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릴로1004 2010. 6. 26. 17:40

눈 맞춤


좋은날 아침입니다.

 

요즈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그루, 집안의 강아지조차도

아무런 사심없이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더욱이 한 사람, 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모든 대상은 그 자리에 있는데 저의 선입견이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모든 대상은 저의 순수한 시선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저는 늘 일방적인 저의 시선만을 생각하며 바라보았습니다.

풀도 눈이 있고, 꽃 한 송이도 눈이 있습니다.

눈을 발견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지요.

오래된 시계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계에는 깊은 사연이 감겨있습니다.

제가 조용히 바라보니 그 시계는 오랜 사랑의 사연을 말해줍니다.

한 책이 책꽂이 꽂혀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먼지를 털고 책장을 넘기니 옛 서향을 피웁니다.

낯선 얼굴도, 낯선 꽃도 사실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사연이 마음에 잠겨있습니다.

그 태고의 사연이 오늘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새로운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만나왔는데 새로운 대상을 만난다고 합니다.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우리는 낯익은 사이입니다.

이미 그의 모습이 제 눈동자에 새겨져있습니다.

오늘 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난을 바라보기 전에 난이 이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난의 향을 맡기 이전에 향이 저의 체취를 맡았습니다.

제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려움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풀 한포기와 꽃 한 송이에게 저의 시선이 어떤지.

사물이 저의 시선과 손길을 어떻게 느낄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익숙하고 너그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 눈만이 낯설게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세상과 제대로 눈 맞춤 해야겠습니다.

창 밖에 숲이 숨을 내쉬고 제 숨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합니다.

한 밤의 숲이 그렇게 말을 겁니다.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