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사람들에게 안달루시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잘살 수 있는 곳이다. 원하는 것이 적다 보니 모두가 부자로 살 수 있는, 장식 없이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안달루시아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반은 기후 덕분이고 나머지 반은 그곳 사람들의 기질 때문이다. 안달루시아의 시인 로르카는 이 기질을 형성하는 요인을 안달루시아 대지의 정수라고 하였다. 결국 안달루시아 사람은 자신의 대지를 떠나면 안달루시아 사람이 아니다. 기후와 땅의 신비와 그곳의 귀신 두엔데가 만들어낸 대지의 영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비스러운 대지와 자신들의 존재를 동일시하며 그곳을 낙원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들판에 해바라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바로 그 안달루시아의 중심 지역인 세비야로 간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돛을 올린 곳이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도시 세비야가 16세기에 해외 식민지를 지배하는 무역도시가 되면서 전성기에 이른 것은 모두 그의 덕이었다. 바다와 1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항구 역할을 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 과달키비르 강으로 신대륙에서 금을 실은 배가 들어왔고, 지금도 강가에 서있는 ‘황금의 탑'에 그 금을 저장했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 내부. 제대 뒤를 둘러싼 제대 병풍은 1.5톤의 황금으로 만든 황금벽이다.
세비야 대성당 주제대, 그 유명한 황금제대 앞에 앉는다. 사방이 정말 거대하다. 제단병풍은 높이 27미터, 폭 18미터에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45개의 조각으로 제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아즈텍과 잉카, 마야에서 착취해온 1.5톤의 황금으로 만든 황금벽이다.
바로크와 로코코의 극치를 보여주는 파이프오르간과 '은의 제단'
주제대의 맞은편에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극치를 보여주는 파이프오르간이 위용을 떨치고 있고, 그 중앙 통로에는 ‘은의 제단'이, 그리고 그 맞은편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콜럼버스의 관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의 네 왕국,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과 나바라 왕이 운구하는 그 관은 이사벨 여왕의 것이라고도 전해졌지만 정황상 콜럼버스의 관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앞쪽의 두 임금은 가슴을 활짝 편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고 뒤쪽의 두 임금은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다. 가슴에서 왕국의 상징인 사자가 포효하는 레온 왕은 긴 칼로 ‘그라나다'를 상징하는 ‘석류'를 내리찍고 있다. 무슬림을 쫓아내고 비로소 기독교 왕국을 회복했다는 자부심의 발로인가. 그들은 콜럼버스의 관을 운구한답시고 스페인의 네 왕을 동원해서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무슬림을 추방하고 남은 자들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고통스런 역사에 기어이 칼을 찔러야 했는가. 그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폭력의 얼굴이었다. 적나라한 기독교도의 폭력의 역사 앞에서 자꾸 불편했다.
은의 제단 맞은편에 있는 콜럼버스의 관.
스페인 네 왕국 임금이 운구하고 있다는데, 앞쪽 임금들의 표정은 기고만장하다.
반면에 뒤쪽 두 임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레온 임금은 그라나다를 상징하는 석류를 칼로 내리꽂고 있다.
콜럼버스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심지어는 시신의 행방조차 이견이 분분한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도 이사벨 사후 스페인 귀족들의 담합으로 소환되어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부랑아로 죽었다거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의 책임을 물어 발목에 족쇄이 차인 채 끌려온 후 이사벨의 도움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더 이상 재등용은 없었다거나 등 여러 버전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심지어 그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도시는 발라돌리드, 산토도밍고, 세비야, 그리고 아바나 네 군데나 된다. 과연 그는 어디서 안식을 구하고 있을 것인가. 결론은 그가 삶의 밑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버려졌다. 지상 최대의 찬란한 부를 스페인에 안겨 주었지만 그는 스페인 사람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었다. 그는 스페인의 주류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죽음을 맞아야 했다.
1992년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는 그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산토도밍고에 거대한 등대 하나를 세우고 성당에 안치했던 유해를 그리로 옮겨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묘비에 그의 유언을 새겼다. “자비, 진리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들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기 바란다.” 권력과 엄청난 부를 누렸던 그는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항해의 잔인한 악마'였다. 그런 그가 남긴 유언이 아이러니하다.
성가대석 높이 무리요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보고 보물실의 황금 왕관 등을 본다.
세비야 대성당의 내부
본당의 어마어마한 분위기에 비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박한 성수대를 지나 다시 오렌지 정원에 선다. 이곳 역시 모스크를 부수고 지은 곳이어서 곳곳에 사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렌지 정원은 본래 무슬림들이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에 세정을 하던 곳이었다. 오렌지 나무 푸른 잎들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히랄다탑 꼭대기에 어렴풋이 조각상의 날갯자락이 보인다. 탑 역시 본래 모스크의 미나레트였던 것으로 15세기에 가톨릭이 세비야를 점령한 후 종탑으로 개조했는데, 종탑의 최정상에는 신앙(Faith)을 나타내는 4미터 높이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오렌지 정원에서 바라보는 히랄다탑. 아래 그림은 세비야 성당 앞 광장이다.
성당을 나와 모퉁이를 도니 세비야의 광장이다. 바로 그 광장인가, 도스토예스키의 ‘대심문관'이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어두운 죄악의 심연에 빠져 있으면서도 항상 어린애처럼 자기를 사랑해 주는 민중 사이'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체포한 곳!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을 빌자면 ‘시 작품 속에서 천상의 모든 세력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크게 유행하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에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바로 전날 그곳에서는 고관대작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에 대심문관인 추기경의 지휘 아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백 명 가까운 이단자들의 화형이 있었다. 인육 타는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그곳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한없이 거룩한 미소와 손길로 축복하고 병을 고쳐주며 죽은 여자아이를 다시 살린다. 그러자 지켜보던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감옥에 감금한 뒤 불평과 협박을 퍼붓는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내일 나는 당신을 사악한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할 테니까.”
그날 대심문관의 협박은 그 후로도 역사의 곳곳에서 무수한 민중을 협박하고 유린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23,30)’라고 공언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교회, 공고하게 쌓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예수'라도 마땅히 처형시켜 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괴벨스의 호언 역시 오늘날도 어디선가는 현실화되고 있다.
유다인 거주 지역임을 알리는 표지가 남아 있는 골목에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살았다는 집이 있다.
한때 안달루시아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는 일순간에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인간은 베네딕토 16세가 첫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밝힌 바처럼 ‘때때로 복수나 심지어 증오와 폭력의 명분'에 하느님의 이름을 결부시키곤 하였다.
안달루시아의 낯선 거리에서 뜨거운 태양에 취해 나는 꿈을 꾸며 걷는다. 언제쯤 다시 유다교와 이슬람과 기독교가 그토록 평화롭게 공존하는 때가 올 수 있을까. 그때는 어떻게 서로가 피비린내 나는 폭력 없이 어울려 살 수 있었을까. 이 또한 꿈같은 일일 뿐일까. 어쩌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마치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어울리는 것처럼 평화롭게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토록 첨예하게 제 것만 고집하고 타인에게는 양보만 요구하는 끝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진실로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종교가 가르치는 것을 지상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 서로에게 천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참으로 순진한 꿈같은 생각을 한다. 아마도 세비야의 태양에 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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