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타스 우리의 사명 - 이동호 신부 교리신학원 부원장 -
카리타스, 우리의 사명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의 이름이 'DEUS CARITAS EST(하느님은 사랑이시다)'였습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의 회칙으로는 너무 '말랑말랑한' 제목이어서
약간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었는데,
회칙을 읽으니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가장 복잡한 상황에서 짚어주셨습니다.
모두 42개 항목으로 구성된 이 회칙에서 여덟 가지 성찰거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찰1. 회칙의 취지; 종교 갈등의 대안인 사랑 실천
최근에도 인류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테러를 목격하고 있다.
9.11이 그랬고,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의 아프간 피랍 등이 그러했다.
종교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바꾸어가며 여전히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포된 이 회칙은 사실 '애덕'에 관한 첫 번째 회칙이다.
성찰2.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도 아니고 고결한 사상의 최종 종착도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만이 바로 그리스도인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나누어 주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 된다.
성찰3. 에로스와 아가페; 가장 철저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어 본뜻으로 에로스는 광적이며 맹목적인 상승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남녀의 성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 세계의 모든 사랑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데아로 가고자 하는 에너지를 의미했다.
교황님은 이 회칙에서,
본래 의미는 잃어버리고 본말이 전도된 채 전해진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다시 말해 에로스는 쾌락적이고 말초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신적 세계로 상승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는 '에로스'라는 개념을 버리고
그리스인들도 거의 사용하지 않던 '아가페'라는 낯선 단어를 선택했다.
혹자는 그리스도교의 금욕적 경향이 에로스를 거부했다고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이미 그리스에서 에로스가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이를 차용할 수 없었을 뿐이다.
에로스가 상승 에너지인 반면,
아가페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무조건적인, 하강하는 에너지이다.
카리타스는 이 아가페의 라틴어 단어이다.
사랑은 하나이다.
상승하거나 하강하거나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에로스적이요 아가페적인 가장 완전한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현된다.
그 사랑은 바로 성체성사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줄 수 있단 말인가!
회칙은 사랑의 무질서와 남용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는 이 시대에
교회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즉 교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사랑의 질서를 정립하고,
이를 해석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성찰4.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
무슬림의 폭탄 테러에 대한 일침!
동해형법 정도도 아니고 왜 무고한 대량의 피해자를 양산하는가.
그러나 회칙은 양날의 칼이다.
곧 칼의 한쪽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성찰5. 삼위일체이신 교회, 교회의 본분으로서의 애덕
교회의 본질은 케리그마와 레이투르기아, 그리고 디아코니아이다.
이 셋은 따로 뗄 수 없다.
그저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고, 종교인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나눔의 본질적 목표는 케리그마와 전례 행위를 통해 '나누는' 것이다.
성찰6. 정의구현 국가 & 사랑 실천 - 교회 연대
국가는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이다.
그러나 그 속성상 부패하고 편향되기 쉬운 것이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교회는 사회정의가 필요해질 때,
정의와 권력의 균형을 위해 윤리적 권고를 하고
상호 연대(협력)하며 공존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보조성의 원리이다.
곧 전체가 부분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직능별 단체를 둠으로써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다.
회칙은 이를 위해 개인의 자선만이 아니라
조직으로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교회의 '카리타스'는
그저 남는 것을 던져주는 부자들의 자선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의 양심에 면죄부를 주는 이러한 행위는
사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난한
마르크스의 지적을 마땅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성찰7. 교회 사랑 실천(애덕)의 고유성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필요하다.
첫 번째, 긴급한 요구와 특수상황에서는 무조건 응답할 것.
두 번째, 당파와 이념에서 벗어날 것.
세 번째, 애덕 실천을 개종 권유의 기회로 이용하지 말 것.
즉 선교와 애덕 실천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때와
침묵으로 오로지 애덕을 실천해야 할 때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성찰8. 교회의 애덕 활동의 책임자와 윤리규정들
교회의 애덕 활동의 주체는 바로 교회 자신이다.
여기서 개별 교회의 주체는 주교를 말하며,
전체 교회는 주교의 임명권자인 교황이 주체가 된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봉사자'이다.
주교는 모든 사도직 활동을 조정해야 한다.
예컨대 위의 성찰7에서 살펴본 것처럼
응급 상황일 경우 무조건 개입해야 하지만
그 순서를 식별하는 것은 주교의 몫이다.
올해 서울교구는 교구 사회복지 예산의 30%를 삭감하고,
그 대신 교구청 건물을 개축하고 있다.
주교들의 숙소 등을 손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분명히 주교들에게 순종하기 힘든 상황도 발생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바람직한 태도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봉사자에게 '마음의 양식'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카리타스의 목적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대상,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상황에 너무 목매지 말 일이다.
- 이선미(성서 영성학과) 선교사가 이동호신부님의 강론을 발췌한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