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

십자가의 성요한

시릴로1004 2009. 9. 28. 17:18

서 문

이 작은 책자를 통해서, 우리는 독자들에게 귀중한 보물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이 보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마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날까지 감춰진 채로 있는 보물이다.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적 교의라는 문제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적 교의는, 예수께서 다음 기도를 통해서 성부께 청하셨던 복음적(福音的) 이상(理想), 우리 가운데에 실현시켜 주시기를 청하셨던 복음적 이상(理想)에 대해, 가장 깊고 가장 분명한 설명을 해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요.'[1] 또한 이 교의는 이 목표에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복음적인 여정(旅程)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교의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영혼의 여정(旅程)'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길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미 이 길을 택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쳐가야 하는 상태들의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우리 목표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들의 실재(實存)에 대한 진실한 의미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젊은이다운 열정을 가지고 등반을 시작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히 세속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합당한 사랑을 점진적으로 또 완전히 들어올리기를 요구하는, 그리고 어떤 생활태도들을 그만큼 변화시키기를 요구하는, 그렇게나 힘든 영적인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의지(意志)였던 모든 것들은 -예를 들면, 가족들이나 주어진 일에 대한 애착들과 근심들은- 전혀 변화시킬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은 그들의 영혼 밑바닥에서 오로지 하느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끝까지 걸어야 할 이 길이 먼 것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우리의 사랑의 너그러움으로 우리가 그 단계들을 재빨리 넘어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배우게 되는 이 길은, 우리 각자의 길들이 이미 다소간에 관련된 고전적인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구나 그 길을 같은 방법으로, 혹은 같은 시간 내에 거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목표에 도달하는 때가 늦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순수한 선성(善性) 그 자체를 통해서 당신과의 합일(合一)이라는 상급을, 마지막에 불리운 사람들에게도 주시면서,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을 다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중에서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2]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나약함은 이제 더이상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영혼이 하느님을 찾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찾고 계신다는 것은 더욱 진실'[3]이고, 영혼이 하느님께로 나아감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그를 지탱해 주신다는 것도 더욱 진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영적 성장을 위한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학식(學識)과 성덕(聖德)을 통한 경험을 가진 안내자 즉 사제 없이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교회와 인류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인(聖人)들을 필요로 한다.

아무도 성인(聖人)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성인(聖人)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점점 더 우리 안에 살아계실 수 있도록, 또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드림으로써 성인(聖人)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온갖 것들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처럼, '전능하신 분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큰 일'[4]을 우리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아드님을 통해 얻게 되기를 바란다.

안젤로 알바니.

마씨모 아스트루아.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누구인가?

종교개혁의 충격을 받지 않았던 16세기의 스페인은, 교회를 위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성인(聖人)들과 학자(學者)들의 요람이었다.

하느님은 귀족과 서민,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그들을 일으키셨고, 당신 사랑으로 그들을 학자로, 사목자(司牧者)로, 또 신비가(神秘家)로 이끄셨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 모든 소명(召命)을 실천하는, 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성인(聖人)이 되는 선물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까스티야(Castilla) 지방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敍情詩人)이기도 했다.

'후안 데 예뻬스'(Juan de Yepes)는 -그가 바로 후에 '십자가의 요한'이 된 사람이다- 1542년 6월 24일 폰띠베로스(Fontiveros)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상류계급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중류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후안은 가난하고 모든 면에서 궁핍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고, 청년시절도 전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서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을 했다.

후안은 자신의 것들에 대해서, 특히 자신의 어머니와 하나 뿐인 형과 조카에 대해서 대단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거룩한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를 대단히 사랑했다. 그가 어느 수도회의 사제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에도, 그는 성모님께 대한 존경 때문에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회'를 택하게 되었다.[5]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Teresa de Avila) -성녀는 성인보다 거의 30세나 위였다- 가 메디나(Medina)에서 이 젊은 사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성녀는 그에 대해서 이런 찬사를 남겼다: '요한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서 소유하신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영혼들 중 한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상적 지혜의 큰 보물을 그분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6] 성녀는 그의 왜소한 체구와 그 위대한 학식을 암시하면서 그를 '나의 작은 세네카'라고 불렀고,[7] 아빌라의 수녀들을 위해서 그를 고해신부로 초대할 때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성인(聖人)이신 고해신부님을 소개하겠습니다.'[8]

요한 신부의 사제생활은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모략을 당했고, 부당하게 구금되기도 했고, 악인(惡人)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인 요한 신부는 그런 고통과 함께 거의 9년을 살았는데, 그는 우리에게 자신은 자신의 불행과 구금생활을 용감한 인내로 견디었음을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의 대단히 신중하고 온순하고 강인한 점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자신이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남에게 호감을 주는 그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말해준다.[9]

성인(聖人)을 잘 알고 있던 또다른 증인인 '순교자들의 엘리세오 신부'(P. Eliseo de los Martires)는, 요한 신부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말을 적게 했으며 가끔 웃기는 했지만 항상 매우 조심성 있었다고 증언한다. 또 엘리세오 신부는, 성인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런 상태를 누리고 있었으며, 성인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더욱 영성적으로 변해가고 더욱 경건해지고 덕행(德行)에 더욱 헌신적인 사람들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단언한다.

성인의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아주 소수의 영혼들만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합일을 주께서 그에게 주셨을 때, 그는 그 경험을 '사랑의 산 불꽃'(Llama de Amor Viva)에서 묘사하면서,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진 영혼의 저술을 마무리해도 좋을 만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1592년 12월 14일 우베다(Ubeda)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그는 짧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병(病)을 치른 후에 세상을 떠났다.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그는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는 1726년에 베네딕도 13세 교황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었고, 1926년에는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인의 생애를 살펴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마리아의 브루노 신부'(Pere Bruno de Jesus Marie, O.C.D.)의 저서 Saint Jean de la Croix (Libraire Plon, Paris)와 Vie d'amour de saint Jean de la Croix (Ed. Desclee de Brouwer, Paris)를 추천한다.[10]

일러두기[11]

- 우리는 독자들이 부록 1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사상을 정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필요한 중요한 심리학적(心理學的) 개념(槪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임을 알린다.

- 부록 2는, 성인의 작품들을 읽는 데에 유익한 몇 가지 제안들을 함축하고 있다.

- 부록 3에는, 이 번역에 사용된 불어판 책 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리판 (Mimep-Docete, Pessano (Milano), 1991, pp.172)에 대한 서평(書評)을 번역· 소개한다.

- 부록 4에는, 이 책에서 소개된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 의해 그려진 '완덕의 산' 그림의 내용을 우리말로 옮겨 실었다. 그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될 수 없으나, 두 원저자들이 쓴 글과 함께 그림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면, 독자들의 이해에 조그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 책에 인용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들은, 부분적으로는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을 차용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 회 Lucien-Marie de Saint Joseph 신부님에 의해 1959년에 출판된 불문판 전집 (Ed. Desclee de Brouwer, Paris)과 Kieran Kavanaugh 신부님에 의해 1973년에 출판된 영문판 전집 (Ed.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 Washington), 그리고 1993년에 출판된 스페인어판 전집 (Editorial de Espiritualidad, Madrid)을 참조해서 새로운 번역을 시도했음을 밝힌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주요 작품들의 참조를 위한 제목은 아래와 같이 약어로 표시하겠다.

산길 = 가르멜의 산길 (Subida del Monte Carmelo)

밤 = 어둔 밤 (Noche Oscura)

노래 = 영혼의 노래 (Cantico Espiritual)

불꽃 = 사랑의 산 불꽃 (Llama de Amor Viva)

약어에 이어지는 숫자들은 순서대로 그 책의 권· 장· 절을 표시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

1장. 실재(實在)를 발견하게 하는 신앙(信仰)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특징짓는 것은, 그의 구체적(具體的)인 현실감각(現實感覺)이다.

신비가(神秘家)를 마치 사람들의 구체적인 문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사상이다.

모든 진정한 신비가(神秘家)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공상(空想) 안에서가 아니라 현실(現實) 안에서 살았다. 건전한 판단력(判斷力)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는 실재(實在)를 인식(認識)하기 위해서, 겉모양도 철학자(哲學者)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믿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의 신앙(信仰)이라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빛에 의존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인은 신앙의 빛 안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실재(實在)들을 보았다;

- 절대적이고 영원한, 다른 모든 실재들의 근원인 실재, 즉 하느님.

-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그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는 실재들, 즉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

2장. 인간의 운명; 하느님과의 일치(一致)의 삶.

1. 그리스도교적인 삶

하느님과 인간, 이 두 실재(實在)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 두 실재(實在)는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啓示)해주는 것은 역시 신앙(信仰)이다.

이 합일(合一)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은, 인성(人性)을 취하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던 하느님의 아들의 인격(人格) 안에서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모두의 원형(元型)이시다. 성부(聖父)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성자(聖子)를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고, 우리는 당신 성자(聖子)의 모습을 닮게 하셨다.[12]

인간에 대한 모든 신학(神學)의 핵심은 바로 이 '예정(豫定)' 안에 있는데,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인간은 오로지 예수의 '살아있는 모상(模像)' (copie vivante)으로 간주되고 있다.

2. 자녀적인 삶

예수 안에서 우리의 변모를 이루어 주시는 분은 성령(聖靈)이시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께로부터 파견되신 성령(聖靈)께서는, 우리를 예수 안에 변모(變貌)시키시고 우리가 성자(聖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면서, 예수의 생명[13]으로 우리 영혼을 비추러 오신다.[14]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15]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16]

3.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인 삶

성령(聖靈)의 위격적(位格的)인 현존(現存)은, 성령의 신적(神的) 본성(本性)이 지닌 본질적인 단일성(單一性)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느님의 다른 두 위격(位格), 즉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를 모셔들여, 예수의 다음 말씀 그대로 성삼위(聖三位) 전체를 우리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시게 한다: '우리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17]

따라서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께서는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양식으로 생활하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변모(變貌)되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체험하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우리의 '삼위일체 안에서의 변모'[18]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졌고, 바로 그것을 자신의 모든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의 바탕으로써 표제로 내어놓았다. 영혼은 영혼 자신 밖에서가 아니라 영혼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과의 독특한 합일(合一)을 실현시킬 것이고, 이 합일은 영혼 안에 단순히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의 생명에 완전히 참여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인은 우리에게 말한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聖三位) 안에서 분명하고 명백한 방법으로 영혼이 변모되지 않는 한, 하느님 안에서의 진실하고 완전한 변모란 있을 수 없다.'[19]

성인은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그렇게 고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신화(神化, deiforme)되어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聖三位) 안에 일치되어 있게 하시니, 그 안에서 영혼이 '참여'로써 하느님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聖靈)을 숨쉬며 살아계신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본성적 활동 자체에 영혼이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삼위일체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왜 믿어지지 않는가?'[20]

'비록 그것이 저 세상에서 만큼 완전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영혼이 완덕(完德)의 상태에 도달할 때에, 영혼은 그 상태를 미리 맛볼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얻게 된다.'[21]

성인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오, 이 위대함들을 위해서 창조된 영혼들, 이 위대함들에 초대된 영혼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무슨 일로 소일(消日)하고 있는가? 그대들의 소망은 비열하고 그대들이 소유한 것들은 비참한 것들이구나. 이토록 밝은 빛 앞에서 그대들은 어찌 눈이 멀었으며, 이토록 우렁찬 소리 앞에서 그대들은 어찌 귀가 먹었는가?'[22]

우리로서는, 이 값비싼 진주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진정 모두 팔도록 결심하게 하기 위해서, 신앙(信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귀한 진리(眞理)들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이 값비싼 진주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23]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함을 말하는 것이다.

3장. 우리 안에서의 하느님 생명의 성장

하느님의 내적(內的)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참여는 천상 영광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지만, 그 참여는 -많게 혹은 적게 진보한 성장의 상태에 있기는 하나- 이 지상에서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다.

1. 생명과 생명력(生命力)

어린 아이는, 태어나는 때부터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만을 한다. 배가 고프면 울고, 만족하면 웃는다. 어린 아이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훈련을 통해서 더 적절하게 인간적 활동을 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성장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는 때부터 그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적합한 활동을 완전히 하는 데에, 또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을 실천하는 은총에 도달하는 것은 오직 조금씩 조금씩만 이루어진다.

실제로, 거룩해진 인간 안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세례 때에 활동하기 시작하신 성령(聖靈)께서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의 친밀함 안에 인간이 들어간다는 것과,

- 인간의 모든 행위들에 이 생명이 통교(通交)된다는 것인데, 이는 대신덕(對神德, 向主德)에 의해 이루어지고,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계속 증진된다.

2.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은, 인간의 행위들을 하느님의 생명에 밀접히 결합시키고, 그리스도 그분의 행위들의 완전함에로 인간의 행위들을 들어높임으로써, 인간의 행위들을 거룩하게 한다. 이 때문에 신덕· 망덕· 애덕을 '대신덕(對神德)' 혹은 '향주덕(向主德)'이라고 부른다.

신덕(信德)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실재(實在)를 인식(認識)하고 판단하시는 것처럼 실재를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 망덕(望德)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예수께서 성부(聖父)의 영광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곳에로 방향지워 준다. 애덕(愛德)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듯이 사랑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신덕(信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생각하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고, 망덕(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바라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고, 애덕(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대신덕(對神德)의 수업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이 덕(德)들의 성장이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와의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나, 보다 외적(外的)이고 보다 가시적(可視的)인 표시들에 있어서나, 신적(神的) 생명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3. 성령(聖靈)의 선물들

대신덕(對神德)의 훈련은 성령(聖靈)의 선물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 성령의 선물들은, 덕(德)들에 대한 훈련을 이처럼 쉽게 하는 하느님의 도움에 대해서, 우리가 민감하게 또 순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영혼이 특히 대신덕(對神德)의 수업에 열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덕(德)들이 실천되면 실천될수록 성령의 선물들이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되기 때문이다.[24]

4장. 인간의 몫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과의 합일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 당신의 주도권(主導權)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성장되고 완성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인 대신덕(對神德)의 훈련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대신덕(對神德)은 병행(竝行)· 발전(發展)되는 두 가지 일, 즉 정화(淨化)와 기도 안에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1. 정화(淨化)

신덕· 망덕· 애덕은 하느님을 최고선(最高善)으로, 무한히 매력적이고 무한히 사랑스러운 최고선(最高善)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25]

하느님께 대한 이 전적(全的)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격렬히 끌어당기는 감각적(感覺的)인 피조물(被造物)들에 대한 사랑과 대조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만 돌려져야 할 이 사랑의 한 몫을 하느님 아닌 피조물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이 피조물들을 마치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 양 사랑하게 되는 위험을 날마다 겪게 된다.

무질서(無秩序)란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은 모두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직접 피조물들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음으로써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우리가 앞으로 말하게 되겠지만-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 또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애착을 피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에 대항해야 함은 불가피하다. 바로 여기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 사랑의 점진적(漸進的) 이탈(離脫)인 정화(淨化)가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의 정화(淨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만큼, 다시 말해서, 우리 의지(意志)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무질서한 방법으로 - 즉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 사랑은 더럽고 불순한 사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로 향하기에 부적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인의 말씀대로, 새가 노끈으로 지상에 묶여 있는 한, 노끈이 아주 가늘다고 하더라도 그 새는 하늘로 날 수 없다.[26] 마찬가지로, 마음이 피조물들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비록 가늘다고 할지라도 그 노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러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끊어버려야 할 노끈은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 즉 하느님 때문이 아닌 피조물 자체 때문에 그것들을 원하는 그런 사랑이다.

따라서, 정화(淨化)에 관심을 가진 영혼이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합당한 일이나 자기 생활에 유익한 사물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피조물들을 직접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도 더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부부(夫婦)의 사랑을 예(例)로 들어보자.

남편은 아내를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동기는 바로 아내 자신이고, 아내가 완전할 수 있기를 바라나, 아내는 항상 피조물로서 머물러있게 된다. 이런 사랑은 당연히 자기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매여 있게 되고, 지상적(地上的)인 행복에만 한정될 것이다.

- 만일, 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아내의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같은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좌우되지도 않고, 순전히 지상적(地上的)인 행복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랑은 아내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합일(合一)을 지향(指向)하는 그런 사랑이 될 것이다.

이 두번째 사랑이 첫번째 사랑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합당한 일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상급들이나 고통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또 우리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도 고통도,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병고(病苦)도, 또는 죽음 자체까지도,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착한 이탈 안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깊은 평화 중에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다양한 사물들, 가령 집이나 식량이나 돈 따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도, 그것들에 우리 마음을 집착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그런 것들에 우리 행복을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수단들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의지(意志)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사랑하기를 포기(抛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을 최대한으로 증진(增進)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중시키는 탁월한 목표를 가지고, 피조물들에 대한 의지(意志)의 완전한 이탈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神的) 사랑의 완전함과 힘을 가지고 다시 피조물들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2. 기도

의지(意志)의 정화(淨化)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새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땅에 묶어두는 노끈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개를 움직이고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영혼의 이 '날아오름'이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하느님의 의지(意志)에로 밀착시키는 것,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對話)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인간은 대신덕(對神德)을, 특히 애덕(愛德)을 최대한으로 실천하게 된다.

신덕(信德)으로 기도하는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과 존경은 점점 커나가고,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에 대한 존경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망덕(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실 만한 탁월한 분이심을 발견하고서 영혼의 모든 욕망을 그분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애덕(愛德)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영혼을 하느님께 항상 더 완전히 밀착시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는 -즉, 대신덕(對神德)으로 배양된 기도는-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상태에로 인도한다. 거기서는 더이상 두 의지(意志)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의지(意志)만이 존재하니, 하느님의 의지가 바로 영혼의 의지가 된다.[27]

정화(淨化)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의지(意志)의 이탈이 하루의 모든 행위들 안에 미치는 동안, 우리는 기도에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기도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福音)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셨다'[28]는 것과 '밤새도록 기도하셨다'[28]는 것을 전해준다.

기도에 바쳐질 시간은, 각자의 고유한 능력들과 필요성들에 따라 각자에 의해 선정(選定)되어야 한다. 일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평신도들도, 하루에 30분이나 15분 정도 조용한 곳에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암시해 주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30]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있어서, 영혼이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행위들이다. 우리는 점점 더 완전한 기도의 형식(形式)을 원하지만, 모든 기도의 본질(本質)은,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이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성실하다면, 그의 의지(意志)와 하느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루의 모든 행위들에 확산되고, 예수의 다음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점점 습관이 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31] 이 말씀은 '삶의 모든 상황들 안에서 항상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원하라'는 뜻이다.

5장. 합일(合一)의 ; 무(無)와 전(全)

 

 

십자가의 성 요한은 깔바리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던 때에 '완덕(完德)의 산(山)'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시 그려졌고,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영혼들을 이끄는 여정(旅程)의 전체 모습을 영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의 지도를 받던 영혼들에게 이 그림을 나누어주었다.

 

이 귀중한 도움이 독자(讀者)들에게 더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히 성인의 그림을 -그 내용은 충실히 보존하면서- 단순화(單純化)시켜본다.

 

이 산의 정상(頂上)은 하느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이는 영혼이 갈망하는 목표이고, 영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표인데, 특히 등반이 더 엄한 희생을 요구하는 때에 그러하다.

산의 기슭에서 세 갈래의 길이 시작된다.

- 오른쪽의 길은 지상(地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이다: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산을 벗어나 길을 잃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말씀이 적혀 있다: 그 첫째는 '내가 그것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들을 더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네가 이 길을 통해서는 그 산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 왼쪽의 길은 천상(天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인데, 그들은 산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넘을 수 없는 어떤 바위로 인해 멈춰버린다. 여기도 역시 두 개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 표지판들은 영혼의 즐거움들을 찾거나 그런 것들로 만족해하는 자는 누구나 순수한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에 도달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 가운데의 길은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길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완덕(完德)의 좁은 길이다.[32] 이 길은 순수한 하느님 사랑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무(無)'로 표시되어 있다: 영예도, 휴식도, 맛도, 자유(自由)도, 재능도, 영광도, 안전(安全)도, 기쁨도, 위로도, 지식도… 아니고,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로 영혼을 직접 인도하는데, 거기서 영혼은 자신이 걸어온 전체 여정(旅程) 안에서 체험한 무(無)보다도 더한 무(無)의 심연에 삼켜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하느님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분명히 이 무(無) 안에서이다: '내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원함 없이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여기서는, 무(無)의 길은 자신의 한계를 잃고 그 산(山)과 혼합된다: '여기에는 더이상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법이 없고, 그 자신이 자신의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은 하느님의 힘에 내맡겨지고,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만 이끌리게 된다.

이 후에는, 모든 것을 행하고, 영혼을 마지막 찌꺼기들로부터 정화(淨化)시키고, 하느님의 고요한 기운들과 하느님의 선물들 덕택으로 영혼의 마지막 한 올까지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대단히 아름다운 영혼을 바라보시고 그 영혼을 마치 당신의 정배처럼 사랑하시면서, 당신 자신 안에서 그를 변모시키심으로써 그 영혼을 영원한 잔치에로, 거룩한 침묵과 거룩한 지혜가 다스리는 영원한 잔치에로 들어가게 하신다.

성인은, 용기를 가지고 무(無)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산의 밑부분에 다음과 같은 몇 귀절들을 놓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33]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을 향하는 영혼 안에서, 영혼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더욱 변모된다.

 

이 길의 출발점(A)에서는, 영혼 안에 '나'는 최고도에 달해 있고, (세례로 인한) 하느님의 실체적(實體的) 현존(現存)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의 실체적 현존은 영혼의 활동 밖으로 밀려나 있다. 대신덕(對神德)을 훈련함으로써 영혼이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애착들로부터 비워진 자리를 확장시킬수록, 하느님께서는 이 빈 자리를 채워주시고(B), 결국 영혼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무(無)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하느님으로 완전히 채워지고, 하느님 안에서 변모된다(C).

이제 우리는 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의 박사(博士)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이신 '전(全)'을 소유하는 데에 다다르기를 원하는 영혼에게 있어서, 해야할 과제는 한 가지 뿐이다: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무(無)'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해주신다.

'하느님은 마치 태양과도 같이,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자 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비어있고 정화되어있음을 발견하시면, '하느님은 그 영혼 안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선물들로 그 영혼을 채워주신다.'[34]

따라서 합일(合一)의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포기(抛棄)를 통해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 편에서 본다면, 영혼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지배(支配)이고 장악(掌握)이다. 이것은 결국, '영혼이 온전히 무(無)에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께서 친히 영혼과 당신 자신과의 영적인 합일(合一)을 이루어주시는 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이 합일은 사람이 이승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상태를 만들어준다.'[35]

6장. 합일(合一)의 여정(旅程)의 각 단계들

우리는, 우리의 논리전개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불충분하게 보이거나 혹은 사물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향한 긴 여정(旅程)을 따라 독자(讀者)들을 안내하고자 하는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그 여정(旅程)에 대해서, 도식(圖式)으로 각 단계들을 묘사하고자 하는데, 번호를 매긴 각 칸을 따라 그림을 분리시켜서 한 칸씩 해설을 덧붙여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 여정(旅程)은, 복음적(福音的)이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각자는 이 안에서 확실한 지침(指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각 영혼 안에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방법과 서로 다른 시기를 통해서 인격적(人格的)으로 성화(聖化)되도록 하시니, 우리의 거룩한 사부(師父)께서 제시하신 도식(圖式)과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부 성 요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한다: '하느님께서는 각 영혼을 그의 고유한 길을 통해서 이끄신다. 그래서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 다른 길과 절반쯤 일치되는 한 길을 찾아내기도 대단히 어렵다.'[36]

1.

 

이 도식(圖式)은 그 전체를 끌어안는 '밤'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지배된다. 실제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도달하기 위한 영혼의 길은 '밤'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첫째로,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맛을 스스로 끊는 그 출발점의 문제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에 있어서 진정한 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혼이 걸어야만 하는 길의 문제인데, 그 길은 신앙이니, 지성(知性)에 있어서는 밤과 같이 깜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영혼이 인도되는 목표의 문제인데, 그 목표는 하느님이시니, 이 목표 역시 영혼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영혼에게는 깜깜한 밤이기 때문이다.'[37]

그런데, 이 '밤'이라는 명칭(名稱)은 실재(實在)와 일치한다. 영혼은 사실 맹인(盲人)처럼 완전히 어두움 속에 빠져서 이 밤의 여행에 유일한 안내자인 신앙(信仰)에 손을 내맡기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 걸어간다.

2. 능동적(能動的) 밤과 수동적(受動的) 밤

 

영혼은 항상 신앙(信仰)에 의해 인도되면서, 이 길의 출발점에서부터 정화(淨化)와 기도에 능동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모든 것이 영혼 자신에게 달려있는 듯이 충실성과 항구함을 가지고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한다.

의지(意志)가 피조물에 대해서 충분히 이탈되고 비어있게 되면, 하느님은 영혼을 철저히 정화(淨化)시키시고 당신께로 강렬히 끌어당기시면서, 이 비움의 자리를 당신 자신으로 채우러 오신다. 영혼은 오로지 극도의 겸손으로 자신을 수동적으로 내맡기고, 항상 오로지 신덕(信德)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밤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영혼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능동적(能動的)인 밤과 하느님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수동적(受動的)인 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도식(圖式)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리(分離)되어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두 부분은, 하느님께서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능동적인 부분이 밤의 길에서 무엇보다 첫째 부분을 차지하고 수동적인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각 단계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7장. 출발점

 

영성(靈性)의 산(山)을 오르기 위한 출발점은, 이미 소죄(小罪)에서까지도 벗어나 있고 좋은 목표인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에 이르는 위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 의지(意志)이다.

이는 이 영혼이 더이상 죄에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죄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하느님께로 결정적으로 돌아선, 그런 의지(意志)이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 대로, 이 길에서 진보(進步)하기 위한 '영혼의 걸음걸이'는 정화(淨化)와 기도이다. 이 둘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 중요한 특징들만을 열거해 보자:

- 정화(淨化)와 기도는 병행적(竝行的)으로 진보하는데, 결과적으로,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정화(淨化)의 어떤 '단계'는 기도의 어떤 '형태'와 상응한다.

- 정화(淨化)와 기도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 정화(淨化)의 증가나 감소는 기도의 증가나 감소를, 기도의 증가나 감소는 정화(淨化)의 증가나 감소를 반드시 유발(誘發)시킨다.

- 정화(淨化)와 기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세한 활동이 영혼의 활동일 때는 능동적이고, 영혼이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반면 하느님께로부터 우세한 활동이 나오는 경우는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영혼의 수동성(受動性)'은 '한가함'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순응성(順應性)· 온순함'과 같은 말이다. 이 순응성(順應性)은 산의 정상(頂上)을 향한 영적 활동을 요구하는데, 영혼이 오로지 받기만 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8장. 감각의 능동적 정화(淨化)

 

이 단계에서 영혼이 성취해야 할 목표는 '감각적인 모든 맛과 모든 자기만족에 대한 거절'이다. 사실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이 세상의 사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맛이다.'[38]

영혼은 피조물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이탈하지 못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맛으로부터 그 의지(意志)가 이탈하지 못한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淨化)시킬 수 없다.

1. 첫 단계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사물들의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聖人)은 우선 우리의 취미와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그처럼 영혼들은, 거룩한 일들 안에서 자신이 찾아낸 맛의 덕분으로, 다른 모든 맛들을 쉽게 포기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하는 짓과 비슷한데, 우리가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면, 그 어린이들이 빈 손으로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쥐어준다.'[39]

그 때문에, 아직도 잘 먹고 편안하게 살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술집이나 TV 앞에서, 혹은 더 나쁘게는 감각적(感覺的)인 쾌락 안에서 당장에 자신의 맛을 낙으로 삼고 추종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보다 영적(靈的)이고 고상한 수준에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의무 수행이나 애덕(愛德)의 실천이나 기도의 실천, 묵상, 영적 독서, 또 관대함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킬 만한 고행(苦行)의 실천에 전념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즐기던 것보다 더 고상한 감각적(感覺的)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지상적인 만족을 찾느라고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는 낭비된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의 감성은 '영적(靈的) 보화들의 맛으로 풍부해지게 되고, 물질적인 보화들로부터 이탈하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데에도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40]

2.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화(淨化)

불완전한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이 첫 단계의 결과가 이미 큰 성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곧장 두번째 단계로서 보다 결정적(決定的)인 진보(進步)에로 넘어가야 한다. 즉,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감각적인 맛에 대한 전적(全的)인 고행(苦行, mortification; 즉, 절제, 금욕, 혹은 죽음)에로 넘어가야 하고, 이는 영적(靈的)인 분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감각(感覺)의 능동적(能動的) 정화(淨化)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대단히 많은 영혼들이, 심지어는 수도자들까지도, 자신들을 정화(淨化)시키는 이 훈련에 과감히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로서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게는 되지만, 하느님과의 일치 합일(合一)이라는 거룩한 모험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은 없이, 기다림 속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관대한 영혼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감각(感覺)들은 무척 조잡하고 물질적인 능력들이어서 순수한 영(靈)이신 하느님께 내가 도달하도록 할 수 없다. 내 감각들은 기껏해야 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조금 쉽게 할 수 있을 뿐, 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다 . 그러니,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지만, 그것들에 의지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을 원함이 없이 그냥 이용하겠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이미 자기가 지나온 다리(橋梁)를 뒤에 남겨두고 걸어가듯이, 그것들을 담담하게 넘어서서, 이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무한한 사랑이신 분께로만 내 마음을 향하겠다.'

3. 정화(淨化)의 구체적인 규범들

이 관대한 영혼들에게 성인(聖人)은 다음과 같은 정화(淨化)의 규범들을 제시한다: '고귀한 마음으로 관대하게 정화(淨化)를 실천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그 영혼은 감각의 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1]

우리는 이를 네 가지 점에서 요약한다:

- 예수께 대한 모방

-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淨化)

-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

- 자애심(自愛心)에 대한 정화(淨化)

이것들을 하나씩 설명해 보자.

●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함

'우선 영혼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항구한 원의를 가질 것이고 ,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기 위해서 그분의 생애를 묵상할 것이다.'[42]

성인의 이 말씀은 근본적(根本的)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닮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앞으로 보게 될 여러 점들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규범들은 참아견딜 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불이 타고 있다면, 가장 무겁게 느껴지던 희생도 가벼워질 것이고, 본성(本性)으로는 가장 괴롭던 포기도 감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4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성인(聖人)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욕망이 한결같아야 하고, 그 영혼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들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루의 봉헌'이나 단순한 '습관적인 지향(志向)'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포기를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다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새로와지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淨化)

예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意志)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둘째는, 하느님의 영예와 하느님의 영광에서 기인하지 않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영혼이 포기하는 일인데, 이는 지상 생애 동안 성부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즐거움도 갖지 않으셨고 갖기를 원하지도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44]

그리고 여기서 성인은 현명하고도 실천적인 두 가지 권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a) '무엇을 듣거나, 보거나, 혹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또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봉사하지 않는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이 있거든, 가능한 한 그것들을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소유하거나 행하지도 말고, 피하라.'[45]

b)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네가 피할 수 없는 그것들의 맛을 즐기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46]

그렇게 처신하면서 영혼은 '단시일 내에 덕(德)에 있어서 크게 진보할 것이다.'[47]

●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

감각의 정화(淨化)에 있어서, 영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성(本性)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향해서 자신의 의지(意志)를 정향(定向)시킴으로써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를 실천해야 한다.

사실 욕(慾)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감각에 즐거운 것에 집착하도록 한다. 이 욕(慾)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慾)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성적인 욕(慾)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慾)들에 대한 반격을 행함에까지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 사부 성 요한도 분명히 말한다:

'욕(慾)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

영혼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에로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48]

● 자애심(自愛心)으로부터의 정화(淨化)

성인은 마침내 자애심(自愛心)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묘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自愛心)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성인은 세 가지 규범을 제시한다:

'첫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없이 보도록, 남이 모두 자기를 업신여기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도록, 남이 모두 낮추어 말해 주기를 바랄 것.

셋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남이 모두 낮추어 생각해 주기를 바랄 것.'[49]

감각(感覺)의 정화(淨化)의 마지막에서, 영혼은, 놀라운 일이자 그 자신의 보다 큰 기쁨으로서, 모든 지상적인 맛들과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설사 전에는 감각적인 집착들이 마치 땅에 깔린 송진처럼 발에 붙어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 애착들이 끊어져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님과의 합일(合一)을 즐기기 위한 진정한 자유에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50]

9장. 묵상기도

 

모든 기도는 대화(對話)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의지(意志)를 하느님의 의지(意志)에 일치(一致)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對話)이다.

1. 기도의 세 가지 방법

첫째 방법은, 영혼이 '주의 기도'나 혹은 다른 말로써, 자신이 그분을 믿는다고, 자신이 그분을 사랑한다고, 또 자신이 그분의 모든 것을 희망한다고 표현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구송기도'인데, 이 기도 안에서 영혼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하느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으시게 된다.

둘째 방법은, 영혼이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 -예를 들면,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편재(偏在)하심 등- 이나, 혹은 예수님의 생애의 신비 -예를 들면, 그분의 매맞으심- 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 -예를 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지킨다' 하신 말씀- 을 주의깊게 생각하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불태우기 위해서 상상력(想像力)까지 이용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묵상(默想)'이라고 불리우는 기도인데, 바로 이 묵상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이 장에서 논할 것이다.

셋째 방법이자 기도의 더욱 완전한 단계는,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선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 때 영혼은 드디어 유일하고도 총괄적인, 사랑에 가득찬 시선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분의 거룩한 빛을 받고 엄청난 평화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이 '관상(觀想)'의 기도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앞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2. 묵상의 방법

감각의 정화(淨化)는,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영혼이 예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모방하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정화(淨化)는 묵상(默想)을 동반해야 한다. 묵상의 목적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대로, 바로 '그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식(認識)을 조금이나마 얻어내기 위한 것'[51]이고, 감각의 정화(淨化)를 위한 끈질긴 싸움 안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묵상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된다.

- 우선, 성당이나 자신의 방 같은, 외부의 번잡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조심스레 머르무는 것이 좋다.

- 거기서 맨먼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現存), 혹은 우리가 성당 안에 있다면,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現存)에 대한 신덕(信德)의 행위들을 실천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現存)과 그분께서 우리를 지배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분과 친밀하게 사귄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 여기서 영혼은, 어떤 신비(神秘), 즉 하느님의 어떤 특성이나 하느님의 어떤 말씀에다 주의를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묵상하고자 하는 어떤 신비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 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어떤 책을 읽음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영혼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러면, 영혼은 그 사랑에 사랑을 통해서 응답하고, 예수님과의 대화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결국, 영혼은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그분께 말씀드리게 된다: '예수님, 왜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제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까? 왜 저는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도대체 왜 저는 제 죄들로써 당신께 상처를 드리고 있습니까?' 영혼은 이어서, 전에는 한 번도 청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청하게 된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과 함께 고통받게 해 주십시요!'

- 그 후에는, 대화는 중단되고, 그리스도를 향한 어떤 사랑의 눈길 안에서 영혼은 변모된다. 이 사랑의 눈길에는 종종 사랑의 감명과 눈물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 태도는 여전히 더 영적(靈的)인 것이 되어야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위해서 고통받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단호하면서도 평온한 의지(意志) 안에서 스스로 더 변모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 영혼 안에 주입시키기를 원하는 '인식(認識)과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10장. 능동적 관상의 기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묵상을 실천하고 묵상을 통한 모든 노력의 결과인 이 '예수께로 향하는 사랑의 눈길'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묵상에 있어서 즉 책을 읽고 특정한 주제(主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총괄적이고 사랑에 가득찬 이 눈길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영적(靈的)인 맛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눈길' 때문이다. '처음에 영혼은 특별한 인식(認識)에 대한 묵상에서 피곤을 느끼면서 이 사랑의 눈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사랑의 눈길은 그 영혼 안에서 습관이 된다.' 그래서 '영혼이 하느님 앞에 있게 되자마자, 그 영혼은 즉시 아스라하고 사랑스럽고 평화로우면서도 조용한 이 인식(認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지혜와 사랑과 그윽한 맛을 음미하게 된다.'[52]

전에는 이 영적인 물을 조금 길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하면서 피곤을 느껴야 했는데, 이제부터는 손쉽게 물을 길어내게 된다.[53]

전에는 그 열매의 알맹이를 얻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통해 그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닦아야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먹을 수 있게 이미 다 준비된 것을 얻어내게 된다.[54]

그 때문에, 성인(聖人)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내적(內的)인 체험에 다다른 영혼은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 읽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고, 실행 -즉 그 물과 열매의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그 때까지는 그렇게 필요했던 행동방식-을 전적(全的)으로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곧장 사랑으로 가득찬 침묵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 침묵은 온갖 추리나 부질없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를 예수님께로 일치시키게 된다.

이 기도는, 추리적 묵상과 수동적 관상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능동적(能動的) 관상(觀想)'이라고 불린다.

모든 영혼들은, 진정으로 성실하게 항구히 묵상을 한다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만 한다.

11장. 영의 능동적 정화

 

묵상 안에서 축적되어왔고 또한 관상의 출발점이기도 한 '예수께 대한 사랑'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길에서 새로운 한 걸음을 재빨리 내딛게 한다. 감각의 정화(淨化)가 영혼 안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정적(情的)인 면에서의 이탈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즉 영적(靈的)으로 하느님께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 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靈)의 능동적 정화(淨化)' 혹은 '영(靈)의 능동적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지성(知性)과 기억(記憶)과 의지(意志)이다. 영혼의 정화(淨化)는 이 세 가지 능력들로 하여금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즉:

- 지성(知性)으로 하여금 신덕(信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認識)하게 하고,

- 기억(記憶)으로 하여금 망덕(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원하게 하며,

- 또한 의지(意志)로 하여금 애덕(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다.

좀더 분명히 설명해 보자:

우리의 영적(靈的)인 능력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듯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의 영적(靈的) 능력들은 피조물 안에서 그 고유한 대상(對象)을 찾기 때문에, 감각적인 실재(實在) 안에서 그 대상을 찾아낸다. (부록 I 참조).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태초로부터 계시는 분,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에 존재하시고 피조물들보다 무한히 높이 존재하시며 피조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지성(知性)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천상적 존재이든 지상적 존재이든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과 창조주 하느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55]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지성(知性)이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과 비슷한 그 무엇을 알 수는 없다. 의지(意志)도 하느님 안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그런 맛이나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기억(記憶) 역시 하느님을 나타내는 어떤 지식이나 어떤 영상을 자신의 상상 안에서 만들어낼 수는 없다.' [56]

성인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창조된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과의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자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들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57]

비유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모래 위에서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면,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고 추론(推論)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이상, 우리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지성(知性)은 감각(感覺)의 덕택으로 만물에 대해서 열려 있고, 거기서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세상 안에서, 또 하느님의 속성들 (아름다움, 선함, 슬기로움 등)을 가진 어떤 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우리 지성(知性)은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 지성(知性)은 '그분'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모래 위의 발자국을 아무리 찾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만이 인간적(人間的)인 덕(德)이 아닌 신적(神的)인 덕(德)으로서,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고 우리를 실제적으로, 다른 중개 없이 성삼위(聖三位) 하느님께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하느님 안에서의 자신의 변모를 원하는 영혼은, '이 세 가지 능력 -지성, 기억, 의지- 을 대신덕(對神德) -신덕, 망덕, 애덕- 에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는 세 가지 능력들을 대신덕(對神德)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벗기고 어둠 속에 둠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능동적'이라고 부른 영(靈)의 '밤' -혹은 정화(淨化)- 이다. 왜냐하면, 이 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혼 편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58]

우리가 짐작하건대, 하느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연이 영혼에게 준 모든 방법들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즉 영혼이 자신을 정화(淨化)시키면서, 영혼은 오로지 대신덕(對神德)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제 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의 하나하나에 해당되는 행위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훈련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보도록 하자.

● '지성(知性)의 밤'은 신덕(信德)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 지성(知性)의 밤은 피조물들에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 발전되는 것 만큼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도 발전되어야 한다.

a) 하느님을 또 신적(神的)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지성(知性)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신덕(信德)만이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면 믿음은 그분을 무한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시라면,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등등.[59]

신덕(信德)만이 완전하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제시한다. 사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또 단 한번에 말씀하셨고, 따라서 다시 더 말씀하실 것을 지니고 계시지 않는다.'[60]

신덕(信德)만이 확실한 방법으로 또 모든 이들이 얻기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의 신비(神秘)들과 하느님의 진리(眞理)들을 누구나 단순성(單純性)과 교회가 그것들을 제시하듯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것들을 알아듣고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61]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영혼의 논리적(論理的)인 인식(認識) 전체를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게 반드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마련이긴 하지만- 밤의 휘장으로 덮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느님께 대한 참되고 확실한 인식(認識)만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신덕(信德)의 발전은 기도 중에, 특히 묵상(默想)과 관상(觀想)의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데, 기도는 이제부터 대단히 순수한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되어야만 한다.

b) 게다가, 영혼은 창조된 모든 실재(實在)들을 신앙(信仰)의 빛으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천지만물의 아름다움 안에서,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現存)과 그분의 사랑을 알아본다: 들에 핀 꽃들은 '님의 손으로 심어진' 것들인데,[62] 이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선물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 아름다움과는 관계없이 영혼에게 무한히 소중한 것들이다.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님이시여, 그대는 우뚝한 산들,

쓸쓸하고 그늘진 골짜기들,

묘하디 묘한 섬들,

소리내며 흐르는 강들,

사랑을 싣고 오는 바람소리.'[63]

신덕(信德)은 영혼으로 하여금 새로운 빛으로 천지만물을 관상(觀想)하게 하는데, 이 새로운 빛은 사물들의 겉모양에 마음을 두지 않고 가장 참된 감각(感覺)의 내면(內面)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 창조주를 계시하도록 마련된 가장 정확한 성질을 알아보게 한다.

'오오, 수정같은 샘이여,

은빛 나는 네 얼굴에서

내 그리워하던 그 눈들을,

내 안에 그려 지닌 그 눈들을

재빨리 마련했더라면!'[64]

하느님을 찾음은 항상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로써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로 드러난 피조물들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된다:

'하늘들도 나의 것, 땅도 나의 것, 사람들도 나의 것,

의인들도 나의 것, 죄인들도 나의 것,

천사들도 나의 것, 하느님의 모친도 나의 것,

만물이 다 나의 것이요,

하느님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니,

그리스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로다!'[65]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인생의 온갖 고통들도 죽음의 고통도 온갖 환난도 유혹도 병고(病苦)도 온갖 수고도, 마치 성부(聖父)께서 원하신 것으로, 따라서 포기(抛棄)와 자녀적 신뢰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높은 완덕(完德)에로 들어올리고자 하시는 영혼들에게 하느님은 그런 고통들을 주신다.'[66]

● '기억(記憶)의 밤'은 망덕(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식(認識)에 대한 기억(記憶)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記憶)으로 우리 영혼을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a) 기억(記憶)의 비움은 완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듣기를 바란다. 우리의 의무들· 책임들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한 영혼이 -가령 기도하는 동안과 같이- 하느님을 대면할 각오가 되어있을 때, 영혼은 그가 듣고 보고 느끼고 맛보고 만져본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간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즉시 잊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정들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것들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장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7]

b) 이 침묵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이 '밤' 안에서, 거룩한 망덕(望德)이 발전되는데, 이 망덕(望德)은 결국 하느님께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기도를 하는 동안, 기억(記憶)이 침묵하도록 하고 벙어리가 되게 만드는 대신에, 오로지 마음의 귀만을 침묵 속에 열어주어, 예언자 사무엘과 더불어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68] 하고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면 닫힌 문을 통해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협력도 없이 영혼 안에 영적(靈的)으로 들어오실 것이고… 그 영혼을 평화로 가득 채우실 것이며…, 영혼이 두려워하거나 줄곧 두려워해온 무엇이 자신에게 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온갖 근심들을 그에게서 다 없애실 것이다.[69]

● '의지(意志)의 밤'은 애덕(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의지(意志)의 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즉:

-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또 우리 형제들 안에 살아계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이나 행복 때문에가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시고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서 가능한 모든 사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며,

- 천지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意志)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이 사랑의 훈련 안에서, 영혼은 다음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첫째로, 영혼은 자신의 사랑을 피조물들에게 매어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피조물들은 요정(妖精)들처럼, 그 매력들로써,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쳐져야 할 이 사랑을 전부 혹은 일부라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4장 참조). 다시 말해서, 피조물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도에 따라 우리에게서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둘째로, 영혼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사랑의 행위들에 수반되어야 하는 너그러움과 열성과 정열을 억압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이끌림을 받은 영혼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 안에서 -자신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되고- 오로지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게 되고, 영적인 밤의 어두움 안에서, 또 피조물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품고 있던 헛된 사랑 안에서, 점점 자신이 사라져버림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그 영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님'과의 최초의 진정한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

'오,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보다 한결 좋은, 오,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님께로 변모된 사랑받는 이를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게 하는, 오, 밤이여!'[70]

이렇게 해서 영혼은,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대신덕(對神德)의 삶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이우러 주기를 원하시는 훨씬 더 능력있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힘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12장. 감각의 수동적 밤

 

영혼이 피조물들에로 향하는 모든 애착을 스스로 정화(淨化)시키고 오로지 신덕(信德)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했음을 하느님께서 보시면, 당신께서는 영혼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신 친히 영혼을 정화(淨化)시키러 오신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중요시하시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가장 깊고 무미건조한 심연 속으로 영혼을 던지시고, 영혼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거두신다.

이 무미건조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전에는 영혼이 열성적으로, 그러면서도 쉽게 기도를 했으나, 이 때는 오히려 영혼은 단 한 가지의 생각도, 또 하느님을 향하는 단 한 가지의 애정도 만들 수 없게 된다.

-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비참하고 죄스러운 존재이며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만 보이게 된다.

- 또, 전에는 자신의 의무나 애덕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이 이룰 수 있었던 선행(善行)들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쓸모없고 비겁한 인간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내적(內的)인 변화는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앞서 말한 그 무미건조함에 의해 직접적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질병(疾病)과 같은 고통스런 사건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어떤 실패나 혹은 또다른 불행한 사건들 때문에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심하게 또 고통스럽게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애착으로부터 억지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영혼은 실재(實在)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시각(視覺) 새로운 비젼(vision)을 자신에게 요구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하느님만이 문제가 된다.

처음에는 이 체험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또 여기에 도달할 때 영혼은 정말 대단히 놀라게 된다. 피조물들 안에서 얻고 있던 위안을, 여러 해 동안 끊어버리려고 애써온 그 위안들을, 영혼 자신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돌아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확실히 이 체험은 영혼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체험은 조금씩 조금씩 영혼이 전에는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내적(內的)인 위로와 빛의 근원이 된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사랑깊은 어머니가 사랑스런 어린 아이에게 하듯이 그렇게 영혼에게 행동하신다. 처음에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팔에 안아주고 쓰다듬어준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서, 아이로서의 결점들을 버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 위대한 일들 더 본질적인 일들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만든다.'[71]

이 시련을 겪어낸 영혼도 마치 그 아이처럼 모든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영혼은 어머니 팔의 도움이 없이, 즉 전에 자신이 즐기던 하느님의 위로들 없이, 또 아직 연약하고 걸을 능력이 없는 자신의 두 다리의 도움도 없이, 자신 안에서 모든 감성적(感性的) 위로를 고갈시키는 혼란스럽고 괴로운 상태 안에 있게 된다.

'이러한 밤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는 심각한 감각(感覺)의 유혹과, 영혼의 모든 개념(槪念)과 명항(暝想)들을 꿰뚫는 불경스러운 영(靈)의 유혹을 -그런 것들을 발설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힘과 함께- 동반하거나, 또 어떤 때에는 영혼이 세심증(細心症)과 의심 따위, 이 밤의 공포를 더 심하게 하는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지기도 한다.'[72]

'순교자들의 엘리세오 신부' (Padre Eliseo de los Martires)에 의해 수집된 '영적 권고들'에서, 성인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들을 실천함으로써 이 유혹들에 대항할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육욕(肉慾)이나 분노나 조바심이나 복수심 따위의 무슨 악심(惡心)의 첫 충동 혹은 첫째 공격을 받으면, 그와 반대되는 덕행(德行)으로 저항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느끼자마자 우리 마음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들어높이면서 사랑의 움직임과 행위로 그것을 대면해야 한다. 사실, 영혼은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 앞에 서게 되기 때문에, 이 영혼의 '들어높임' 덕분으로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루게 되고, 유혹은 잠잠해지고 원수는 낙담한 채로 다시는 공격할 상대를 얻지못하게 된다.'[73]

이 정화(淨化)시키는 무미건조함은 주로 기도 중에 나타난다. 전에는 영혼이 거룩한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쁨 중에 묵상을 잘 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결과인 감동(感動)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영혼이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영적(靈的)인 명상(暝想)조차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다.

이 시련 앞에서 영혼은,

- 피조물들이 그에게 제공하는 위로들에로 되돌아가기를 거절하고,

-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를 갈망하게 되며, (영혼이 그 안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처럼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 계속 규칙적으로 또 열심히 기도에 열중하게 된다. 그런데도 무미건조함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그것은 그 시련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증거이고, 따라서 그것은 새롭고 더욱 완전한 하느님과의 관계에로 영혼을 인도하는, 축복받은 무미건조함,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수동적(受動的) 관상(觀想)의 무미건조함이라는 증거가 된다.[74]

13장. 수동적 관상

 

위험스런 오해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서 무미건조함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시는 그 '수동적(受動的) 관상(觀想)' -혹은 '감각의 수동적 밤'- 은 우리가 이미 10장에서 말한 그 '능동적(能動的) 관상(觀想)'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능동적 관상'은 묵상(默想)의 완성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각자의 합당한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무미건조함이 앞서거나 동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수동적 관상은 묵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부터 일어난다. 이는 영혼이 이런 상태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수동적 관상은 특히 가장 심각한 무미건조함 안에서 일어나고 발전되는데, 말하자면 모든 감각적 위로의 '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에 있어서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동시에 확인되어야만 하는 세 가지 징표들을 열거한다:

- 첫째로, 영혼은 자신이 이제 더이상 묵상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이제 더이상 상상이나 추리를 통해서 어떤 것에서 다른 어떤 것에로 분주하게 돌아다닐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영혼이 상상이나 추리의 과정으로부터 열매를 얻어낼 수 있는 동안에는, 묵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 둘째로, 묵상을 할 수 없게 된 영혼들은, 다른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그런 것들로부터 어떤 맛을 느끼려는 욕구마저도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따끔 자기 탓 없이 고통스럽게 상상력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님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의 맛을 즐기던 상태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얻던 온갖 재미들을 느끼지 않게 된다.

- 셋째 징표이자 가장 확실한 징표로서는, 영혼이 특별히 어떤 것을 심사숙고함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돌아다님도 없이,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조심성과 내적(內的)인 평화, 그리고 고요함과 안식 안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맛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75]

이 '즐거움'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각은 하느님에 의해 가장 극심한 무미건조함 안에 놓이게 된다- 성인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바와 같이 영적(靈的)인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하도록 하자:

'이런 상태가 시작되는 처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인식(認識)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안식의 상태 - 즉, 온갖 추리의 정지상태-에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이 인식(認識)이 영혼 자신 안에서 더욱 성장되고, 이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사물들 안에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認識)이 그에게 평화와 안식과 위로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76]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수동적 관상'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가끔, 아무 것도 행함이 없이, 즉 특별한 어떤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함이 없이, 오로지 받아들이는 일에만 사로잡혀서, 자신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이 눈길에 빠져 있게 된다. 반대로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런 조심성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영혼이 추리작용의 힘을 빌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런 일은 감미롭고 온화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때에는, 다른 어떤 것을 느끼려고 하거나 보려고 함이 없이,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77] 그렇지 않으면, 화가(畵家) 앞에서 자세를 취하면서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임으로써 오히려 그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작용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78]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에게 하느님은,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의 열린 눈에 빛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 들어가신다…. 영혼은 오로지 다른 인식(認識)과 추리작용을 개입시키지 않는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온전한 헐벗음과 영(靈)의 가난 안에 머무르면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단순하고 순수한 지혜 안에 스스로 변모될 것이다.'[79]

성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영혼은 -비록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지성(知性)을 잠잠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눈길 안에 머무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휩싸인 거룩한 안식과 평화는 하느님의 오묘하고 숭고한 인식(認識)과 함께 조금씩 그러나 신속하게 주입될 것이다.'[80]

14장. 전이(轉移)의 단계

 

영혼이 '감각의 밤'을 벗어나면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은 영혼을 훨씬 더 끔찍한 정화(淨化)인 '영(靈)의 밤' 안에 두시기 전에, 영혼에게 대단히 긴 안식과 위로의 단계를 허락하신다.

이 전이(轉移)의 단계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수 있고…, 그동안 영혼은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지치는 일도 없이 아주 쉽게 고요하고 사랑 가득한 관상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내적(內的)인 즐거움은 영혼이 이 단계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영(靈) 안에서 맛보게 되는데, 이 내적(內的)인 즐거움은 감각들에까지 미치게 되고, 이 감각들은 전보다 더욱 정화(淨化)되면서 내적(內的)인 맛들을 더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아직 정화(淨化)가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영(靈)의 정화(淨化)가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은 여러 가지 시련들과 무미건조함, 유혹들과 어두움들, 그리고 때로는 전에 당했던 것보다도 더 심한 괴로움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은 겨우 몇 시간 혹은 몇 일 동안 계속되면서, 앞으로 닥쳐올 '영(靈)의 밤'을 예고해줄 뿐이다.[81]

이 시기 동안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길에서 자신을 엄청나게 후퇴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잘못 -즉, 이제는 자기가 성인(聖人)이라고 착각하는 환상-에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과 그때까지의 일상적인 은혜들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있어서 사랑의 순수함 안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냉혹하리만큼 강하게 영혼을 현실에로 되부르는 이유이다. 영혼의 온갖 노력들과 영혼이 받은 갖가지 은혜들은, 가장 큰 장애물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소극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준비시킬 뿐이다.

실제로, '감각의 수동적 밤' 안에서 감각적인 집착들은 겉으로만 정화(淨化)되었을 뿐, 영혼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착의 깊은 뿌리들은 아직 남겨두고 있다. 피조물들에서 연유한 즐거움에 대한 온갖 집착의 가지들을 갑자기 다시 움트게 할 수 있는 이 뿌리들은, 이제 곧 이어질 대단히 끔찍스러운 '영(靈)의 수동적 밤'에 의해서만 완전히 뽑힐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동안에 많은 영혼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聖人)들의 시현(示現,vision)이나 그분들과의 통교(通交,communication)에 지배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때로는 사실일 수도 있으나, 더 많은 경우에 이런 체험은 악마로부터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다.[82]

이렇게 해서, 이제는 성인(聖人)이라는 환상은 영혼들 안에서 더 강해지고, 인간미(人間美)나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영혼들을 끌고간다. 그런데 사실상 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敬畏心)이야말로 '모든 덕(德)들의 열쇠이자 보호자'이다.[83]

이러한 현상들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방법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멜의 산길' 2권에서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하는 바로 그 방법이고, 요약하자면 고해신부들에게 의지하는 방법이다.

'고해사제들은 이 영혼들을 조심스럽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즉 그런 시현(示現,vision)들로부터 돌아서게 가르침으로써, 또 그런 일들의 경우 완덕(完德)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욕(慾)과 영(靈)을 발가벗김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신앙에로 들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고해사제들은 영혼들에게, 사랑으로 실천되는 의지(意志)의 어떤 활동이나 행위가 그런 모든 시현(示現)들이나 천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통교(通交,communication)들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과, 이런 특별한 은혜를 누리지 않는 많은 영혼들이 이런 은혜를 넉넉히 누린 영혼들보다도 영적(靈的) 성장에 있어서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84]

성인은 '가르멜의 산길' 3권에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영혼은 모든 시현(示現)이나 말씀(locution)이나 계시(啓示)들 자체를 중요시하지 말고, 그것들이 영혼 자신 안에 불러일으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혼은 그런 맛이나 감미로움이나 모양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사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85]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바로 Nada와 Todo, '무(無)와 전(全)'이라는 교의(敎義)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적나라한,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훈련 한가운데에 와 있다. 하느님 앞에서는 다른 것들은 모두 가치가 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영혼을 그가 '영(靈)의 밤'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이 지점에 다다르도록 이끌어주시고, 여기서 하느님은 유일한 안내자(案內者)인 -영혼에게는 어둡게 보이지만 사실상 너무나 확실한- 신앙(信仰)의 등불을 영혼에게 남겨주신다.

15장. 영의 수동적 밤

 

'감각(感覺)의 수동적(受動的) 밤'을 거치는 동안에 영혼은,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미건조함 안에 있었지만, 영(靈) 안에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자기 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깊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영혼을 '영(靈)의 수동적 밤'에 두기로 결정하시는 때에는, 그 영혼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위로까지 떼어내시고 정화(淨化)시키시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마저도 그 영혼에게서 빼앗아버리신다. 하느님은 이렇게 해서 그 영혼에게 지극히 순수한 사랑, 당신과의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갖출 수 있게 하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의 밤이 감각에게 있어서 쓰라리고 무서운 것이었다면, 영(靈)의 밤은 거기에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는 이 밤이 영(靈)에게 있어서 정말 끔찍하고 지독한 것이기 때문이다.'[86]

그런데, 이 두번째 밤은, 첫번째 밤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나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첫번째 밤 이후에도 감각적(感覺的)인 집착의 뿌리들이 남아있다- 하느님과의 전적(全的)인 합일(合一)에 있어서 큰 장애물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기로 하자.

하느님은 영혼 안에 당신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을 부어주시는데,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자신이 행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또 이런 상태가 자신에게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完全性)을 대면(對面)하게 된다.[87]

이 '깜깜한 관상(觀想)' 혹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가득한 지혜' 안에서 -천상(天上)의 성인(聖人)들을 비추고 있는 바로 이 지혜 안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추함· 더러움· 무가치함을 발견한다.

이는 영혼에게 충격을 주고 영혼을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넣는다. 무한한 빛이 영혼을 눈멀게 하기 때문에, 또 영혼 자신이 얼마나 불순하고 가련한지를, 하느님께서 영혼 자신과는 얼마나 다르시고 영혼 자신은 얼마나 하느님과 어긋나고 있는지를 영혼이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여기서 영혼은 암흑과 절망 속에 던져넣어진다.

영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당연히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내쫓김을 당해 영원히 그분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88] 이 체험은, 마치 지옥의 고통과도 같은 엄청난 아픔이다.

게다가, 영혼은 마치 자신이 지옥에 들어선 것처럼 자신이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당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89]

이 밤 안에서 영혼을 우울하게 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아픔은, 기도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이다. '비록 가끔 영혼이 기도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아무 맛도 없는 상태로,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느끼면서 기도를 하게 되고, 도대체 기도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90]

때때로 영혼은 자신의 일들에조차 몰두할 수 없게 되고, 정신적인 면에서의 무감각 상태나 기억상실에 깊이 빠져서,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자기가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오랜 시간을 흘려버릴 정도의 그런 상태에 있게 된다.[9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깜깜한 관상(觀想)'은 특별히 좋아할 만한 선물이고, 하느님께서는 이 선물을 통해서 마치 불이 녹을 태워 없애듯이 영혼을 태워버리고 영혼을 비우고 온갖 집착과 평생 간직해온 불완전한 버릇들로부터 영혼을 정화(淨化)시키신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저승에서 참아받아야만 하는 연옥의 고통을 지금 겪게 하시는 것이다.[92]

그리고, 이 집착들은 영혼의 중심에 아직 남아있고 영혼과 뒤섞여있기 때문에, 마치 용광로 속에 있는 금처럼 영혼 자신이 타없어지고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다.[93]

이와 같은 고통들로써, 하느님은 영혼을 대단히 겸손해지게 하시는데, 이는 오로지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시기 위함이다.[94]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만큼 그 영혼을 더 겸손해지게 하신다.[95]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제기된다: 이 끔찍한 '영(靈)의 밤'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성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자신이 지도해온 많은 영혼들의 체험에 입각해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 밤의 정화(淨化)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밤이 진정으로 깊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해를 끌게 될 것이다.[96]

다행히도 이 '하느님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은 위로의 순간들에 의해서 중단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혼은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위로의 순간들조차도 영혼에게는 양심(良心) -그 역시 제 안에 더러움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양심- 때문에, 또 '밤'이 재빨리 되돌아와서 영혼이 고통을 받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역시 괴로운 것이다. '실제로 영혼은 이 길에 얼마나 많은 산꼭대기와 골짜기들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이 누린 성공 다음에 뜻밖의 혼란상태와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에 도달하기까지의 일반적인 양상(樣相)과 그 훈련과정이니, 이 관상의 상태는 한 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그 전부인 것이다.'[97]

그래서 영혼은 대담한 용기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순결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순결함은 피조물들에 대한 헐벗음과 뼈아픈 절제(mortification)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98]

'하느님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이 영혼 안에서 모든 자존심(自尊心)을 말끔히 걷어내고 모든 이기적(利己的)인 만족으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비움에 따라, 당연히 하느님은 더욱 친밀하게 영혼 안에 깊이 들어오시고 영혼을 당신 안에서 변모시키신다.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자각하게 되고, 그것을 마음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감각(感覺)을 통해서도 지성(知性)을 통해서도 인지(認知)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다만 열매들을 느낄 수 있을 뿐이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이 만족한다는 것, 평온하다는 것, 충족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느낀다는 것, 모든 것이 좋다고 느낀다는 것 등, 일반적인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99]

사실, 오직 인격적(人格的)인 체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완전성(完全性)을 인식(認識)하게 하고 맛볼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완전성(完全性)은 그 자체 그대로 인식(認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봄으로써 혹은 체험함으로써만 알아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100]

영혼 편에서는 과거에 해온 대로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이 '하느님께 대한 깜깜하고 사랑에 찬 관상(觀想)' 안에서는, 이 덕(德)들이 영혼의 유일한 발판이 되고, 영혼의 유일한 내적(內的) 활동이 된다.

그리고, 이 덕(德)들은 영혼이 세 원수들 - 하느님께서 가끔씩, 그러나 영혼을 즉시 들어높이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마귀· 세속· 육신- 에게 더이상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영혼이 하느님의 눈에 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마귀가 혼란하고 불안한 감각(感覺)들을 통해서 영혼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때문에 영혼은 안전하게 두려움 없이 그 정배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서 떠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비밀스럽고 실체적(實體的)인 방식으로 그 안에 머무르시는 영혼과의 바로 그 친교(親交) 안에서, 이제 당신 신부(新婦)인 영혼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해주신다.

이 입맞춤 안에서, 또는 '하느님과 영혼과의 거룩한 합일(合一)의 실체적(實體的)인 접촉'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재물을 넘어서는 보물을 받게 되고, 기도의 최고의 단계에로 들어서게 된다.[101]

'이 실체적(實體的)인 접촉들 덕분으로, 영혼은 조금씩 조금씩 정화(淨化)되고, 강인해지고, 하느님의 아드님과의 신비적(神秘的)인 약혼(約婚)으로써 사랑하는 님과의 합일(合一)을 항구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102]

16장. 최초의 합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영적(靈的) 약혼(約婚)'에 대해서 제시한 개요(槪要)를 통해서,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성인이 결혼(結婚)의 비유로써 설명하는 새롭고 한층 더 친밀한 합일(合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를 자세히 분석하기 전에 우선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 지금까지는, 영혼은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해왔고 (능동적 밤), 하느님은 그런 영혼을 힘차게 도와주셨다 (수동적 밤).

영혼에게 있어서 이 정화(淨化)는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화(淨化)야말로, 복음(福音)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서 영혼이 주의를 기울이게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103]

바로 이 순간에 영혼은 하느님께로 빠져든다. 이렇게 해서 모든 연인(戀人)들의 걱정스럽고도 즐거운 이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혼은 밤낮으로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뵙고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리려는 욕구에 불탄다.

하느님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저 세상에서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혼은 그분과 결합될 수 있도록 죽기를 바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 장(章)에서 다룰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최초의 합일(合一)이 맨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이 합일(合一)이 어떻게 전개(展開)되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 하느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에 그토록 빠져있는 영혼을 보시고 더더욱 당신 자신의 사랑에 못이기시어,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을 발견하게 하시고, 영혼과 당신과의 사랑의 약속을 승인하신다: '그래, 너는 나의 신부(新婦)가 될 것이다!'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충실성을 약속하는 영적(靈的) 약혼(約婚)의 날이 바로 이 때이다.

두 약혼자가 서로 친절함과 선물들을 주고받음을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하느님은 가장 귀중한 선물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가장 귀중한 선물들을 교환함으로써 대단한 기쁨을 얻게 된다.

- 그 날이 멋지게 올 때까지 자신을 위해 천상 정배께서 배려하신 친절함으로써 자신이 온전히 깨끗하게 되는 그 날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영혼은, 창조주와의 영적(靈的) 결혼(結婚)이라는 거룩한 합일(合一)에로 인도된다. 거기서 -각각 고유한 존재(存在)를 보존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두 본성(本性)의 합일(合一)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두 본성(本性)들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혼합되는 것처럼 보인다.[104]

여기서 하느님은 영혼에게 더이상 선물들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당신 안에 영혼을 빨아들이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영혼에게 내어주신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사랑은, 성부(聖父)께서 성자(聖子)를 사랑하시고 성자(聖子)께서 성부(聖父)를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이고, 바로 성령(聖靈)이신 사랑이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실제로 변모되는 것이다.

- '사랑의 산 불꽃'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 역사상 신비가(神秘家)들 중에서 그분이야말로 이런 내용을 언급하시는 유일한 분이시지만- 영혼이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다음 단계를 묘사한다. 이는 '변모(變貌)의 합일(合一)'에 대한 문제인데, 그 자신 안에서 이미 신화(神化)된 영혼은, 훨씬 더 하느님을 닮아가게 됨으로써, 자기 주위에 신적(神的) 사랑의 불꽃을 퍼뜨린다.[105]

이 합일(合一) 이후에는, 그 어떤 가리움도 없는 합일, 천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합일 이외에는 더이상 남은 것이 없다.

이제는, 이 최초의 합일(合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영혼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영혼의 노래'의 첫 열두 노래들 안에서 서술하는 내용에 따라서 알아보기로 하자.

'영(靈)의 수동적 밤'의 끝 부분에서, 영혼은 아가 (Cantique des Cantiques)의 신부(新婦)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

'그리워라, 뜨거운 님의 입술!'[106]

그리고 하느님은 영혼의 이 소원을 글자 그대로 들어주시고, 영혼에게 입맞춤을 해주신다.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하느님에 관해서도 역시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107]

하느님께서 몸소 영혼에게 접촉하시는 이 입맞춤 안에 내포된 사랑의 체험은 대단히 깊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혼은 다시 자신이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영혼은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자신이 홀로 있음을 보게 될 때, 슬퍼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원하게 된다:

'어디 숨어 계시는고? 사랑하는 님이시여,

울음 속에 날 버려두고.'[108]

하느님께로 향한 합일(合一)에 가장 확실한 안내자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항상 남아있을 신앙(信仰)에 의해서, 대답은 곧 들려온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네 안에서 산다!'[109]

그 때문에, 요한 성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 영혼이여!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여! 사랑하는 님을 찾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서, 어디에서 그 님을 찾아 만날 수 있는지를 그토록 알고 싶어하는 영혼이여! 이제부터 그대는 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이라고, 님께서 몸을 숨기시는 곳이라고 불리리라. 그대는 그대의 온갖 선(善)도, 그대의 온갖 희망도 그대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님께서 그대 안에 사신다는 사실을 알아, 한없이 즐거워할 수 있도다.'[110]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님이 어디 숨어 있는지를 알고는 집도 재물도 친구들도 온갖 것들도 다 뿌리치고 님과의 만남을 위해 달려가는 것처럼,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영혼 역시 애정(愛情)으로나 의지(意志)로나 모든 것들을 다 떠나서 자기 자신 안에, 마치 다른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철저한 잠심(潛心; 마음의 평정) 안에 숨어들어야 한다.[111]

하느님 안에서의 이 영혼의 잠심(潛心)은 기도 안에서 다시 한번 실현된다. 거기서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 완전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이는 사랑으로써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그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112]

이렇게 사랑에 빠져든 영혼이 오로지 사랑하는 님만 찾기를 충실하게 또 열심히 계속한다면, 하느님은 그 사랑에 감동하시어 당신의 현존(現存)을 잠시동안이나마 영혼에게 드러내신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신적(神的) 인식(認識)의 접촉'[113]이라 부르는 이 선물은, 가령 그것이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 지속된다 하더라도, 영혼이 항상 죽어가는 것처럼 느끼는, 또 무엇보다도 영혼으로 하여금 그 사랑에 불타 실제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 더 죽어가게 하는, 하느님께로 향한 그런 사랑으로 영혼에게 불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영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 반문(反問)하게 된다:

'그러나, 너 사는 데에 살지 못하면서

오오 목숨아! 너 어찌 부지하려느냐?'[114]

그리고는 실제로, 현존(現存)하는 동시에 숨어있다고 느껴지는 이 최고선(最高善) 안에 풍덩 빠지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영혼은 쇠약해진다.[115]

예기치 못했던 이 신적(神的) 발현(發現), 그렇게도 순간적인 이 신적(神的) 발현(發現)은, 하느님께로부터 얻은 욕망과 하느님을 완전히 찾아얻지 못한 고통의 불을 영혼 안에 다시 일으키고 점점 번져가게 한다.

하느님은 사슴처럼 모습을 드러내시고, 영혼을 사랑으로 상처입히시고, 달아나 숨으신다.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사슴처럼 가버리신 그대!'[116]

그 다음에 영혼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랑으로 그 님을 질책한다:

'이 마음에 상처를 낸 그대이시거늘

어찌 이를 낫우어주지 않으시나요?'[117]

님께서 내신 상처 님만이 치유해 주실 수 있음을 알고, 영혼은 이렇게 애원하게 된다:

'아아, 누가 날 낫우어줄 수 있을런가?

이젠 정말 그대를 전부 주소서.'[118]

따라서 이 시기는 영혼에게 있어서 큰 고통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오로지 짤막한 '사랑의 접촉'으로만 중단되는데, 이 사랑의 접촉으로 하느님은 영혼에게 당신의 현존(現存)을 드러내신다. 이 짧은 위로의 순간이 끝나면 영혼은 전에 체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고통 속으로 즉시 떨어지게 된다.

17장. 영적 약혼

 

하느님과의 영적(靈的) 약혼(約婚)의 출발점에 도달한 영혼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계속 설명하기 전에, 영혼 안에서 계속 무르익어가는 현실감각을, '하느님과의 새롭고 더 친밀한 합일(合一)'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현실감각을 분명히 하기로 하자.

은총지위에 있는 영혼이 세례 때부터 소유하고 있는 (2장 참조)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참여는 은총지위에 있는 영혼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現存)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 영혼은 특히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진다. (3장 참조).

'하느님과의 새롭고 더 친밀한 합일(合一)'은, 우리가 앞 장에서도 이미 언급했고 앞으로도 또 언급하게 되겠지만, 대신덕(對神德)의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한 세례에 의한 합일(合一) 그 자체이다. 영혼은 이미 천상 낙원에서의 복된 합일, 어떤 가리움도 없는 합일에 대한 어떤 체험에 참여하고 있다.

영혼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하느님께 가장 깊숙히 일치된 영혼이라 할지라도, 항상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가끔 복되신 당신 현존(現存)을 영혼에게 잠시 드러내셔서 영혼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이 순간적인 발현(發現)들을 신비가(神秘家)들은 '입맞춤'· '접촉'· '애무'· '광선' 등으로 부르는데, 이 발현(發現)들은 영혼 안에 사랑의 상처들을 남기고, '탈혼상태'와 '황홀경', 그리고 '영혼의 날아오름'을 불러일으킨다. 이 모든 것들은 영혼 안에서 지상적(地上的)인 모든 욕망(慾望)들을 소멸시키고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고, 하느님께 대한 이 엄청난 열망은 어떠한 가리움도 없이 하느님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영혼으로 하여금 죽기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의한 모든 계획의 목표는 분명히 우리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변모(變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모든 계획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본성(本性)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처럼 저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변모시키는 것이다.

하느님만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들에 대해 자신을 비운 영혼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미래의 일을 미리 맛보게 하시고 그 영혼 안에 이미 실재(實在)하시는 당신의 현존(現存)을 드러내는 순간적인 어떤 표징을 이 세상에서부터 영혼에게 주기 원하신다는 것이 어째서 그렇게도 놀라운 일인가?

이제는, 사랑에 빠진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서의 영적(靈的) 약혼(約婚)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자.

하느님은 당신 사랑으로 상처입은 영혼을 보시고, 그 탄식으로 감동되신다. 그리고 당신 역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으신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연인(戀人) 사이에서는 한 사람의 상처가 바로 다른 사람의 상처이고, 이에 대해서 그들이 받는 느낌은 공통된 것이기 때문이다.[119]

그래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더이상 견디실 수가 없어, 마치 상처입은 사슴처럼 당신을 영혼에게 드러내시고, 하늘로부터 당신 신부(新婦)에게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영혼을 당신께로 부르신다:

'돌아오라 비둘기야,

상처난 사슴이

언덕 위에 나타나

네가 나는 바람에 서늘함을 얻나니.'[120]

아직은 결정적인 합일(合一)의 문제는 아니지만, 영혼을 향한 하느님의 선택과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선택, 결정적인 이 선택이 바로 '영적(靈的) 약혼(約婚)'이다.

이 약혼(約婚) 안에서 영혼의 의지(意志)와 하느님의 의지(意志)가 영원히 결합되기 때문에, 영적(靈的) 약혼(約婚)을 '의지(意志)의 합일(合一)'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하느님의 의지와 영혼의 의지가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영혼은 피조물들에 대한 다른 모든 애정을 포기한 것이다.'[121]

'이것이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는 위대함과 엄위로 영혼을 꾸미시고 온갖 선물들과 덕(德)들로 영혼을 채워주시고 거룩한 인식(認識)과 사랑을 영혼에게 드러내시고, 마치 사람들이 약혼하는 날 자기 약혼녀에게 해주듯이 하시면서, 큰 이익을 영혼에게 나누어주신다.'[122]

이 선물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선물, 하느님을 소유하는 마지막 선물로 마무리된다.

실제로 이 복된 날에, 격렬한 걱정들과 사랑의 탄식들은 영혼 안에서 사라지고…, 영혼은 평화롭고 기쁘고 감미로운 상태로 살기 시작한다.[123] 설사 약간의 혼란이나 혹은 감각들이나 악마로부터 오는 불쾌감들로 고생을 해야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오로지 영적(靈的) 결혼(結婚)에 이르러서야 끝날 것이다.[124]

영적(靈的) 약혼(約婚)의 시기 동안에, 사랑하는 님의 방문이나 선물들의 교환은 자주 일어난다.

'여러 차례의 방문 때에,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덕(德)들을 자신 안에서 보고, 그 모든 덕(德)들을 엮어서 마치 꽃다발처럼 사랑하는 님께 그것을 봉헌하게 된다.'[125]

이 모든 선물 교환이 관상(觀想)의 기도를 통해서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관상(觀想)의 기도는 충실히 실천될 것이고, 영혼이 모든 일에 있어서, 약혼(約婚)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참되고 충만한 사랑의 동의(同意)로써 자신의 거룩한 정배이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려고 애쓰는 매일매일의 모든 행위들에 미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126]

사실 이 순간에 기도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27] 하신 예수님의 계명을 완전히 실현시키면서, 또 정화(淨化)를 동반한 기도가 되면서, 끊임없는 기도에로 향하게 된다. 실제로, 이 마지막 기도는 여기서 피조물들로부터 달아나는 부정적인 모습을 버리고, 기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애착'이라는 긍정적인 모습을 열어주게 된다.

게다가, 약혼(約婚)의 시기에 영혼은 오로지 사랑하는 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원하게 되기 때문에, 영혼은 자신 안에서 영혼들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 그 자체로 불타게 된다. 예수님의 성심(聖心) 안에 불타는 이 열정은 사사로운 편애(偏愛)가 없는 보편적인 열정이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열정이며, 특히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함께 속죄(贖罪)하는 열정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혼자만 천국에 가는 것은 그에게는 사소한 일로 보이는 것이다.[128]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도우심 안에서 영혼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포기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정과 짝을 이룬다. 영혼은 이제 자기 자신도,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죄들도, 또 자신의 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전에는 비록 어떤 지난 일들이나 자신의 죄들이나 혹은 타인(他人)들의 죄들 -영성가(靈性家)들이 습관적으로 많이 느껴왔던 것들인- 로부터 나온 고통의 샘물이 영혼에게까지 이르렀더라도, 이제는 영혼이 그것들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직시(直視)하지만 그것들이 영혼에게 더이상 고통도 불행도 일으키지 않게 된다.'[129]

그리고 이것은, 이제부터는 영혼이 하느님께 의탁하기 때문이고, 영혼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했기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치유해주려 하신다는 것을 영혼이 알기 때문이고, 영혼이 이 착한 목자의 어깨에 메여 자신을 내맡긴 채로 당신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청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영혼을 마치 잃었다가 되찾은 순한 양처럼, 당신 어깨에 메인 나무랄 데 없는 순한 양처럼, 그토록 갈망했던 이 합일(合一) 안에서 당신 팔에 안긴 순한 양처럼 생각하실 때, 사랑의 목자(牧者)와 영혼의 정배에 의한 시련을 거친 즐거움과 기쁨을 본다는 것, 이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130]

이런 식으로 하느님은 영혼을 당신 팔에 안아 인도하시면서 '당신의 화관(花冠)이자 당신 성심(聖心)의 기쁨'[131]인 영혼을 영적(靈的) 결혼(結婚)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합일(合一)에로 들어가게 하신다.

18장. 영적 결혼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라는 사랑의 법에 끝까지 충실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이 대단히 높은 합일(合一)을 포함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은 소수에 불과하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묘사한 사랑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영혼들은 많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영적(靈的) 결혼(結婚)이라고 불리워지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合一)에 도달하는 영혼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132]

그렇지만 성인은, 이 은혜를 갈망하고 이 은혜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거룩한 정배이신 하느님은 과연 이 합일(合一)을 우리에게 주려는 열망에 불타시는데, 오로지 우리 사랑의 부족함만이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는 것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133]

이제는 영적(靈的) 결혼(結婚)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우리 사부(師父) 요한 성인께 질문해보기로 하자.

요한 성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님 안에서의 영혼 자신의 전적(全的)인 변모(變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고 참여로써 거룩하게 하는 -말하자면 하느님이 되게 하는- 사랑의 합일(合一)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영혼과 하느님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몰두하는, 그런 변모(變貌)이다.'[134]

'그것은 마치 촛불이 태양빛에 흡수되어 태양 앞에서 사라지고 태양의 그 눈부신 광채가 다른 모든 빛들을 소멸시키고 흡수해 버리는 것과 같다.'[135]

따라서, 이 영적(靈的) 결혼(結婚)은 영혼이 영적(靈的) 약혼(約婚)의 상태에서 이미 도달했던 단순한 '의지(意志)'의 합일(合一)이 아니라, 이제는 감각(感覺)을 포함한 모든 능력들을 하느님 안에 흡수시키고 일치시키는 전적(全的)인 합일(合一)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끝맺는다: '그래서 영적(靈的) 결혼(結婚)이라는 이런 상태는 영혼이 은총 안에 굳건해짐이 없이는 -즉 죄를 범할 수 없게 됨이 없이는- 검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36]

이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분명 성령(聖靈)이시다. 성령(聖靈)께서는 이제 영혼 안에 당신의 특별한 선물들을 가득 부어주시고, 이 성령(聖靈)의 선물들은 마치 시원한 강풍(强風)이 항해(航海)를 쉽게 하고 빠르게 하듯이 모든 덕(德)들의 실천을 쉽게 하고 즐겁게 한다.

우리가 17장의 첫머리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영혼이 이미 세례 때에 받아들였고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을 통해서 완성시킨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은, 이제 영혼 안에 실재(實在)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번째 차이점은, 대신덕(對神德)의 합일(合一)은 영혼의 걸음걸이에 따라서, 말하자면 점진적(漸進的)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서,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합일(合一)은 하느님의 걸음걸이에 순응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이 합일(合一)이 한번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137]

두번째 차이점은, 외견상으로 드러나는 뚜렷한 근거들로, 또 뚜렷한 순간들로써,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합일(合一)은 거의 확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재(實在)와 비교하면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무(無)'라고 밖에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138] 영혼이 이 영적(靈的) 결혼(結婚)이라는 합일(合一) 안에서 체험하고 맛보는 것에 대한 우리 사부(師父) 성 요한의 설명을 들어보자.

- 무엇보다 먼저, 영혼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의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혼은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의 현존(現存)을 깊이 누리게 된다.'[139]

- 영혼은 그분이 자신의 정배로서 존재하심을 느낀다. 즉, 마치 자신에게만 배타적(排他的)으로 속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것이다: '영혼은 자기 정배이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쉬게 되고 그분께서 진정한 영적(靈的)인 포옹으로 자신을 안아주심을 느끼며, 이로써 영혼은 하느님의 생명을 함께 누리게 된다.'[140]

- 영혼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정배이신 하느님의 신비(神秘)들에 대한 깊은 인식(認識)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충실한 남편이 아내에게 하듯이 당신의 놀라운 비밀들을 영혼에게 자주 드러내시고, 진실하고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비밀도 감추어둘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당신의 활동들을 잘 알려주신다. 이 친밀한 사귐으로 영혼은 특히 강생의 감미로운 신비(神秘)들에 대한 심오한 인식(認識)에로 인도되고, 인류의 구원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사용하신 기묘한 방법들과 하느님의 가장 숭고한 업적들 중에서도 중요한 업적들을 알게 된다.[141]

- 영혼은 자신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누림을 느끼게 된다: '영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참여로써 자신의 지성(知性)과 인식(認識)과 사랑의 활동을 하게 되는데, 하느님과 함께 또 하느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서 이 활동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142] '여기서 이미 영혼은, 자신을 형언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는 이 영광스러운 삶에 대한 어떤 표지들을 얻어누리게 된다.'[143]

- 영혼은 자신의 감각(感覺)들을 자신의 이성(理性)으로써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단계에서 감각적인 부분은 정화(淨化)되고 더 영적(靈的)인 것이 된다. 그래서 감각(感覺)도 하느님께서 영(靈)의 가장 깊은 곳에 전해주시는 영적(靈的)인 큰 은혜들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고 그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144]

- 끝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이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단계에서 누리는 모든 영적(靈的) 체험(體驗)들은 영혼 안에서, 그런 체험(體驗)들이 완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천상(天上) 낙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합일(合一)이 완전해지고 드러나게 되는 곳은 오로지 그곳 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투쟁하는 교회' (地上교회) 안에서 영혼을 들어높여 주신 영적(靈的) 결혼(結婚)으로부터 '승리한 교회' (天上교회)의 영광스러운 결혼(結婚)에로 넘어가고자 하는 열망 안에서, 신부(新婦)는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단계에서 갖게 된 이 모든 성향(性向)들과 모든 완전함들을 자신의 정배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앞에 드러낸다.

하느님의 선하심으로, 지극히 거룩한 예수의 이름에 도우심을 간청하는 모든 이들이 그 영광스러운 결혼(結婚)에 도달하게 되기를 바란다.'[145]

19장. 변모의 합일

 

'변모(變貌)의 합일(合一)'[146]이라는 이름은 '영적(靈的) 결혼(結婚)'을 지칭하기 위해서 여러 저술가(著述家)들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는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이름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친히 설명하는 영적(靈的) 결혼(結婚), '사랑의 산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의 저서(著書) 안에서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는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최고봉(最高峰)인 영혼의 최고 성장을 가리키기 위해서 보류된 용어로서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

성인의 말씀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나는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완덕(完德)의 최고 단계에 대해 말했는데, 그것은 영적(靈的) 결혼(結婚)을 통해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변모(變貌)되는 단계였다. 이제는 바로 이 변모의 단계에서 가능한, 한층 더 높고 더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겠다.'[147]

한층 더 높고 더 완전한 이 사랑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은 한 가지 비유를 이용한다:

'나무가 불에 탈 때에 비록 그 나무가 불과 뒤섞이고 변모되고 불과 하나가 된다고 하더라도 더 불타오르고 불꽃과 불티를 튀기기까지 작열하게 되는 것처럼, 나무에서 일어나는 그런 같은 일이 영혼에게 일어난다.'[148]

따라서, 변모의 합일은 영적(靈的) 결혼(結婚)의 경우와 꼭같은 하느님과의 합일이지만, 가능한 모든 활동들이 극도(極度)에 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영혼이 사랑의 훈련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극도의 한계이고, 이 한계를 넘어서면 영원한 생명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랑의 이 가장 높은 활동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표현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시적(詩的)인 상징들을 이용한다. 성인은 화폭(畵幅) 위에다 몇 줄기의 대단히 빛나는 필치를 쏟아내지만, 어떤 논리(論理)도 그 내용을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이것이 '오, 사랑의 산 불꽃이여!' 라는 시(詩)의 네 절(節)이다.

여기서 한 절씩 그 메시지를 끌어내보자:

1절;

'오, 사랑의 산 불꽃이여…. 이 사랑의 불꽃은 영혼의 정배이신 하느님의 영(靈)이시다. 이는 바로 영혼이 이제부터 그 자체로서 느끼게 되는 성령(聖靈)이시고, 영혼을 영적(靈的) 결혼(結婚)을 통해서 감미로운 사랑 안에서 불태우고 변모(變貌)시키는 불로서만 아니라, 변모의 합일(合一)을 통해서 영혼 안에서 영혼을 태우고 불꽃을 튀기고 천상적(天上的) 행복(幸福)으로 영혼을 씻겨주는 불로서도 느끼게 되는 성령(聖靈)이시다.'[149]

변모의 합일(合一)의 특징은, 성령(聖靈)께서 항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三位一體)께로, 당신께서 하느님의 생명 자체인 무한한 사랑의 불꽃을 그 안에서 끊임없이 태워주시는 그 삼위일체(三位一體)께로 영혼을 더욱 동화(同化)시키시면서 영혼 안에 펼쳐주시는 이 '사랑의 활동'이다.

따라서, 영혼에 의해 행해진 그런 사랑의 행위들이 대단히 귀중하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도 없고, 그 사랑의 행위들 중의 단 한 가지가 평생동안 그가 행한 모든 일들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도 없다.[150]

또 영혼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볼 수 있고,[151] 이제는 영혼이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아무런 가리움 없이 만나뵙기 위해서 죽고 싶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기 생명의 마지막 한 올마저 잘라버리시는 마지막 선물을 성령(聖靈)께 간청하고 애원하게 된다:

'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속에

부드러이 살라주는

사랑의 산 불꽃이여!

다시는 너 매정할 리 없으니

자, 이만 끝내어다오, 소원이로다.

녹아나는 이 만남의 휘장을 찢어다오.'[152]

2절;

이렇게 불꽃에 사로잡혀서 불타는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은, 하느님의 순결하심과 생명 안에서의 영혼 자신의 전적(全的)인 변모(變貌)이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 안에서 자신을 정화(淨化)시키시고 사랑의 상처를 입히시기 위해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마치 불타고 있는 쇠, 다시 말하자면 불에 달구어진 인두의 역할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 상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에 달구어진 인두는 그것이 닿는 곳에 항상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서 불에 데인 상처가 아닌 어떤 상처에 인두가 닿게 되면 그 상처를 불로 태우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듣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의 인두 곧 성령(聖靈)께서는, 당신이 접촉하신 영혼이 다른 불행이나 죄들로부터 이미 다른 상처를 입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의 상처를 입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렇게 해서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생긴 상처들은 사랑의 상처들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153]

그래서 영혼은, 정화(淨化)되고 성령(聖靈)에 의해서 불태워져서 이렇게 기도한다:

'오, 서늘한지고 탄 자국.

오, 고마울사 이 상처.

아, 섬섬한 손길, 오 보드라운 접촉!

영원한 생명 맛들이고

모든 빚 다 갚아지나니

너 죽이며 죽음을 목숨으로 바꿨노라.'[154]

3절;

영혼이 이 '변모(變貌)의 합일(合一)'의 상태에서 자기 주변에 퍼뜨리는 불길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의 활동을 하게 하고, 영혼을 완전히 정화(淨化)시킨다. 게다가 하느님의 무한하신 아름다움에 대해서 영혼을 밝혀주면서 영혼을 거룩한 지혜로 가득 채운다. '유일하고도 단순한 그 존재(存在) 안에서,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강하시고, 사랑스러우시고, 영원하시고…, 그 밖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성들과 덕(德)들을 갖추고 계신다.'[155]

그래서 영혼은 이 불꽃을 '등불들' (Flambeaux de feu) 이라고 부른다. 이 등불들 안에서 영혼은 타버리고, 이 등불들로 인해서 영혼은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시고 즐기시는 것처럼, 그 내면(內面)으로부터 뵙고 즐기게 된다.

4절;

그렇지만, 사랑의 활동 한가운데에 있는 이 사랑의 불꽃 안으로 영혼이 이끌려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휴식 안에, 또 영혼 자신이 정배이신 하느님을 누리는, 마치 '자기 품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님과도 같이'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느끼는, 그런 평화 안에 영혼은 잠겨있게 된다.[156]

'이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가! 또 영혼이 온갖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걱정들을 떨쳐버리고 사랑하는 님의 품 안에서, 가장 미세한 소리조차도 더이상 자신을 방해할 수도 괴롭힐 수도 없는 무한한 고요 안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영혼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일인가!'[157]

당신 신부(新婦)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영혼 안에서 친히 일어나시어, '당신의 거룩한 생명에 대한 아주 새로운 계시(啓示),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 안에서 누리는 조화(調和)에 대한 아주 새로운 계시(啓示)'[158]를 영혼에게 주신다.

하느님의 이 일어나심 안에서 그분의 탁월하심을 영혼이 어떻게 알아듣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설명하기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159]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발(發)하시는 성령(聖靈) 안에서 -그 안에서 영혼이 지극히 영광스러워지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사랑에 도취되고 하느님의 오묘하심에 잠기게 되는 그 성령(聖靈)의 발하심 안에서- 영혼이 체험하게 되는 특별한 기쁨을 설명하는 일 역시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160]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가장 강렬한 사랑의 통교에 대해 영혼의 눈을 열어주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께 호소하면서, 영혼은 겨우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은밀히 내 품안에

홀로 계시면서 어이 이리

고이 사랑스레 잠깨시는고.

지선(至善)과 영광이 칠렁이는

그대 향기로운 숨결로 어이 이리

살며시 나를 사랑에 매시는고.'[161]

이것이 바로, 예수께 대한 사랑으로 걸어온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의 길이 충실한 영혼들을 인도해주는 목적지(目的地)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영혼들이 많기를 원하신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서 강생하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든 영혼들이 다 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결론

피조물들 중 가장 뛰어난 존재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

● 우리의 영광이신 마리아

모든 피조물(被造物)들보다 더 완전하게,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실현하시고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모(變貌)를 실현하신 분은, 바로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이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단언한 것처럼, 대단히 확실한 진리(眞理)가 여기에 있다: '지극히 영화로우신 동정녀, 우리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에 의해 처음부터 이 높은 상태에로 올림을 받으셨다.'[162]

마리아께서 영성적(靈性的)으로 그토록 위대하신 이유는, 그분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이시라는 특전에서 유래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아드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를 원하셨을 때,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치시고'[163], 당신 전능(全能)으로서 아드님을 위해 가장 아름다우시고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합당한 어머니를 마련하셨다.

하느님은 마리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당신의 권능,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그 자체로서 무한하지만 마리아가 피조물(被造物)이라는 사실에서만 한계를 가진 그런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다.

설사 마리아에게 주어진 선물이 유일하고 가장 위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리아를 지켜주시고 그 잉태에 있어서 '원죄없으신 분'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이 의지(意志)에 대한 한 가지 표징이다.

사실, '피조물(被造物)들 중 가장 겸손하신 분'께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합일(合一)과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變貌)'라는 이 엄청난 은총이 그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예감하게 한다:

'전능하신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음이라!'[164]

● 우리의 모범이신 마리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오로지 받기만 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마리아께서는 그토록 위대한 선물들을 넘치도록 받으셨지만, 당신께서 모든 덕(德)들, 특히 신덕(信德)과 애덕(愛德)을 끊임없이 실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이 업적을 가능하게 했고 하느님의 활동에 협조하셨다.

우선 신덕(信德)에 있어서,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특히 다음과 같은 때에 영웅적인 신덕(信德)을 실천하셨다. 즉:

- 처녀이신 당신이 구세주를 낳으실 것이라고 알리는 천사의 말씀을 당신이 믿으셨을 때,

- 당신 아드님이 태어나시고 성장하시는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이심을 믿으셨을 때,

- 또 당신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부활하실 것을 믿으셨을 때, 마리아는 위대한 신덕(信德)을 실천하셨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그분을 만났을 때에 '당신은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165] 라고 했던 것이다.

애덕(愛德)에 있어서도, 마리아는 역시 영웅적인 애덕(愛德)을 실천하셨다. 즉:

- 당신의 동정성(童貞性)을 봉헌하신[166] 바로 그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천사의 전갈을 받으시고 대답하신 '예!'라는 대답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완성된 사랑의 순교(殉敎)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의지(意志)를 온전히 복종시킨 바로 그 하느님의 의지(意志)에 대한 사랑 안에서,

- 또 당신께서 일생동안 겸손하고 말없는 봉사행위를 예수님과 성 요셉과 엘리사벳과 사도들에게 실천하심으로써 드러내신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마리아는 역시 위대한 애덕(愛德)을 실천하셨다.

● 우리의 중재자이신 마리아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마리아의 온갖 위대함의 원천은 그분의 신적(神的) 모성(母性)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거룩하게 하신 것, 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최고로 또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단계에까지 당신과 일치시키시고 변모시키신 것은 바로 이 신적(神的) 모성(母性)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 정도에서 중단되지 않았고, 말씀의 육화(肉化)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당신께 동의(同意)할 것을 마리아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시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167] 하신 마리아의 응답을 들으신 후에야 인류구원이라는 당신 과업을 실행에 옮기셨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육화(肉化)가 온전히 마리아의 자유로운 선택 -그것으로 그 신비(神秘)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동의(同意)- 에 달려있게 되기를 바라셨으나, '피조물(被造物)들 중 가장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예!' 하는 응답을 하시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런데,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께서 -인간을 하느님께 일치시키는 신비(神秘)의 실현(實現)에 대한 그의 동의(同意)에 복종하시면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이 피조물(被造物) 앞에 무릎을 꿇으신 까닭에,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다른 모든 일치와 변모의 은총들이 사실상 오로지 마리아의 동의(同意)와 중재(仲裁)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모든 은총들의 중재자이시고, 말하자면 '은총의 통로'이시며, 하느님께서 그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기로 작정하신 '길'이시며, 또한 그 길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그런 '길'이시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신 예수님도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

이 '길'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변모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며, 끝없는 천상 행복 안에서 하느님을 누리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영원히 다음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삶의 길을 몸소 가리켜 주시니

당신 모시고 흡족할 기꺼움이,

당신 오른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하리이다.'[168]

부록 1.

철학적 논거에 의한 심리학 개요

인간은 그 자연적(自然的) 존재(存在) 안에 실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두 본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물질적인 부분을 말하는 '육신'과 영적인 부분을 말하는 '영혼'이다.

1. 육신

우리의 육신 안에는, 다른 많은 동물들의 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 세계를 지각(知覺,connaitre)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시각(視覺)· 촉각(觸覺) 등- 과 지각(知覺)된 사물을 사랑(tendre)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각(知覺,connaissance)은 감각(感覺,sens)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랑(tendence)은 욕(慾,passion)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a) 감각은 사물들의 구체적인 성질, 즉 색깔이나 모양 따위를 지각할 수 있는 수단인데, 감각적인 대상이 우리 밖에 있는지 우리 안에 있는지에 따라서 외적(外的) 감각과 내적(內的) 감각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외적(外的) 감각은 다섯 가지이다:

- 시각(視覺)은 눈을 통해서 우리 밖에 있는 사물들의 색깔이나 모양, 움직임 등을 본다.

- 청각(聽覺)은 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듣는다.

- 후각(嗅覺)은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 냄새들을 맡는다.

- 미각(味覺)은 혀를 통해서 여러 가지 맛들을 느낀다.

- 촉각(觸覺)은 피부를 통해서 외부의 사물들에서 열(熱)이나 모양을 감지한다.

 

내적(內的) 감각은 뇌(惱)를 통해서 외적(外的) 감각들이 우리 안에 일으킨 인상(印象)들을 감지(感知)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당신 작품들 안에서 두 가지 내적(內的) 감각(感覺)만을 다룬다. 이는 '창조적(創造的) 기억(記憶)' (memoire imaginative)과 '상상(想像)' (imagination) 이다. 성인이 이 두 가지만을 염두에 둔 것은, 이 두 가지가 당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고 다른 모든 내적(內的) 감각(感覺)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 창조적(創造的) 기억(記憶)은, 시각(視覺)이라는 감각의 기관인 눈이 더이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도, 또 귀가 더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을 때에도, 우리가 색깔들을 내심(內心)으로 '다시 보게' 해주고, 음악을 '다시 듣게' 해준다.

- 상상(想像)은, 우리가 내심(內心)으로 어떤 형상(形象)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전에 사람(人)과 말(馬)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으로 두 가지 형상을 합성(合成)해서 '인두마(人頭馬)'의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b) 욕(慾, passion, appetit)은 감각(感覺)의 정(情) (tendances sensitives)을 뜻하는데, 우리는 이 情들을 통해서, 감각(感覺)에 상쾌한 것들 -예를 들면, 좋은 향기나 아름다운 음악 등- 에는 끌리고, 감각(感覺)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 -예를 들면, 나쁜 냄새나 귀를 따갑게 하는 소음 등- 에는 반발하게 된다.

욕(慾)이란 다만, 우리 안에 상쾌한 혹은 불쾌한 인상(印象)들이 있을 경우에, 외적(外的)인 어떤 감각(感覺)들을 통해서, 혹은 내적(內的) 감각(感覺)들을 통해서 되살아난 인상(印象)들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결론이 나오는데, 이 결론은 우리 사부(師父) 성 요한에 의해서, 우리가 감각적(感覺的) 지각(知覺)들을 통제하는 은총으로 하여금 우리의 욕(慾) -즉, 격정(激情)- 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근거(根據)로 이용될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자기 작품들 안에서 네 가지 욕(慾)들을 말한다:

- 기쁨

- 희망

- 두려움

- 고통

다른 여러 가지 욕(慾)들에 관해서 (산길 I, 13, 5)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여러 예(例)들을 통해 이 네 가지 욕(慾)들을 설명함으로써 충분하다. 사실상, 성인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욕(慾)에 관한 심리학(心理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合一)'에 영혼이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욕(慾)들이 어떻게 통제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2. 영혼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지각(知覺)하고 사랑하는' 작용들을 수행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당신의 작품들 안에서 이 작용들을 폭넓게 묘사한다: 지각(知覺)하는 두 가지 작용으로서는 지성(知性)과 기억(記憶)을, 이미 지각(知覺)된 사물들을 사랑하는 세번째 작용으로서는 의지(意志)를 설명한다.

 

a) 지성(知性)은 구체적(具體的)인 성질들을 지각(知覺)하는 육신의 능력 -이것이 감각(感覺)의 근거(根據)이다- 과는 달리, 추상적(抽象的)인 성질들 즉 사물 자체의 개념(槪念)을 인식(認識)할 수 있는 영혼의 능력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붉은 장미를 볼 때, 지성(知性)은 '붉다'는 개념을 추상해낸다. 붉은 장미를 통해서 우리는 붉다는 개념을 장미에 매어두지 않고, 장미가 아닌 루비나 버찌 등 다른 붉은 모든 사물들에 적용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을 이끌어내게 된다.

지성(知性)이 특정한 구체적인 사물에 추상적인 개념을 적용시킬 때, 거기서 '버찌는 붉다', '베드로는 착하다' 하는 식의 판단(判斷)이 나온다.

일련의 판단들이 계속되고 발전해나가면, 거기서 어떤 추론(推論)이 나오는데, 이 추론으로 사람들은 더 위대한 진리(眞理)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지성(知性)은 선(善)함· 위대(偉大)함· 무한(無限)함 등의 보편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b) 기억(記憶)은 지성(知性)이 만들어낸 개념들을 보존하는 능력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강렬한 영성적(靈性的) 노력의 대상(對象)으로서의 이 기억에 대해서 길게 명백하게 설명을 해준다.

 

c) 의지(意志)는 지성(知性)에 의해 인식된 '좋은 것'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장난감을 본 어린 아이는 그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 좋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가령 그것을 조작하는 일이 번거롭다고 하더라도, 그런 번거로운 조작을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그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意志)의 근본적인 특성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또 다른 일보다 오히려 이 일을 하도록 결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어떤 사물을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그 사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의지적(意志的) 행위를 동시에 사랑의 행위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지성(知性)의 행위와 의지(意志)의 행위의 상반되는 특성들:

1) 지성(知性)은 추상적 개념을 통해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그 사물에 의식적으로 일치됨이 없이, 실제로는 그 사물과 구별된 상태로 남아있다. 반면에, 의지(意志)는 어떤 사물을 사랑할 때, 그 사물과 살제로 일치되거나 혹은 실제로 일치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對象)과 일치하고자 한다.

2) 지성(知性)은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지각된 그 사물을 개념화(槪念化)함으로써 자신에게 동화(同化)시킨다. 즉 그 사물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반면에, 의지(意志)는 어떤 사물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그 사물에 동화(同化)된다. 즉 자신을 그 사물과 비슷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하는 자 -주체(主體)-를 그가 사랑하는 대상(對象) -객체(客體)-에로 동화(同化)시키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자 -주체(主體)-를 변모시킨다고 말한다.

3) 사랑의 대상(對象) -객체(客體)- 안에서 사랑하는 자 -주체(主體)-를 그 객체(客體)에 일치시키고 변모시키는 이 사랑의 특성들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모든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의 바탕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 특성들을, 영혼에게 요구되는 피조물(被造物)들에 대한 이탈(離脫)의 실현에든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실현에든, 면밀히 적용시킨다.

3. 세 가지 법칙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에 이어서, 여러 가지 능력들 -예를 들면 감각(感覺)· 욕(慾)· 지성(知性)· 기억(記憶)· 의지(意志)- 이 지각(知覺)과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해나가는 데에 적용되는 세 가지 법칙들을 설명하는 것이, 사부(師父) 성 요한의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제 1법칙; 우선 감각(感覺)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지성(知性)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 지성(知性)은 처음에는 완전히 비어있다. 그것은 전혀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 (白紙, tabla rasa)와도 같다. 실제로, 태생소경은 자신의 감각(感覺)을 통해서 전혀 아무 색깔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색깔의 개념(槪念)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감각(感覺)들은 '영혼의 문들 (les portes de l' ame)'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제 2법칙; 먼저 인식(認識)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욕구(慾求)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다.

실제로:

a) 의지(意志)가 무엇을 욕구 -즉 사랑-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성(知性)을 통해서 그것 -객체(客體)-이 그 -주체(主體)-에게 보여져야 한다. 밭에 보물이 묻혀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결코 그것을 원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지(意志)가 지성(知性)에 종속되어 있다고 한다.

 

b) 반면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認識)은 의지(意志)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수도 있고,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의지(意志)가 어떤 사물을 지각(知覺)하는 데에 지성(知性)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예를 들자면, 책을 읽는 경우-, 지성(知性)은 그 사물을 인식(認識)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지성(知性)이 의지(意志)에 종속되어 있다고도 해야 한다.

제 3법칙; 욕(慾)은 지성(知性)에도 의지(意志)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욕(慾)들은 감각(感覺)에 의해 자극된 눈먼 정(情,tendance)들이고, 이 욕(慾)들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행위들에 거의 항상 동행(同行)한다.

거기서 두 가지 현상이 파생된다:

a) 욕(慾)들은 지성(知性)의 행위에도, 의지(意志)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식도락(食道樂) -미각(味覺)에 해당되는 욕(慾)- 은 우리에게 해로운 음식도 해롭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성(知性)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의지(意志)마저도 지성(知性)의 잘못된 판단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b)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慾)들의 영향은 의지(意志)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 그 방법은 욕(慾)들이 정(情)을 붙인 감각적(感覺的) 대상(對象)을 욕(慾)들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의지(意志)가 감각(感覺)에게 바라보지도 말고, 냄새맡지도 말고, 맛있는 음식의 맛을 회상하지도 말도록 명한다면, 욕(慾)은 감각적(感覺的) 대상(對象)이 자기에게는 없기 때문에, 없어지게 된다.

욕(慾)들에 대한 의지(意志)의 통제는 간접적인 통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感覺)의 느낌을 중재로 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4. 결론(結論); 의지(意志)의 우위성(優位性)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의지(意志)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한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네 가지다:

- 첫째로, 여러 지각능력들 -감각(感覺)· 지성(知性)· 기억(記憶)- 이 그 지각(知覺)한 내용을 의지(意志)에게 제공함으로써 의지(意志)에 봉사하기 때문이고,

- 둘째로, 다른 모든 능력들 -욕(慾)을 포함한 모든 능력들- 이 의지(意志)가 명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의지(意志)에 복종하기 때문이고,

- 셋째로, 의지(意志)야말로, 거룩한 사랑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들어올릴 수 있는 일치의 능력이고 변모의 능력이기 때문이며,

- 넷째로, 의지(意志)는 자유로움으로써 우리가 책임성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할 만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 있어서 한결같은 과제는, 영혼에게 방해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희생함으로써, 또 그런 희생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함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키워나가려는 데에 있다.

다른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성인(聖人)에 의하면 한 가지 뿐이다: '저녁에,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169]

부록 2.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들에 대한 독서 안내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작품들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독자들에게 이 도표를 제시한다. 이 도표에는 성인의 가르침에 따른 여러 단계들에 해당되는 작품의 장절(章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독자들에게 다음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 성인이 제시한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세 작품의 서문(序文)을 읽기 바란다.

- 그 다음에는, 위의 도표에서 각 단계들을 표시한 번호 (1∼13)에 해당되는 성인의 작품의 부분들을 차례로 읽기 바란다.

- 위 도표의 2번에서는, 산길 I, 13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거기서 우리는 감각(感覺)의 능동적(能動的) 정화(淨化)를 위한 구체적인 규범들을 발견할 수 있다.

- 도표의 5번에서는, 산길 II, 16∼21장은 다른 기회에 참조하기를 권한다. 이 부분은 환시(幻視) 등과 같은 비범한 현상들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충실한 논문을 이루는 것인데, 이 단계에서는 그런 비범한 현상들이 독서를 부담스럽게 하고 독자들의 의욕을 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도표의 9번 부분을 시작하기 전에, '사랑의 비밀 사다리' (밤 II, 19-20) 부분을 읽기를 권한다. 이 부분은 다음의 여정(旅程) 전부를 일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사랑의 산 불꽃' (도표의 13번 부분)에서 성인은, 앞서 이미 다루었던 논지(論旨)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내용들을 첨부시키고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이것을 독자들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논리(論理) 전개에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첨부된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불꽃 1절 (pp. 728-733; Ed. Pere Lucien-Marie), 2절 (pp.751-755), 3절 (pp.769-794; 795-798).

부록 3.

서평(書評)

이 서평(書評)은 스페인 부르고스(Burgos)에서 발간되는 가르멜회 영성잡지 100호 (1992년) 180-181페이지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스페인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소개한다.

ALBANI - ASTRUA,

La dottrina spirituale di S. Giovanni della Croce,

edizioni Mimep - Docete, Pessano (Mi) 1991, 172 pags.

Es un librito de divulgacion de la doctrina espiritual de San Juan de la Cruz, que el autor considera para la mayoria de los cristianos un , pues es la explicacion del ideal evangelico de perfeccion. De ahi su finalidad eminentemente practica: senalar -fiel a la doctrina del Santo- . Sirve para orientar tanto a los que inician este camino como a los que se encuentran en el, para que puedan comprender mejor lo que experimentan en su vida. Es una vibrante llamada a la santidad.

Su esquema de desarrollo es muy sencillo. Despues de unos capitulos iniciales sobre los componentes de la vida espiritual (destino del hombre a la union con Dios, crecimiento por la vida teologal, colaboracion humana, la nada y el todo, la noche activa y pasiva), comienza la descripcion del itinerario sanjuanista segun las etapas siguientes: 1 ) Oracion-Purificacion; 2 ) Purificacion activa de los sentidos; 3 ) Meditacion; 4 ) Contemplacion activa; 5 ) Purificacion activa del espiritu; 6 ) Purificacion pasiva de los sentidos; 7 ) Contemplacion pasiva; 8 ) Transicion; 9 ) Purificacion pasiva del espiritu; 10 ) Comienzo de la union; 11 ) Desposorio espiritual; 12 ) Matrimonio espiritual; 13 ) Union transformante.

La descripcion de cada una de estas etapas es muy sucinta, recogiendo siempre los textos fundamentales sanjuanistas alusivos al fenomeno comprendido en cada etapa. De esta forma ofrece un punto de referencia seguro en la dificil singladura espiritual.

Esta descripcion, sin embargo, tiene dos pequenos inconvenientes. El primero es que se trata de una descripcion puramente conceptual, desprovista de esa carga experiencial y mistagogica que reciben de San Juan de la Cruz, convirtiendo estos temas en experiencias o realidades vivas de la vida cristiana. El autor, por el contrario, convierte estas realidades en temas, desarrollados mas bien en categorias clasicas y segun un metodo tradicional, que hoy nos parecen lejanas y no facilmente inteligibles. Y es que la doctrina sanjuanista, para hacerla cercana e inteligible al hombre de hoy, ha de ser interpretada en otras categorias o vaciada en otros moldes distintos de los de la espiritualidad cl sica, en los que el se expreso. En otras palabras, requiere una relectura en nuevas claves teologico-espirituales, que el autor no hace, ni lo intenta siquiera. Aqui radica una de sus limitaciones mas importantes.

Otra limitacion o segundo inconveniente es la forma rigurosa o excesivamente rigida en concebir las etapas del itinerario espiritual, como si el desarrollo de la vida espiritual estuviese rigurosamente sujeto a la sucesion de esa serie de grados descritos. No responde a la concepcion sanjuanista -ni siquiera teologica- de la evolucion de la vida cristiana. Por eso el autor, mas que etapas, lo que describe son una serie de temas o aspectos de la vida espiritual, que en San Juan de la Cruz tienen especial relevancia, pero no destaca la peculiaridad del proceso sanjuanista, ni la import!ancia u originalidad que el Santo da a determinados temas (v. gr., vida teologal, purificacion de las noches...) en el itinerario hacia la union con Dios.

Estas limitaciones se justifican desde el punto de vista del autor, puesto que lo que el se propone es una simple divulgacion de la doctrina espiritual de San Juan de la Cruz. Pero entiendo que la divulgacion ha de hacerse no solo con criterios de fidelidad material a la doctrina del Santo, sino tambien de interpretacion creativa de su doctrina a la luz de los planteamientos actuales de la teologia espiritual. Esta tarea no es propia solo de la investigacion, sino tambien -y mas propiamente- de la divulgacion. De lo contrario, no se da divulgacion, sino mera repeticion.

Pese a estas limitaciones, el librito cumple su proposito de dar a conocer el mensaje de San Juan de la Cruz a tantos cristianos que ignoran este : si las senalamos; es con la mejor de las intenciones para animar y orientar al autor en la reelaboracion de su libro en sucesivas ediciones; para que pueda cumplir mejor su proposito.

Ciro Garcia

(번역문)

Albani, Astrua 공저,

La Dottrina spirituale di San Giovanni della Croce, Dottore della Chiesa.

Mimep-Docete, Pessano(Milano), 1991, 172페이지.

이 책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성적 가르침의 대중화를 시도한 소책자이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성적 가르침은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춰져 있는 보물'인데, 사실 성인의 이 가르침은 '완덕(完德)'이라는 복음적 진리(理想)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심오한 설명이다. 따라서, 대단히 현실적인 저자들의 의도는, 성인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하느님과의 합일에로 향한 영혼의 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이 길에 이제 막 들어선 사람들과 이미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삶 안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길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르침은 '성덕(聖德)'에로의 감동적인 부르심이다.

이 책의 서술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처음에 몇몇 장(章)들에서는 영성생활의 구성요소들 -하느님과의 합일에로 정향된 인간의 운명, 대신덕적(對神德的) 삶을 통한 성장, 인간의 협력, 무(無)와 전(全), 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 을 다룬 후에,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따라 성인께서 제시하신 그 여정(旅程)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1) 기도 - 정화(淨化), 2) 감각의 능동적 정화, 3) 묵상, 4) 능동적 관상, 5) 영(靈)의 능동적 정화, 6) 감각의 수동적 정화, 7) 수동적 관상, 8) 전이(轉移)의 단계, 9) 영(靈)의 수동적 정화, 10) 합일의 시작, 11) 영적 약혼, 12) 영적 결혼, 13) 변모의 합일.

각 단계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간결하다. 이 묘사들 안에서, 우리는 각 단계들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암시하는 성인의 기본적인 텍스트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쉽지 않은 이 영적 여행에 있어서 확실한 어떤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두 가지 작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결함은, 순전히 개념적인 묘사라는 점인데, 이는 이런 주제(主題)들을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체험과 실재(實在)들로 변모시키시는 성인의 그 체험적이고 신비신학적인 가르침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거꾸로 이런 실재(實在)들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고전적인 범주들에 잘 맞추어진 주제(主題)들로 바꿔놓았는데, 이는 오늘 우리에게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것으로, 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가르침을 현대인에게 더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이 다른 범주들 안에서, 고전적인 영성과는 다른, 성인께서 그 안에서 당신 사상을 표현하신 그 새로운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학적이고 영성적인 새로운 기준으로부터 성인의 작품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지는 한계성들 중 하나가 나오게 된다.

다른 한계성 혹은 두번째 결함은, 마치 영성생활의 진보라는 것이 이 책에서 설명된 그 단계들에 엄격하게 얽매여있는 것처럼, 영적 여정의 각 단계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엄격한 혹은 지나치게 딱딱한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변화 발전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개념에도 신학적인 개념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들이 서술하는 것은 단계들이라기보다는 영성생활에 대한 일련의 주제들 혹은 일련의 측면들이고, 그 안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시는 것은 사실이나,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가르침에 따른 영혼의 여정이 가진 특수성도 성인께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여정 안에서 어떤 특정 주제들 -예를 들자면, 대신덕(對神德)이나 밤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화(淨化) 등- 에 부여하시는 중요성 혹은 독창성도 확실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한계성들은, 저자들이 의도했던 것이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가르침을 단순히 대중화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저자들의 시각(視覺)에서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중화라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자료의 충실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영성신학의 현대적 문제제기에 비추어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창조적 해석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제는 단순히 성인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경우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대중화의 경우에도 역시, 아니, 대중화의 경우에는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화라기보다는 단순한 반복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한계성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책은 '감춰져 있는 보물'을 알지 못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메시지를 알리고자 하는 그 목적을 이루고 있다. 그 한계성들에 대해 지적한 것은, 이 책이 재판(再版)될 때에는 그 내용을 다시 가다듬도록 저자들을 격려하고 유도하기 위한 것이고, 이는 저자들이 의도했던 그 목적을 더 잘 이루기 위해서이다.

씨로 가르씨아 (Ciro Garcia)[170]

부록 4.

십자가의 성 요한의 '완덕의 산' 그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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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註)

1) 요한 17,21.

2) 마태 20,1-6.

3) 불꽃 3,28.

4) 루가 1,49.

5) Crisogono, Vida, p.45.

6) Vida, p.69.

7) Vida, p.67.

8) Vida, p.98.

9) Vida, p.350.

10) <譯註> 성인의 생애에 대한 번역서로는 대구 가르멜수녀원에서 번역해낸 Richard P. Hardy의 저서 '무(無)에의 추구(追求)' (분도출판사, 1986)를 추천한다.

11) <譯註> 일러두기는 그 성격상 한글판 번역본에 맞춰 일부 수정했다. 주요 작품 제목의 약어도 한글로 조정했고, 괄호 안에 스페인어 원제목을 밝혔다.

12) 로마 8,29.

13) 로마 8,9.

14) 사목헌장 22.

15) 갈라 4,5.

16) 로마 8,17.

17) 요한 14,23.

18) 노래 39,3.

19) 노래 39,3.

20) 노래 39,3-4.

21) 노래 39,6.

22) 노래 39,7.

23) 마태 13,46.

24) 산길 2,29,6.

25) 마르 12,30.

26) 산길 1,11,4.

27) 산길 1,11,3.

28) 루가 5,16.

29) 루가 6,12.

30) 마태 6,6.

31) 루가 18,1.

32) 마태 7,13.

33) 산길 1,13,11.

34) 불꽃 3,46-47.

35) 산길 2,7,11.

36) 불꽃 3,59.

37) 산길 1,2,1.

38) 산길 1,1,4.

39) 산길 3,39,1.

40) 불꽃 3,22.

41) 산길 1,13,7-8.

42) 산길 1,13,3.

43) 마태 11,30 참조.

44) 산길 1,13,4.

45) 산길 1,13,4.

46) 산길 1,13,4.

47) 산길 1,13,4.

48) 산길 1,13,6.

49) 산길 1,13,9.

50) 산길 1,15 참조.

51) 산길 2,14,2.

52) 산길 2,14,2.

53) 산길 2,14,2.

54) 산길 2,14,3.

55) 산길 2,8,3.

56) 산길 2,8,5.

57) 산길 2,8,3.

58) 산길 2,6,6.

59) 산길 2,9,1.

60) 산길 2,22,3.

61) 산길 2,29,12.

62) 노래 4.

63) 노래 14.

64) 노래 12.

65) 사랑에 불타는 영혼의 기도.

66) 노래 3 참조.

67) 산길 3,2,14.

68) I열왕 3,10.

69) 산길 3,3,5-6.

70) 밤 5.

71) 밤 1,1,2.

72) 밤 1,14,1-3.

73) 순교자들의 엘리세오 (Eliseo de los Martires) 신부, 영(靈)에 대한 의견들 (dictamenes de espiritu), 5.

74) 밤 1,9.

75) 산길 2,13 참조.

76) 산길 2,13.

77) 산길 2,15.

78) 밤 1,10.

79) 산길 2,15.

80) 산길 2,15.

81) 밤 2,1.

82) 밤 2,2.

83) 밤 2,2.

84) 산길 2,22.

85) 산길 3,13.

86) 밤 1,8.

87) 밤 2,5.

88) 밤 2,5.

89) 밤 2,6.

90) 밤 2,8.

91) 밤 2,8.

92) 밤 2,6.

93) 밤 2,6.

94) 밤 2,6.

95) 밤 2,7.

96) 밤 2,7.

97) 밤 2,18.

98) 밤 2,24.

99) 밤 2,17.

100) 밤 2,17.

101) 밤 2,23.

102) 밤 2,24.

103) 마르 10,21.

104) 노래 22,5.

105) 불꽃 서문 3-4.

106) 아가 1,2.

107) 밤 2,23.

108) 노래 1.

109) 요한 14,23 참조.

110) 노래 1,7.

111) 노래 1,6 참조.

112) 노래 1,13 참조.

113) 노래 7,4.

114) 노래 8.

115) 노래 11,4.

116) 노래 1.

117) 노래 9.

118) 노래 6.

119) 노래 13,9.

120) 노래 13.

121) 불꽃 3,25.

122) 노래 14,15.

123) 노래 14,15.

124) 노래 14; 15,30 참조.

125) 노래 16,2.

126) 노래 19,2.

127) 루가 18,1.

128) 순교자들의 엘리세오 (Eliseo de los Martires) 신부, 영(靈)에 대한 의견들 (Dictamenes de espiritu), 10.

129) 노래 20; 21,10.

130) 노래 22,1.

131) 노래 22,1.

132) 노래 26,4.

133) 불꽃 2,27.

134) 노래 22,3.

135) 노래 22,3.

136) 노래 22,3.

137) 노래 23,6.

138) 노래 26,4.

139) 불꽃 4,15.

140) 노래 22,6.

141) 노래 23,1.

142) 노래 38,4.

143) 노래 39,6.

144) 노래 40,5.

145) 노래 40,7.

146) 불꽃 1,25.

147) 불꽃 서문 3.

148) 불꽃 서문 3.

149) 불꽃 1,3.

150) 불꽃 1,3.

151) 불꽃 1,6.

152) 불꽃 1.

153) 불꽃 2,7.

154) 불꽃 2.

155) 불꽃 3,2.

156) 불꽃 4,4.

157) 불꽃 4,15.

158) 불꽃 4,6.

159) 불꽃 4,10.

160) 불꽃 4,16.

161) 불꽃 4.

162) 산길 3,2,10.

163) 루가 1,51.

164) 루가 1,49.

165) 루가 1,45.

166) 루가 1,34.

167) 루가 1,38.

168) 시편 15,11.

169) 빛과 사랑의 말씀 59.

170) <譯註> 맨발가르멜수도회 소속 스페인 신부로서, 1999년이래 스페인 부르고스(Burgos) 관구의 관구장직을 맡아있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