 초라한 군주인 그는 잘난 체 하는 그 세 임금을 결코 앞지르고 싶지 않았고
또 실상 그분이 우선은 어린아이긴 하지만, 어쨌든 통치에 있어서는 자기가 그분을 따르지 못할
처지였다. 그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곤고한 사정을 보면, 그 전능하신 통치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표로 바치려던 선물 중에서 뭔가 꺼내어 선뜻 내주고 자기가 목격한 어려움을 덜어
주곤했다. 그런 경우 자기가 받는 감사는 자기가 아니라, 새로 오시는 그 훌륭한 분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황금을 넣어온 가죽 주머니의 속은 점차 줄어
들었고, 그 자신, 보석을 금화로 바꾸기 시작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 그날이 왔다. 어느날 저녁, 몸집이 크고 살이
피둥피둥 찐 두 사람의 감독관이 농장에서 일하는 쇠약한 남녀 농노(農奴)들을 몽둥이로 마구
후려치는 것을 그는 방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두 감독관의 말에 의하면, 그 농노들은 일을
빨리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얻어맞아서 살이 갈라지고 빈사상태
에 빠진 자들이 적지 않았다. 작은 왕은 보다 못해 즉석에서 돈을 내놓고 몸값을 준 다음
그 농노의 무리를 모두 노예신분에서 빼내었다.
물론 이 일을 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저녁부터 별이 뜨기까지의 귀중한
많은 시간도 허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작은 왕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그 별을
따라 밤길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묵었다. 그는 노예신분에서 속량되어 자유의 몸이 된
자들이 자기를 구세주처럼 환대하는 가운데 앉아서, 하늘의 그 별이 옮아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구세주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타고 그 별을 따르지는 않았다. 늘
이 시간이 되면 속보로 밤길을 달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던 애마 와니카는 뭔가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불안하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다음날 작은 왕은 역시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햇빛 밝은 낮에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그 자신의 판단 외에는 그에게 길을 가리켜 줄 많나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계속 길을 갔다.
그가 구세주로서 환대를 받았던 그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낮에는 별로 길을 가보지
않아서, 애마 와니카는 버릇이 안된 밝은 햇빛이 부시어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는 말의
등에서 흔들리며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선한 일이 또한 언제나 올바른 일이기도 할까>하고 그는 자문(自問)해 보았다. 그가 몸
값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되게 했던 그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그에게 와서 이젠 누가 자기
들에게 먹을 것을 주느냐고 물었었다. 그들은 농노로서, 자기들을 감독하는 자들이나 고문
하는 자들이 징계의 매를 때리는 몽둥이뿐 아니라, 또한 죽을 푸는 국자도 흔덜어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평생 처음으로, 노동할 것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이날 아침, 정작 먹을 것은 아무것도 맛보지 못했었다. 그들으 배가 고팠고 뭔가 먹고
싶었다.......
작은 왕은 길을 떠나기 전에 사흘분의 식량을 살 수 있는 돈을 그들에게 주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인으로서 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일을 하라고 타일렀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얼마 멀리 가기도 전에 그는 벌써, 그들이 과연 그렇게 할 것인지 의심
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은 그 노예근성이 너무 깊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살아가지 못할
것이고, 필경 또다시 스스로 자기 몸을 팔고 노예가 되겠지. 매를 때리는 몽둥이는 이따금
있을 뿐이지만 끼니때가 되면 언제나 나오는 그 국자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날 작은 왕은 밝은 햇빛 속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작으 자루들을 세어보고 놀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자루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다.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자기변명을 했다.
<아마 낮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훔쳐갔을게다.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거든. 내가
크바스와 절인 오이를 꿈꾸고 있으 때 쉽게 훔쳐갈 수 있었을테지! 틀림없이 누군가 짐
꾸러미들을 열었어.....>
그러나 이것이 양심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는 단단히 절약하고, 아무도 자기 나라를 멸시하지 않도록 그 지존하신
통치자에게 바칠 보물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아직도
고운 아마포 두서너 필과 모피, 그리고 꿀단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열심히 하면서 약간
마음을 위로했다. 그 꿀만으로도 넉넉하며, 다른 많은 것을 충분히 대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꿀은 황금빛 털을 가진 둥그스름한 러시아 벌들이 보리수에서 모아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저녁도 되기 전에 작은 와은 자신이 마음먹었던 그 착한 뜻을 어기고 그릇된 짓을
하고는 스스로 실망하였다. 그러니까 대단히 불쌍한 나환자 두서너 사람을 만나자 불현 듯
동정심이 일어나, 자기가 갖고 있던 그 고운 아마포 한 필을 몽땅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 주어
그들의 곪은 종기를 싸매게 했다. 그리고 구역질나는 파리떼 속에서도 그들의 역병(疫病)이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작은 왕은 생각했다.
<이제, 공기가 맑은 상에라도 가면 저 문둥병자들의 곪은 종기에 달라붙은 파리들이 눈에
띄지 않겠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남에게 주고 싶은 그 유혹도 벗어날 거야.>
그러나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런 유혹과 약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그것은 더욱
무겁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제 정신을 차리고 또 궁리했다.
<본래 약점이란 없는 법이야. 하느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이와 아주 판이한 얼토당토
않은 경우에 맞닥뜨리게 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다 섭리야. 모든 임금 중에 제일 위대한
임금이 그분이 만약 이것ㅇ르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그야말로 놀랄 일이다. 그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물을 바치는 것은 좋고 아름다운 일이야. 하지만 장차 그분의 신하될 사람들이
알맞을 때에 도움을 받는 것은 더 좋은 일이 아닌가! 더구나, 내가 본래는 다 가지고 오려고
했다는 것을 그분에게 죽 얘기해 드린다면 - 어떻게 내 말을 믿지 않겠는가!>
이렇게 그는 갈수록 더욱더 정교하게 자기변명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때
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처럼 여겨
졌다.
그는 저녁때 산으로 출발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겨울이 가까웠다. 작은 왕은 출발할 때 단 한번 그 별을 보았을 뿐이고, 그것은
곧 비에 가리워지고 말았다.
<달려라, 와니카, 힘껏 달려라! 저 별의 꼬리를 물어야 해!>
작은 왕은 또 경솔하게 소리를 지르며 애마 와니카를 서둘러 몰아댔다. 허나 그는 밤새껏
길을 헤매었다. 아침이 되어, 그 일대는 몹시 험하고 황량했는데도, 와니카와 자신의 몸이
다친데 없이 무사한 것을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해가 뜨자, 그는 뜻밖에, 전날 밤 이 산에
숨어 있는 강도에게 얻어맞아 속옷까지 빼앗기고 쓰러져 있는 장사꾼을 발견하였다.
작은 왕은 깊이 동정하며 말했다.
“오, 이 딱한 친구야! 당신은 그렇게 벌거숭이로 있으니,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천사
같구려. 마땅히 자비로운 도움을 받아야죠.”
그는 우선 그 부상자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그가 고운 아마포 한 필에서 붕대로 쓸 만큼
찢어냈을 때, 그 소리는 아마포가 정말 항의의 고함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귀에 들렸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꾸짖고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출혈을 막는 것이, 한 어린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그 다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기운을 돋우어 주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나 작은 천사처럼 그렇게 벌거숭이로 있을 수는 없지.”
작은 왕은 이렇게 말하고 난처하다는 듯 귀 뒤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내 말 와니카의 꼬리는 길고 아름답지. 또 그 갈기도 촘촘하고 숱이 많아요. 허나 내가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몽땅 잘라낸다 한들, 난 그것으로 결코 옷을 짤 수는 없어요....그러니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다른 도리 없이 두서너 장의 모피와 또 아마포 한 필을 드릴
수 밖엔 없군요. 그렇잖으면 당신은 얼어죽을 테니까요.”
형편이 이렇게 되어, 강도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던 그 장사꾼은 혼인식 때나 쓸 가장
아름다운 아마포와 검은 담비 가죽으로 옷을 꾸며입고 그 비참한 곤경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작은 왕은 거의 속이 빈 짐꾸러미를 안장 뒤에 얹고 그 별을 뒤따라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루마다 밑에 구멍이 뚫린 듯 그 속의 마지막 남은 것도
급속히 빠져나갔다.
작은 왕이 그렇게 일년 가량 여행을 하고 나니, 그의 모든 자루는 바닥이 드러났다. 아마포
는 헐벗은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따스한 모피들은 동상에 걸린 자들에게 건네
주었다. 황금과 보석 - 그리고 제일 먼저 뽐내며 뿌렸던 지주까지도 - 곤궁한 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내주었다. 오직 한가지 남은 것이라곤 어머니가 주신 꿀단지뿐이었다.
어느날 작은 왕이 그 오지단지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여니 그 꿀에 햇빛이 비치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와니카에게 풀을 뜯어먹게 했다. 요즈막엔 거의 귀리를 맛보지 못했으니,
와니카는 털이 그전보다 훨씬 푸석푸석하고 걱정스러울 정도로 살이 빠졌다. 사람들의 한 살에
비해 말의 한 살은 정말 몰라보게 늙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왕은 단지 속의 노란
빛을 띤 꽃꿀의 윤기를 황홀하게 들여다보며, 마음속에 고향의 한창 꽃이 핀 녹황색(綠黃色)
보리수들을 그려 보았다. 고향 땅에 서 있는 그 나무들은 햇빛을 담뿍 받으며 하나같이
훈훈한 향기를 뿜고, 또 벌들이 윙윙거리고 있었다.
작은 왕은 견딜 수 없을이만큼 사무치는 향수를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아! 낯선 외국땅에서 무명의 왕으로서 정처없이 헤매는 신세보다 짧은 목숨이지만 고향
땅의 한 마리 꿀벌의 신세가 더 낫지 않을까! 저 별을 따라 다니는 것보다 그 보리수를
찾아 날아 다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벌써 일년이나 여행을 계속해 왔지만, 끝이 없었다. 타향이란 바로 불행이었다. 새로운
것들도 시시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죄다 주어버린 뒤로는, 그는 애마 와니카
하고만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상상도 해보지 못한 뼈저린 고독감에 사로잡
혔다.
겨울도 지나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러시아 보리수의 훈훈한 향기에 매혹된 야생벌이
한 마리 날아와 그 단지 가장자리에 앉아서 꿀을 빨아먹었다. 작은 왕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벌이 너무 빨리 다시 날아갔기 때문에 미처 거기에 대한 생각을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야생벌들이 세 마리, 네 마리, 이윽고 삼십 마리, 사십 마리, 점점 떼지어 날아들었을 때
비로소 그는, 이제 자기로선 더 이상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처지인데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것까지 벌떼가 빼앗아 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리가! 저리 가란 말이야!"
작은 왕은 고함을 지르고 두 손을 휘두르면서 옆에 놔두었던 단지 뚜껑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을 수 없었다. 자기가 그 뚜껑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노란
빛을 띤 꿀에는 벌떼가 새까맣게 들러붙어서 그 고향의 맛좋은 꿀들 마구 핥아 대고 있었다.
작은 왕이 손을 뻗치어 그 단지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자, 즉시 정말 구름 같은 벌떼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그가 꿀단지를 흔들며 그 날개 달린 욕심쟁이들을 쫓아버리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더 못되게 그를 쏘아대는 것이었다.
"저리가! 어서 물러가!"
작은 왕은 또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문제였다. 그는 꿀단지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애마 와니카를 타고 도망하려 했다. 그런데 웬걸 와니카는 이미 벌떼에
쫓기어 머리를 치켜세우고 미친 듯 되는대로 질구(疾驅)하다가 들판에 사납게 나둥그라져
뻗으며 그 목을 요란하게 내던졌다. 그리고는 땅바닥을 뒹굴며, 갈기 속에 기어든 그 날개
달린 원수드를 짓눌러 바수어서 없애버리려고 몸부림쳤다.
작은 왕은 애마의 이 악전고투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벌들에게 어무 심하게 쐬어서 눈이 이미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꿀단지를 들고 있었으나, 벌떼가 들러붙은 이 손은 마치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 넣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변이 있나. 그래 처먹어. 살아 있는 내 몸뚱아리도 마음대로 처먹어 - 작은
왕은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슬픈 생각이 들었다. 죽도록 슬퍼서, 만약 눈에서 눈물이 나올
수만 있으면, 아마 그는 실컷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나올 수 없었다. 벌들에게
지독하게 쐬어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던 것이다. 그는 꾹 참고 있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화끈거리는 고통, 슬픔, 태양과 함께 온 세상이 가라앉아 버린 듯한 깜깜한 어둠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주저앉아 있으면서, 자신의 이 비참한 몰골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랐고, 벌들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면 애마 와니카가 다시 자기한테로 돌아와 주기를
빌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곤 이제 와니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은 다만 원망과 불평의 넋두리뿐이었다. 그로 하여금 이 여행길에 오르게 한
그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약속이며, 도무지 멈추어 설 것 같지 않은 그 별이며, 그토록
먼 곳에서 자기를 오도록 한 그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왕이며, 자기를 미혹케 하여 그릇된
길로 꾀고 놀린 외국 땅이며, 자기 생각엔 틀림없이 자기를 위험 속에 내버려두고 저희끼리만
떠난 그 세 임금들이며, 자기가 친절히 자선을 베푼 그 숱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이며.......
그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햇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다시 열린 날이 며칠인지 그는
몰랐다. 참으로 긴 어둠이 계속되었으나, 그는 열과 아픔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리어 날을
셀 수도 없었다.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다시 보니, 모든 것은 벌떼가 그를 습격하였을
당시와 전혀 똑같은 것 같았다. 와니카는 자기 근처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고 그 오목
들어간 등에는 안장이 비스듬히 달려 있었고, 짐자루들도 느슨하게 걸쳐져있었다.
그러나 작은 왕은 붓기가 내린 눈꺼풀 사이로 첫눈에, 벌겋게 부어올라 모양이 말이
아닌 자기 오른손의 꿀단지 속이 비었다는 것 - 그것도 아주 완전히 비었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벌들은 이미 멀리 날아가 버리고 윙윙거리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까무러칠 정도로 절망하여, 어머니가 주신 그 단지를 허공에 냅다 던져
버렸다. 단지는 곡선을 그리며 바위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와니카한테로 가서 오랜만의 인사로 다짜고짜 그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안장에 올라
앉아 정신없이 몰아댔다. 그는 정말 기차게 쓰라린 고초를 겪은 그 자리를 떠나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기 물건을 훔쳐간 자들을 모조리 저주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에 그는 자기 애마 와니카 옆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가 자포자기하며 너무
거칠게 다루었기 때문에, 와니카는 이제 병이 나서 사지를 뻗고 땅바닥에 누운 채 다시는 일
어나려 하지 않았다. 작은 왕은, 이미 생기를 잃고 흐릿해지고 있는 와니카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친구야,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 누가 나를 내 별 있는 데로 데려가며, 또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 데려다 주겠는가? 지난번에 내가 자네를 걷어찬 것을 용서하게! 내가 내 자신을 걷어
찰 수야 없지 않나. 그건 나 자신을 걷어차려고 한 거야, 나를 믿어주게!”
와니카의 콧구멍이 마치 고향 땅 목장의 마른 목초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가볍게 떨렸다.
그리고 사지를 더 길게 뻗으면서 말굽소리를 내는 것이 거의 정상적인 말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작은 왕은 말했다.
"자네가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아네. 하지만 내가 자네한테 묻는데, 그렇게 멸시
하듯 비웃을 필요야 없지 않나.”
그는 와니카가 웃을 때는 이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와니카는 이미
죽었었다.
작은 왕은 와니카가 죽은 것을 알고는 맥이 풀려, 여러 시간 동안 그 네발 가진 친구 옆에
앉아서, 팽팽하고 더욱 뻣뻣해진 목을 쓰다듬으며 텁수룩한 갈기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생각난 듯, 그 앞머리의 터부룩한 털을 옆으로 걷어올리고 애마의 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생기가 없고 섬뜩한 검은 눈을 오래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전에 그 눈에
깃들여 있었던 장난기 어린 고집과 호기심 그리고 성실한 끈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와니카의 앞머리를 다시 내리워 주고 일어섰다.
멀리서 돌들을 날라오는 데 여러 시간이 걸렸다. 야수들이 점잖지 않게 죽은 친구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 돌들을 애마의 시체 위에 쌓아올렸다. 제일 밑엣돌을 아주 조심스럽게
와니카의 싸늘해진 옆구리에 기대어 놓았을 때는, 돌로 짓누르게 되어 미안하다고 수없이
변명을 했다. 일을 마친 다음 그는 돌더미 옆에 앉아서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초저녁에는 그 별이 나타나지 않았다. 차차 밤이 깊어가도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
았다.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줄곧 하늘을 바라보려고 애쓰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바람을
나무랐다.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야 그는 일어나서, 그 자리를 떠나 어둠 속을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와니카만큼은 빨리 달릴 수 없었다. 생각하나마나
이제부터 다시 여행이 오래 계속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태산 같았다.
와니카가 죽은 첫날 밤, 새벽녘에야 그 별이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밤마다 되풀이되었다.
그런데, 그 별이 -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 보이곤 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별의 꼬리는 이젠 중천에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 앞에 보이는 남쪽 어느 곳인가 땅에 닿아 있었다.
<저기다....저기다....>
작은 왕은 밤새껏 정말 힘껏 달렸다. 멀리서 개들이 수상하다는 듯 짖어대고 파수꾼들이
놀라 주춤거리기도 했다. 그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주고, 그러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뿌렸는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은
불행의 눈물만 뿌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군....한 여자거지의 마음의 왕이 돼, 하하, 웃기
는군! 그래도 난 한때 그걸 그럴싸하게 상상하면서 으쓱거렸으니, 참 나도 멍텅구리야!
그런데도 이제 난 너무 늦었어. 제때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보다시피 이 몸은 거지꼴이니,
만나 주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바로 얼마 뒤에, 작은 왕은 그의 생애중 가장 긴 밤을 체험했다. 그 밤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는데, 문제의 별이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작은 왕은 해질녘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 장소에 웅크리고 앉아서 밤을 꼬박 새었다. 그리고 낮에는 온종일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하늘의 어떤 지시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림짐작으로 길을 더듬어나갔다.
둘쨋 날 밤에도, 눈을 똑바로 뜨고 줄곧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렸으나 역시 허사였다. 그는
새벽녘에 어떤 외양간으로 남몰래 숨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지난밤 거기선 잔 짐승의 온기가
남아 있어 짚은 따스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이런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 데에 감사했다.
그 별이 다시는 반짝이지 않은 둘쨋 날 밤 후로, 러시아 땅에서 온 우리의 주인공 작은 왕은
일종의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무턱대고 길을 갔다. 낮이고 밤이고 길을
갔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루의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고집과 절망을 번갈아 짓씹
기도 하고, 혹은 사무치는 비애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도 뚜렷한 목표가 없었고,
또 외적으로도 육안으로 바라보며 뒤따를 명확한 목표가 없었다. 그리고 눈에서나 마음속에서나
그의 목표가 희미해질수록, 그는 불운과 세속 일에 더욱 깊이 휘말려 들어갔다. 그것은 어떤
왕도 - 모든 민족의 영원한 왕인 저 지존하신 분도 - 개선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것으로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후에도 그는 같은 일을 겪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해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이국풍의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있었다.
이른 새벽에 그는 바닷가로 나가 앉아서 아침 놀이 마치 진주모(眞珠母)처럼 파도에 부서지며
번져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가 아직 진주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것을 바다에
던져 그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했을 터인데!
그때 그는 대단히 난폭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죄인과 노예들이 젓는 단갑판의 군함인)
갈레선 한 척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미 출항(出港)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 젓던 사람이 죽었으니,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본래 그 사람은 선주에게 빚을 지고
우물거리며 갚지 못하고 있다가, 그 선주의 갈레선 선원으로 일을 하도록 판결을 받았었다.
- 그러나 아주 건장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그 뱃일을 감당할만큼 이 사람의 팔은 굳세지
못했다. 아마 배가 이 항구에 닿기 전에 그의 송장은 바다에 던져졌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선주와 그의 종들이 죽은 사람의 어린 자식을 끌어다가, 그 아버지가 묶였던
사슬에 매서 일을 시키려고 했다. 아직 젊은 어머니가 그 옆을 따르면서 선주에게 자기
자식을 동정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주는 그 아이를 즉시 아버지의 사슬에
매서 일을 시킬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작은 왕은 얼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분노와 비통한 느낌이 엇갈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젊고 아름다운 -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과부가
불쌍했다. 어린 자식이 가엾어 속을 태우는 여인의 고통이 그를 감동시켰다. 적어도 지
금은 누가 보든지, 그 어린 자식은 오래지 않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황천길로 들어갈 것이
뻔했다. 소년은 도살대로 끌려갈 양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꼼짝않고서서 어머니를 쳐다
보다간 또 시선을 돌려 자기를 박해하는 폭군을 멀거니 쳐다보곤 했다. 그동안, 어머니
는 선주에게, 아이를 데려가면 자기는 부양자를 잃게 된다고 애걸하고 있었다.
"전에 먹어치운 것을 먼저 갚아야 해!"
선주는 우악스럽게 웃으면서 고함을 지르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녀 자신이 올려고 하지 않을까? 그러면 재미있겠는걸!>
작은 왕은 그 젊은 여인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나라 고향에 있는 그 많은 젊은
처녀들이 퍼뜩 생각났다. 그는 흐믓한 마음으로 그녀들을 살피곤 했지만, 결코 청혼을 한
적은 없었다. <상냥하고 성실한 젊은 여인 곁에서 한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여자는 틀림없이 그런 여인일 거야>하고 그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러나 선주가 선창에서, 그 아이를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사슬에 매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는 다급해졌다. 마침 아침바람이 출항하기 좋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왕은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뱃사람들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 아이 대신에 가겠다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도전적인 눈초리로 선주를
쳐다보았다.
그의 귀에 제일 먼저 들린 것은 빈정대는 웃음소리였다. 그다음에, 마치 백정이 자기 앞에
끌려온 도살될 가축 한 마리를 살피듯이, 선주는 작은 왕을 자세히 살폈다. - 원! 자신이
있느냐구요? 있구말구요. - 그의 선임자가 그에게 어처구니없이 떠맡긴 부채를 마지막 한푼
까지 다 갚으려면, 여행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 번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선주는 말했다. 그리고 뱃사람들에게 선동적인 눈초리를 보내면 그때마다 웃돈을 더 얹어
부채를 셈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 그렇지 않아야 그의 신상에 좋으리라는 말이다. -
선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작은 왕이 그 어린아이보다는 훨씬 낫게 노를 저으리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작은 왕은 그 젊은 과부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은 휘둥그래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
하는 빛을 보이면서도 희망을 되찾고 있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자기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울고 있는 저 여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고 작은 왕은 생각했다.
그 자신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이 여인을 사랑하고 싶었다.
"잘있어요."
그는 나직이 말하고 몸을 돌려 배에 올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갈레선 감독은 그를 쇠사슬
에 맸다.
그후 이 넷째 왕이 보낸 세월은 이야기하기는 간단하지만, 참으로 지겹도록 긴 세월이었다.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거의 삼십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죄인과 노예들이 젓는
갈레선에서 보낸 삼십년!
그는 죽은 자의 사슬에, 그 과부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자진해서 매였을 때 그저 순진하
기만 했다. 죽은 자가 자기에게 떠맡긴 빚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또 노역(勞役)으로 그 빚
을 다 갚기 위해서는 얼마동안이나 노를 저어야 하는지도 전혀 묻지 않았었다. 그후 언제
부턴가 쇠사슬이 그의 복사뼈에 죄어들 때마다 자기 노역이 끝날 기한을 물을라치면 으레
<아직 멀었다!>는 대답만 들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와도 매양 한가지로 그의 고생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며, 세상의 찌꺼기 같은 온갖 잡배나 불운한 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쉴새
없이 노를 저어야 했다. 함께 고생하는 그 족속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아니면 오히려 꾀를
부리다가 배에서 이승을 하직하곤 했다.
이 삼십년 동안에 작은 왕은 두 번이나 도망하는 데 성공했지만, 두 번 다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오랜 세월 쇠사슬에 매여 있었던 발이 굳어져 버려서 그렇게 빨리 해안을 벗어나
달아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번 탈주를 시도했던 죄값으로, 그 죽은 자의 빚을
노역으로 갚아야 할 기간이 더 연장되었다. 그의 생각에 명백히 이 '빚'이란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불행한 동료들이 선주의 방자한 독재와 불의에
무섭게 분노하는 것을 볼 때마다 수없이 그는 음모를 꾸몄지만, 그때마다 빚값에 '웃돈'을
더 보태야 했다. 이 웃돈은 낯선 항구에서의 그날 아침 그 젊은 과부가 보는 자리에서 선주가
만약 그에게 선동적인 기미가 보이면 벌값으로 짊어지우겠다고 예고한 것이었다.
작은 왕을 배에 태우고 일을 시켜온 선주는 죽고, 그 아들이 그를 고집이 세지만 부지런히
노를 젓는 일꾼으로 알고 물려받았다. 감독들도 두서너 차례 바뀌고 나니, 그가 원래 다른
사람 대신에 노 젓는 자리에 묶여서 그 죽은 자의 부채를 완전히 갚을 때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로 잊혀지고 마침내는 배의
말없는 시설의 일부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아마 작은 왕에게 가장 기분이 나쁘고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망각은 인간존재로서의 그 자신을 지워 없애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눈에 띄게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흐릿해지고 마치 그 자신의 그림자와 같이
돼 버렸다. 앙상하게 말라빠진 얼굴의 움푹 파인 눈으로 그는 혼자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
보곤 했다. 누가 옆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아니 대관절 살아 있느냐고 묻고 싶
어도 말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신들린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참으로 오래전 어느날 아침에 그가 애마 와니카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때 견딜 수가 없어서 외면했던 그 눈빛을 해가 갈수록 닮아갔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보았고 또 그것을 보는 데에
몰두하여 오직 그 힘으로 살고 있었다. 다름이아니라 그는 또다시 그 별을 되풀이해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별 때문에 몇십년 전에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던가.
이제 그 별을 밤에도 낮에도 보았다. 왜냐하면 등불이 몹시 어둠침침해서 대낮에도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듯 그 등불을 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갑판 밑의 노 젓는 자리는
뜨거운 열기가 감돌고 그의 주위는 언제나 캄캄하여 그에게는 그 별의 광채가 어둠을 가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말을 타고 거쳐왔던 모든 노정(路程)과, 특히 동방에서 온 그 이방의
왕이 그에게 왜 이국 땅에 눈물을 뿌리느냐고 물었던 그 날 아침의 일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그는 <나에겐 웃음도 있소>하고 바보스럽게 대답을 했었다. 이제 그는 그 웃음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진주며 황금, 보석이며 모피, 아마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자거지가 자기 마음 속에 그를 위해 마련하겠다고 했던 그 왕국도 이제는 믿을 수
없었고 또 거기에 희망을 걸 수도 없었다.
그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헛되이 낭비했고, 무의미하게 헛수고만 했었다. 그가 저 지존하신
분의 봉신(封臣)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 이젠 자기 고향에 돌아가 그 왕관을
쓸 자격도 없었다. 그는 확실히 오래 전부터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양 행세해 왔었
지만, 이젠 영영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가 다만 해마다 자꾸 이상히 여기는 것은,
자기가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찾아 헤맨 저 위대한 임금이 왜 빨리 통치권을 행
사하여 이 갈레선에서 고생하는 자기들의 비참한 생활을 개선할 어떤 획기적 조치를 취하고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젊고 아름다운 그 과부를 눈앞에 그려 보곤했다. 이전에 그가 자진해서 이 갈레
선의 노 젓는 노예가 된 것은 바로 그 여인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불행한 운명을 구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인, 그 어머니에게 갑자기 싹튼 자신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설명해 왔다. 그리고 그 별빛이 이
여윈 얼굴을 환히 비춰도 좋다고 생각했다. 숨길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인은 벌써 오래전에 나를 잊어먹었을 것이 틀림없어. 자기 부양자를 구해준 이 낯선 이국
남자를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일찍이 다른 사내와 다시 결혼했을 테지
- 그리고 사랑의 왕국을 선사했겠지. - 그 여자거지가 헛간인가 외양간에서 자기에게 얼마큼의
동냥을 준 사람이 누구든 우선 급한 대로 자기를 도와주었기에 분명히 자기 마음을 선사한
것처럼 말이다. 여인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갔지만 믿을 수 있나.>
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칠 줄 몰랐다. 거의 삼십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여인을
생각했고, 갈수록 연모의 정은 더 깊어갔다. 갈레선의 노 젓는 남자의 억센 가슴도 그 일이
생각나면 구멍 뚫린 풀무처럼 호흡이 고통스러워지곤 했다. - 먼저 관자놀이 언저리가 어느새
희끗희끗해지더니, 이윽고 머리 전체가 백발이 되었다. 흐릿한 눈은 구멍이 난 듯이 움푹
파여 들어갔고, 무거운 사슬에 눌린 살갗은 차차 가죽처럼 딴딴해졌다.
어느 날 작은 왕이 그 노 젓는 일에서 제쳐놓이게 되니 사람들은 그를 육지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갈레선의 노 젓는 자리에는 쓸모없게 된 것이다. 이젠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육지로 옮겨지고 보니, 그 항구는 거의 삼십년 전에 그가 문제의 갈레선
에 올라 사슬에 매였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방파제의 돌 하나에 기대어 그늘에서 두서너 시간동안 누워서 바람을 쐬었다. 삼십년
동안이나 갑판 밑의 노상 후덥지근하고 숨막히는 열기에 시달려온 뒤라 그는 하염없이 그 바
람을 들이마셨다. 바다의 번쩍거리는 수면이 눈부시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는 바다의 살인
적인 잔인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미소에 다시는 유혹되고 싶지 않았다.
항구의 개들이 컹컹거리며 그의 냄새를 맡고 어깨에 발을 얹기도 했으나 그는 개들을 쫓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생명에 눈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그는 잠간씩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자기 발로 이 항구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자신의 발로 일어
서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그는 자기 발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다. 그저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누운 채 영원히 잠들었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녁이 가까웠을 때, 외모로 미루어 유복해 보이고 또 하인들이 뒤따르고 있는 폼을
보아 대단히 명망이 높은 듯한 남자가 작은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돌 옆을 자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그를 살피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작은 왕은 말없이 손만 들어 막연히 바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왔소> -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갈레선에서 왔소?> 그 사람은 이렇게 묻고, 끔찍한 듯 진저리치면서 벗겨진
복사뼈가 짐승 가죽처럼 딴딴해진 것을 살폈다. 그것은 삼십년이나 쇠사슬에 짓눌려 왔었다.
작은 왕은 역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오늘이요."
이 한마디가 그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사람이 물었다.
"당신이 자진해서 갈레선을 탔소?"
작은 왕은 허탈한 미소를 띄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아니오>라는 뜻이었다.
그 낯선 사람은 자기 하인 두 사람에게 일렀다.
"들것을 가져오너라."
두 사람은 들 것을 가지러 가고 셋째 하인은 그의 옆에 남아 있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집에서 묵으시오. 건강해질 때 까지 돌봐 주겠소."
작은 왕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는 그 낯선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이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 나오기 전에, 낯선 사람이 말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당신이 감사를 드릴 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바로
내 어머니요. 어머니는 내가 죽을 때까지, 갈레선에서 쫓겨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내 집에
데려다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내게 맡긴거요. - 난 어머
니의 유언을 뭐 좋아서 지켜온 것은 아니오.”
그의 말투는 딱딱했다.
"아마 앞으로도 내 기분은 그럴거요. 왜냐하면 갈레선에서 쫓겨 나오는 자들은 대부분 교수
형감인 진짜 도둑들이니까요. 아마 그들은 양가 가풍을 지키는 내 집보다 그들 고향의 감
옥 안에나 있는 것이 더 나을 그런 작자들이오. 하지만....어머니는 언젠가 어떤 착한 사람이
갈레선을 타는 걸 보았다고 말씀하셨소. 어머니는 그 착한 사람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하도록 약속을 시킨 것이오. 만약 당신이 이때 까지 돌봐준 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뜻을 살리는 셈이고 또 나도 어머니의 마음씨 고운 그 변덕을 이전처럼 아주 어리
석은 것으로는 여기지 않게 될 거외다.”
작은 왕은 방파제의 돌에 기댄 채 이 부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삼십년 전의 그날 아침을 생생하게 회상하였다. 그리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치 도살될 양처럼 오도카니 서 있던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 어머님께서 그러셨군요...전...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자기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그때 이미 그분이 그러시리라고 생각했답니다. 전 늘 그걸 확신하고 있었어요.
삼십년이라는 어둡고 긴 세월 동안, 그분이 틀림없이 그러시리라는 걸 굳게 믿어 왔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 선생님의 착하신 어머님 뜻을 더럽힐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그
분의 맏아드님이시지요....?”
그 낯선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렇소, 맏이노릇 하기란 쉽지 않지요. 여러 가지 귀찮은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작은 왕은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많았지만, 마침 그때 두 하인이 아무렇게나 만든
엉성한 들 것을 들고 와서, 무슨 대답을 하려던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윽고 그는 끙끙
신음하면서 하인들의 들것에 실려 갔다.
이날부터 작은 왕은 그 부유한 상인 저택의 외딴 채 골방에서 거처했다. 그 상인은 오히려
자기 어머니의 유언에 어긋나는 처사를 했고, 실상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자기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치지도 않고 누누이 공언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베푸
는 자선의 혜택을 입는 자들 중에 조금이나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성싶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모두 갈레선에서 감옥으로 갔다가 거기서 바로 시체 버리는
구덩이로 직행할 작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호상(豪商)은 참으로 냉혹한 주인이었다.
그는 출신이 비천했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 때문에 어린 시절을 곤궁하게 보냈었다.
그후 갖은 고생을 하면서 입신출세를 하였음이 틀림없는데도, 그의 재산과 성공이 사람들의
입을 막아, 그의 아버지가 어떤 갈레선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일이며, 그가 전에 어머니에게
약속한 바를 지금 억지로 지키고 있는 내력을 얘기하지 못하게 했다.
작은 왕은 이 모든 사연을 그 집 하인들에게서 듣고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한편 그는
마치 그림자 모양 외딴 채 골방에서 조용히 지냈고, 그런 가운데 조금씩 차도를 보이면서 다시
원기를 회복해 갔다. 그는 온전히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 옛날 그가 스스로 갈레선의
사슬에 매이면서까지 자신의 애정을 보여준 그 여인은 이미 죽었고, 이제 그에게 생각나는
것이라곤 그 별과 저 위대한 임금뿐이었으니,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작은 왕이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하기 위해 그 부유한 상인한테 갔을 때 그는
마지못해 칭찬의 말을 했다.
"당신은, 지내고 보니 전에 내 집에서 신세를 진 작자들처럼 꾀를 부리며 약아빠진 악한
근성을 보인 일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구려, 예외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언제나 그래야죠."
그리고 다시 덧붙여 말했다.
"내 어머니 때문에 난 그러기를 바라는 거요."
"나도 그래요."
작은 왕은 그의 말에 동감이라는 뜻을 표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 부유한 상인은 어안이 벙벙해서 작은 왕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왕은 이미 등을 돌리고 그의 앞을 떠났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예전에 자기가 갈레선에 몸담기 전에 더듬어 왔던 큰길로 다시 나섰다. 그는 오래
전부터, 문제의 별이 마지막으로 밝게 빛나면서 그 긴 황금빛 꼬리가 땅에 닿았던 장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되살아 난 과거의 버릇대로 그는 그 방향으로 길을 재촉했다.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이러한 습관을 되살림으로써 길을 제대로 찾아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길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쪽으로 향하는 그 도로가
특별히 사람들이 몰려갈 만한 어떤 목적지로 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길을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고 그중에 떠돌뱅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 반대로 대부분 유복한 사람들과 소시민들이었고, 그들은 화창한 봄날씨에 가정마다 온 식
구가 함께 길을 떠나, 남쪽의 어느 큰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그 도시에서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축제 참가자들의 인파 속에는, 하릴없이 축제의 환락이 벌어지는 곳은
어디든지 으레 나타나기 마련인 무리, 곧 남녀 거지들과 요술쟁이, 그리고 장사아치들이 상
당히 많이 섞여 있었다.
작은 왕은, 끙끙거리며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나가고 있는 사람을 이따금 앞지르곤 했다.
아마 일생의 마지막이 될 이 기회에 저 번화한 대도시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자기가
목적지까지 배를 곯지 않고 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동냥을 거두기로 했다. 어쩌다 건장한
뜨내기들이 그를 앞지르고는, 거친 경쟁자로서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그 우쭐대는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는 저들보다 훨씬 뒤늦게 행인들의 동정을 끌어 동냥
을 거두기 시작했을 터인데도 말이다.
길을 가다 보니, 유달리 한 노파의 모습이 온종일 그의 시야에서 어른거렸다. 결코 도봇
장수는 아니고 거지인 듯했다. 그가 처음부터 짐작했던 대로, 노파는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부담없이 그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있는 힘을 다 내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 그런데 그 속도가 그 자신, 바로 작은 왕의 걸음걸이와 똑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온종일 그의 눈에 띌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또 그가 쉬면 같은 시간에 노파도
똑같이 쉬고, 그가 숙박을 하면 노파도 역시 같은 곳에서 묵는 듯했다. 그가 길을 떠나면
노파 역시 같은 시간에 출발했다. 기운도 비슷하고 길가는 버릇도 비슷하니, 아마 피로를
느끼는 것도 똑 같았을 것이다.
사흘 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같은 간격을 두고 길을 가고 있는 그 노파를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자신의 그림자가 저만치 그를 앞장서서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름에 잠겨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의 마음 속에 조금은 남아 있었던 호기심이
움직여, 한번 저 늙은 여인을 따라잡고, 어떤 사정이 있느냐고 물어 확인해 보고 싶은 유혹
을 여러번 느꼈다.
물론 그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노파가 걸음걸이를 자기보다 늦추어 주어야 그럴 수 있다.
잠시 뒤에 그는 피곤해서 마음을 바꾸고 이 수수께끼를 그대로 덮어 두기로 했다. 그는
생각했다.
<아마, 난 또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잘난 체하려는군, 인생에서 겉꾸밈에 지나지 않을거야,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지. 하지만 사랑은 확실히 가장 아름다운 것이야 - 그 대신 가장
무서운 교훈을 주지.>
이튿날이 되니, 목적지인 그 대도시가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왜냐하면, 동쪽 혹은 서쪽
에서 오는 길이 그가 걷고 있는 대로와 합치는 목마다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고 그들은 한결
같이 남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처음으로 그
여자거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웬일인지 그 인파가 빽빽하게 몰려들수록, 우리의
주인공 넷째 왕은 자꾸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2, 3일 동안 친밀하게 자기 가까이
있다가 이제 다시 사라지고만 그 여자거지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서운했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얼굴이 그리웠다. 마치 누가 그 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빼앗아 간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제 좀 쉬면서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 궁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
했다.
오후가 되니, 멀리 네 개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도성의 거대한 신전이 바라다보였는데 그
둥근 지붕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신전을 바라보면서
환희와 찬미의 소리를 떠뜨렸다. 그리고, 어둡기 전에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 걸음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작은 왕만은 천천히 걸었다. 그는 저녁 때 도성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해질녘에 성문에서 가까운 언덕 위의 작은 올리브나무
숲이 눈에 띄자, 그는 큰 도로에서 벗어나 좁은 오솔길을 힘겹게 헐떡거리며 걸어올라갔다.
그 숲속의 나무 아래서나 아니면 동산바치의 오두막에서 밤을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갈수록 그곳은 그의 고향을 생각나게 했고, 동시에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부
유한 사람들이 아마 여기에 전원이나 농장을 갖고 있는 듯했고, 울타리 안은 틈새기없이
울창하고 구석구석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 작은 왕은 관목숲 사이로 어떤 그림자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얼핏 본 듯했다. 그러나
작은 나뭇가지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방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만약 이 그림자가 그 자
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리는 떠돌이 나그네가 아니라면, 흔히 고적한
장소에서 있을 수 있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동산바치가 낮에 이용했을 샘물을 발견하고, 그는 한참동안 그 물을 마시며 시원히
갈증을 풀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여러개의 큰 나팔들을
한목에 불어제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잔 저녁 하늘에 그 나팔소리는 멀리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축축한 샘터 주변의 수목들 사이에서는 모기떼의 윙윙거리는 소리
만이 높아졌다가는 낮아지고, 낮아졌다가는 높아지곤 했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귀뚜라미
들이 울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 자리에 눌러앉으려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다른 자리를 찾아볼까 궁리하며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널찍하게 돌출하고 있는 바위 사이에 난 좁은 동산길을
내려갔다.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이 밤을 바위를 지붕 삼아 이슬을 피하면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찾아간 바위의 우묵 들어간 곳에는 이미 사람이
들어앉아 있었다. 작은 왕은 놀랐다. 거기에 한 노파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고, 마치 돌을 다듬어 만든 조각처럼 꼼짝도 않고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얼른 물러가려고 했다. 하지만 노파가 벌써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
에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는 자기가 도망하려고 했던 것이 우습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 노
파도 따지고 보면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불청객이었기 때문이다. 그 노파는 풍상과
세파에 단련된 늙은 여자거지였다. 노파는 어두워진 도성의 욱시글거리는 군중을 피하여
여기서 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작은 왕은 이 할머니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늘 그래온 버릇대로 자기 자리를 잡
았다. 등을 기댈 수 있는 편편한 바위를 찾아,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꾸벅꾸벅 졸기도 하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노파가 입을 열어 갑자기 수다스러워지면서 작은 왕에게 구걸하는 방법을 캐묻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장 좋은 자리가 있으며, 어찌하면 많은 동냥을 얻을 수 있고, 또 사람들의 동
정을 사기 위해 몹시 허약한 체 겉꾸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그의 생각에는, 언제,
어떤 모양으로,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관헌(官憲)이 까다로운 단속을 하며, 한편 사람들의
마음을 자못 감동시켜 자비를 베풀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냐고도 물었다.
작은 왕은 그 숱한 질문에 대답할 말을 몰랐다. 그는 이 노파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만큼 경험이 풍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곧 잠들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는 몰랐지만, 노파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깨웠을 때는 정말 화를 냈다. 노파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작은 왕은 노파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들어앉아 있는 바위 밑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유달리 강하게 울리어, 마치 적어도 세 개의 목소리가 힘껏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느냐구요?"
작은 왕은 아직 졸음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멀리서 왔지요..."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갈레선에서 실려나와 상인의 집에 수용되었던 그 도시의 이름을
댔다.
노파는 입을 다물었다.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노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할멈은 어디서 왔소?"
작은 왕이 물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노파는 낄낄 웃으며
그렇다면 영감은 아마 조합의 한 사람이 아닌 것 같구려? 하고 물었다.
어떤 조합인가? 작은 왕은 궁금했다. 법이 명하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행의 기회를 마련
해 주는 그런 조합이란 말인가.
작은 왕에게는 그 말이 거지로서는 야릇하게 거드름 빼는 선언으로 여겨졌다. - 그는 잠시
뒤에 말없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난 그런 조합의 한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가만있자! 내 꼬락서니를 보면 나도
거지임에는 틀림없는데....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바로 그 선행의 기횔르 가져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나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
게는 인생살이가 그렇게 여겨질거야.>
노파는 어둠 속에서 혼자 낄낄 웃었다.
"우리도 그들에게 뭔가 주어야 한다오."
노파는 늙은이 특유의 거슬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작은 왕은 놀라서 물었다.
"거지로서 말이오? 남에게 무엇을 준다구요?"
노파는 대답했다.
"그래요.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이라곤 없는 법이라오. 자선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대가를 받으면 흐뭇해하지요. - 인간이란 누구나 사실
그렇게 보답을 바라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요.
아무런 보답도 할 수 없는 빈손이나 무딘 마음에도 뭔가 베풀어 주시니까요.”
작은 왕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정신이 들었다. 그는 물었다.
"거지가 자기한테 동냥을 준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단 말이오?"
노파는 침착하게 말했다.
"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주어야죠."
"모든 걸 가지고 있다면, 도대체 왜 빌어먹는단 말이오? 구걸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오!”
작은 왕은 언짢은 말투로 물었다.
노파 쪽에서 입을 다물었다. 작은 왕은 이 이런애같이 유치한 할멈의 말문을 막고 논쟁
이겼다고 성급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할멈은 입을 열었다.
"아, 영감은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군요. 분명히 나보다 젊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요.
난 얼마 전에 영감을 보았지요. - 들어보세요. 물론 거지가 자기에게 동냥을 준 사람에게
같은 것을 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 자선한 사람이 돈보다도 꼭 필요로 하는 다른 뭔가를
줄 수 있답니다. 가령 따스한 미소도 좋고 다정한 말 한마디도 좋은 거예요. 어쨌든 그 사람
의 마음과 생각을 밝게 해주고 더 자신을 갖게 하는 그 무엇, 혹은 그의 양심에 위로가 될
만한 그 무엇을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은 많지요...”
"많다구요!"
작은 왕은 이렇게 되뇌고 어둠 속에서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내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노파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난 언젠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 버린 일이 있어요. 그리고....아, 그땐 나도 젊었지요!”
작은 왕은, 그 노파가 옛날 젊은 시절에 누군가의 동냥을 얻기 위해 자기 몸을 내맡긴 이야
기를 털어놓으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걸 더 캐어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노파 자신이 입
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어두워서 노파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윽고 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는
뜻밖에 가까이서 퍽이나 낭랑하게 울려 왔다.
"난 영감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요. 영감은, 내가 예전에 많은 동냥을 얻기 위해서 어떤
사내에게 몸을 판 얘기라도 할 줄로 알고 있지요. 천만에! 물론 난 사내들과 관계를 가져
본 적도 있고 애들도 낳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돈 때문에, 혹은 친절히 날 돌보아 주었다고
해서 그래본 적은 없다오. 그런 얘기는 안하겠어요. 아주 어리석고 죄많은 짓이예요.
사랑이란 그 두 가지를 얼버무리려는 핑계죠. 그런게 아니라 난 그보다 훨씬 많은 선물을
했어요. 하지만 틀림없이 나는 오늘도 선물을 되받고 있어요.”
작은 왕은 얼떨떨해서 되물었다.
"그래, 할멈은 무엇을 선사했소? 그리고 오늘도 선물을 되받고 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오?"
바위굴 속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작은 왕은 노파가 앉아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어둠
속을 긴장된 눈으로 응시하였다.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낭랑하게 울렸다.
"거의 삼십년 전 일이지요. 그때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친절하게 도와준 어느 남자에게 나는
내 마음을 선사했답니다. 정말 친절하고 자비로운 분이었어요. 그 당시 나는 젊고 어리석
어서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요. 그때 나는 그분에게 내가 한 말을 꼭 지키겠다고 말
했지만, 그분이 그걸 정말 믿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요. 하긴 젊은 여자거지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래요, 나 자신 그분이 그걸 믿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지 않았으니까요. 그
러나 나는 분명히 그분에게 내 마음을 드렸어요. 그분은 곧 말을 타고 떠나가 버렸지만
말이요. 그후 난 생각을 되돌려 본 적이 한번도 없답니다. 설령 죄가 될 만한 실수를 하였
을 때도 말입니다. 그 후로...정말 그후로는 난 대단히 행복했어요.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
는 친절하고 인자한 사람이 한분 이 세상 어디엔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흐믓했어요.
나는 매일 이 행복을 누리면서 삼십년 동안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분에게 내 정성을 바쳐
왔어요. 그러니까....아무것도 잃은 게 없지요.”
늙은 여자거지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몹시 지쳐 있었다. 작은 왕은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불현 듯이 노파의 말에 동의했다.
"암, 옳은 말이오. 아무것도 잃은 게 없지요. 행복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 자기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빨리 혹은 얼마나 늦게
찾아오는지도 모르고 있지요."
작은 왕은 노파가 자기 말을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기뻤다. 그는 추억을 더듬어
옛날의 그 작은 헛간인가 외양간인가를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거기서 이 여자를 처음
만났었다. 그때 이 여자는 어린아기를 낳았고, 그 형편이 하도 딱해서 그는 고향에서 가져온
아마포로 한필을 아기의 강보와 기저귀로 쓰도록 내주었다. 그리고 벌써 거의 삼십년이 흘러
간 것이다! 이젠 여자도 늙은 할머니가 되었고, 그도 연로한 영감이 되었다. 그후 갈라져
두 사람은 각기 먼길을 헤매었다. 그러나 서로 모르는 사이에 결국 같은 길을 더듬어, 같은
곳을 향해 왔던 것이다.
틀림없이 이 할머니는 그가 온종일 자신의 그림자처럼 뒷모습을 눈여겨 보아온 그 노파였다.
그는 자기가 노상 잃기만 한다고 생각해 온 것을 실상은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그 자신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삼십년 동안이나 무엇인가 간직해 왔었다. 그것은 이 여자가 그때 그 헛
간에서 그를 칭송하던 그 마음의 왕국이다....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나 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온세상의 영원한 대왕인 그분의 봉신이 되고 러시아 황제의 관을 쓸 일만 노상 공상해 왔으니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었는가!
작은 왕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굴밖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마음은 노파에게 가
있었다.
<틀림없이 노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어. 하긴 나도 노파가 그런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노파를 알아보지 못했겠지.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날마다 나에게 정성
을 바쳤다고 했지...>
그는 노파의 얘기 가운데서 이 말이 퍼뜩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비록 왕관이나 영토는
없지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유하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은 가물가물해지며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지, 아마 지쳐서 다시 이따금 깜박깜박 졸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때 그는, 가까이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움찔 놀랐다. 너무 시끄러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노파도 깨어났다. 그 소음은 마치 온갖 음향이 하나의 조개껍질 안으
로 몰리어 몇배나 크게 울리듯, 그들이 앉아 있는 바위 밑 자리를 굉굉하게 울려댔다.
"쯧쯧, 이 큰 도성은 언제나 이렇게 시끄럽단 말이야! 아직 밤중인데 미친 듯이 떠들게
뭐람!”
그는 노파가 화를 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작은 왕은 잔뜩 긴장해서 앉아 있었다. 여차하면 언제든지 숲으로 도망할 작정이었다. 그
러나 그 시끄러운 소리는 그들이 있는 동산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왕은 흥
분해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마
순찰대가 근처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순찰대가 찾고 있는 사람이 이곳 동산에 있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국외자(局外者)로서 한시름 놓고 차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산들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이슬이 방울져 땅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
왔다. 솨솨 - 아주 나직하게 들려 오는 이런 소리들이 밤의 고요를 더욱 깊게 했다. - 작은
왕은 어느덧 다시 잠이 들었다.
날이 환히 밝고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기 혼자뿐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
어느 틈엔가 노파는 그를 남겨두고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그는 노파가 떠나는 기척을 전혀
몰랐다. 너무 깊이 잠들어서, 옛날 젊었을 때처럼 고향 땅의 그 향기좋은 과실주 크바스와
절인 오이를 꿈꾸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할멈의 발자국 소리를 아마 그 나직한 밤의 소리로
여겼을 것이다. 어쨌든 할멈은 가버렸다. 할멈이 옆에 없는 것이 어쩐지 허전했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 큰 도성의 거리에는 틀림없이 여자거지가
수많이 앉아 있을 터이니, 그 숱한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
이었다. 그런데 왜 그 할멈을 또 만나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제 모든 것을 알았고, 오늘
도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바치는 그 정성어린 선물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의 병든 심장이 무지륵한 게 날씨가 뜨겁고 무더우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동산의
나뭇잎들과 바위들 밑에 감도는 습기찬 열기가 그의 얄팍한 가슴을 짓눌러 와서 호흡이
답답해졌다.
동산 건너편 도성의 큰 건물 원개(圓蓋)들과 숱한 가옥 지붕들 위엔 안개 같은 연기가 나붓
거리고 그 윤곽들이 가물가물 흔들려 보였다. 작은 왕은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현기증이 났다.
그곳을 떠나려는 결심을 하니 가슴이 무거워져, 될 수있는대로 시간을 끌고 이 높직한 동산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가 천천히 동산 언덕을 내려와서 큰 도로로 나가는 오솔길을 어기죽어기죽 걷고 있을
때에는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그 도로는 그가 어제 온종일 걸어왔던 길이요, 바로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아래 도로상의 혼잡은 아마 어제보다 더 심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 날 해가 지는 그 시각부터 대축제가 시작되고, 그러면 우선 모든 신도는 조용히
안식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일 늦게 당도한 대상(隊商)들이 낙타들을 채찍질 하며 급히 몰아 흔들흔들 성문을 향하고
있었다. 성전(聖殿)에서 제물로 바쳐질 양들도 음매 - 음매-소리를 지르면서 총총걸음으로
성문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몸뚱이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빽빽하게 떼지어 가는 꼴이 마치
움직이는 털 양탄자 같았다. 짐승이 없는 데는 사람들이 밀려가고 있었다.
작은 왕은 큰길로 들어서 인파에 휩쓸리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마치 맷돌에 짓빻이
듯이, 발을 놀리지 않고 가만 있어도 성벽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문의 마름돌 아래서
거의 고꾸라질 뻔했는데, 얼떨결에 앞에 있는 나귀의 꼬리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밀려오는
뒷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짓밟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때, 죽은 벗 와니카, 언제나 자기를 안
전하게 등에 태우고 여행을 했던 애마 와니카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예전의 지나간 일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늙고 지친 머리는 현재 이 도성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보는 것마다 신기하여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떠드는 갖가지
소리들이 어지럽게 그의 귓전을 때렸다. 군중 속의 몇몇 무리가 계속 되풀이해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군중은 어떤 왕에 관해 외쳐대고 있었다. 이 왕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그리고 골목들과
거리를 지나 밀치락 달치락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는 군중이 아마 이 왕에게 경배하러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왕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건지, 러시아에서 온 넷째 왕만이 모르고
있었다.
점점 불어나는 어중이떠중이 군중의 흐름 속에 그도 휩쓸리어 한참동안 어울려서 도성
안쪽으로 급하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의 기운이 말을 안들어, 기회를
봐서 얼른 어떤 문길(門道)로 비켜났다. 그는 담에 기대어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자기가 허약해졌다는 것을 여태까지 몰랐었다. 골목을 달리며 미친 듯이 군중이 외
쳐대는 소리도 몹시 난잡한 소동소리로만 들렸다. 그는 눈뜨고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악의(惡意)가 점점 더 심해져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했다.
<아마 폭동일게야. 하긴 군중의 태도에서 호의와 증오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이는
법이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거야....헌데 그 문제의 인물은 도대체 어떠한 왕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덮쳐오자 그는 숨이 막혔다. 심장의 고동이 멎은 것 같고, 현기증이 나면서
머리가 빙빙 돌았다.
"저들은 가장 위대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자로 깍아내리려 하지."
그는 귀익은 목소리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얼떨떨해서 두리번
거리며, 이 말을 한 사람을 한참동안 찾았다. 그러다가 자기 발치 가까이, 문길에 들어서 있
는 그 늙은 여자거지를 알아보았다. 할멈도 이리로 피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할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다시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마디 말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할멈, 방금 뭐라고 했소? 그게 누구 이야기요?"
그의 생각대로 노파는 비웃는 웃음을 띄고 그를 바라보았다.
"영감은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큰길을 내내 걸어 오면서도 얘기를
못들었어요?"
그는 잠자코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방망이질을 했다.
"이 백성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에도 적혀 있고 예언자들도 말해온 임금님을
만난 거예요. 그분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려냈지요. 그런데
이 백성은 이방인들에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졸라대고 있는 판국이라오.”
"할멈은 어디서 그걸 들었소?"
작은 왕은 이렇게 물으며 문길에서 몇 걸음 걸어나왔다.
노파는 너그러우면서도 좀 얕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냥도 안받았을 뿐 아니라 아는 것도 없다오."
작은 왕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고
예언자들도 선포 해 온 왕이라니, 아니 그분이...
"그 왕의 연세는 얼마요?"
그는 명령하듯이 노파에게 다그쳐 물었다.
노파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분의 나이요? 아마 서른 살 가량이라고 하지."
"서른 살? 할멈 방금 서른 살이라고 했지?"
작은 왕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되물었다.
노파는 끄덕였다. 노파의 머리는 작은 왕의 눈앞에서, 마치 얼마 안가서 멎어버릴 시게추
처럼 느릿느릿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그 할멈의 탓인지, 아니면 자기 눈의 착
각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서른 살, 서른 살이라구."
그는 그 서른 살에 이 세상과 자기 인생의 가장 중대한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기나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노파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서른 살이라, 그러니까......그건 바로 그때였군......."
그는 완전히 자기를 잊고 다음과 같이 말의 줄거리를 세웠다.
"당신이 헛간인가 외양간에서 애기를 낳고 내가 갖고 있던 아마포로 강보와 기저귀를
만들어준 건 그때가 아니오?"
노파는 눈을 크게 뜨고 이가 빠진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톱이
길고 쪼글쪼글한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노파는 얼마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아주 역력했다. - 틀림없이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녔어요. 언제나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녔단 말입니다."
작은 왕은 어물어물 말하고는, 군중보다 뒤에 처진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 도성
안쪽을 향해 서둘러 갔다. 단 한번 그는 뒤돌아보았다. 노파는 맥없이 문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푹 숙이고 두손으로 포도(鋪道)의 돌을 짚고 있었다. 마치 돌이 된 듯 거기
웅크리고 하염없이 자기 운명을 되씹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멈이 앞으로 쓰러지며
그 이마가 제물에 힘없이 돌에 부딪쳤을 때, 그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
순간 그는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저 가장 위대한 임금의 생각뿐이
었다.......
.....골목을 거쳐 큰길을 건너고 광장을 지났다. 어디든지 자꾸 갔다.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너무 늦었어 - 도처에 그 엄청난 흥분이 아직 감돌고 있었으나, 마땅히 일어날 수 밖에 없었
던 그 이상한 일은 이미 눈에 띄지 않았다. 벌써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몰려 있어 그를 당황케 하고 방향을 섞갈리게 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엇
비슷하여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임금님은 어지 계시오...? 어디로 가셨소? 어디로?"
마침내 그는 옆에 있는 아무나 붙들고 헐떡거리며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그 왕을 어디로
인도하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 낯선 사람은 이 실성한 늙은이의 뚱딴지 같은 물음에 깜짝
놀라면서,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작은 왕은 그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도성 밖을 향해 멀리 걸어나갈수록
자기가 올바른 인생노정을 , 그러니까 자기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찾아 헤매었던 그 무엇의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이 한결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쳤다가 뒤에 물
거품을 남기듯이, 심상치 않은 행렬이 지나간 지 얼마 안되는 길가에 사람들이 아직 늘어서
있었다.
작은 왕은 겨우 머리를 들었다. 이젠 아무런 안내도 필요없었다. 그는 자기가 틀림없이
그분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일이었다. 어떤 집 안으로 피하여 울고 있는 부인들을 보기도 하고 또 제 정신이
아닌 노인들을 보기도 했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어정거리는 구경꾼들과,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덩달아 몰려든 무리에
뒤섞이기도 하고, 거칫거리면 피하기도 하면서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임금님.....! 그분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성경에 똑똑히 기록돼 있고, 예언자들이 또한
그분이 오리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은 엉클어졌다.
<그런데 이제 이 백성이 그분에게 반항하다니! 삼십년 전에 하늘의 별이 그분의 강생을
알려주었고, 또 그렇기에 그분을 찾아 뵙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저 동방의
세 박사가 길을 떠나왔고, 바로 자기자신도 머나먼 러시아 땅을 떠나왔는데, 그 임금님을
물리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이런 일이....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이제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성의 가옥들을 뒤로 하고 걸어나오니 너른 들이 펼쳐지고 밋밋한 언덕이 저만큼 바라다
보였다. 완만한 오름길이었다. 갈수록 사람들이 뜸해졌다. 모두 아래의 도로에 붙박힌 채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사 작은 왕은, 자기가 저 대도시의 '짐승송장을
대다버리는 구덩이’언저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정신이 들고 보니, 저 위 -
언덕에서는 몇몇 노예들이 커다란 십자가를 세 개나 세우고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세
사람을 거기에 매달 것이었다. - 이 세상의 다른 어느 곳도 아니고 바로 저 위에 그가
찾아 헤맨 임금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언덕으로 오를 것인지, 아니면 그만둘것인지, 혼자 깊이 궁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실상 그는 쇠약할 대로 쇠약했고, 또 거기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잠시 눈앞이 아찔
했다. 그는 주춤하며 비틀거렸다. - 그러나 이윽고 구부정한 자세로 발을 떼놓았다. 헐떡
거리며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이 어떻게 옮겨지고 있는지 그는 몰랐다. 이것이
....이 걸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삼십년 전에 처음으로 떼놓기 시작하여 오랜 세월 걸
어온 그 여로의 마지막 몇 발자국이다. 그는 너무 늦게 당도했는가? 바로 지금 여기서도 너무
늦었단 말인가?
러시아에서 온 을씨년스러운 넷째 왕은 머리를 똑바로 쳐들고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가장 쇠약해 보이는 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썩어가는
뼉다귀들이 발길에 채여 비트적거려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쩌다 그의 한쪽 발이, 해골바가지
에 빠지는 것도 상관치 않았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 목덜미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꼭 한번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다급하게 심장있는 쪽의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무엇에 찔리는 듯 지독히 아팠기 때문이다. 태양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그의 입술은, 그가 옛날 돌아다니다가 여러번 공짜로 얻어먹곤 했던 밭두둑의
들포도 색깔처럼 푸르스름했다.
점점 걸음이 느려지기는 했지만, 그는 쉬지 않고 걸어올라갔다. 걸음이 자꾸 무거워지면서
겨우 발을 떼놓곤 했다. 그는 가운데 십자가를 놓치지 않고 꼭 지켜보기 위해 머리를 꼿꼿이
들었다. 천천히 다가가면서 몸을 가누려고 멈춰설 때마다, 그는 그 주님을, 가시관을 씨신
주님을 더 뚜렷이, 더 황감한 마음으로 볼 수있었다. 그분은 바로 그 자신의 왕이요, 모든 시대
의 모든 겨레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분이 삼십여년 전 어린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찾아
뵙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 땅을 떠나왔었다.
그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이가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건 몰랐다. 주님은 그 고통 속에서 그저 한번만 그를
바라보시면 된다. 주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그를 바라본다는 것 - 그렇게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은
작은 왕의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한순간 그는 더할나위 없는 행복감이 충만한 고요를
느꼈다. 그 고요 속에서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 이 순간 그는 조용히 앞으로 쓰러
졌다. 그리고 뭔가 쇠갈퀴 같은 것이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그 고통은 그의 온 가슴팍을
좨치었다.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갖다 드리려고 했던 것들을 죄다 없앴습니다.>
작은 왕은 부끄럽고 몹시 괴로웠다.
<황금, 보석, 아마포, 모피, 그리고 어머님이 단지에 가득 채워주신 꿀까지도 - 모두 쓸데
없이 낭비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그의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었을 때, 불현 듯이 여자거지의 마음이 생각났다. 그 마음은
여인이 그에게 왕국으로 선사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자신의 마음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자기가 받아본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썩고 있는 뼉다귀들 사이로 줄기를 뻗어 저녁
하늘에 향기를 뿜고 있는 야생 백리향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주님, 저의 마음을, 저의 마음을....그리고 저 여인의 마음을....우리의 마음을 받아 주시겠습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