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얼굴
주님의 얼굴(Vultus Christi)
당신 종에게서 얼굴을 감추지 마소서(시편 69, 18)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무한한 분의 존재를 유한한 인간이 보는 데에는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시편은 주님의 얼굴을 그리는 신앙인의 간절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의 변모’(9,2-10)는 주님이 모습을 나타내지만 제자들이 그 모습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용이다. 이는 우리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성경은 주님은 쉽게 드러나시는 분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주님의 얼굴을 볼 것인가? 우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에서 주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누구보다 이웃의 얼굴에 주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자들처럼 그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분의 모습을 찾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기도하는 모습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의 모습을,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모습을,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정의로운 모습을, 무고하게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이 오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데 일방적인 바라봄이 가능할까? 여기서 나에게서 주님은 어떤 모습을 드러내실 것인지 스스로 신앙적 실존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 스스로 주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타인에게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웃에게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주님의 모습이 상호적으로 소통하는 일이다. 내가 바라보고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상대 안에 계신 주님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 될 것이다. 영적 소통은 너와 나뿐만이 아니라 너 안에 계신 분과 내 안에 계신 분이 함께 소통하는 일이다. 둘이 아니라 넷이 하나를 이루는 소통이다. 이러한 영적 소통을 위해서 무엇보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웃의 영을 가만히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사심을 가라앉히고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의 마음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웃에게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영적대화를 추구하는 일이다. 인격체를 통하여 말없이 모습을 전해주시는 주님 안에서 서로 일치를 꾀하는 참신앙의 모습이다.
좋은날가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