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묵상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바로 서자

시릴로1004 2018. 11. 10. 17:16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바로 서자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 흙 속을 걸을 뿐이다. 우리는 눈먼 이들처럼 담을 더듬는다. 대낮에도 캄캄한 듯 비틀거리고, 몸은 건강하다고하나 죽은 자 들이나 마찬가지다.”(이사59,10) 이렇게 우리가 죄 중에 있으면, 우리의 귀가 막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의 죄가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이 듣지 안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악마는 먹이 감을 찾아 으르렁 거리는 사자와 같이, 언제 우리를 먹이 감으로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례를 제정하셔서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음식과 음료로 주셨고, 십자가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성부께 청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물과 피를 다 쏟아 부으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간청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따져 보고 시험도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격자입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 시키시려고 시련과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잠언3,1~12)는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고 또 믿게 됩니다. 이런 주님의 훈육에 깊이 감사합시다. 주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두께가 두껍고, 깊이가 깊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얼마나 무게가 나갈까? 혹시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빌론의 왕 벨사차르 같이 무게가 모자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니엘의 세 동료와 같이 설사 주님께서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하면서 주님을 끝까지 믿고, 불가마에 주저 없이 들어가는 믿음의 사람일까? 하고 스스로 자문해 봅시다. 바오로 사도의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는 믿음의 고백을,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부자의 큰돈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과를 더 중요시 하지만 하느님은 과정을 더 중요시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람을 지어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 마음속을 꿰뚫어 보셔서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3,6~10)는 올바른 십일조와 예물 봉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 하면서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하고 말한다. 바로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십일조를 먼저 하고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고 묻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가 가진 것은 죄와 악습뿐이며 그 외는 하느님의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 것을 내 것 인양 이기적으로 살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부끄러움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을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이 기회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저의 위선적 믿음에서 참 믿음의 삶으로 인도 하셨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시골 면소재지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때 영세와 견진세례를 받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그저 평범하게 주일미사 정도 다니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도에 냉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우애를 쌓고 세상과 친구하며 살면 하느님의 적이 된다는 야고보사도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직장이 돈을 취급하는 금융회사라 돈에 대한 욕심을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매년 성경 일독과 7일 금식과 단전호흡을 하며 정신 수양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은 변질 되었고, 책상위의 성경은 죽은 말씀이 되어 사람들이 저를 신뢰하게끔 하는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금식은 주님 앞에 희생과 보석을 드린 것이 아니라 생색내기와 자랑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로지 명예와 출세지향주의 만 이 제 우상 이었고 신앙은 무늬만 종교인이었습니다. 저의 영적 상태가 나병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의 경고가 세 번 내려 졌는데 첫 번째는 큰 교통 사고였습니다. 신호대기중인 제 승용차를 버스가 추돌 하였고 차는 대파되었습니다. 주님의 보살핌으로 창과 살도 입지 않고 온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회초리에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저에게 이번에는 대장암 3기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니 15년 동안이나 금식을 하여 누구보다도 저의 대장은 깨끗할 텐데 하며 대장암3기라니! 여기서 저의 인생도 끝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주님의 일이고 몸을 관리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만 으로 건강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하느님의 영역이었고 저의 영적 교만이라는 것을 뒤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때 저는 냉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냉담은 풀어야지 하고 병원주재 신부님을 찾아가서 총고해를 보고 성사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어 회복은 빨랐습니다. 후유증도 없고 지금은 완치가 되었습니다.

두 번의 큰 주님의 경고와 은총을 입고도 깨닫지 못한 저는 귀머거리, 눈먼 장님처럼, 아직도 모든 것을 내 중심적으로 합리화 하며 내가 만든 우상화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저에게 최후통첩과도 같은 경고가 또 찾아왔습니다. 마치 에집트왕 파라오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완고하게 하시어 열 번째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듯이, 저의 재산을 초토화 시켜 파산의 길로 내 몰았습니다.

전에 보증 섰던 것이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가난을 모르며 살아온 저에게 고통 받는 삶을 체험하게 가르쳐 주신 공평하신 하느님.

다행히도 이런 결과를 주님께서 미리 예측 하셔서 저를 월남전에 참전시키셨고 대장암을 통해 고엽제후유증 판정을 받아 매월 보상금을 받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예비하셨구나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한테 생활비를 보태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게 된 것이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보다 더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저의 유랑생활 동안 좌절과 분노에서 해방되면서 냉정을 다시 찾아 주님께 무릎 꿇고 기도와 성경 쓰기를 시작하였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내 삶으로 승화시켜 보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의 마음을 붙잡아 주고 이끌어 주신 것은 성모님의 은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셨고 그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성경공부와 기도하는 모임에 인도하여 주셨고 그곳에서 21일금식과 40일이라는 큰 금식을 하면서 지내온 시간들을 회개하며 조명하여 보았고, 또 이냐시오 영신수련 30일 과정을 수련하면서 저의 지난 모든 잘못을 주님 십자가에 봉헌 하였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참 빛을 보게 되듯이 저의 눈도 뜨게 되었고 귀도 뚫어져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 곳이 영등포역 주변 노숙인과 윤락녀봉사였습니다, 요셉병원에서 노숙인 성경공부, 윤락녀와 노숙인들에게 매 주마다 날씨에 관계없이 커피와 차 그리고 쵸코파이등을 대접하면서 느낀 것은 이분들에게도 하느님 사랑의 씨앗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느 윤락녀는 세례를 받았다며 은퇴 사제님을 위해 헌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자살하고자 하는 노숙인을 설득하여 꽃동네에 입소시킨 것이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이곳 산곡동 성당에서 교리교사와 성경공부를 맡겨주신 장희성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는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땅의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와 같이 인내와 기도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 11 11 이 근 호 시릴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