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의 복음묵상

조재형 신부님 묵상

시릴로1004 2020. 9. 28. 12:18

연중 22주간 수요 묵상  --- 조재형 신부님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 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의 무대가 되는 세상보다도 1,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문자로 남겨진 작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논어, 맹자, 장자, 노자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학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우리는 고대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휴가에 시간이 있다면 4,000년 전의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마 그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의 내용은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강 건너에는 대홍수를 피해서 살아남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노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가메시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륜이 젊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불로초의 모습은 가시나무였다고 합니다. 이 가시나무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떨기나무가 되었고, 이 가시나무는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렸던 가시관이 되었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메르의 뒤를 이은 아카디아의 왕 중에는 사르곤왕이 있었습니다. 사르곤 왕은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기에 사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르곤 왕의 어머니는 신전을 지키는 사제였습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바구니에 아이를 넣어 유프라테스 강에 흘려보냈습니다. 강 위를 떠오는 바구니는 아카디아의 공주가 발견하였고, 아이는 왕궁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구약성서는 아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를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 수용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다릅니다. 사르곤 왕은 스스로 높은 자가 되었고, 정복하는 왕이 되었지만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었고 하느님을 높였습니다. 모세는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문화의 이야기를 수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탈신화화라고 말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트만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탈신화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고린토의 신자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 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자세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곳에서는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아는 것은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 용서도 훈련이 필요하다 *^^*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태풍 하이선에 의한 피해는 없으신가요? 울릉도에서는 마이삭과 하이선이 연속으로 몰려와서 피해가 큽니다. 사동 방파제는 복구가 되려면 많은 시일과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겠고 일주도로도 일부 구간은 언제 복구가 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본당에는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텅 비었던 성당이 어제 저녁부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어서 신자들의 밝은 얼굴로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렇게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주일 미사에서는 더 많은 신자들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합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의미를 얼마나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립니까? 오늘의 제 1독서는 이 기도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용서에 조건이 붙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이 줄곧 베풀어주시는 용서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오늘 응송에서 잘 나타나듯이,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는 분’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과 계약으로 맺어진 백성 역시 남을 잘 용서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는 말씀으로 남을 용서함에 있어 그 한계를 없애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누구나 “감정을 가진 인간이 남을 무한히 용서해 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런 의문을 미리 다 아신 듯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왕에게 1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리고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루 인건비를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종이 임금에게 탕감 받은 빚은 6조 원이고 친구가 그에게 진 빚은 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비유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무자비한 종에 대해 의분을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욕하는 내가 무자비한 종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종이 일만 탈렌트의 빚을 졌다는 것’은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빚을 지고 하느님 앞에선 우리 인간의 처지를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데나리온 정도 빚진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는지요?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는커녕 마치 자기가 하느님이나 된 듯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집회서 28,18절에 보면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쓰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성당에 나오지?” “저런 사람이 우리 성당에 있다니 내가 부끄럽다.”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니까 차라리 내가 성당에 나오지 말까?” 등등의 말을 많이 하고 듣습니다. 만일 그런 이유로 성당에 나오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은 본인이 성당을 떠나야합니다. 성당은 잘못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용서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한 우리에게 제 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옛 세례찬미가의 한 부분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독서에 바로 이어지는 로마 14,10에서)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무자비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제 자매님, 참된 형제적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꽁하고 가지고 있다면 나만 병듭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베풀 때 내가 비로소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2006년 10월 2일 아침, 미국 펜실바니아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서 우유 배달부였던 칼 로버츠가 난데없이 초등학교교실로 들어와 어린 학생 5명을 죽이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칼 로버츠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전원적 마을의 신화를 여지없이 깨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를 쉽게 용서했으며 남아 있는 살인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아미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인자를 그렇게 쉽게 용서했는지 몹시 궁금해 했습니다. 기자들은 아미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용서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아미시들은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기도문으로 기도합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삶의 일상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며 용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큰 용서는 매일 작은 용서를 베풀면서 용서하는 것이 몸에 베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의 미사를 봉헌합시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