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은 좋으신 분!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 내십시오."(1고린 6,19-20)
건강과 영성 "몸이 하는 말을 듣자"1)
안셀름 그륀 & 마인라드 두프너 지음
조성옥 에노스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역
현대의학은 한계에 달했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의학은 끝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질병들을 치료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갈수록 더 건강하지 않다고 느낀다. 현대의학은 많은 병들, 특히 외부 감염으로 발생하는 병은 성공적으로 치료해 왔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약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다루어져야만 하는 새로운 병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제대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의지해온 건강관리 체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깊이 느끼고 있다.
사회는 건강관리를 위한 재정 부담에 지쳐버렸다. 정치가들은 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건강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의학 분야에서 대중의 일반적 견해를 반대할 힘이 없다. 더 진보된 과학기술과 더 좋은 약품으로 건강을 살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듯 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한 생활 태도를 익히는 대신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그 책임을 떠맡긴다. 그 결과, 과식과 운동부족, 담배, 술, 마약 등 중독으로 인한 잘못된 생활을 고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삶에 허황된 기대를 품는다. 건강이 마치 어떤 기술처럼 획득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들은 건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의학을 제외하고도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나타나고 있다. 심리치료와 여러 가지 요법들, 단식코스, 다이어트, 영적 치유 등에 대한 수많은 광고들이 우리 주위에 범람하고 있다. 마음과 몸, 그리고 사회적 요소를 두루 다루는 통합 치료를 찾는 이들은 고대에 사용된 방법들을 시도하기도 한다. 당시 의술은 병을 고치는 일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의술은 건강하게 생활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의학 연구는 식이요법과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에 관한 것들이었다. 잘사는 비결이란, 빛과 공기,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운동과 쉼, 취침과 기상, 포기와 선택, 영혼의 상태들, 감정과 열정 사이의 올바른 균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의술은 역시 그 기원에서 언제나 종교적인 행위였다. 의사들은 치유의 신(Aesculapius) 역할을 하였다. 고대의 의사들은 치유의 힘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예배는 건강한 생활에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 교회는 몸에 관한 문제를 지나치게 의학에 맡겨왔다. 교회는 오로지 영혼의 구원에만 주력하였고 몸과 영혼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혼의 구원은 단지 초자연적인 관점에서만 고려되었다. 그 결과, 건강한 삶을 위한 자연적인 법칙들이 무시되었다. 물론 늘 그렇지만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는 예수를 참된 교육자 Pedagogue, 건강한 삶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스승으로 묘사하였다. 4세기에서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수도승 생활의 규칙들은 수도승들이 몸과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지침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네딕도 규칙서는 분별(discretio)이라는 기준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 지혜로운 기준은 규칙서 안에 다양한 인간적 양상들이 두루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식이요법으로 고대 의학이 알아들었던 것은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중세기의 대 알베르토(Albert the Great)나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드(Hildegard of Bingen)는 몸과 영혼 모두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을 중시하는 영성생활의 전통 안에서 유명하다. 그들은 식사법을 수도생활 가르침의 기본구조 속에서 다루었다.
바르게 먹는 것은 수행(Asceticism), 곧 영성생활에 관한 가르침에 포함된다. 식사법은 수도자들을 더 큰 자유와 건강으로 이끄는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영혼과 육체의 일치, 건강한 몸과 영성생활의 일치를 실천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건강 문제를 의사나 심리학자들에게만 떠맡기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치유를 포함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그 치유를 믿음의 덕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교회의 치유사목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겠다. 대신 그리스도교적 식사법이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 건강한 몸과 영혼에 관심하게 하는 영적 과제 등에 대하여 더 많이 다룰 것이다. 몸에 대한 염려는 여기서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다. 몸을 영혼의 표현으로 이해하여, 몸과 몸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몸이 일으키는 반응과 혼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영성생활을 위해서는 의식성찰뿐만 아니라 의식보다 더 정직하게 우리의 내면 상태를 드러내는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I. 상징으로서의 병
몸의 움직임은 우연한 것도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반응만도 아닌 그 사람의 진실한 상태, 무의식적 욕망과 욕구, 억압과 반응 등을 표현한다고 정신신체학(psychosomatics)은 거듭 강조한다. 인간의 몸은 그 영혼이 참으로 갈망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한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자기이해를 돕는 네 가지 정보가 있다. 첫째는 생각과 감정, 둘째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꿈, 셋째는 영혼을 표현하는 몸, 넷째는 행동의 수준으로 습관이나 매일의 일상을 사는 방법, 직업과 살아온 역사 등이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고려할 때 비로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되짚어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우리 안의 방어기제들은 과거를 돌이켜 반성하면서도 너무 고통스럽고 불쾌한 것들은 쉽게 옆으로 제쳐놓게 한다. 그러나 몸은 생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보다 더 정직하게 말한다. 자신이 야심이 없고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흐르는 땀은 그가 다른 이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병은 영혼의 언어이다.
병은 영혼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병이 전달하는 상징적 언어를 알아들으면 우리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필요와 욕구들을 깨닫고,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병을 통하여 우리 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과 감정, 충만한 삶에 대한 이상이 어디에서 조화를 잃어버렸는지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아픔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 정직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의식 속에서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소리에 점점 더 귀머거리가 되어 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 메시지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이 온통 잘못되었다고 간주하거나, 삶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불안을 억누르고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기어이 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로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병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진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병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이 메시지를 잘 들어야만 한다. 병은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고혈압 증상을 통해서 우리가 내면의 갈등을 허락하고 있지 않다고, 내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지 모른다. 혈압은 우리가 자신을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내면의 갈등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일종의 경보신호이다.
우리 의식의 통제 하에 있는 인지력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꿈이 말해주는 것처럼, 병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 중요한 암시를 준다. 테겐(F.Teegen)은 질병을 적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차라리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동료나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병은 우리 내면의 정신적 혼란 때문에 몸이 일으키는 일종의 소동이다. 테겐은 이 소동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병의 증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어디를 잘못 다루었는가? 무엇을 무시해 왔는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나를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증세가 무엇에서 나를 놓여나게 해 주는지 물어 볼 수 있겠다.
많은 증상들이 주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생기고 구체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어떤 증세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에 걸려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거나 다른 이들이 대신해서 그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에게 물어봐야 한다.ꡒ이 증세 때문에 내가 면제받을 것이 무엇인가? 이 불편함 때문에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가?ꡓ이런 종류의 대화를 시작하면 몸의 불편에서 오는 대답은 종종 놀라운 것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병에서 간접적으로 이로움을 얻어낸다는 사실, 그것에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이는 덜 파괴적이다 (F. Teegen).1)
정신 신체적 문제의 경우, 몸의 이상을 지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설명하려는 유혹이 일어나고 이것은 종종 비정한 것이 된다. 그보다는 몸을 영혼의 목소리로 생각하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통증을 느끼는 부위에 손을 대고, 그곳으로 숨이 흘러 들어가게 깊이 호흡하면서 그 부위에서 자신을 느껴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완전한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느끼며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지 볼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병은 우리 몸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일 것이다. 때때로 아픔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무시해 왔기에, 몸과 더불어 살지 않고 내팽개쳐 두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면 병은 자신을 좀더 주의 깊게 대하라는, 몸을 가장 내밀한 존재의 표현으로 감지하라는 도전이다.
병은 우리를 본성의 어두운 면(그림자)과 대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병은 우리가 삶에서 유배시켜온 것이 무엇인지 지적한다. 억압되어 왔던 것, 우리 삶의 무대 뒤로 쫓겨났던 것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어떻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우리 의식세계 안에 통합해야 하는지 말하고 보여준다. 그래야 아픔은 자기 치유의 시도가 된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을 때 미래에 당연히 겪게 마련인 영적 몰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병을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 때때로, 아픔은 그 순간에 유리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나쁜 어떤 것으로부터의 의혹에서 벗어나게 해준다.2) 오버벡(Overbeck)은 병을ꡒ일시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외적 현실이나 내적 요구들과의 타협ꡓ이라고 말한다. 병은 자신 안에 일어나는 아직 친숙하지 않은 감정들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것을 통합하도록 돕는다. 인정되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간 우리 존재의 파편들은 질병이라는 길을 통해서 의식 안에 들어온다. 병은 우리자신을 더 폭넓게 이해하게 하여 성숙을 향한 여정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병은 자기보호의 역할도 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심적으로 지나친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요즘 심리학자들은 아플 수 없는 병ꡓ에 대해 말한다. 이 아플 수 없는 병은 예기치 못한 심각한 와해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건강한 중년기를 보낸 직후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플 수 있는 능력은 신체적 자기파멸을 예방하는 보호책, 말하자면 생명보호장치가 될 수도 있다. 아픔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하고 몸에 이롭고 건강을 지켜주는 절제된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병은 우리가 병의 증상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만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된다. 병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가끔 그 병의 증상을 묘사하는 단어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누군가 ꡒ나는 코가 꽉 막혔어ꡓ라고 한다면, 그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또 ꡒ나는 콧물감기에 걸렸어ꡓ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모욕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 또 어떤 이는ꡒ감염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 지금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 어떤 이는 ꡒ나는 감기(cold)에 걸렸어ꡓ라고 말하면서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느끼는 냉랭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료들의 얼음같이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고 있다고 말이다. 아픔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상태를 매순간 더 잘 이해할 것이고 좀더 솔직하고 진실한 삶을 시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병의 원인은 공격성과 쾌락과 욕구의 억압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공격성을 다루어야 하는지, 쾌락에의 갈망과 욕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병에 걸린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극기는 이런 억압의 밑바닥에 있다. 그것은 쾌락이나 욕구의 충족을 부정한다. 그러나 인정되지 않은 욕구는 질병이라는 옷 속에 자신을 감추고 그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만일 어떤 주부가 가정을 위해 계속 자신을 희생하면서 친밀감과 부드러운 보살핌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계속 억누른다면, 무의식적으로 병에 걸려 그 필요를 대신 만족시키게 될 수도 있다. 남편은 병에 걸린 아내를 걱정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도 아픈 엄마에게 달라붙어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가족 모두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병을 이용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로부터의 요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질병은 애정과 거리감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런 이유라면 병에 걸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아내가 남편과 의견을 교환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체념한 채로 뒤로 물러서 버리거나 아니면 내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수단으로 아픔을 이용하여 남편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이런 공격성의 표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앓는 병은 그 가정의 상태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가족이 병에 걸리면 다른 구성원들은 아픈 이를 가엾어하면서 약질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앓는 병을 통해 그들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정신신체성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비난하거나 그의 정신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그 병을 자신의 의식을 성찰할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떻게 그 사람의 병을 비난할 수 있는가? 혹시 난 그가 다른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그렇게 병에 걸리도록 모른 체 한 것은 아닌가? 그가 앓고 있는 병은 내가 귀를 막고 무시해버린 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보여주고 있진 않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ꡒ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병에 잘 걸리진 않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ꡓ가정의 주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표현할 기회가 없다면 자주 아프게 마련이다. 남편의 병도 역시 그의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한, 혹은 그 가정의 상태를 말하는 어떤 것을 담고 있다. 병은 때때로 다른 이를 위한 효과적인 치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병은 다른 이가 지금까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을 그들 안에서 보게 한다. 아내의 병은 남편이 지나치게 사업에 몰두하느라 밀쳐두었던 사랑의 표현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병은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수단 또한 될 수 있다. 병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내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모든 갈등 상황에 극심한 두통과 고열로 대응한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의견을 강요당하게 된다. 심장병이 있는 아버지가 그를 흥분하게 만드는 어떤 의견도 가족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심장병은 폭군 노릇을 하는 것이다.
병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기 본성의 어두운 면(그림자)과 화해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욕구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키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나의 어떤 욕구를 인정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허용될만한 자세로 그 욕구를 대하게 된다. 인정되지 않은 욕구는 병을 통해 그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병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욕구들과 더 가까워지라는 간청이다.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인간관계로 초대하는 하나의 도전이다. 이 새로운 관계에서는 다른 이의 욕구가 수용되는 공간을 제공하고 양쪽 모두 자신들의 갈망과 욕구를 서로에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병의 원인이 단순히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못된다. 그것은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것 보다는 다른 이의 병을 친구 관계를 원하는 요청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병은 나의 눈을 열어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할 것이다. 만일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똑바로 보여주기 위해 때로 나 자신이나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병을 허락하실 것이다.
병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알아듣는 다른 방법은 아픔과 우리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병을 제거하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우선 병을 이해해야 한다. 테겐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아픔과 접촉해 보라고 제안한다.
긴장을 풀고, 눈을 감는다. 우리 의식을 아픈 곳에 집중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각과 영상은 서서히 우리의 감정, 기억, 우리가 억압했던 것들과 연결된다. 이렇게 떠오르는 내면의 영상들을 수용하면 중대한 삶의 경험들이 다시 감정적으로 현존하게 된다.3)
우리가 겪고 있는 증상들 속에서 자신을 느끼며 그 이미지를 지켜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면 아픔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알레르기 증상은 삶의 어떤 상황에 저항하고 있지만 그 반대 상황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 알레르기는 물론 유전적인 이유로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ꡒ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이건 유전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알레르기가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라도 그것과 상대해 볼 필요가 있다. 알레르기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 증상이 주는 메시지와 도전은 무엇인가? 알레르기의 경우, 내면의 방어적 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합리적으로 처방된 식사법도 지켜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알레르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런 훈련은 영혼에도 이롭다.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긍정적으로 병에 대응하여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 알레르기가 사라졌든 아니든 그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알레르기는 나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좀 더 부드럽게 자신과 주위 환경을 대하라고, 끝없이 싸우지만 말고 그 환경을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이다.
정신신체성 질환으로 분류되는 많은 증상들은 잘 치료되지 않는다. 치료받는 중에 그 병의 영적 원인들이 발견되고, 억눌린 욕구들이 인정되고 채워져도 병의 증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희망이 전혀 없고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이런 병은 증상과 싸우면서 철저하게 이겨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질병이 결코 아니다. 그 증상은 우리가 더 풍요로운 내적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려고 했을 것이다. 증상은 죽을 때까지 남아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증상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고 아픔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더 성숙하고 지혜로워질 것이고 영혼의 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치료가 꼭 증상을 완치시키지 못해도 영혼의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병은 영혼을 다른 영역으로 초대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병은 우리의 나약한 인간 조건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는 충실한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경성 기침을 심리학자와 상담하면서 어떻게든 고치려고만 든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기침에 고착되어 버릴 것이고 기침은 계속해서 재발할 것이다. 우선 기침과 화해하고 기침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자신이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구를 거절하고 싶은데서 어떤 공격성을 감추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기침을 내적 속박을 끊어버리라고 격려하는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분석이나 지적 통찰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공격성과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열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어떤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상징적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여러 개로 조각내면서, 남들이 우리에게 지운 모든 짐들을 털어 버릴 수 있겠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또 말씀을 통해 속박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와 비슷한 상징적 행동들을 하였다.
병은 우리에게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제를 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과제를 다 완수했어도 증세들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병과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기침하는 것이 그렇게 못 견딜 불상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듣고 그래서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기침은 때때로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린 기침을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 기침을 하는지 안 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상태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침이 내가 풀어가야 할 삶의 숙제를 거듭거듭 상기시키도록 수용하는 것이다. 그 숙제는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어려움 중에도 삶의 기쁨을 간직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유이다. 병의 증상들을 견뎌내는 데는 유머감각도 필요하다. 유머감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병을 반드시 뿌리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이나, 완전히 올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건강하게 산다고 은근히 주장하는 완벽주의적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유머는 우리가 인간적이 되도록 자유를 준다.
자신이 앓고 있는 지병인 천식을 통해서 가정으로부터 받은 억압을 인식할 수 있었던 한 여인은 자기 자신과의 작업으로 깊은 내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천식은 계속 재발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거나 계속 속박당하고 억눌리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다른 이의 내적 감정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을 알아내겠다고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옳지 않다. 어떤 병의 증상은 아주 오래 계속될 수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러나 그 증상은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꾸준히 상기시키는 고마운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밤에 천식이 시작되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지만, 그 바람에 낮에 마저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천식 발작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늘 발견했다. 천식이 일어나면 기도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하느님 앞에 양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 자유는 누구도 그녀에게서 앗아갈 수 없다. 이렇게 그녀는 천식과 친구가 되었다. 잠만 자지 말고 밤에 깨어 기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면 그녀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도움을 받을 것이다. 천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아마도 천식이라는 지병 덕택에 그녀는 더 생생히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천식을 모든 믿음을 하느님께 두라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라고 격려하는 하느님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병을 수용한다면 그 천식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적 성숙과 영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몸이 하는 말을 듣자"Ⅱ
안셀름 그륀 & 마인라드 두프너
조성옥 에노스 수녀 역
병은 기회이다
신약성서는 ‘병’이 우리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은총을 보여주시는 수단이나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의 치유 이야기들은 복음서에서 묘사된 여러 가지 병의 증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 마르코 복음 2장에 나오는 절름발이는 절뚝거리는 우리 내면의 상태를 상징한다. 나환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밖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피부로 솟아 나와 우리를 나환자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주로 정신신체성 증상들을 고쳐주신다.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병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알아챌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아픈 이들은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성서에 묘사되는 모든 병은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치유된다. 절뚝거림, 중풍, 시각장애, 꽉 막혀 숨쉬지 못하는 호흡곤란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내적인 귀막힘, 진정한 대화의 결핍을 반영하는 마비상태, 균형을 찾지 못해 속에서 절뚝거리는 것들, 삶에 대한 불안 등.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은 정신신체성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 요한 9장에는 태생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자들은 예수께 그의 병이 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물론 그들은 병이 언제나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정신신체의학과 비슷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이유를 윤리적 차원에서 심리적 차원으로 돌린다. 그래서 쉽게 아픈 사람은 무엇인가를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던가, 잘못된 방법으로 양육되었거나, 문제가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관점도 일리가 있지만 독단적으로 주장한다면 역시 위험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환자에게 좋지 못한 의식을 심어주고 그에게 알 수 없는 어떤 심리적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것은 환자를 돕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자기 죄 탓도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라고 말씀하신다. 병은 꼭 그 사람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병은 하느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활동하시는, 그분의 영광이 빛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병의 원인을 너무 근심스럽게 조사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식으로 심리적 원인을 찾는 것은 자칫 비인간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환자들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자신의 내밀한 문제를 알아차리면 어쩌나, 세상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어야 하고, 분석되기 위하여 심리학적 시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엉터리 심리학자들의 호기심에 자신을 열어야 하고, 결국엔 인간 존엄성까지 박탈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자유롭고 더 인간적인 시선으로 병을 다루신다. 병은 우리의 내적 상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병은 하느님께서 우리 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기회, 그분의 사랑 어린 손길이 우리를 쓰다듬는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앓고 있는 병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분명해 질 수 있을까? 요한복음 9장 태생소경을 치유하는 장면에서 하느님은 병을 고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의 인간적 한계와 부서지기 쉬운 속성은 병 때문에 드러난다. 건강은 저절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병은 나의 처지를 하느님 앞에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다. 건강은 하느님의 선물이지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병은 건강이 당연하게 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은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임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치유의 힘은 질병을 통해서 나를 상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내가 처한 현실을 지적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 내 인생에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 인생에 가치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병을 앓으면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강함이나 건강, 성취나 장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임을 배운다. 내가 성취해온 것들, 가령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왔는가 하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나 자신과 나의 삶을 하느님께 양도하고 봉헌하는 것,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그분께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어떻게 일하실 지 결정하도록 맡기는 것, 그분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를 얼마나 오래 갈망해 오셨는지가 내 인생에 가치를 준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분의 선하심과 애정으로 가득한 호의에 나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느님의 빛이 조금이라도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비치고 그 빛이 밝음과 따뜻함을 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의 빛을 통과시키는 것이 나의 건강이든 나의 병이든, 나의 강함이든 약함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 라는 등불을 들고 어디에 얼마나 빛을 비추실 지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등불을 언제나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분의 빛이 환하게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아픈 몸을 통해서도 빛날 수 있다. 때로 건강한 사람을 통해서보다 훨씬 밝고 강하게 말이다. 병을 앓으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건강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쓰기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빛임을 느끼게 된다.
건강한 생활습관과 바람직한 영성생활이 우리에게 건강을 보장한다고 무조건 믿어선 안 된다. 우리는 병에 걸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병은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물론 병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결핍, 부족함이긴 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결함과 잘못을 지녔으며 그것들과 함께 살게끔 허락된 존재이다. 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병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기반에서부터 인간적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병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다면 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앓은 병 때문에 하느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그가 하느님께 받아왔던 것들을 두 배로 받았다.
병은 위기이다. 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더 새롭고 단단한 기반을 갖게 된다. 이 위기는 자신을 새롭게 재정비하라고, 우리 앞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빛은 위기로부터 나온다. 어떤 위기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F. Weinreb)
병과 건강은 서로에게 속한 현실의 양면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고 낫게 하시려고 오셨다. 건강을 잃어야 치유를 체험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의 가치를 안다. 그러니 아프거나 병에 걸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는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치유에 의지해야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건강하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하게 건강관리를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병을 참 현실에 우리 눈을 뜨게 하는 위기로 맞이할 때, 병은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기회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건강한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주신 계명은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들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행을 위한 규칙과 식사법들은 건강하게 사는 자세를 가르친다. 그 규칙들을 따르며 우리 건강을 위해 자신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병에 걸릴 가능성,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건강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주어지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성은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우리는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죄인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지하는 존재라는 이 진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병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장점이나 건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정의하게 한다. 나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병은 우리가 자연의 힘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사랑 받는 자로 그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나이가 들어 신체적으로 매력과 생기가 사라져 갈 때, 우리는 하느님이 자리하시는 우리 안의 내면의 궁방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한 궁방, 시에나의 가타리나가 묘사한 내면의 방,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질 수 없다. 병은 우리를 그 내면의 자리로 돌아서게 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정의할 기회를 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앓는다. 그들의 정신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듯 말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체질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병은 지속적으로 풀어야 할 영적 과제이다. 그들은 늘 자기 몸에 신경을 써야 한다. 병은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제동을 걸 것이다. 병은 삶에 분명한 한계를 만든다. 병에 걸린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에 계속 도전 받는다. 병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제외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스스로의 가치를 믿기가 힘들어 진다.
건강과 영성 "몸이 하는 말을 듣자"
안셀름 그륀 & 마인라드 두프너
조성옥 에노스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역
II.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
그리스 의학은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몸의 건강을 지적이고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의사가 하는 일을 인생의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확신에 찬 손으로 이끄는 조타수의 역할에 비유하였다. 의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규칙들을 정해주며 우리의 인생길을 함께 한다. 우리가 이 규칙들을 무시하면 의사는 그들이 가진 치유의 기술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의 이차적인 과제이다. 셀미브리아Selmybria의 헤로디쿠스Herodicus(기원전 5세기)는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 소위 섭생요법을 가르친 선구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생활하는 태도에 마음을 쓰면서 자연에 순응하여 산다면 건강은 당연히 따라온다. 반대로 질병은 행동이 자연을 거스른 결과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책, “생활 자세에 관한 규정”에서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을 더 발전시켰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몸뿐 아니라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부터 중세까지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은 의술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왔다. 의사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과 영적 지도자들 역시 건강한 생활 자세를 강조했다. 스콜라 철학은ꡐ질서ordo’ 와 ‘규칙regula’을 인간이 살아야 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거듭 강조한다. 이 둘은 중세 때에 삶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위대한 신비가 빙엔의 힐데가르드는 고대의 섭생법에 그 뿌리를 둔 치유 방법에 관한 책을 썼다. 동시에 그녀는 건강에 관한 그리스 가르침과 베네딕도 규칙서의 내용들을 통합하였다.
ꡒ힐데가르드는 인간 공동체 생활에 기초가 되는 책, 곧 베네딕도 규칙서와 갈렌Galen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인간에 대한 내적 외적 견해 안에 통합시킨 건강에 관한 지침을 발전시켰다. 이 지침에는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에 입각한 기본적인 생활 규칙을 비롯하여 음식과 음료, 운동과 휴식, 주거와 의복에 관한 것들이 포함된다"(Schipperges, 64).
그녀는 건강한 생활양식의 기본 원칙으로 분별을 매우 강조하였다. 베네딕도는 분별을 영적 아버지인 아빠스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힐데가르드가 생각한 것처럼, 영성에 유익이 되는 것은 몸과 영혼을 돌보는 건전한 삶에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힐데가르드는 빛과 공기, 음식과 음료, 일과 휴식, 수면과 기상을 취하는 적절한 한계를 수녀들에게 계속 요구하였다. 힐데가르드의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들은 그녀의 영적 조언들과 신비주의와 한데 어울려 있다. 그녀는 영성생활과 건강한 생활양식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았고 그것으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다.
“식사 후 음식의 맛과 즙과 냄새가 가야할 곳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 식사 후에는 잠자는 것을 미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자기 위한 몸의 조건이 음식의 맛과 즙과 냄새 등을 가야할 장소가 아닌 적절하지 않은 기관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소화기관 안에서 먼지처럼 여기 저기 저리 흩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Schipperges, 70).
우리는 인간의 몸이 움직이는 원리를 이같이 설명한 힐데가르드의 생각을 분명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성생활과 건강한 생활양식을 떼어놓지 않고 하나로 생각하고, 육체와 영혼을 진지하게 다루고, 또 은총이 자연에 의지하며 자연을 전제로 한다는 스콜라철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을 그녀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갈레노스에 의하면,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ꡒ여섯 가지 비자연적인 요소들”을 모두 고려한다.: 1. 빛과 공기, 2. 음식과 음료, 3. 움직임과 휴식, 4. 잠과 깨어남, 5. 분비와 배설, 6. 영혼의 열정들, 감정과 정서이다.
여기에서는 이 여섯 가지 영역들을 각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에 따른 영적인 차원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영성생활을 위해 인간 삶의 자연 조건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 베네딕도 성인이 관찰한대로, 모든 것은 신중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결코 건강이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이 되게 해선 안 되지만 늘 건강을 진정한 삶,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빛과 공기를 올바로 사용하는 문제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환경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 환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고대인들은 집을 짓더라도 어디에서 인간이 잘 지낼 수 있는지 알았다. 건강뿐 아니라 영적 복지 역시 기온이나 조망, 주거조건 등과 무관하지 않다. 베네딕도 성인이 이유 없이 수도원의 외적구조를 그처럼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번은 꿈에서 떨어진 곳에 있던 형제와 그들의 수도원 건축에 대한 계획을 의논하기조차 했다. 건강에 좋은 건축, 집과 전망의 올바른 관계, 광선의 조건 - 이 모든 것은 단지 집 치장이 아니라 건강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물론, 이 주장들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하고 사막에서 살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주거의 외적 조건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모든 인간적인 필요를 거절하고 오직 하느님의 보호만을 찾는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특별한 성소가 없다면, 하느님이 창조물 안에 만드신 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영혼과 육신이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 생활을 가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우리를 병들게도 하고 건강하게도 한다. 그것은 잘못된 건축설계나 몸에 해로운 건축자재, 혹은 수맥이나 방사선 위로 지나가는 건물의 부적당한 위치 때문만이 아니다. 이것은 방을 정돈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지나치게 멋을 부린 현학적인 방이 있는 반면 멋스러움이라곤 전혀 없는 방도 있는데 이런 것들도 영혼을 해칠 수 있다. 영성이 너무 천상적인 탓으로 자신이 사는 방을 품위 있게 정리하고 정돈하는 것을 소홀히 할 정도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외적 공간을 정돈하면 영혼 역시 정리될 수 있다. 기분 좋은 그림이나 멋진 가구로 방을 꾸미는 것은 영혼에도 역시 이롭다. 물론 우리는 외적인 것에 의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인간임을, 두 눈을 가진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눈이 요구하는 건강상의 필요들을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가 어디에 살며 무엇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에 따라 생명은 영향을 받는다. 외적인 것에서 받는 느낌들은 우리 영혼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지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일이다. 살고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귀를 자극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은 우리 안에서 계속 어떤 작용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둘러싼 소음들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귀를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귀를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음에 노출시키면 몸이 병들게 된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괴시키는 음악도 있다. 텔레비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어떤 이미지가 하루 종일 내 안에 남아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형상들인가 아니면 성서의 이미지인가?
건전하게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먹어댈 수도 있지만, 적절한 음식물을 섭취하여 끝도 없는 약물치료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 많은 질병이 음식으로 조절된다. 적당한 식사와 단식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중요한 수행의 하나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 음식과 음료의 분량에 대한 장을 따로 썼다. 그는 먹고 마시는 자세가 우리 영성에 큰 영향이 있다고 확신했다. 지성으로만 영성생활을 할 수 없다. 온 몸이 쓰인다. 적당하고 건강하게 식사를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영적인 삶을 위한 동기 없이 부적절한 식사습관을 고치려는 것은 소용없는 시도이다. 몸무게를 조절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만이 우리 노력의 목적이라면, 건강을 염두에 둔 음식섭취는 전혀 즐겁지 않고 단지 고집스런 실천만 강요하는 하나의 관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몸과 영혼의 일치를 의식해야 한다. 몸은 너무나 귀한 것이다. 몸과 몸의 법칙들을 존중하여 의식적으로 적당하게 먹고 마시면서 몸을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몸의 요구를 지나치게 들어주란 뜻이 아니라, 몸이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들이고 더 투명해질 수 있도록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는 자세는 우리 몸뿐 아니라 영성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적절한 식사는 마음의 순결을 지키는 영적 투쟁의 수덕적 수단이 되었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것은 성(性)을 자극한다. 그런 까닭에 옛 수도자들은 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을 하였다. 먹고 마시는 일이 몸과 영혼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심한 과식을 하게 되면 즉시 알 수 있다.
너무 먹거나 날씬한 몸매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 이런 습관들은 몸과 영혼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먹어댐으로써 모든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한다. 음식으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분노나 실망,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거듭되는 도피와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심리치료로 폭식 습관을 고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할 때에만 성공한다. 과식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과 욕구가 말하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억압된 욕구들을 인정해야 한다. 폭식은 이런 현실에 나를 놓아두신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이기에 이 습관을 고치려면 영적으로 새롭게 방향을 잡아야 한다. 나의 모든 욕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내게 허락하신 하느님과 마주해야만 한다. 폭식은 종종 어머니를 대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음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자기 자신 안에서 안정을 찾으라고, 자기 자신과 함께 편안해 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신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는 문제만 우리 영성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방식이 다 그렇다. 얼마나 먹고 마시는지는 내 영적인 성숙도를 보여준다. 만일 내가 모든 것을 꿀떡 꿀떡 그대로 다 삼켜버린다면 하느님과 창조물들 역시 그런 방법으로 대할 것이다. 책도 그런 식으로 읽어치울 뿐 진정으로 즐기지는 못 할 것이다. 영적인 삶은 침묵과 경외, 그리움, 하느님 앞에서의 쉼을 추구한다. 그렇게 할 수 있고 없고는 역시 나의 먹는 습관에서 나타난다. 베네딕도 성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식사를 성스러운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도승들은 식사 때에 창조의 선물인 음식물만이 아니라 식당독서로부터 들은 것도 함께 섭취하였다. 이렇게 식사는 마음과 영혼이 함께 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선물과 말씀을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는 일이다.
외적인 식사 예절은 한 사람의 몸과 영혼 전체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허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패스트푸드) 경향이 있는데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이다. 식사기도는 단지 경건한 관습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다. 식사기도는 중대한 기도도 아니고 종종 판에 박힌 것이 되고 말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식사가 거룩한 것이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만일 모든 이가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 무섭게 먹기 시작한다면, 그런 자리는 식사가 아니라 거친 급식이 제공되는 것이다. 중세기의 영성 작가들이 식사 예절이나 예법 같은 자칫 진부한 주제에 대해서 쓴 사실은 몸과 영혼의 활동과 영향에 대한 그들의 깊은 이해를 증명한다.
건강한 생활의 세 번째 영역은 움직임과 휴식, 노동과 여가의 조화로운 순환에 대한 것이다. 헤로디쿠스는 일과 여가, 노동과 휴식이 조화를 이루는 규칙적인 하루일정을 만들었다. 그의 목표는 개인의 건강이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서 일과 휴식의 합리적인 배치에 입각한 건강 원칙을 적용했고 그것이 중요한 영적 가르침이 되게 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일과 기도의 조화로운 결합은 베네딕도 수도생활의 특징적인 표시이다.
성 베네딕도는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의 원리들을 영성생활에 적용하면서 신앙의 치유적 차원이 드러나게 하였다. 영성은 지적이고 영적인 것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힐데가르드 성녀는 규칙서에 대한 설명에서 베네딕도 성인이 그의 명령의 날카로운 못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박았다고 썼다.ꡒ그는 정수리에 못을 칩니다”(Schipperges, 66). 그는 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모두 건강과 영혼에 주의를 기울이며 피어나고 성장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을 규칙서에 제시한다. 베네딕도 성인의 목표는 제자들이 수덕적인 성과를 올리도록 재촉하는 데 있지 않고, 몸과 영혼의 건강을 촉진시키는 생활양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자리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베네딕도회의 하루 질서는 자연스러운 신체 리듬과 조화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리듬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하루 질서는 우리를 치유하고 더 생산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기도하고 일하는 시간들이 우리 자신의 자연적 리듬에 맞도록 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하라고 계속해서 우리자신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적절한 날질서를 따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몸과 영혼에 다 이로운지 경험한다. 베네딕도회의ꡒ기도하고 일하라”는 기본적으로 건강한 영성생활은 건강한 생활방식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한 생활방식은 적절한 시간 분배만이 아니라 일상의 주된 일들을 하는 방식과도 관계가 있다. 예컨대, 일 할 때의 몸의 자세가 그렇다. 나는 일 할 때 긴장하는가 아니면 자유로운가?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따라 오는가? 일을 할 때도 역시 하느님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가? 방심하지 않고 깨어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산란하고 흩어지는가?
생활 방식은 우리가 지내는 하루의 모양새를 만드는 여러 가지 습관들도 포함한다. 좋은 습관도 건전하지 못한 습관도 있다. 아침에 침대에서 괴롭게 일어나는 것이나 급하게 아침식사를 먹어치우는 것은 불건전한 습관이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개인적인 습관들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건강한 영성생활은 일정한 생활 방식과 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외적 형식이 없으면 영성생활은 단지 의지의 놀이터가 되고 말며 그러다 보면 항상 과도한 부담을 느끼게 된다. 영성생활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생활방식은 영성생활을 성장하게 하고 몸과 영혼에 치유의 효과가 있다. 한편, 의지에만 기반을 둔 영성생활은 결코 그 의지를 제어할 수 없기에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쉽게 병에 걸리게 한다. 그 결과 의지는 우리 안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의 네 번째 법칙은 기상과 취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수면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 수도승들을 위한 수면 시간을 정해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수도승 전통의 중요한 주제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는 사람은 둔해지고, 어떤 것으로부터 쉽게 도망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진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고 잠에 빠지는 것으로 도피한다. 한편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없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중요성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사람은 쉴 수 없다. 물론 필요한 수면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잠을 지나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 조금 자면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한다.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면장애로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이들이 이것을 정신적 문제의 표시라고 본다. 무엇인가에 억눌려 있기 때문에 혹은 해야 할 일을 결코 마무리하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면장애는 일종의 경고신호이다.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 장애들을 사무엘과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ꡒ말씀하십시오, 주님. 종이 듣고 있습니다.ꡓ이렇게 한다면 더 이상 수면부족에 신경 쓰지 않고 긍정적으로 이 문제를 수용할 수 있다. 잠들지 못할 때 그 시간을 영적인 일이나 기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다음날 수면부족 때문에 일에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일할 수 있으려면 밤에 충분히 잠을 자야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수면을 단지 일을 잘 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은 몸의 여러 가지 기능 중 하나가 될 뿐, 더 이상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장소,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거시는 장소가 될 수 없다. 잠은 몸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영혼을 회복시킨다.
잠을 자면서, 영혼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무의식이 움직여서 꿈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꿈에 나타나는 진실은 의식이 깨어있을 때의 현실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꿈이 말하는 진실을 이해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 무의식은 그날 있었던 일들과 우리가 성장을 향해 가는 여정의 현재 조건들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사물을 이해하는 의식적인 관점은 대개 단편적이기에 우리는 꿈이 말해주는 것을 알아들어야만 한다. 꿈을 통해서 그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 일이 담고 있는 중대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어떻게 우리가 잘못된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바른 길이 있는지, 또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닫고 있는지 아니면 열어 왔는지, 그리고 이제 어떤 걸음을 시작하라고 지시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무의식은 꿈의 형상들을 통해서 말한다. 영적 여정에서 꿈이 하는 말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진실을 무시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유대인 사색가, 바인렙Weinreb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참된 진실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거룩한 생명과 연결된다. 꿈속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 이야기 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내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밤침묵을 중요하게 여겼다. 밤의 침묵은 치유하고 신성하게 하는 자리로, 잠들고 꿈꾸는 것을 돕는다. 밤의 고요함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밤침묵의 한 가운데에서 거룩한 말씀은 우리의 귀를 뚫고 들어오기 위해 내려오신다. 성탄 전례는 밤침묵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시간임을 보여준다.
바인렙은 매일 매일이 우리가 밤의 침묵 가운데 꿈속에서 인식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합리적인 동기나 의지의 의식적인 결정에는 아주 조금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꿈속에서 우리 마음에다 이야기를 하시도록 밤의 경건한 침묵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소란한 밤은 영혼을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오직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음성을 덮어 버린다.
다섯째 법칙은 분비와 배설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얼핏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신체학의 창시자, 그로덱Groddeck은 변비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변비는 한 사람의 정신 구조를 드러낸다. 그는 변비가 있는 사람들은 버려야만 하는 어떤 것을 움켜쥐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연이 그들에게 살아있는 내장 대신 주석으로 만든 파이프관을 준 것처럼 살아간다. 힐데가르드는 내장의 소화 과정을 포도주틀에 비교하였다.
땀과 눈물, 침이나 정액, 소변과 대변처럼 쓸모없고 이질적인 것은 버려진다. 그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ꡒ그것은 마치 포도주 틀을 통과하는 포도와 같다. 주스는 항아리에 담기고, 껍데기와 같은 찌꺼기는 버린다.(Schipperges, 72)”
배설 문제는 性에 관한 주제로 우리를 이끈다.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의 영성은 성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성을 무의식적으로 타부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성스러운 단어들로 성을 승화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영성생활의 여정에 성을 통합시키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혼인한 사람들은 결혼함으로써 성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은 성적인 일치로 온전히 다른 존재,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을 표현한다. 성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가는 길 역시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성적 욕망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됨을 즐기면서 그들의 성 욕구를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킨다. 우선 이 과정에서 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사실 종교인들이 이것을 먼저 인식해야만 한다. 성 에너지는 생명력이 넘치는 에너지이다. 이것을 얼어붙게 만든다면, 반쪽만 살아있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잘 누리면서 생명력, 몸의 생동감,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의 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과 함께 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영적인 방법으로 성을 통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성을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의 에로틱한 흐름이 하느님과의 관계로 흘러들어갈 때 영성생활은 보다 강력하고 결실 있는 것이 된다.
에로스로부터 성이 변화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필수적이다. 진정한 신비주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된 에로스가 필요하다. 요즈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 신비주의자가 너무 적다는 사실은 에로스와 성의 힘을 간과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체험으로 에로스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예로, 아빌라의 데레사와 그라시안,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정수를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만남 안에서 뚜렷하게 보여준다. 정결은 에로스와 성을 억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에로스의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물어야 하며, 사랑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사랑과 애착이 어떻게 그들 자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지 물어야 한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나의 영성생활이 얼마나 견실한지 보여준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에로스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로 보지 않고 차라리 활력을 주는 힘으로 이해하였다. 그라시안Gratian에 대한 사랑은 그녀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고 더 순수하고 내밀한 깊이로 하느님께 가도록 인도하였다. 그녀는 그라시안에 의해 어루만져졌고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랑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더 새롭고 친밀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독신자는 어떻게 성을 영성생활에 활력을 주는 에로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성을 묶어 버리거나 의지적 억압이나 훈련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성을 그대로 통과하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가능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자신의 성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온전히 현존하게 하고, 온전히 살아있게 하고, 온전히 진실하고 참되게 하는 위대한 생명력과 봉헌을 열망한다. 우리가 성에 대해 갖는 기대는 모든 가능한 깨달음을 능가한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적 쾌락을 맛보면서, 성 경험이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부부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로 그들을 인도하기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독신자들이 포기를 통해 성을 승화하는 것과 같다. 신비가들은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의존과 하느님과 하나 되고 싶은 깊은 갈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과 사랑(에로티시즘)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성을 부정하지 않고 성을 생각하였고 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일치를 향한 실존적 갈망을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채워지지 못한 결핍과 다른 성에 기우는 경향을 인정하였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성 문제를 대신 알아서 돌봐주실 거라고 천진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요한네스 타울러나 엑카르트, 힐데가르드나 데레사와 같은 신비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영성이 생명력과 인간미, 자유로움와 광대함, 친밀감과 부드러움을 호흡하고 있음을 느낀다. 에로스로 충만한 영성에 이르게 하는 조제하기 쉬운 처방 같은 것은 없다. 혼인한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성의 차원을 변화시키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독신자들은 하나 되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된 그들의 깊은 상처를 인정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간다. 하느님께서 이 상처를 어루만지시도록 그리고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그분께 봉헌하도록 스스로 허락한다면, 우리의 성은 삶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 주위에 그 결실이 퍼져 나가게 하는 사랑의 흐름이 될 수 있다.
마지막 규정은 열정과 정서, 영혼의 감정들에 관한 것이다. 고대의 치유는 사고와 감정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건강하게 살려면 사고와 감정을 올바르게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사고와 감정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병들게 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병에 걸리게 만드는 생각들에 관하여 특별한 책을 썼다. 그는 자기연민의 감정이나 끊임없는 불평이 한 사람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 어떻게 신체적인 병을 만드는지 설명하였다. 그는 분노의 악신이 인간의 영혼을 삼켜버린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의 종양학자, 칼 시몬톤Carl S. Simonton의 통찰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오랫동안 계속 일어난 분노는 말 그대로 몸의 세포를 삼켜버린다. 정신이 더 이상 분노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몸이 그 반응을 대신해야 하고 따라서 병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지키려면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라는 그런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감정은 인정되어야 한다. 미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단지 억압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몸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런 감정들을 억누르지 말고 바라보아야 하며, 자연스럽게 내적으로 깨어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분노를 인정하고 그것을 잘 이해하면서 바라본다면 쉽게 불같이 성을 내지 않을 수 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 분노를 진심으로 느낀 후에야 비로소 분노를 억압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내밀한 감정, 곧 상대방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격분을 그대로 표현해 버릇하면 화내는 것을 반복하게 될 것이고 내면의 다른 과정이 진행될 수 없다. 자신의 공격성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려하면서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 부모에 대한 공격성은 물론 자녀들을 향한 공격성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여 병에 걸린다.
교부들은 열정을 억압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과 대화하기를 권한다. 포이멘 아빠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열정들로부터 무엇인가 얻어야 하며 또 무엇인가를 열정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조화로워 질 것이다. 단순하게 우리 안의 공격성을 표현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고 성숙을 방해하지만, 그것들을 억압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병들게 한다. 필요한 것은 건전한 통합이다. 오직 이 방법으로 열정들 안에 있는 힘은 유익한 것이 된다. 한 사람에 대한 증오는 언제나 어떤 긍정적인 충동을 포함한다.ꡐ나는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ꡐ나는 나만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ꡑ미움이 너무 오래 가면 자신을 해친다. 그러나 순간적인 증오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걸음을 내딛도록 나를 도울 수 있다. 증오는 필요한 거리를 만들라는 하나의 도전이기도 하다.
수도승들은 사고와 느낌들을 다루는 다양한 원리들을 개발했다. 이러한 원리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보고 긍정적으로 다루라고 요구한다. 수동적인 자세로 감정과 생각을 대한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감정들 자체에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것은 단지 심리학적 관찰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열정을 봉헌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면, 그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파괴적인 힘을 잃어버릴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사야 예언자가 생생하게 표현한 것처럼, 우리 안의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들조차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수도승들의 표현대로, 영성생활은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영성생활을 합리화시키면서 건강을 지키는 하나의 기술로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께 순종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병을 주실 때에도 역시 그렇다. 건강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구원과 건강은 같지 않다. 구원은 거룩한 사람들 안에서 그들의 병을 통해서 드러났다. 바울로는 몹시 고통스러운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계속 간청하였지만 하느님은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불평에ꡒ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능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라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영혼이 건강한 신체에 자리할지, 약하고 병든 몸에 자리할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두어야 한다. 그 자리는 하느님의 힘이 순수한 은총으로 우리가 바라지도 못하는 선물로 더 분명한 모든 것이 되는 자리이다. 이것은 우리의 투명성에 달려있다. 건강한 몸은 하느님의 구원을 주위에 전파한다. 아픈 몸은 그가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성령은 온전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드는 인상은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의 성령과 그분의 능력이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 안에 놓아둔다면, 우리가 신체적으로 건강하든 아프든 상관없이 좋은 일을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바울로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몸에 박힌 가시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씁쓸함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력, 진정함과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고통은 장애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람들과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게 하였다.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아주 깊은 평화를 체험하였고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건강한 사람으로 봉사하든 병든 사람으로 봉사하든 거기엔 다름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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