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의 영성
성 베네딕도의 영성
1. 겸손에 대하여(겸손의 12단계)
성 베네딕도는 겸손을 수도규칙 7장에서 다른 부분에 비해 비교적 길게 서술하고 있다. 성인은 이 7장에서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겸손이며, 그 합일의 단계를 12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성인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 11)라는 성서 말씀에 근거해서 자기를 높이는 모든 짓이 교만의 일종임을 가르쳐준다. 반면 생활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갈 때 천상적 들어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성인을 말하고 있다. 성인은 이를 야곱이 보았다는 천사들의 사다리(참조; 창세 28, 10-13)에 비유하여 사다리를 오르고 내린다는 것은 “교만으로써 내려가고 겸손으로 올라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 마음이 겸손해질 때 주께서 계신 천상으로 향한다는 것이다(참조; 수도규칙 7, 1-11). 그럼 먼저 겸손의 12단계의 핵심 주제들을 도표를 통해 알아보도록 한다.
<도표1> 참조: W.투닝크, 같은책, 223쪽.
단계
핵심 주제
1
하느님을 두려워함
2
하느님께 순종함(내 뜻〈 하느님의 뜻, 말씀)
3
장상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
4
인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에 대한 순종
5
영혼의 개방성; 정직한 고백
6
가난에 만족함
7
스스로 자신을 낮춤
8
온건함, 규칙이나 장상의 권고 이외에 다른 짓을 하지 않음
9
침묵
10
감정의 조절
11
슬기로운 말씨
12
겸손한 몸가짐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성인이 가르쳐 왔던 여러 가르침들(장상에 대한 절대적 순명, 침묵, 가난, 언어의 절제 등)이 겸손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인이 가르치고자 하는 겸손은 단지 병적인 자기비하(自己卑下)나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이기적 낮춤이 아니다. 후에 보다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성인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 단계에서 제시한 겸손은 창조주이시자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만일 어느 사람이 성인이 말하고자 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으며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하느님이 서 계심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성인이 제시한 겸손의 열두 단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겸손의 열 두 단계
① 겸손의 첫 번째 단계: 하느님을 두려워함
“겸손의 첫째 단계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어 잠시도 잊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늘 기억하여 하느님을 경멸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어떻게 지옥 불에 태워지며, 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마련된 영원한 생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신의 마음속에 늘 생각하는 것이다.”(7, 10-11)
베네딕도 성인이 제시하는 겸손의 열두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가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다. 이는 자칫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잘못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늘 감독하고 있는 감시자로 생각될 수 있으나, 이를 통해 베네딕도 성인이 가르치고자 하는 점은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첫걸음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현존의식을 깨닫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단계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제한을 받는 유아기적인 단계이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통해 하느님이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고 계심을 인식하는 것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여정에 있어서 첫걸음임에는 틀림없다. 현존의식에 대한 의식적 노력을 바탕으로 수련자는 점차 이성과 감정을 포함한 전인격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게된다.
② 겸손의 두 번째 단계: 하느님께 순종함
“겸손의 둘째 단계는, 자신의 뜻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본받는 것이다.”(7, 31-32)
하느님의 현존을 전인격적으로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꾸준히 찾아야 한다. 그럼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성인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은 현재 자신의 뜻과 욕망에 반대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 욕심에서 벗어나는 - 이것은 ‘나로부터의 이탈과 끊음’이라고 할 수 있다 - 수련이 요구된다.
③ 겸손의 세 번째 단계: 장상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
“겸손의 셋째 단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순명으로써 장상에게 복종하여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사도께서 말씀하신 그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7, 34)
이 부분은 무조건적 순명과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성자께서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것처럼 수련자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장상에게 순명해야 한다. 이 순명은 하느님과 하나되는데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④ 겸손의 네 번째 단계: 인내-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에 대한 순종
“겸손의 넷째 단계는, 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는 당한 모욕까지도 의식적으로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며, 이를 견디어 내면서 싫증을 내거나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7, 35-36)
그런데 장상에게 순명함에 있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자신에게 요구되거나 자신이 판단에 비추어 장상에게서 잘못된 점이 발견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수련자들은 내적으로 갈등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 단계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첫 시련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이 시기에 수련자는 인간적 고뇌와 비참을 경험하게 되며 ‘이 길이 과연 주님께 나아가는 진정한 여정일까? 이것이 진정 주님의 뜻이란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도 한다. 그런데 수련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있어서 그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나 중심의 사고’에 대한 정화(淨化)과정이 필요하듯 장상의 무리한 요구나 때로는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적극적인 순명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음으로써 순종한 성자의 모습을 본받는 것이기도 하다.
⑤ 겸손의 다섯 번째 단계: 영혼의 개방성; 정직한 고백
“겸손의 다섯째 단계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나 남모르게 범한 죄악들을 겸손된 고백을 통하여 아빠스에게 숨기지 않는 것이다.”(7, 44)
이는 자신의 모든 모습을 아빠스에게 정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용기를 갖는 단계를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어느 한 부분 - 예를 들어 장점이나 선한 모습 - 만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떳떳하고 좋은 부분뿐만 아니라 부족하고 어두운 모습을 포함한 전존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⑥ 겸손의 여섯 번째 단계: 가난에 만족함
“겸손의 여섯째 단계는, 수도승이 온갖 비천한 것이나 가장 나쁜 것으로 만족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나쁘고 부당한 일꾼으로 여겨 예언자와 함께 ‘나는 쓸모 없는 자이오며 알아듣지도 못하였나이다. 나는 당신 앞에서 짐승과 같은 처지오나 늘 당신과 함께 있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7, 49-50)
이 단계는 수련자가 단순히 물질적 가난만이 아니라 내면적 가난함을 지녀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내면적 가난함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난에 자족(自足)하는 것이다.
⑦ 겸손의 일곱 번째 단계: 스스로 자신을 낮춤
“겸손의 일곱째 단계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가장 못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말로써 드러낼 뿐 아니라, 마음 깊숙한 정으로 확신하여 자신을 낮추고 예언자와 함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의 조롱감이고 백성들의 천덕꾸러기이다.’ ‘내가 나를 높였음에 낮아지고, 부끄럽게 되었나이다’하고, 또 ‘당신이 나를 낮추셨기에 내가 당신의 계명을 배우게 된 것은 내게 좋은 일이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7, 51-54)
이제 어느 정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온 진보자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고백하는 단계에 왔다. 자신을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감이며 백성들의 천덕꾸러기’로 말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초심자들이 보기에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자신이 진실로 하느님 앞에 낮아질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음을 깨달은 단계라 할 수 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단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⑧ 겸손의 여덟 번째 단계: 온건함
“겸손의 여덟째 단계는, 수도승이 수도원의 공동 규칙이나 장상들의 모범이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7, 55)
이것은 순명과 연결된 듯 보이지만 앞에서 언급된 순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네 번째 단계에서 보여지는 순명의 정신은 초심자에게서 보여지는 내적 갈등이나 고뇌가 있지만 이 단계에서는 자아(自我)가 어느 정도 정화(淨化)된 상태이기에 비교적 자유스럽게 규칙이나 장상의 말에 순명한다.
⑨ 겸손의 아홉 번째 단계: 침묵
“겸손의 아홉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함에 혀를 억제하고, 침묵의 정신을 가지고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성서는 ‘많은 말에서 죄악을 피하지 못한다’ 또 ‘말이 많은 사람은 이 지상에서 오래 살지 못한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7, 56-58)
베네딕도 성인에게서 강조되는 또 하나의 영성이 바로 이 ‘침묵’이다. 7장을 제외하고도 6장, 38장, 42장, 52장 등에서 침묵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베네딕도 성인이 지나칠 정도로 침묵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단지 무조건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바르고 절제된 언어사용, 신중한 판단, 침묵을 통한 형제애의 실천, 무엇보다 하느님께 자신을 집중하기 위함 등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⑩ 겸손의 열 번째 단계: 감정의 조절
“겸손의 열째 단계는,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니, (성서에) ‘어리석은 자가 큰 소리를 내어 웃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7, 59)
⑪ 겸손의 열 한 번째 단계: 슬기로운 말씨
“겸손의 열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는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7, 60)
⑫ 겸손의 열 두 번째 단계: 겸손한 몸가짐
“겸손의 열두째 단계는, 수도승이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내는 것이다. … 언제나 머리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고 자기 죄에 대하여 매시간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이미 무서운 심판대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7, 62-64)
여덟 번째 단계에서부터 진보자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자아(自我)는 이제 서서히 사라지게 되고 하느님의 충만함에 몰입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으로 감정의 조절(열 번째 단계), 슬기로운 말씨(열 한 번째 단계), 겸손한 몸가짐(열 두 번째 단계)이 있다. 이 과정은 의식적 노력이 아닌 성령의 이끄심 - 물론 첫 단계(하느님을 두려워함)에서부터 성령의 이끄심은 존재한다 - 에 따라 사는 생활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인간은 매우 자유로운 상태로 행동하는데 진보자는 서서히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과의 합일의 모습을 수도규칙 7장의 마무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 ….”(7, 67-69)
이상으로 성 베네딕도의 겸손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위에서 보았듯이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서 겸손을 강조해 왔다. 성인이 겸손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처지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단지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전존재로서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고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인은 자기비하(自己卑下)로 보일 정도의 겸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은 극도의 겸손 수련을 통해 내 안에 내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재하도록 이끌어 주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길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만났을 때의 기쁨에 찬 어조로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 3, 30)
걸어가는 것이고 종국에는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합일의 단계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20)
도달하는 길이다.
2) 현대의 적용문제
그렇다면 성 베네딕도가 제시하는 겸손의 열두 단계는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과거부터 이 7장을 규칙서와 베네딕도 수도회 수덕의 중심으로 보아 왔다. 이 7장의 기본 방향은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낮추며 개인의 뜻을 포기하는 겸손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완성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겸손의 여섯째 단계와 일곱째 단계는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함에 대하여 아주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겸손을 강조한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의하면 수도자는 가장 비천한 것과 나쁜 것에 만족해야 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나쁘고 부당한 일꾼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이것을 외적 표현으로만 해야 할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수련방식에는 다소 회의적인 면이 없지 않다. 사실 현대인들은 인위적인 겸손의 훈련을 꺼려하며, 굽실거리는 태도와 수동적인 성격을 싫어한다. 그런데 베네딕도에 의하면 겸손을 배우기 위한 초기 단계가 순명인데 베네딕도의 순명은 너무 종적이고 수동적이며 자기 멸시를 포함하고 있어서 ‘이 규칙서가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자칫 성 베네딕도가 엄격한 교육아래 획일화되고 독수도(獨修道)적 『수도규칙』 7장의 내용만 본다면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있어서 개인의 수양만을 가르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수도규칙』의 전반적 내용은 오히려 공동체성이 상당부분 강조되고 있다.
수도자관과 심지어 그릇된 신관을 『수도규칙』 7장을 보면 자칫 하느님은 어디든지 계시면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늘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잘못만 하면 아주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가르쳐주고 있는 듯 보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 베네딕도가 제시한 겸손에 관하여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한 성인들의 보배로운 가르침은 오늘날과 같은 메마른 시기에 단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 베네딕도가 제시한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서 제시한 겸손의 단계 역시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기 위해서 인간은 이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기 실존의 밝은 점과 어두운 점을 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겸손은 바로 진리라고 할때 이 진리를 찾으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개방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이렇게 될 때 -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直視)할 때 -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자기의 능력을 인정하며 발전시킬 수 있다. 한편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기의 단점과 마음의 약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극복하게 위해서 자기 자신 안으로 후퇴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나아가면서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베네딕도 성인의 겸손을 오늘날에 재해석해 본다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 모습 자체를 아무런 꾸밈이나 거짓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성인의 겸손을 이해할 때 단지 7장에 나타난 겸손만을 보고 지극히 사사화(私事化)된 신앙의 측면으로 국한해 이해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서가 회수도자를 중심으로 쓰여진 규칙서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규칙서의 후반부에 이를 수록 베네딕도가 얼마나 형제적 사랑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즉 개인의 필요성과 성장 및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적 사랑을 지극히 공동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베네딕도 성인이 하느님과 합일의 단계로써 제시한 겸손을 이해한다면 자칫 오늘날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영성’으로 생각되기 쉬운 베네딕도의 겸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과 사상만이 아닌 삶과 실천을 동반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촉구함과 동시에 지극히 물질만능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이 풍미하는 이 시대를 일깨우는 준엄한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 순명에 대하여 참조: Aquinata Bockmann,「성규 제5장 순명과 권위」, 『코이노니아』17집(1992/8) 신 마리노엘 옮김,
성 베네딕도는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하는 지원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58, 7)이라고 특정 짓는다. 그리고 49장에서 수도생활 전체를 섬김의 생활로 특징짓는다. 그리하여 5장에 장상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과 연결시켜 장상께 순명하는 것은 “서약한 거룩한 섬김”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을 찾아가는 도정에서 순명의 삶은 수도승에게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드러나고 있다. 다음에서는 순명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5장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규칙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순명의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규칙 5장 순명에 대하여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10, 11-13, 14-19)
1부에서는 신속함이 강조되고 있으며 3부에서는 불평없이 순명하는 내적 태도가 강조되고 있으며, 2부는 두 개의 성서 본문이 소개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중간의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를 띠며 순명을 설명한다.
1부: 1-10절
“겸손의 첫째 단계는 지체없는 순명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는 일이며, 그들은 서약한 거룩한 섬김 때문에, 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원한 생명의 영광 때문에, 장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명령받았을 때 즉시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함에 지체할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주께서 ‘귀로 듣자마자 나에게 순명했다’고 말씀하셨으며, … .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려는 원의가 간절한 사람들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좁을 길을 택한다.”
겸손의 첫째 단계를 지체없는 순명이라고 소개하고, 순명을 하느님과 관련시킨다. 여기서 외적인 신속함은 마음자세에서 나올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핵심은 성서 구절에 있다. “귀로 듣자마자 나에게 순명했다. 너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5,6) 여기에서 말씀이 다른이에게서 나오고 제자는 들으면서 순명한다. 베네딕도에게 중요한 원칙은 순명이 기본적으로 듣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제자들인 우리 편에서는 간절한 원의와 준비된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부: 14-18절
“그러나 이러한 순명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에게 감미롭게 된느 것은, 명령받은 바를 겁내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무관심하지 않고, 불평이나 싫다는 대꾸없이 실행할 때이다. 왜냐하며 장상들에게 바치는 순명은 곧 하느님께 하는 것이니, 주께서 친히 ‘너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만일 제자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순명하든지 또는 입으로 불평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마음으로도 불평한다면 비록 명령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불평하는 그의 속마음을 이미 들여다보시는 하느님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순명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투명한 것으로 또 기쁜 선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의 간절한 원의이다. 그러나 다음에서 불평하는 마음으로 이행한 명령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곧 제자는 좋은 마음으로 혹은 나쁜 마음으로 순명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쁜 마음으로 순명을 했다면 이는 속마음을 들여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고 은총도 따라오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중앙에 있는 성서 구절 곧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로 장상은 차츰 사라져가고, 하느님께 그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순명이 그렇게까지 짐스럽다거나 의무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자 우리 자신을 구원계획에 투입시키려는 간절한 원의에 찬 것이라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로써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참된 해방을 갖게 된다. 오로지 하느님께로, 우리의 기쁨이신 하느님,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오직 우리를 위한 구원계획만을 가지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2부: 11-13절
“…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거나 자기의 원의나 욕망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판단과 명령을 따라 수도원 안에 살면서 아빠스를 자기 으뜸으로 모시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들은 확실히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본받는 것이다.”
두 개의 성서본문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다.(11)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 분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자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다.(13)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분이 순명하셨듯이 우리도 순명하기 위하여 한발자욱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계획을 이루어가는 길이며 그분의 파견에 우리 자신을 투신하는 길이다. 좁은 길이란 우리 자신이 제한을 받도록 내어맡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 자신을 좁은 길 안에 가두어 버리면 때로는 답답함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자유롭게 하는 삶의 길, 곧 그리스도 자신,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게 된다.
12절에서는 성서본문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자기 판단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의 원의나 욕망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따라서 수도원 안에 살 것”을 강조한다. 순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장되어 있으며, 그들은 혼자서 그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추구한다.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살아감은 자신의 선택이나 원의와는 상반되는 것같아 보이지만, 그 반면에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므로 순명의 심장부에 공동체가 있게 된다. 이는 아빠스를 모시는 공동체이다.
결론적으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순명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 귀로부터 곧장 손과 발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든 요소와 온갖 가능성을 다 포함한 전인적인 순명을 한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 제자는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이라 불리어진다. 이는 확실히 자유롭고 통합된 인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상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수하고 곧바른 중재자로 나타난다.
2) 현대의 적용문제
①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 수덕적인 견해
5장에서 나의 원의나 욕망대로 살지 않는 좁은 길을 제시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 우리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길이다. 초기 수도승들은 어떤 사람이 지도자 없이 자기 혼자서 수도승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면 의심을 품기 쉬웠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는 온갖 원의나 뜻은 모두 좋고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영감이기에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이다. 규칙에 따르면 “나의 뜻”은 순명과는 원수일 뿐 아니라 겸손과 공동식별과 사랑으로 모인 공동체와도 원수이다.
규칙1장에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법은 욕망의 쾌락이며 자기들 생각에 떠오르고 자기들에게 매력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다고 하고 자기들이 원치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긴다.(1, 8) 그들은 자기의 뜻과 탐식의 유혹에 빠져든다.(1,11) 그들은 자신의 뜻과 쾌락의 노예들이다. 이것에 이끌려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결코 만족함이 없는 채, 늘상 온갖 욕구를 즉시 채우고자 급급해 한다.
여기에서 장상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아빠스라 불리워지며 영성적 덕에 나아간 사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철저하게 성서와 규칙 위주로 살아감으로서, 그들을 위한 구원이란 관점에서 각 사람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규 64장에 묘사한 아빠스는 자비롭고 현명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분별력이 있고 심사숙고하며 강한 자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또한 약한 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돌봐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장상에게 수도승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쓰여진 자기 뜻이라 해도 역시 장상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48, 8-9) 수덕적 견지에서 이러한 순명은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해 준다. 규칙서 끝에 순명은 더 이상 노고가 아니라 좋은 것으로 생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기적인 자기 뜻을 포기하는 순명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해 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조화와 사랑 속에 살아갈 수 있게 해주며, 마침내 우리의 사도직을 잘 할 수 있게끔 조장한다.
② 귀기울여 들음과 응답으로서의 순명- 장상과 수도승과의 대화와 분별
“귀기울여 들음”이나 “들음”이란 단어는 대부분 성서귀절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바로 순명의 주된 몫이기도 하다. 3장 형제들의 의견을 들음에 대하여와 규칙 끝에 첨가한 68장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을 때의 순명”은 장상 역시 귀기울여 듣는 사람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장을 참조하면 하느님의 뜻만이 최상의 규칙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며, 순명을 하는 데는 다만 양편 쌍방의 상대방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 편 곧 하느님과 장상 그리고 형제나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다. 순명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해내는 한 가지 길이다. 5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체없는 순명은 마음으로 준비된 자세와 간절한 열망에 대한 주장이지, 피상적인 수준에서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까지도 항상 주장하는 바는 아니다. 비록 기본적으로 준비된 자세와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야 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서로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 각 사람은 다 하느님의 뜻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 주께서는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주시기 때문이다. (3, 3)
이와 관련하여 베네딕도는 수덕적 전망에서 상호 순명에 관하여서도 말하고 있다.(71장)이는 하느님께서는 덕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밝혀주신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규칙 72장6절에서는 “서로 다투어 순종하라”고까지 권고한다. 이러한 전망에서 우리의 전생애는 사람과 상황과 법을 이용하여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귀기울여 ‘듣는 삶’으로 바뀌어져 간다. 이런 순명은 공동체 생활을 건설해 가고 버티어 준다. 공동선을 돌보기 위해 있는 권위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뜻을 위한 중개자 역할을 한다.
③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서의 순명
- 어두움속에서의 순명 (겸손의 셋째와 넷째 단계 참조)
겸손의 셋째 단계는 수도승이 “온갖 순명으로써 장상에게 복종하여 ‘그분은 죽기까지 순명하셨다.’(필립 2, 8)고 사도께서 말씀하신 그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7, 34) 그런데 장상의 명령이 언제나 하느님의 명령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했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베네딕도 성인은 “그들이 말한 것을 실행하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4, 61)고 충고한다. 물론 이런 순명은 훨씬 어렵다. 여기서 대화는 겸손하고 개방적이며 또한 적절한 기회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언제나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분노 중에 명령할 수도 있다. 이런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협력을 다 한 후에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마땅한가? 손이 묶인 채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과 같이 된 나 자신의 입장을 볼 수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본시오 빌라도에게 순명하셨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구원계획을 그대로 완성해 가실 것을 확신하셨다. 순명의 신비는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에 드러나 있다. 수도승 역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어두움 속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느님께 신뢰를 둘 수 있어야 한다.(68,5)
예수께서는 때가 이르러 아버지의 신비스러운 뜻에 순명하시어 입은 닫혔고 손과 발은 묶여져서 십자가 위에 못박히셨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온 세상을 다 구원할 수 있었다. 순명의 이러한 밤이 닥칠 때, 우리 자신이 주님께 향한다면 더욱 충만하게 주님을 본받게 될 것이다. 이는 수덕적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뜻에 귀기울여 듣는 차원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서만 순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보답에 확실한 희망을 걸고 기뻐하며, ‘우리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이겨냅니다’(로마 8, 37)라고 외치며 나아간다.”(7,39)라는 외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 순명 중에서의 어두움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규칙 72장에서는 수도승이 가져야 할 좋은 열정에 대하여 나온다. 이 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로 요약되는 규칙의 심장이다. 이 장에서 사랑으로 서로 다투어 순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사랑에서 우러난 순명은 공동체를 건설하고 강화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고 응답을 드리는 대화를 함으로써, 우리는 바로 그분의 삶을 살아가며 마침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자유와 성숙을 더욱 촉진시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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