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글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주님/ 박완서
시릴로1004
2010. 7. 27. 17:08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주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18,19-22) 글 : 박완서 저는 오십대 중반에 비로소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을 만한 스승으로 좋아한 지는 오래되었는데도 영세받는 게 늦어진 건 아마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예수쟁이'라고 불렀고, 가끔 가톨릭을 따로 불러야 할 때는 '천주학쟁이'라고 했지요. 요새도 가끔 애칭 삼아 그렇게 부를 때가 있습니다만 그때는 야유와 혐오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라도 말이 청산유수로 많거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다른 위선적인 사람을 보면 예수쟁이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결심이 선 후에도 몇 년을 더 망설인 것도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나보다는 내가 예수쟁이가 된 걸 남이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그게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세받은 지 십 년이 넘고서야 남이 예수쟁이나 천주학쟁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보다는 내가 어떤 예수쟁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가 본받을 만한 스승이 아닐까 하는 정도가 제가 그리스교에 호감을 갖기 시작한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된다는 건 단순한 호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엔 그것을 잘 모르다가 이제는 조금 알 것입니다. 만약 지금 예수님께서 저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아빠처럼 생각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아빠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아빠라는 말 속에는 남다른 친밀감과 어리광이 함께 포함돼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아직 어른이 안 됐다는 미성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건 아직 신앙적으로 어리고 미숙한 저에게 딱 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아빠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편해집니다. 제 마음에 안 드는 천주학쟁이, 예수쟁이도 제 자매요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롱이조롱이하는 말도 있듯이 여러 형제자매가 제각기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동기간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미운 점만 골라내어 헐뜯는다면 그 형제라고 나를 좋게 볼 리가 있겠습니까. 아빠에게 서로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식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슬픔일까요. 자식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효도 중 으뜸은 동기간 끼리 우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라고 합니다. 아무리 반목하고 싸우는 형제간이라고 해도 아빠 눈에 밉거나 쓸모 없는 자식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세속의 부모도 그러하거늘 사랑이신 예수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빠,동기간 눈의 티끌을 보기에 급급하여 제 눈의 들보도 못보는 이 미련한 자식을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