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에 대한 작은 연구
1. 주님, 저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마르10,51).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마르 8,18).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럼 나는 당달봉사인가? 눈을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느님을 보는가? 하느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라고 흔히 말한다.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도 되는가? 그러니까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데, 나는 신앙의 눈으로 보는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데 나는 보는가? 하루의 생활 어디에서 부활하여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는가? 항상 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하루 내내 동행하던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녁에 주막에 들어 함께 술을 뜰 때에야 비로소 찰나에 알아보았다(루가24,13-32). 하느님, 그리스도뿐 만 아니라 도대체 내가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이 백성은 어떻게 살고 있나? 세계화 시대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과연 실업자들, 노숙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의 실상을 보고 있는가? 그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듣고 알고 있는 수준에만 머물고 있는가? 신자들과 비신자들 사이에는 어떤 시선의 차이가 있는가? 하여튼 도무지 볼 수 없다. 보려고 노력하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무엇이 좀 보이느냐(마르8,23)?’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있나? 하루동안 얼마나 하느님을 보았는가? 이웃 형제들을 보았는가? 아니면 그 인색한 부자처럼 나자로와 같은 가난한 형제들이 전혀 보이지 않나? 나 자신은 보이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숨어버렸나? 죄를 지은 아담이 숨어있어서 하느님께서 그를 찾은 것처럼(‘아담, 너 어디에 있느냐?’ 창세3,9), 나도 숨어있는 나를 찾아보아야겠다.
왜 이렇게 내 눈은 못보는가? 왜? 창세기가 대답을 해준다. 잘못된 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시선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창세3,5), 탐욕에 사로 잡혀있다(창세3,6). 하느님을 떠난 무질서 가운데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혀있다(창세3,7; 참고 마태6,25-33). 때로는 사목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 오늘 나는 얼마나 하느님을 부르고 찾았나? 얼마나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였나? 얼마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義 만을 구하였나? 양들을 찾아 나서서 그 길 잃은 양들을 찾아보고 있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간덩이만 부었나?
어떻게 할까? 사실 눈을 뜨려고 하는 내 힘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내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슈브리에 신부도 기도문에서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이 가난한 혼에 한 가닥 빛살을 보내시어, 주님을 뵙게 하소서...무한히 선하신 주님, 단 한번이라도 주님을 우러러 뵙게 하소서. 주님의 그 찬란한 광휘를 조금 낮추시어, 이 눈이 주님을 우러러 뵙고 주님의 완전하심을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님을 만난 많은 장님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치유되었다(요한 9장 참조). 나도 마찬가지로 장님임을 인정하고 복음서에 나오는 장님처럼 주님으로부터 치유받아야 하겠다:‘주님, 저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마르10,51). 주님께서 치유해주셔도 혼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손길을 통해서 하시리라. 겸손하고 성실하게 성령의 도움을 청한다.
2.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출애3,7)
-하느님의 시선-
2.1. 하느님은 보시는 분이시고, 우상은 못 본다(묵시9,20; 시135, 15-18).
-보시는 하느님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1베드3,12).
‘야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시33,13). ‘야훼의 눈길, 의인들을 돌아보시고...(시34,15).
‘정녕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도다’ (루가 1,48).
‘그가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루가15,20).
‘주님, 이제 그들의 협박을 살피시고...’(사도4,29)
-보지 못하는 우상
‘보지도 듣지도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둘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경배하기를...)묵시9,20(이사17,8; 2,8.20; 다니5,4.23; 시115,4-7 참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우상에 의지하는 자들은 누구나 우상과 같이 될 것이다’(시135,15-18).
그러니까 하느님은 보시는 분이고 우상은 못 보는 존재이다. 나는 하느님을 닮아서 보면서 살아갈 것인가? 우상을 닮아서 못 보면서 그냥 살아갈 것인가? 관찰하려고 하지 않고 관찰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삶은 우상을 섬기는 이의 삶이라는 말이다.
1)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1,10.12.18.21.25.31); 피조물을 바라보시면서 대단히 흡족해 하시는 하느님. 인간을 그저 죄인이라고 말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하느님께서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서 만드시고 흡족해하시는 존재임을 잊지 말고 하느님과 함께 인간에 대해서 우선 형제로서 바라보아야 하겠다.
2)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출애3,7; 참고 사도7,34). 하느님은 이처럼 당신 백성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두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 내 본당, 내 속한 교구, 나의 민족, 온세계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과 마음이 통하겠는가? 60년대 상황과 80년대 상황이 다르고, 오늘 21세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다르다. 새로운 양상을 즉각 관찰하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의 해방의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
3) 주님께서 보셨다, 더 이상 정의가 없다는 것을(이사59,12). 오늘,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불의가 자행되는 것을 똑똑히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 계시는 그 곳에서 땅 위에 사는 사람을 지켜 보신다’(시33,13-14). ‘사람의 마음 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시7,9). 참고 시 139.
2.2.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먼저 2사무11-12,15; 시50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파렴치한 죄를 보시는데 그러나 그런 죄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죄를 계기로 해서 인간은 한층 더 깊이 하느님의 연민의 신비, 자비를 체험한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당신 존재의 신비를 계시해 주시는 것을 듣고 있는데, 바로 그때에 선택된 백성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가없게 여기고 싶은 자에게 자비를 자유로이 베푸신다는 것을 확인해 주시고(‘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님이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출애33,19), 당신의 거룩하심을 손상함이 없이, 하느님의 연민의 정이 죄를 능가한다고 선언하신다. 즉 ‘나는 야훼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 대까지 벌한다’(출애34,6-7). 죄의 결과가 4대째 자손에까지 미친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죄의 중대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수천 대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당신께서 무한히 자비로운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불충실한 자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시다가도 곧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는 자비를 보여주신다(판관2,18).
예언자들의 체험을 보자. 호세아는 비록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호세1,16) 그들을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실지라도,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호세11,8-9) 하신다.
예언자들은 심한 재앙들을 선포할 때에도, 역시 하느님 마음 속에 있는 연민의 정을 알아 보고 있다. “오냐! 에브라임은 내 아들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예레31,20);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이복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이사 49,15).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른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갖고 있었다: ‘주님, 주님 같으신 하느님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살아남은 주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미가7,18-19).
하느님의 자비가 시편 작가의 부르짖음에 잘 요약되어 있다:‘하느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시51,1).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시103,8-10.13-14).
3.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시선
일생동안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의 시선을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본다는 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나온다. 그분의 그 눈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나?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는 이는 누구였을까? 성모 마리아인가?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제자 요한이었나? 그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부를 마찬가지로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서도 항상 아버지 하느님을 찾아보는 눈길을 갖고 있었다.
헌금하는 과부의 모습(루가22,1-4)에서 예수께서 무엇을 보셨을까? 우선, 엘리야 예언자에게 온 정성을 다해서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은 사렙다 과부의 모습(1열왕17,8이하)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 모습에서 예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외아들까지 세상에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요한3,16-17)을 보신 것이다.
마태13,44-46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하시며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그 당시의 땅 장사꾼(투기꾼이었을까?)을 보면서 아버지 하느님을 찾아보았고,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진주를 사는 보석상한테서 성부를 알아보고 값진 진주와 같은 세상과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여서 구원하기 위하여 성부께서 가진 모든 것, 즉 아드님이신 당신 자신마저도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주는 것을 보고 계셨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생동안 끊임없이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복음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포도 나무를 보면서(요한15장): 포도나무를 정성껏 기르시는 농부이신 아버지를 보았다.
-목자를 보면서(요한10장; 루가15,4-7):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착한 목자와 같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과 앎(15.17절)을 보고 있었다. 루가 복음에서는 아흔 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끈질기게 찾아 나서서 찾아내면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목자와 같은 아버지를 보고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난다.
-들녘을 바라보면서(요한4,35): 추수시기에 들녘을 바라보면서 씨뿌리는 성부를 보신다.
-많은 불쌍한 군중을 보면서(‘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마르6,41): 함께 마음 아파하시고 그 상황 타개를 위해서 개입해오시는 아버지를 보신다.
-씨 뿌리는 사람을 보면서(마르4,1-8): 예수 자신의 세상 구원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는 듯한 실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굳건한 신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농사일을 보면서(가라지의 비유. 마태13,24-30): 가라지 때문에 좋은 밀을 하나라도 다칠까 봐 염려하시는 자상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계신 예수님이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면서(요한8,1-11):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달리, 죽음이 임박해서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 여인에 대해서 연민을 갖고 계신 성부를 보고 계시느라 땅바닥으로 몸을 굽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죽음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해방을 선언한다.
-죄많은 여자를 보면서, 사채업자를 보면서도(루가7,36이하): 막달레나를 바라보면서 바리사이 시몬에게 얘기해준 비유에 나오는 빚을 탕감해주는 돈놀이꾼과 같은 너그럽기 짝이 없는 하느님 아버지를 보신다.
-잃은 은전을 찾는 부인을 보면서(루가15,8-10): 이 여인은 당신의 어머니였을까? 이웃집 아주머니의 모습이었을까? 하여튼 그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찾아보셨다.
-불화가 있는 부자집 삼부자를 보면서(루가15,11-32):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해서 방탕한 생활을 한 작은 아들과 우리가 쉽게 공감하는 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삼부자를 바라보면서 거기서도 예수께서는 성부의 모습을 보셨다.
-자캐오를 보면서(루가19,1-10): 어려서 가난에 사무쳐서 깊은 상처를 받고 돈에 환장을 한 그를 보면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을 선사하시고 싶어하는 성부의 마음을 보셨다.
-강도 사건에서도(루가10,29이하): 강도 사건이 심심치 않았을 그 시대에, 그 속에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께서 보셨다.
-새와 꽃을 보면서(루가12,22이하): 자연에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보셨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루가18,9-14): 성전을 자주 찾으신 예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리의 기도를 인정하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시는 성부를 보셨다.
-파견 후에 돌아와서 보고하는 제자들을 보면서(루가10,21): 파견 후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성령에 흥겨워하시면서 성부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기도하셨다.
삶에서 예수를 닮아서 오늘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강생의 하느님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참된 증인으로서 생생하게 하느님을 전해줄 수 있다. 예수께서 과부의 행동에서 성부의 모습을 찾은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몸짓과 말과 행동에서 나는 하느님을 발견해보아야 하겠다.
3.1.1. 성부를 향한 성자의 시선에 담겨있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루가1,35과 세례기사인 3,22을 함께 보면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받은 아들이 되는 것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 즉, ‘성령 안에서 성자는 성부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다’.
-‘과연 하느님이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을 깃들게 하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도다’(골로1,19-20).
바울로 사도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처럼 보았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아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아버지(요한17,1.5.10).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소서”(17,1).
-예수는 자기 영광을 찾지 않는다. 성부의 영광을 찾는다(요한7,18; 참고 8,50).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요한12,28). ‘이제 인자가 영광스럽게 되었고 인자로 말미암아 하느님도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되셨다면 하느님도 당신 안에서 인자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곧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13,31-32).
이처럼 성자는 성부의 영광을 찾고 성부는 성자를 영광스럽게 한다.
-성부의 기쁨을 찾는 성자의 시선을 볼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 4,34. 그래서 성자는 항상 아버지를 향해서 시선을 두고 성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성부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완수하려고 애쓴다.
성자는 성부의 뜻을 잘 알고 그래서 성부의 기쁨을 잘 알고 있다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성령으로 기쁨에 넘쳐서 예수께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 일을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고 철부지 같은 사람들한테는 보이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루가10,17-24). 여기서도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깊이 사랑하는 관계인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자들 안에서 성부의 애쓰심, 활동을 보고 감사와 기뻐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루가 10,17-24).
*골로 1,13-14. 바울로 사도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하는 관계를 보면서 그 관계가 우리를 구원과 해방에로 초대하는 것을 본다.
3.1.2. 성부에 대한 성자의 시선
-성자만이 성부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갖고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한6,46).
-아빠(마르14,36<게세마니>; 로마8,15; 갈라4,6; 공관복음서에 170회;
루가 23,46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사랑과 순종으로써 성부를 바라보신다: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인간 구원에 대한 성부의 뜻에 순종함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버지께서 제게 모든 것을 넘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말고는 누구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마태11,27; 참고 요한 10,15):
여기서 예수는 성부께 대한 친밀하고 절대적인 신뢰심을 드러냈다.
-성부와 성자의 시선 안에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속해 있는 관계를 볼 수 있다: ‘제 것은 모두 아버지 것이요 아버지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훨씬 더 강하게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것: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요한 10,38; 참고 17,21).
매우 심오한 일치communion를 나타내는 것: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요한 16,32).
완전한 일치: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10,30);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14,9).
헤아릴 수 없는 이 일치는 십자가의 한없는 고통의 외침 속에서 반대로 나타난다:‘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마르15,34; 마태27,46).
분리의 아픔은 그 일치communion의 강렬함을 드러낸다:‘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요한5,20):
예수는 사랑받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1,11와 병행구;참고 마르9,7와 병행구; 마태12,18; 루가20,1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요한 15,9),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요한17,23).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뭄: ‘내가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요한 15,10).
예수도 성부를 사랑하며 성부께서 명하신 것을 행한다(요한14,31).
3.2.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종의 시선
요한 5,19-20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여,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어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순종을 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보려는 순종이 아니다. 순종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이지만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순종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으로서 적극적으로 선택한 행동이다. 그러기에 기꺼이 성부를 바라보면서 순종을 한 것이다. 그러니 일생동안 예수는 자주 기도하시면서(특히 루가복음서) 성부를 바라보고 기꺼이 순종을 하려는 자세를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필립2,6이하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예수의 십자가에서 보는 순종은 완성된 순종이다).
‘아빠, 아버지,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뜻대로 하십시오’(마르14,36)
4,34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6,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이다’.(강생과 순종의 밀접함)
8,26. 28-29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항상 행하기 때문입니다’(요한8,28-29).
19,30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드시고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죽는 순간까지 성부께 신뢰하며(마태 27,46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특히 시 22,22이하) 끝내 순종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루가 1,38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천사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출생부터 온 생애,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는 성부를 바라보면서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기는 순종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간에게 멸망이 왔고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선사되었다. 참고 로마 5,19)
4. 제자들을 향한 스승의 시선
4.1. 예수의 부르심의 시선
마르 1,16-20 (루가5,1-11): ‘예수께서 갈리래아 바닷가를 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데오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보시므로써 제자들의 부르심을 시작한다. 무엇을 보는가? 그들의 일상 삶에 들어오셔서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셨다. 이 부르심의 눈길에서 예수께서 전적인 주도권을 쥐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을 부르시는데 조건이 있나? 도덕적인 기준일까? 지식의 기준일까? 신앙의 기준도 없다. 그분이 부르시는 것이다. 옛날 아브라함을 부르시듯이(창세12,1이하), 모세를 부르시듯이(출애3,1이하), 이사야를 부르시듯이... 마찬가지로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다(마태9,9).
부르심의 내용은 무엇일까? 하나는,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분의 구유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아니 승천에까지 그분을 뒤따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이다. 생선이 낚여지면 배에 모아진다. 배는 구원의 성사인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즉 예수님의 일인 사람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 초대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분명히 사도적이며 사목적이다.
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지체하지 않고 ‘곧’ 예수를 따랐다고 한다. 어떤 미련도 두지않고 즉시 그물을 버리고, 즉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참고 마르10,28-31). 그들이 버린 그물도 값이 꽤 나갔을것이고 배는 상속을 받을 예정이 분명하였을텐데 모두 버리고, 아버지 마저도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아직도 그 어떤 미련을 못버리고 우왕좌왕하면서 떠난다고 하니까 예수를 따르면서도 몸이 무겁다. 그 크고 무거운 그물을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 예수는 육로를 이용하셔서 주로 걷는데 배를 끌고 다녀야 하니까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집착에 사로잡혀있는가? 슈브리에신부께서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가족과 세상을 버려야 하고, 자기자신을 버려야 하고, 이 세상의 제물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수긍이 간다. 버리지 않으면 않는 만큼 부르심에 응답하는 운명인 이 삶이 거추장스럽고 불안하고 고달프기만 하다. 오늘도 새롭게 결단을 내려야 하겠다. 어제 없던 집찾과 소유를 매일 버리지 않으면 그 많은 것들을 걸머지고 그분을 뒤따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울 수밖에 없겠는가? 하기야 야고보와 요한은 일꾼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돕도록 했으니 다행이다. 그렇지않으면 노후보험도 없는 세상이었을테니까 그들의 아버지는 완전히 버림받고 거렁뱅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을까? 어떤 기대를 하였을까?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한 것일까? 좋은대로 보내준다는 인사발령의 약속이라도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매력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서 가진 것을 몽땅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비유가 바로 이 제자들의 심정을 말하는 것이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도 마찬가지다(마태13,44-46). 바울로 사도가 바로 마찬가지의 체험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다: 필립 3,7-11.
요한 복음에 첫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1,35-42)을 보아도 예수께서 따라오는 요한의 두제자를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시고 ‘와서 보라’고 초대하신다. 안드레아가 형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을 때 예수는 그 시몬을 보시고 게파(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신다. 또 나타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가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1,47-48). 얼마나 깊이 사람을 보시는 지를 엿볼 수 있다.
마르 10,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고 대견히 여기며...’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실때에도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의 말대로 그동안 그가 한 모든 노력을 인정하시고 대견하게 여기셨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습을 대견해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는 눈길, 너그러운 눈길로 눈여겨 보신다. 우리도 사람들의 애쓰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눈여겨보며 소중하게 바라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인정해야 하리라. 그 시선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의 집착을 예수께서 보셨지만 그의 장점을 인정하실 것은 인정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던진 그분의 눈길의 내용을 나에 대한 부르심에서도 발견해보자. 그리고 나의 응답도 간추려보자.
'교리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해성사 또는 화해성사 (0) | 2010.02.13 |
---|---|
하느님, 예수 십자가 죽음, 빈무덤, 부활 - 이규성토마스 신부, S,J. (0) | 2010.01.16 |
펌) 진화론과 종교는 상호보완적 관계 (0) | 2010.01.14 |
지적설계론은 진화론에 도전하는 유신론적 과학 (0) | 2010.01.14 |
성모님의 사진 모음 (0) | 2010.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