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작은 연구 - 변 데레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작은 연구 영성 변 옥영
1.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나의 실천 (루카 복음을 중심으로)
루카 6,27 (마태 5,44)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29 (마태 5,39) :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루카 6,31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루카 10,27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루카 10,29 : 착한 사마리아의 사람
루카 12,33 :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루카 14,13 :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10,29 ~37)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 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의 관찰 판단 실천
예수님의 관찰
성문화된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을 하는 율법 교사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고 그들의 잘난체함을 보고 계신다.
예수님의 판단
사제와 레위는 평생을 하느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화를 통해 진정한 이웃사랑은 사제와 레위가 왜 강도 만난 동족을 돌보지 않았는지 동기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힘닿는 데까지 무조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며, 사마리아사람의 사랑을 실천 하는 모습에서 성부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로 하셨다.
예수님의 실천
잘 난체하는 율법 교사를 부르시어 세 사람 가운데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물으시며 가서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다.
나의 관찰 판단 실천
나의 관찰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과 고아, 보잘 것 없는 이, 환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 하자는 내용의 글귀와 시설들을 볼 수가 있다.
병원에서는 어떠한가?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제대로 작동이 되어 불편함은 없는가? 길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들을 위한 침식 등은 잘 갖추어있는지, 교회에서의 이웃사랑은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
우리는 고액의 치료비에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삶을 포기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겨울이면 길에서 죽음을 맞는 노숙자들에 관하여 들을 수 있다.
나의 판단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어떠한 성질의 고통이든 간에 무관심하지 않고 그 사람 곁에 멈추어서는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동정심과 자비심은 상처 입은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으며 그는 거기에 자기의 온 마음을 쏟아 넣으며 물질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는다. 즉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실천
오래 전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안나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당신의 전 재산을 팔아 재소자와 출소자들을 돌보았다. 자식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단칸방에서 그들과 함께 살다가 가셨다. 늘 그러한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나 자신 할 수 없는 이유를 거창하게 만들어 합리화 시킨다.
너무 거창한 계획은 하기도 전에 나를 할 수 없는 이유로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한다. “가서 자비를 베풀어라” 하신 것처럼 나의 가족 가까운 이웃 안에서 작은 실천부터 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다.
2.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예수님의 실천 (마르코 복음서 중심으로)
마르1,13 :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
마르14,36 :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14,41 : 이제 되었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마르14,61 :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마르14,65 : 예수님을 조롱하다.
마르15,16~20 :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마르15,21~32 :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마르15,34 : 저의 한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마르14,32-42)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의 관찰 판단 실천
예수님의 관찰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번민에 휩싸인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세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자고 있다. 제자들의 게으르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고 계신다.
예수님의 판단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곁에 가까이 있다. 그들에게 풍랑과 고통이 따르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먼저 찾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해결사이고 또한 그들의 보호자이시다. 곁에서 듣는 좋은 말씀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특은이라 여기고 영적 건강을 위한 기도 생활은 게을리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 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깨어 기도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까지도 내어 놓으시는 성부의 사랑을 일깨워주시기로 하셨다.
예수님의 실천
죽음의 공포와 번민 앞에서 죽음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원을 하시면서도 그러나 아버지의 뜻 데로 해 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앞세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르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하시며 채근하신다.
나의 관찰 판단 실천
나의 관찰
우리는 잘 사는 나라가 되기 위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을 우리들의 손으로 뽑는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근래의 용산 사건, 나영이 사건 등은 살기 어려운 저소득층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정부에서는 시민들이 참여하여 목소리를 크게 내야만이 법과 제도를 핑계 대며 잘못이 아닌 미안함을 시인하는 정도이다.
교회에서는 어떠한가? 서로 앞 다투어 사목위원, 총회장, 등 앞자리에 나아가기위해
서로를 비방하고 흠집 내기에 바빠 공동체 안에서의 이웃 사랑과 하느님사랑은 뒷전으로 밀려 난지 오래이다.
나의 판단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버을 따로 데리고 가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제자들이 달아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강건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공권력을 집행하는 자들이 국민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몸까지도 내어놓을 만큼 국민들을 사랑 한다면 비리와 부도덕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뽑힌 사람들이 말씀을 읽고 실천하며 기도한다면 그 자리가 섬기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영적인 나약함 때문에 공동체를 분열 시키는데 그들이 앞장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어 냉담을 하게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실천
당신 아들의 죽음의 절규 앞에서도 인간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내어놓으시는 성부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성자의 아버지에 대항 사랑과 신뢰.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계속 채근하시는 그 분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영적으로 강건해질 것이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처럼 성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분의 뜻을 먼저 찾을 것이다.
결론
복음서에는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이 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12‘29~31)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