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바오로 서간해설 -김영남신부님

시릴로1004 2010. 3. 16. 16:57

중견사제연수원 강의 (김영남 신부)

2001년 11월 16(금)-17일(토) 9:10-12:00

“중견사제로서 다시 듣는 바오로 서간”

 

시작 기도:

인사:

여기 계신 신부님들께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을 사목현장에서 헌신하셨습니다. 그 동안 기쁜 일도 많았겠습니다만, 마음 아픈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제로서의 보람도 느끼셨겠지만, 때로는 황량함도 느끼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사람들과 일에 치이다시피 바쁘게 사시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중견사제연수회라는 기간 동안) 여러분께서는, 모처럼 거기에서 풀려나, 몸과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지나온 사제생활을 총점검하시고, 앞으로 살아갈 사제생활을 위한 에너지(영성, 건강의 힘)를 재충전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강의 주제에 관하여:

제가 오늘과 내일 여러분께 강의할 내용의 대부분은 여러분이 신학교 시절 때 이미 들은 것이거나 또는 사목생활을 하시면서 강론이나 신자재교육의 강의준비를 하시면서 이미 다루셨던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성서말씀은 어느 때 듣더라도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여러분과 함께 바오로 서간의 일부를 읽어가고자 합니다.

지난 10여년의 사목생활을 돌이켜보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여러분께 사제란 누구입니까? 여러분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제의 정체성’, ‘복음선포자의 정체성’,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에 관한 이런 질문에 대하여 “주님을 복음으로 전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불사르듯이 헌신한 사도 바오로는 어떤 대답을 주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해 전파했던 ‘그리스도 신앙’은 현재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그가 세웠던 ‘교회’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차 례

I. 데살로니카 전서의 주요 메시지:

‘그리스도 신앙의 신선함’과 ‘선교의 근본자세’.

II. 고린토 전서 1장-4장에 나타난 복음선포자의 신원

................................................................................................................................

 

I. 데살로니카 전서의 주요 메시지: ‘그리스도 신앙의 신선함’과 ‘선교의 근본자세’.

다른 입문적 내용은 생략하고 데살로니카 전서의 집필동기와 중요성에 대한 기억만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1.1. 데살로니카 전서의 집필동기:

1데살 3,1-2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와 실바노는 박해 중에 허둥지둥 떠나온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사정이 너무나 걱정이 되어 그 곳 사정을 알아보라고 아테네에서 디모테오를 파견하였다.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고린토에 와 있을 때 디모테오가 데살로니카 공동체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 사랑, 희망 속에 굳건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카 전서이다(1데살 3,6-10; 1,2-10).

1.2. 데살로니카 전서의 중요성: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51년경에 데살로니카 전서가 쓰여졌다면 이 편지는 지금껏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 바오로의 편지 중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임은 물론 신약성서 전체 문헌중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51년이라 한다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사건이 있은지 불과 20여 년밖에 안되던 때, 즉 역사적인 예수사건에 대한 목격증인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 때에 쓰여진 데살로니카 전서는 바오로의 복음선포를 통해 막 형성된 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참신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편지이며 선교활동 초기에 사도 바오로를 움직였던 기본 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1.3. 서두인사(1,1)의 주요 용어 해설

“바오로와 실바노와 디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당대의 그리이스 문화권 내에서 사용되던 편지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비교해 보면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성서 안에 있는 신약성서 시대 때 그리이스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편지의 인사 형식은 야고버 1,1과 사도행전 23,26 에서 볼 수 있다:

야고버 1,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 디아스포라(국외 공동체)에 있는 12 지파에게 / 인사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3,26을 보면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체포하였던 파견대장 클라우디오 리시아가 가이사리아 (체사레아)에 있는 펠릭스 총독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클라우디오 리시아스가 / 총독 펠릭스 각하께 / 문안 드립니다”. 즉, 신약성서 시대의 일반적 그리이스 편지의 인사형식은 1)발신자의 이름 2) 수신자의 이름 3) chairein cai,rein (인사합니다)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간단한 인사, 이상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 23,26과 비교해 볼 때 1데살 1,1의 편지 서두인사는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차이점을 갖고있다: 1) 발신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바오로, 실바노 그리고 디모테오 세 사람이다.(편지의 공동체적 성격 유의할 것). 2) 수신자가 어느 특정 개인이 아니라 ‘교회’(ekklesia)라는 단체이다 (역시 편지의 공동체적 성격을 보여준다). 3)‘교회’(ekklesia)'가 ‘테살로니카인들의 교회’이며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모임, 집회)’로 규정되어 있다. 4) 인사는 일반적 형식대로 ‘chairein'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charis(은총)’와 `eirene’(평화)라는 명사로 표현되어 있는데 은총과 평화라는 이 두 개념은 바오로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5) ‘은총’과 ‘평화’라는 말 사이에 ‘여러분에게’라는 말이 들어감으로써 수신자가 더욱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온다.

 

evkklhsi,a ekklesia:

a) 어원적 의미: ka,lew(부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수동태 분사형 evklh,qhn 에서). 즉‘불리운’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b)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ekklesia라는 그리이스 단어는 무엇보다도 일반 세속적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이스어 ekklesia는 원래 ‘시(市)의 제반사항을 토의하기위한 시민들의 모임(집회)’를 의미했었다.

c)ekklesia라는 단어의 종교적 사용 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비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LXX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를 뜻하던 히브리어 ל?? Qahal 을 ekklesia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참조: הוהי ל??.와 1고린 1,2의 evkklhsi,a tou/ Qeou). 이 히브리어qahal ל??은 동사로는 ‘부르다’라는 뜻를 갖고 있고 명사로는 ‘모임, 집회’를 뜻한다. 이러한 LXX에서의 용례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ekklesia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에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신앙인들의 모임 (집회)’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1 데살 1,1에 는 ‘ekklesia'라는 말이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ekklesia’라고 수식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에게 바오로가 ekklesia(라틴어 ecclesia)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 모임(집회)는 일반 사람들의 사교모임은 될지 몰라도 그리스도적 모임이라고 할 수 없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실제의 교회내의 여러 모임을 가지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모임이 진정으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 되도록 의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Iesous vIhsou/j

발신자들의 이름들은 히브리적 이름이 아니었다: 즉, Timotheos라는 이름을 우리는 고대 어느 그리이스 장군에게서 볼 수 있고, Paulus라는 이름은 로마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름이었으며 (예, 한니발에게 패한 Paulus Aemilius) Silvanus는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숲을 담당하고 있는 神의 이름이었다. 반면에, Iesous라는 이름은 그리이스식 이름도 로마식 이름도 아니었고 Jehoshu`a (?וּשׁוֹה?) 또는 Jeshu`a (?וּשׁ?), ‘Jahwe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참조 마태 1,21)라는 히브리 이름의 그리이스적 변형이다. Iesous(예수스)라는 이름은 그리이스어 성서(LXX)를 읽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었다: 구약성서에서 Iesous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출애급 17,9인데 우리가 흔히 요수에 또는 여호수아라고 부르는 인물로서 후에 모세의 후계자가 된 사람이다 (LXX에는 Iesous라고 되어 있다). 그밖에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활약했던 대사제 예수(여호수아)가 있고 (에즈라 3장;하깨 예언서와 즈카리야 예언서 참조),집회서 서문과 집회서 50,27에 거명되고 있는 집회서의 저자인 ‘시라의 아들 예수’가 있다. 이러한 관찰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성서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분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고치게 한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LXX을 읽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Christos, Cristo,j

cri,w chrio(‘기름바르다’. 참조: 히브리어로는 ח??)라는 동사 (수동태 분사 evcrisqhn )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어원적으로 뜻한다. 성서 밖의 그리이스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지 않다. 반면에 LXX에서는 Christos라는 단어가 거의 항상 사람에게 적용된다: 즉, 기름 부음 받은 사제에게 (레위4,5.16; 6,22 등등) 몇 군데에서는 한 예언자에게 (1열왕 19,26) 적용된다. 그런데 히브리어 mashiah(마쉬아흐 ?י??) 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Christos가 사용되면서 Christos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특정의미 즉,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실 때 하느님이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인 왕’이라는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메시아”라는 발음은 아람어 머쉬하(א?י??=히브리어 mashiah[마쉬아흐]에 관사가 붙은 형태)를 그리스어로 Messi,aj (멧시아스)로 음역한데서 유래한다. 이 점은 요한 1,41에 잘 나타나 있다: “안드레아가 시몬을 만나서 ‘우리는 메시아(그리스어로 Messi,aj Messias)를 만났네’하고 말했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그리스어로 Christos)이다”. 1데살1,1에서 Christos라는 말은 더 이상 ‘메시아’라는 칭호로 사용되지 않고 예수님의 제 2의 이름이 된 것 같다 (마르꼬 1,1 참조). 참조: 마르 8,29의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

 

반면에 ku,rioj Kyrios(퀴리오스) 라는 말은 여기 (1 데살)에서 아직 칭호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 1데살 1,1에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1,3에서는 칭호의 의미가 아주 분명해 진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1 데살 1,1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예수에게 `kyrios'라는 칭호가 부여되고 있는 점은 LXX구약성서를 읽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점이었다. 왜냐하면 LXX에서는 마소라 텍스트에서 ‘야훼’로 되어 있는 것을 kyrios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LXX을 읽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kyrios'는 유일하신 ‘하느님 야훼’를 뜻했던 것이다. “예수는 ‘퀴리오스’시다!”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다음 구절을 참조 할 것: 필립 2,11[그리스도 찬가의 끝구절]; 로마 10,9; 1고린 12,3.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ca,rij charis 라는 단어는 그리이스어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우선적 의미는 ‘아름다움 - 사랑스러움’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호의, 친절’등의 의미를 갖는다. 성서에서는 히브리어 ‘헨 ן?’이 `charis'로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헨’은 무엇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거져 베푼 호의 또는 선물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그런 호의나 선물이 불러 일으키는 ‘고마움’‘은혜로움’을 의미한다. charis는 신약성서에서 ‘바오로적인 개념’이라고 일컬을 만큼 특히 바오로가 많이 사용하고 있다 참조로 언급한다면, 복음서들에서 charis는 중요한 단어가 아니었다. 마태오와 마르꼬에는 전혀 한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고 있고 (요한 복음에서는 서문에만 나온다) 루가에는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바오로 서간에서는 매우 자주 사용된다 (1 데살에서는 시작 인사와 끝 인사에 두 번; 2 데살에 4번; 필립비 3번; 갈라티아에 7번; 1 고린 10번; 2 고린 18번; 로마 24 번..등등). 바오로에게 있어서 charis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상론을 생략하고 간단히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헤아릴길 없는 사랑 - 은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평화’(eivrh,nh eirene): 히브리어 מוֹל? (샬롬)은 어원적으로 ‘온전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히브리인들의 일상 인사말이 되어 사용되고 한다. ‘샬롬’이라는 말이 여기 바오로의 인사말에서도 일상적인 인사말 정도로만 사용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쉬우나 ‘평화’라는 말도 바오로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론적’이다. 즉 바오로가 기원하는 ‘평화’란 단지 소극적으로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평화’ 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선사되었고 선사되는 평화’를 의미하는 말로서 ‘화해’ 또는 ‘의화’등의 개념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의 효과를 표현하는 바오로의 중요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 으로 말미암아 의화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라는 로마 5,1의 말씀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사도 바오로의 의하면 평화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베풀어주시는 평화이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고 기도로서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평화와 은총’이라는 말을 한 짝을 지어 편지 서두인사와 끝인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축원’의 내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오로에게 있어서 ‘평화’와 ‘은총’은 서로 긴밀히 관련된 개념이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라는 표현은 바오로의 모든 편지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고 있다.

 

 

1 데살 1,2-5와 ‘감사’ (eucharistia)

데살로니카 전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로 인해 하느님께 드리는 바오로의 감사’의 정으로 가득찬 편지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편지 서두에서부터 확인하게 된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할 수 없이 문장을 끊을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보면 2절부터 5절까지는 한 문장을 이룬다.

euvcaristou/men (“우리는 감사합니다”)라는 종결동사로 표현되는 주문장에 1) poiou,menoi(행하면서), 2) mnhmoneu,ontej (기억하면서), 3) eivdotej(알면서, 알기 때문에)등의 분사들이 연결되면서 복합문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 분사 eidotes 다음에는 o[ti로 시작되는 종속절이 또 따르고 있다. 이렇게 문장이 길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 수 있겠지만, 반면에 문장 전체에 ‘역동감’(활력)을 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감사’의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1,2: euvcaristou/men tw/| qew/|(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바오로의 편지 서두(발신인 이름, 수신인 이름, 간단한 인사말) 다음에는 으레 감사의 기도가 따른다 (갈라디아 서에는 논쟁적 배경 때문인지 예외적으로 감사의 기도 부분이 없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태도로서 ‘하느님의 은총(charis)’을 받아들이는 합당한 태도이다.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거져 베푸시는 호의,총애)이기 때문이다(감사: euvcaristi,a).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교우들에게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바오로의 모범을 보여 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1,2 (‘항상’ 감사합니다); 2,13:“그리고 우리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끊임없이 감사드립니다”; 3,9:“우리가 여러분에 관하여 하느님께 어떤(어떻게 하면 올바로)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와 같이 스스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모범을 보인 바오로는편지의 제 2부인 ‘권면’부분에서 다음과 같권면한다: 5,18에서 “萬事(en panti)에 감사하십시오!”라고 권고하면서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 대한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며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물론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동기 부여는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말씀들인 “항기뻐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5,16-17)에도 해당된다.

 

‘감사’와 관련하여 1데살 5,18은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5,16-18에 나오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다음과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5,16-18: 아마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일 것이다.

항상 기뻐하시오”: 필립 4,4에서는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시오”. 특히 필립비서는 사도 바오로가 옥중에 있었을 때의 편지인데도 이 편지에는 사도 스스로가 기뻐하고 있다는 표현은 물론이고 교우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까지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편지이다(필립 1,4.18.25;2,2.17이하.28이하; 3,1;4,1.4.10). 필립비서는 감옥의 담장과 죽음의 위협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잘 증언해주는 편지이다. 한편 로마 14,17에서 바오로는 ‘성령안에서의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갈라 5,22에서는 기쁨을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로 언급한다.

끊임없이 기도하시오”: 여기서 ‘끊임없이’라는 부사가 1데살 안에서 세번째 사용되고 있는데 (1,2-3; 2,13; 5,17) 매번 기도와 관련이 된어 나온다. 로마 12,12; 에페 6,18;

골로 4,2와 루가 18,1에 의하면 항구한 기도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인의 기본적인 자질의 하나이다. 바오로는 기도하라는 권면을 길게 다루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그의 편지에서 사도 자신이 수신자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있는데 이 현상은 바오로 사도가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잇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 바오로는 거의 대부분 편지본문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감사를 누구에게 할지 명시되어 잇지 않지만 하느님이 그 대상이라는 것은 전후 문맥으로 분명하다. 하느님이야말로 감사할 만한 모든 선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카 전서야말로 감사의 정으로 가득차 있는 편지이다 (1,2; 2,13). 1데살 5,25에서 즉 편지의 말미에서 바오로는 교우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참조: 골로 2,7; 3,15.17; 4,2; 에페 5,4.20 그리고 로마 1,21. 5,18b에서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이라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따로 따로 살펴보았으나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가 긴밀히 서로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어찌 감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와 소유 그 모든 것을 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사할 수 있으며 또 진정한 의미에서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신앙에서 진정으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현세에서부터 누릴 수 있는 ‘福音’의 내용이 아닐까? 한가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하느님과 그리스도 신앙인 각 개개인간의 私的인 차원에서만 말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와 기도’의 권면을 하기 전에 얼마나 공동체의 교우들 상호간의 관계를 강조하였는지를 잊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 공동체와의 관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재확인하게된다.

 

1,3:믿음’,‘사랑’ ‘희망’:

‘믿음의 일(행동)’,‘사랑의 수고’, ‘희망 (속의)의 인내’: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첫번째 동기로서 선교사들 (바오로와 실바노와 디모테오)은 소위‘向主三德’을 언급하고 있다. 전통적인 향주삼덕의 순서는 1 고린 13,13에의한 믿음, 희망, 사랑 의 순서인데 1 데살 1,3에서는 희망이 제일 끝 자리에 와 있다. 이 삼덕의 기원에 관한 의견이 분분했다. 분명한 것은 신,망,애 삼덕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의 문헌 중에서는 이 곳 1 데살 1,3 이 처음이며 두번째는 1데살 5,8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적 무장’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들로서 정신을 차려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데살5,8). 1 고린 13,13에는 분명하게 연결되어 나온다:“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참조: 히브리 10,22-24; 6,10-12; 에페 1,15-16; 요한 묵시록 2,19; 골로 1,4-5:“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 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을 .....하늘에 마련해 두신 축복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

‘믿음의 일’(e[[rgon th/j pi,stewj) : 이 표현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바오로의 후기 문헌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그의 중심신학인 의화론에 위배되는 말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ek pisteos)이지 율법의 일들 (ex ergon nomou)에 의해서가 아니다” (참조:로마3,28; 갈라 2,16; 로마4,5-6; 갈라 3,2-5). 개신교 신자들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신앙(믿음)이 실천(일)을 아예 배제하고 있기나 하는 듯이 바오로가 주장한 믿음을 이해할 때도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언제나 실천을 동반한 믿음을 설교했다. 그는 ‘의화의 기초가 무엇이냐는 차원에서 말할 때 의화의 기초는 ‘율법의 일들 ’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 (행동, 실천) 그 자체‘가 아니라율법의 일들’이 의화의 기초로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실존)의 기초는 인간이 쌓아 놓은 것 (이루어 놓은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선사(은총)은 인간 편에서의 활동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러한 것을 ‘신앙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율법의 일들’이 아니라 ‘믿음 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서 가장 ‘논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갈라디아서에서 조차 중요한 것은 일하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에 의해 힘(에너지)을 내는 믿음 (pistis di'agapes energoumene) 만이 중요하다”(갈라 5,6;참조 갈라 5,14;6,2). 그리고 만일 바오로가 의화론에서 말하는 ‘믿음’이 실천을 배제하는 믿음을 의미했다면 바오로의 모든 편지들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 많은 훈계들은 무의미한 말들에 불과할 것이다.

사랑의 수고’: 사랑 때문에 감수하는 수고들, 더 나아가 ‘사랑 때문에 기꺼이 받아 들이는 고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신앙인들이 감수하는 ‘사랑의 수고’는 그보다 앞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바오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우리 인류를 위한 한없는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드러난 이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사도 바오로의 그 많은 ‘사랑의 수고’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참조:로마 8,31-39; 갈라 2,19-20; 2고린5,13-14).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19b-20);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5-37) ;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2 고린 5,13-14). 위의 인용된 바오로 사도의 편지의 말씀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났듯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로마 5,2-8의 말씀은 특히 ‘희망의 인내’ 와 관련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지만, 위에서 신,망,애 삼덕에 관해서 언급했던 것들이 종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데살 1,4-5: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과 ‘말씀의 능력’

 

2-3절에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삶으로 인한 선교사들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말씀이 있었다. 4-5절에도 감사의 동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선교사들의’ 복음선포 과정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이 감사의 동기가 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형제들이여’라는 표현(참조: 2데살 21,3; 신명 33,12; 집회 45,1)에 대하여는 묵상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는 선교사들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선택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복음선포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된 데살로니카 교우들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선택된 형제자매들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씀 같지만 이 점을 선교사들은 자칫 잘못하면 잊기 쉽다. 선교사들이나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선포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나 다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귀한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선교사들의 기본자세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고압적인 자세는 예수님의 자세와 가르침이 아니었음은 물론 사도 바오로의 자세도 아니었다.

1,5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놀라운 힘을 가지고 전파되는 데에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이 드러난다고 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오로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 하였던 복음선포의 놀라운 결과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권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이르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복음선포’의 심오한 차원을 눈여겨 보아야한다. 복음선포는 인간들인 선교사들이 하고 있지만 그 복음선포 안에는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몸소 활동하고 계신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같은 편지인 1데살 2,13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거기서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선교사들로부터 들은 복음을 인간의 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그들 안에서 효력을 내고 있다 (에너지를 내고 있다 energeitai)’고 덧붙이고 있다 (히브 4,13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후일 사도 바오로는 로마 교우들에게 “복음은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라며 복음선포의 심오한 차원을 강조한다. 즉 바오로는 복음을 우리가 종합뉴스 시간에 듣는 수많은 소식 중의 하나와 같이 그저 듣고 지나가 버릴 수 있는 ‘들을 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삶에 ‘구원’과 관련하여 효과를 내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이 구원능력(힘)은 아무에게나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작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로마 1,16-17참조). 방금 언급한 복음(선포)의 심오한 차원과 ‘하느님 말씀’의 능력에 관한 말씀은 후대 교회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는 복음선포가 얼마나 막중한 임무인지를 일깨워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복음선포’ 때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것도 일깨워 준다. 다행히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이끌어주고 변화시켜 준다는 것을, 더구나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열심한 신앙인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1,6: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환난 속에서의 기쁨’:

“그리고 여러분은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를 본받고 또한 주님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환난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바오로는 그들의 이 태도야말로 자신들뿐 아니라 ‘주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적 태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人之常情이기에 고통(환난)과 기쁨은 일반적으로 兩立하지 못한다. 환난 속에서도 기쁨을 가졌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위의 말씀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비추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바오로에 의하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을 간직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베푸신 이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기쁨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갈라 5,22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데 그중 사랑 다음으로 언급되는 두번째 열매가 바로 기쁨이다(‘성령과 기쁨의 관계’에 관하여 참조: 1데살 1,6; 5,16-19; 3,9; 로마 14,17; 로마 8,15). 무릇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며 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사는 삶의 나무에서 ‘사랑, 기쁨, 평화 등등’의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성령의 기쁨’이란 순간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맡기는 긴 과정의 신앙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며 역설스럽게도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가능한 기쁨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사도 바오로 자신이 이러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필립비서이다. 아시다시피 필립비서는 옥중에서 쓰여진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필립 1,13.17참조) ‘기쁨의 편지’라고 할만큼 ‘기쁘다’ 또는 ‘기뻐하라’는 말씀이 많은 편지이다(필립 1,4.18.25; 2,2.17이하.28이하; 3,1; 4,1.14). 환난 가운데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을 사도 바오로의 다음 편지들 안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다. 2고린 1,3-7에서 사도 바오로는 ‘환난’중에 베푸시는 ‘위로’에 대하여 다섯절 밖에 안되는 글에 ‘위로’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사용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그 중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 넘칠 수록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그만큼 더 넘치기 때문이다”(2고린 1,5)라는 역설적인 말씀은 사도 바오로로 하여금 그 환난 중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이 위로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점을 2고린 4,7-10에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표현한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힘이며 결코 우리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우리는 갖은 환난을 다 겪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참조: 이른 바 ‘고난목록’: 2고린 4,7-12; 6,3-10; 11,23-29; 그리고 ‘사도직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난’가운데에 느끼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곤하여 2고린 5,14; 1고린 9,16) 즉 외적으로 체험되는 현실세계는 죽음이 위협하거나 지배하는 ‘죽음의 세계’일지 모르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하여 계시다고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내면에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다고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1데살 1,6에서 사도 바오로는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주님을 본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나를 본받으십시오”(1고린 4,16; 필립 3,17 참조)라는 바오로의 말씀은 자기자랑처럼 들려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나를 본받으라’는 바오로의 말씀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는 1고린 11,1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시오”. 이 말씀에 의하면 바오로가 교우들에게 본받으라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이다. 사실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이야말로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대원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필립비 2장에도 나오듯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당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가르치신다 (요한 13,14-15; 13,34; 마르 10,45).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본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나 다같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 그 자체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본받으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과 환난을 전혀 모르고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곳에 참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1,9-10에는 사도 바오로의 종말론이 표현되어 있다. 바오로 사도 시대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종말의 때’가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으며 주 예수께서 종말의 심판을 하시러 곧 재림하시리라는 믿음 속에 살아갔다. 1데살 1,10에는 ‘(하느님의) 진노’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적인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서는 ‘惡에 대한 야훼님의 응징적 개입’이 줄기차게 선포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惡의 세력이 극악해지자 이 ‘악에 대한 야훼의 응징적 개입’이 최종적 개입이 되는 ‘야훼님의 날’이 희망의 날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이 ‘야훼의 날’은 양면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악인들에게는 ‘진노의 날, 멸망의 날’이 될 것이며 (예컨대 스바니야 1,14-2,3) 동시에 의인들(야훼님을 깨어 기다리던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구약의 예언적 문헌에 나오는 ‘야훼님의 날’이 1데살 1,9-10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에 의해 변형되어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을 두고 하는 말이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그러한 날이 곧 닥쳐 올 테니 그러한 ‘주님의 날’이 ‘진노의 심판 날’이 되지 않고 ‘구원의 날’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히 믿고 살아 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1데살 2,1-12: 사도 바오로의 선교 자세

 

1데살 2,1-12의 단락은 1-6절과 7-12절의 두 소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6절의 소단락에서 바오로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선교의 기본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7-12의 소단락에서는 교우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선교의 기본자세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1-6절의 문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이 문장들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또는 ‘하느님 안에서’ 하는 선교의 태도와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또는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는 선교의 태도가 대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절에 나오는 다음의 말은 1-6절의 단락을 종합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시험받고 복음을 信託받은 그대로 말하는데,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사람들로서 말합니다”. 이 4절의 앞뒤에 ‘복음을 전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즉 5절에서는 이것을 ‘아첨하는 말로 하는’ 또는 ‘탐욕의 구실로 (삼는)’ 자세라고 하고 3절에서는 ‘오류와 불순함과 속임수로 하는’ 태도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태도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오히려 1고린 10,33를 보면 “모든 점에 있어서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고린토 교우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1고린 10,33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 있다: “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려는 것이다”(로마 15,2도 참조). 즉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태도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바오로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와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가 대비되어 나오는 문맥에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갈라 1,10의 다음의 말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하느님을? 또는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시도합니까? 만일 내가 아직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갈라 1,10; 참조 로마 8,8; 1고린 7,32).

이상 말한 것을 종합하여 우리는 1데살 2,1-6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는 선교자세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근원적으로 ‘인간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해야한다. 왜냐하면 선교의 근본적인 자세가 인간들이나 기쁘게 하려는 데에 있으면 그러한 선교 태도의 결과는 결국 3절 5절에 묘사된 ‘오류, 불순함, 속임수, 아첨, 탐욕’의 이기적 태도가 되며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로부터 영광이나 찾는 자세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교활동의 기본방향을 ‘하느님을 향해’ 두고 있는 자세가 데살로니카 선교과정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났는지는 1데살 2,7-12를 보면 알 수 있다. 7-12절의 소단락에 기록된 선교의 자세는 한마디로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8절의 다음 말이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목숨까지도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선포를 듣고 신앙을 갖게된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필립 2,17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러분이 바치는 신앙의 제사와 예배를 위하여 내 (피)가 제물로 쏟아지더라도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러분 모두와 함께 즐거워하겠습니다.”사도 바오로는 교우들에 대한 이 깊은 사랑 때문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라고 기록한다(9절 참조). 그러나 바오로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복음선포활동에서 드러나는 이 사랑은 자녀들의 응석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는 식의 사랑은 아니었다. 이는 11-12절에서 보여진다: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이 여러분 각자를 대하면서 당신 나라와 영광에 여러분을 하느님께 맞갖게 생활하도록 훈계하고 격려하고 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7-12절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의 헌신적 사랑의 자세를 보면 1-6절에 나왔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태도’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태도’가 그 자체로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교의 근본 방향을 하느님께 두고 있을 때 그러한 선교자세는 또한 이웃에 대한 헌신적 봉사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 1데살 2,1-12에서 잘 볼 수 있다. 2,4를 보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복음을 믿고 맡기셨다고 의식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신뢰를 보여주며 동시에 하느님의 이 신뢰에 대한 응답으로 바오로가 느끼고 있는 깊은 책임감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박해까지 하였던 자신을 불러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맡기셨다고 바오로가 깨달았을 때 그가 얼마나 이를 은혜롭게 여겼겠는가! 이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바오로는 책임감을 가지고 올곧고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고(1-6절)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7-12절). 선교활동에 있어서도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편으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해 ‘복음선포’와 행동으로 다른 이들에게 봉사한다. 다른 한편 그들은 그토록 헌신적으로 봉사하기 때문에 더욱 긴밀하게 ‘하느님 안에’ 살게 된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선교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중에서 어느 관계가 더 근본적인 관계이냐라고 묻는다면 1데살 2,1-12에 근거하여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1데살 3장에 의한 선교의 목표: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의 근본적인 목표(관심사)는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믿음을 굳세게 가지는 데’에 있다는 것은 1데살3장에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1데살 3,2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보낸 목적은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그들을 굳세게 하고 권면하기 위하여’라고 밝힌다. 그리고 디모테오가 가서 알아볼 내용도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라고 한다. 즉 바오로는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궁극목표는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의 믿음이라고 보고 만일 이들이 믿음을 잃게 되면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허사가 되고 만다고 보고 있다(5절 참조). 6절을 보면 디모테오가 돌아와서 전한 소식 중에서 바오로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내용은 바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소식’이다. 7절을 보면 바오로가 그 모든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위로를 갖는 것은 ‘교우들의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8절에서 바오로는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니 이제 우리는 살았습니다”라며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한다’(9절 참조). 그리고 10절에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믿음의 부족한 점을 완성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빌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3,1-10만 보아도 선교사로서의 바오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가 잘 드러난다. 그가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밤낮으로 (3,10) 걱정하고 그 많은 수고와 고생을 감내하였는지 (3,5; 2,2.8.9),그리고 그 많은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어디에서 위로를 받았으며 (3,7), 어디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하느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었는지가(3,8-9) 잘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복음선포를 들은 (듣는)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오로가 선교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기쁨과 보람으로 삼았던 것은 ‘자신의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굳건한 믿음 속에 사는 것’이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런 선교정신은 로마서에서도 계속된다. 로마서 서두 감사기도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이유가 “여러분(로마 교우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두루 알려졌기 때문입니다”(로마1,8)라고 한다(참조: 로마 1,5; 16,19.26).

과연 현재 교회의 선교사들,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사도 바오로처럼 진정 자신들의 전체 활동의 목표를 ‘사람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는 데’에 두고 있는가? 거기에 자신들의 활동전체의 보람과 기쁨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겉으로는 그러한 목표를 둔 것처럼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1데살 2,4.6등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불순한 마음으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데에 기쁨과 보람을 두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 선교사들은 ‘주님의 선교사들’ 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선전자들’이 되어 있는 것이리라.

 

1데살 4,1-5,28(사도적 권면)

4,1-2:

4,1이하는 서간의 제2부 즉 사도적 권고가 시작되는 곳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편지들에서 으레 전반부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비교적 이론적으로 설명 또는 선포를하고, 후반부에 가서는 ‘이러한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권면을 한다. 그런데 거의 매 편지마다 바오로가 신앙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하여 길게 권고하고 있는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이 단지 뉴스 시간에 보도되는 수많은 소식 중의 한가지처럼 한쪽으로 듣고 다른 한 쪽으로 흘려버려도 되는 기분좋은 소식의 하나 정도가 결코 아니라 ‘온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또는 변화시켜야 하는 소식이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4,1-2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제 2부 ‘사도적 권면’의 서문으로서 사도적 권면의 전체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덧붙여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당부하며 권고하거니와...: 여기서 ‘권고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parakalein parakalein’이라고 하는데 이 동사는 para(옆으로, 가까이)라는 전치사와 kalein(부르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가까이 부르다’(사도 28,20참조), ‘초대하다’(루가 8,41참조), ‘도움을 청하다’(마태 26,53),‘권고하다’(2고린 5,20; 1데살 2,11;4,10;5,14참조), ‘격려하다’(1데살 3,2;5,11?), ‘위로하다’(1데살 3,7;4,18이하 참조).이러한 parakalein 동사의 여러가지 의미들 중에서 그 기초가 되는 뜻은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는 ‘부름’(kalein)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하는 권고를 주로 이 동사 또는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 (paraklesis para,klhsij)를 사용하여 일컫는데 parakalein이라는 단어를 바오로가 이렇게 애용하는 데에서 우리는 바오로가 하는 권고의 중요한 특성을 알 수 있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매 서신마다 하고 있는 여러 권고들은 단지 일방적인 ‘윤리적 지침들의 하달’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선교활동 과정 중에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신앙인들을 어버이가 자녀들을 애정을 갖고 ‘가까이 불러들여‘ 권고하는 듯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바오로의 권고는 격려하고 호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당부하며 권고합니다’ : ‘우리는 권고합니다’해도 될텐데 ‘당부하며’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당부하며’라는 말을 통해 사도 바오로는 앞으로 말하려는 권면의 말을 공동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공동체가 마음으로부터 따라줄 것을 호소하는 문체의 말이다. 그런데 더욱 유의해서 볼 것은 ‘주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다. 편지의 권면부분 첫 구절에 있는 이 말은 사도 바오로의 전체 권면이 어떤 차원에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이 말은 바오로의 권면이 바오로의 私的인 견해표명이 아니라 ‘주 예수 안에서’라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이 어구는 신앙인들이 사도의 권면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도 암시한다. 사도의 권면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힘의 원천도 바로 ‘주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권면을 하는 사도도 권면을 받는 교우들도 다같이 ‘주 예수 안에서’라는 공통차원을 갖고 있다.

 

4,3: 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인지를 알려주었다고 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聖化’라고 먼저 밝히고 난 다음,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해당되는 ‘聖化’의 삶은 무엇보다도 ‘性的인 불결함(부정함)’을 멀리 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느님께서 신앙인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聖化’이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성서 전반에 깔려있는 공통된 가르침이다. 성서에 의하면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신앙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상태가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 머무는 것이라면 ,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변화(聖化)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구약성서 자체 내에서도 聖化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직접 또는 중재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 주셔야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의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聖別시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셨다(출애 19,4-6참조). 이 계약은 주변 강대국에 비교하여 초라하기 이를데 없던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난 은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백성으로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토라‘(가르침/계명)를 지켜야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경신의식들에 관한 수많은 사소한 규정까지도 하나 하나 다 지켜야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게 된다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선사된 은총적 지위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분명히 말했듯이 사도 바오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인지 긴 그의 권면의 말들을 통해 지시하였다(참조: 1데살 4,1-2중에서 ‘우리에게서 전해 받은 대로’라는 표현과 ‘지시’라는 단어; 갈라 6,2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 사도 바오로가 ‘토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문제는 논란이 많은 큰 신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요컨대 사도 바오로도 구약성서의 근본적 가르침을 따라 ‘聖化’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바오로의 신학 전반이라는 맥락을 고려하여 이 가르침을 좀 더 풀이하자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신 친교의 상태 (1고린 1,9참조)에 머무르기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라’는 (1데살 5,23-24참조) 말씀이 된다.

... ...

4,10b-12절: 11절의 ‘조용하게 지내는 것,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라’는 권면을 보면 4,13이하에 나오는 주님의 재림을 둘러싼 지나친 열광주의를 바오로 사도가 경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2데살 3,6-12는 여기 1데살 4,11-12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주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고생하며 노력할 필요 없이 마음껏 즐기며 살자’라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 말씀이다. 주님의 재림이 다가온다면 그 재림에 대한 희망 속에 더욱 착실히 현재를 살아가야지 무질서하게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제 손으로 일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당시의 그리스적 환경에서는 노동하는 것이 천시되었었다 (구약성서적 전통에서는 노동이 결코 천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이 이방인 출신인 데살로니카 공동체 교우들에게 ‘제 손으로 일하여 조용히 살라’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되도록이면 교우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일을 해가며 복음전파의 생활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우들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私的인 일로 받으면 복음전파를 한답시고 사리사욕이나 채우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 쉬우며, 이러한 오해를 받게되면 복음전파를 제대로 할 수 없게된다고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1고린 9,3-16; 2고린 11,7-11.27; 사도 18,3에 의하면 바오로 사도는 천막 짜는 직업을 가졌었다). 바오로는 틈틈히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인답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선교적 관심이 드러난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4,5),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도’(4,12), ‘희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4,13).

 

4,13-5,11:주님의 날의 도래와

그리스도 신앙인의 희망

같은 주제가 4,13-18에서는 ‘재림 이전에 죽은 이들’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루어지고 (참조 4,13: ‘죽은 사람들에 관하여’), 5,1-11에서는 再臨 ( 님의 날)의 시기문제와 관련되어 (참조 5,1: ‘시간과 때에 관하여) 다루어진다.

 

4,13-18의 단락에서 바오로는 주님의 재림 이전에 죽었던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면서 걱정과 슬픔 속에 있던 교우들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희망을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이제 5,1-11의 단락에서 이 희망을 신앙인들이 현실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시켜야하는지에 관하여 권면한다. 바오로의 관심의 초점은 화려한 미래에 있지 않고 많은 어려움으로 둘러싸인(참조: 8절에 나오는 갑옷과 투구라는 방어 무기) 현재에 있다. 몇 해 전(1992년)에 이른바 ‘携擧’의 날짜와 시간까지 임의로 정해놓고 순박한 사람들을 미혹에 빠지게 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날’(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한부 휴거설 주장자들이나 신흥종교 유형의 그리스도교 분파들에서 우리는 세사에 지치고 지친 순박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종말 심판을 무시무시한 영화장면을 재현하듯이 묘사함으로써 공포에 몰아 넣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날자까지 정해진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환상적으로 그려내며, 바로 그 극적인 순간에 참여하여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소수 신앙그룹에만 소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갖가지 괴롭고 암담한 일로 실의에 빠져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고된 현실을 잊어버리고 환상적인 미래로 도피시키게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이는 병든 신앙심을 전염시키고 있는 것으로써 매우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묵시문학의 기본취지는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의인들이 극도의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현실에 눈감고 미래로 도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 반대로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미래를 강조하여 묘사함으로써 신앙인(의인)들이 이 위대하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굳세게 가지고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말고 현실을 굳세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데 있다.

 

5,1-11에서 문제는 ‘주님의 날’의 시기가 아니었다. 바오로도 데살로니카 교우들도 주님의 날이 곧 갑자기 (참조: 4,17의 ‘남아있는 우리 산 사람들도’; 5,2) 그리고 반드시 (참조 3절 “임신한 이에게 닥치는 산고와 같이”) 닥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갑자기 들여 닥칠 ‘주님의 날’을 앞둔 신앙인들의 태도였다. 거짓 안전에 사로잡혀 ‘태평하게’(3절 참조) 취하여 잠자는 사람들처럼 (5절) 살아서는 안되고 마치 파수꾼이 갑옷과 투구로 잔뜩 무장을 하고 있듯이 신앙인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8절) 철저하게 준비되어 살아야한다고 바오로는 권면하고 있다. 편지 초두(1,3)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세 가지 덕목이 일-수고-인내 와 연결되어 나왔었는데, 여기 5,7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갑옷과 투구 두 가지와 연결되어 나오고 있다. 갑옷과 투구는 방어용 무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오로는 이 표현을 통해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주변의 유혹으로부터 자신들을 ‘거룩하게’(3,13; 4,3.7 참조) 방어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조로 살펴보면, 이사 59,17에는 ‘정의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라는 표현이 나오며 에페 6,10-17에서도 1데살 5,8에서와 비슷하게 ‘신앙인의 무기’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무기들로는 진리의 띠, 정의의 가슴받이(갑옷), 평화의 복음이라는 군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영의 칼등이 언급된다.

그런데 바오로는 이 단락에서도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잘못 살고 있다고 비난만 한다는 오해를 피하려는듯, 그들이 현재 처한 긍정적 상태를 다각적으로 밝혀둔다: ‘그들은 이미 빛의 자녀들로서 어둠에 속해 있지 않으며’(4-5절),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진노가 아니라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으며’(9절),‘(이미)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고있다’(11절). 이러한 바오로의 배려는 앞에서도 몇번 나왔었다 (3,10.12; 4,1.10). 바오로는 교우들이 현재 잘하고 있는 점을 더욱 발전 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만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현재 비록 신앙인으로 잘 살고 있지만, 그들 주변에 있는 이방인적인 사조의 유혹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염려가 되어 그들 교우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신원을 재인식시키고 이방인적인 유혹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0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깨어 있거나 잠자고 있거나 그분과 더불어 살기 위한 것입니다”는 말씀은 4,17의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말씀이다. 이 두 구절은 다음 세가지를 밝혀준다: 첫째,「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태」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것임을; 둘째, 이러한 상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염려하듯이 살아 남았다가 주님의 날을 맞이하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는 그 반대로 죽은 후에서야 비로서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셋째, 이러한 상태를 누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11절의 말은 문맥에서 유의해 볼 구절이다. 앞의 단락 마지막 (4,18)에서 “이런 말로 여러분은 서로 위로하시오” 했듯이 5,1-11의 단락을 끝맺으면서도 바오로는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시오(직역하면 ‘건설하시오’; 참조 1고린 8,1)”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위협과 환난(1,6참조), 여러 유혹들 그리고 걱정스러운 문제들을 갖고 있던 교우들이 신앙과 사랑과 희망으로 더욱 굳세어져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얼마나 사도 바오로가 원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II. 고린토 전서 1장-4장에 나타난 복음선포자의 신원

 

2.1. 고린토 전서의 신학적 중요성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고린토 전서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하여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익숙해 있는 팔레스티나의 농촌적 환경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젖어 있으면서 동시에 로마적 분위기가 겹쳐있던 그리스의 한 상업도시(그 당시로서는 대도시 중의 하나)와 이 큰 도시 속에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의 모습을 만난다. 고린토 전서에서 우리는 기원 후 51년부터 55년 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약 25년 정도 지난 후, ‘그리스도의 복음’이 좁은 팔레스티나 지역을 벗어나 세계로 전파되어 나가는 그 초기단계의 모습이 어떠했었는지 한 단면을 보는 셈이다. 이렇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의 산 증언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고린토 전서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공동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문제들(파벌형성으로 인한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 음행과 이방인 법정에서의 소송, 혼인 문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는 문제, ‘죽은 이들의 부활’, 영의 은사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무질서 등등)을 대면하고 있다. 그는 우선 그 문제들이 그리스도 신앙에서 볼 때 왜 문제가 되는지 조명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방향제시’를 해주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고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회란 무엇이고,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복음전파자들의 신원은 무엇인지?

전체적을 보아 고린토 전서는 바오로 사도가 과연 ‘사목자’였음을 잘 보여주는 서간이다. 이 서간에는 이방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의 한 무역도시에서 갓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가도록 바오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 서간은 ‘복음선포자들의 신원’(3,1-4,1), ‘복음선포의 내용’(15,1-11; 1,18-25) 그리고 ‘복음선포의 자세’(9,19-23)에 관하여 바오로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2.2. 고린토 전서의 서두 인사(1,1-3)의 주요 메시지.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오로”. ‘사도’라는 칭호에 ‘하느님의 뜻으로’라는 수식어와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수식어가 첨가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토 교우들에 대한 바오로의 사도적 권위가 강조되어 있다. 후에 바오로는 논쟁적인 배경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적 귄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1고린 9,1-2; 갈라 1,1.11-12; 2고린 11장). 그러나 여기 고린토 전서 서두에 벌써 이런 논쟁적인 어감이 표현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로마 1,1; 갈라 1,15; 1고린 15,8; 필립 3,4-11 등의 글이 보여주듯이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사도로 불렸다는 의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방금 인용된 구절들이 잘 밝혀 주듯이 바오로가 사도가 된 것은 그의 노력이나 선행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사도’로 선택하신 것이었다(참조: 요한 15,16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사실 바오로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을 치닫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기는커녕, 하느님의 교회를 열정적으로 박해까지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는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없던 사람이었다.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참으로 큰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해하고(특히 1고린 15,10),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라워한다(참조: 갈라 1,15-16).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2절은 바오로 사도의 교회론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은 구절이다. 첫째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 둘째 「교회의 聖性」, 셋째 「하느님으로부터 소집된 ‘하느님의 교회’」라는 점이 모두 이 2절에 표현되어 있다.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보편적인 “하느님의 교회”는 “고린토 공동체”라는 지역교회에서 구체화된다. 칠십인 역(LXX)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참조: 신명 4,10)를 뜻하던 히브리어 「카할」(Qahal)을 에클레시아(ekklesia)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야훼님의 카할’(Qahal Yahweh)이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만 유보시켜 사용해 온 용어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뭇 백성 가운데에서 특별히 자신들을 선택하시어‘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이스라엘이 영예롭게 생각하였던 이 칭호를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야말로 바로 하느님께서 종말론적으로 불러모으시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는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놀랍도록 새로운 주장이다. 갈라 6,16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라는 표현을 교회에 적용시키기까지 한다. 고린토 전서의 수신자들은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린다. 이 표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의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린토인들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것”이지, ‘바오로의 것’도, ‘고린토 신자들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하느님의 교회”.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이해 중의 하나는 ‘하느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참조: 레위 11,44; 19,2; 20,7.26; 22,31-33; 또한 출애 19,6; 이사 6,3). 그리고 인간들이 이 거룩하신 하느님과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제사들은 바로 인간을 ‘거룩하게 변하게’ 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사건을 통해서’ 이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참조: 1고린 1,30; 6,1-2.11; 로마 1,7). 이렇게 교회의 ‘거룩함’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사받은 거룩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간구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라는 표현은 “그들과 우리들의 (장소) 어디에서나”라는 표현과 함께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또는 연대성을 강조한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의 교우들에게 ‘그들만이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간구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 줌으로써 고린토 교우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리스도 신앙은 어느 특정 지역,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위에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바오로는 이제 고린토에 있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부르심을 받은 성도(聖徒)’라고 부르고 있다. 바오로에 의하면 사도들뿐 아니라, 일반 신앙인들까지 그리스도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참조: 1고린 1,9; 로마 8,30; 9,24이하). 오늘날의 교회도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명의식’을 새롭게 가질 필요가 있다.

 

2.3. 고린토 전서 1장-4장에 나타난 복음선포자의 신원

 

1고린 1,10-17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과 갈등의 상황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제일 먼저 그리고 상당히 길게(1,10-4,21) 거론하는 문제는 공동체 내에 형성되어 있던 파당형성의 조짐이었다. 그 만큼 이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아마 고린토의 교우들도 가장 잘 의식하고 있던 문제였을 것이다. ‘파당형성’의 문제점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바오로 사도는 우선 “합심하여 분열(schisma)이 없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12절: 전후 문맥으로 보아, 바오로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파당을 조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16,12는 ‘아폴로’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바오로의 추종자들과 갈등관계를 빚게 했다고 바오로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종하는 지도자들에 따라 파당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폴로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1고린1,12; ; 3,4-6.22; 16,12; 사도 18,24-19,1; 디도 3,13을 종합하여보면 아폴로는 유다인 출신으로 그리이스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성서에 정통하고 언변이 매우 좋던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후 이러한 아폴로가 고린토에서 한동안 활동하였던 것 같은데, 그를 추종하여 하나의 파당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만큼 아폴로는 고린토 교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나는 게파 편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위’를 뜻하는 케파(Kepa’)라는 아람어를 ‘페트로스’로 번역하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시몬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렀는지 여부는 전혀 확인 할 수 없다. 신약성서 전반에 반영되어 있듯이, 초대교회에서 베드로 사도가 차지하였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한다면 그와 그의 권위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산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름으로 파당이 형성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구절이다. 같은 편지인 1고린 3,22-23과 그 문맥을 고려하여 보면 고린토 공동체에 ‘바오로 편’, ‘베드로 편’,‘아폴로 편’외에 또 하나의 편으로서 ‘그리스도 편’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라는 말을 여기 1,12에서 사도 바오로가 기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말은 오히려 다 같이 ‘그리스도의 일꾼들’(4,1)에 불과한 인간들로서 마땅히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어야 할 베드로, 바오로, 아폴로 등을 앞세워 파당을 이루고 있는 고린토 공동체의 어리석은 현실을 꾸짖기 위하여 바오로가 고의적으로 엉뚱하게 삽입해 놓은 말 같다. 사실 3,4-6도 파당형성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는 ‘베드로 추종자들’이나 ‘그리스도 추종자들’이라는 말은 없고, ‘바오로 추종자들’과 ‘아폴로 추종자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13절: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복음선포로 생겨난 그리스도 공동체가 자신이 선포한 복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때 그들의 삶을 바로 잡아주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기시키곤 한다. 1고린 1,13의 경우는 공동체가 분열의 위험을 맞고 있을 때이고, 갈라 3,1의 경우는 공동체가 바오로가 선포한 복음에 계속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떨어져 나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을 때이다. 그리고 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8)라는 말도 문맥 (필립2,1-5와 2,12이하)에서 보면 일치를 호소하기 위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7절ㄱ). 거두절미하고 이 문장만 읽고는 바오로가 ‘세례주는 것’의 가치를 부인하였다거나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간주한다면 이는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이다. 1고린 1,17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의 문맥과 ‘세례’에 관한 바오로의 다른 표현들을 감안해야한다. 바오로는 고린토 공동체 내에 여러 파당이 생겨 서로가 갈라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12) 교우들에게 파당을 종식시키고 서로 일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1,10-17).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인 ‘바오로’, ‘아폴로’, ‘게파’의 이름을 내세워 저마다 파당을 이루려 함을 꾸짖으면서 바오로는 그들이 파당을 이루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바탕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13.17 참고)를 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일치하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몇 사람밖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다행히 생각하는데(14.16절) 그것은 사람들이 ‘나는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며 바오로의 이름을 내세워 파당을 이룰 구실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세례를 베푼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고린토 교우들이 갈라져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보다도 ‘인간’이 더 중요하게 된 셈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그들이 바오로가 선포한 복음을 얼마나 잘못 받아들였는지를 반영한다고 바오로는 보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바오로가 초대교회로부터 ‘세례’예식을 당연한 것으로 물려받았음을 보여준다: 갈라 3,26-28; 1고린 1,13-17; 6,11; 12,13; 로마 6,1-11. 참조: 로마 10,9; 1고린 12,3; 골로 2,11-14. 이 구절들을 보면 바오로 사도도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우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본 것도 분명하다. 사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세례는 복음선포를 들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말의 지혜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17절ㄴ): ‘말의 지혜’라는 말에서 ‘지혜’는 능력 또는 솜씨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 시대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수사학적 기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스 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던 고린토 교우들에게도 ‘인간적 지혜가 담긴 말[언변]’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다. 17절ㄴ은 그 다음 대목들에서 전개되는 내용의 주제, 즉 ‘세상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의 대조를 예시하고 있다. 특히 2,5의 말씀은 바오로가 1,17ㄴ에서 왜 ‘말의 지혜’(‘말솜씨’[말재주]; 또는 ‘인간적 지혜의 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고 말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근거를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두어야 하며, 하느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둘러싼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툼과 갈등의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이미 사도 바오로의 교회에서도 있었다. 지도자들이 드물지 않게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의 구심점이 아니라, 갈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서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당[분파] 형성’의 문제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가 한 말씀은 후대의 교회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그의 말씀은 특히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신중해야 하고, 복음의 근본적인 정신,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깨달음과 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1고린 3,5)

 

1고린3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앙공동체에 관하여 ‘하느님의 밭’(9절), ‘하느님의 건물’(9절),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3가지 은유를 사용한다. 그런데 바오로가 이 은유들을 여기서 사용하는 목적은 신앙 공동체(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있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들인 ‘복음 선포자들’의 본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데 있다. 3,1-4,2에 의하면 바오로와 아폴로와 같은 ‘복음선포자’는 “믿음으로 이끌어주는 봉사자”(3,5), “하느님의 동료 일꾼들”(3,9), “관리인”(4,1)이다. 바오로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덕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5절; 7절; 10절). 아폴로든 바오로든, 그들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며, ‘하느님의 성전’인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신앙공동체’(교회)의 주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시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특정 지도자(‘복음선포자’)가 주인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바오로는 ‘일꾼들’이요 ‘관리자’인 이 사람들에게는 참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요구된다는 점을 말하며 경고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하느님의 건물’인 신앙공동체를 짓는데 부실공사를 할 경우에는 심판 때에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며(12-14절),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마치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16-17절).

육적(肉的) 인간들(3,3): 앞의 맥락을 참고하여 보면, “육적인”이라는 말로 바오로는 “시새움과 싸움이 지배하고 ... 인간적 기준 (세상의 지혜)에 따라서만 살아가려는 삶의 근본태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는 “육에 따라서 살지 말고 영에 따라서 살라”는 권고를 여러 곳에서 한다. (대표적 예로 로마서 8장; 갈라 5,13-25). 3절에는 육적인 삶의 특성으로 “시새움과 싸움”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오로가 갈라 5,19-20에 열거하는 “肉의 일들”의 목록에도 나오는 단어들이다. “영의 열매”에 관해서는 갈라 5,22참조.

9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동료일꾼들”이란 말은, 이 어구만 보면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참조: 1고린 15,10; 2고린 6,1)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하느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문맥에서는 복음선포자들을 둘러싼 ‘경쟁’, ‘파벌형성 조짐’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바오로에 의하면 복음 선포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로서 자기 소유의 밭에서 일하는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밭(건물)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봉사자”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자랑을 해서도 안되고(18절, 21절; 참조: 1,29) 또 이 「하느님의 일꾼들」을 빙자해서 신도들이 파당을 이루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여있는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3,11)의 말씀은 언뜻 보면 에페 2,19-21에 나오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모순이 되지 않음을 즉시 알 수 있다. 에페 2,19-21에 신앙 공동체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즉시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초”라는 단어 대신에 “모퉁이 돌”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1고린 3,11에서 바오로는 복음선포자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공동체의 분열 조짐’ 앞에서 공동체의 참된 기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일치를 찾으려는 것이다.

12-15절: “금, 은, 보석”은 값지고 오래 보존되는 건축재료이고 “나무, 마른 풀, 짚”은 값싸고 타없어지기 쉬운 건축재료들인데, 이런 표현들을 통해 바오로는 「복음선포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까지도 가치있게 남을 수 있는 일을 할 것을 촉구하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지도자 역할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 경고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을 파멸시킬 것입니다(3,16-17). 이 글에서 ‘여러분’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뜻한다. 바오로는 여기서 교회를 ‘하느님의 성전’에 비유하고 있는데, 1고린 12,12-27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다. 신앙인의 ‘몸’을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1고린 6,19도 참조할 것.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17절)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교회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전체적으로 볼 때, 보편교회는 저승 문도 쳐 이길 수 없겠지만(참조 마태 16,18), 지역교회는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 지역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인을 배출시킬 만큼 찬란했던 북아프리카 지역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에집트 지역에 꽃피웠던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자기가 현세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십시오”(3,18).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 말로써 바오로가 사람들이 모든 지성적 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인간 지성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인간적 지식의 한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의 최종적 근원인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지성적인 활동을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가지고 판별해 가는 비판적 ‘신학’ 토론을 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지성활동 자체를 반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3,18의 말씀도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을 두고 자랑하지 말라(3,21)라는 말씀은 ‘공동체 내의 파벌 조성의 위험과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고린토 일서의 첫 단원 즉 1,10-4,21의 결론을 짓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랑을 하거나, 지혜로운 자로 자처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라는 3,18의 말씀,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든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라는 1,29의 말씀, 그리고 4,6-7에 나오는 ‘교만’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같은 생각의 흐름 속에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교만함이야말로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는 주원인이라고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참조: 1고린 8,1; 필립 2,1-4).

1고린 3장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음을 인식하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선임 본당신부와 후임 본당신부’, ‘본당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본당 수녀’, ‘신부와 일반 신자들’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가 많지만, 때로는 심한 ‘갈등’마저 빚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갈등들이 생길 때에,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결코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공동체의 참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은 그 하느님의 은총의 덕분으로 그 분의 ‘밭’에서, 그분을 위해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라는 것을 명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신원의식 속에 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 참다운 ‘사제적 형제애’, ‘동료애’, ‘신앙적 형제애’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경쟁’, ‘파당’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교우들이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께서 하시는 다음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두어야겠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주고, 그들의 업적[일]을 보아 그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존경하시오. 서로 화목하게 지내시오.”(1데살 5,12-13).

 

여기서 필자는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정진석 옮김, 바오로 딸, 1995)라는 ‘최양업 신부의 편지 모음집’의 책 제목을 생각하게 된다.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박해를 피해 조선 8도 가운데 5개 도를 맡아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교우촌들을 찾아 다니시며 사목하시느라, 박해와 추위와 굶주림을 그토록 많이 겪으셨던 최양업 신부님의 체취가 담겨 있는 이 편지 모음집은, 독자가 교우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눈물 없이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 제목이 보여주듯이, 최양업 신부님이 보여주시는 태도는, 우리가 묵상하는 1고린 3장의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긴 듯한 태도이다. 그 엄청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직했던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과 희망, 불쌍한 처지에 있는 교우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 다른 성직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긴 존경과 형제애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고 있으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II. 고린토 전서 1장-4장에 나타난 복음선포자의 신원

 

2.1. 고린토 전서의 신학적 중요성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고린토 전서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하여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익숙해 있는 팔레스티나의 농촌적 환경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젖어 있으면서 동시에 로마적 분위기가 겹쳐있던 그리스의 한 상업도시(그 당시로서는 대도시 중의 하나)와 이 큰 도시 속에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의 모습을 만난다. 고린토 전서에서 우리는 기원 후 51년부터 55년 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약 25년 정도 지난 후, ‘그리스도의 복음’이 좁은 팔레스티나 지역을 벗어나 세계로 전파되어 나가는 그 초기단계의 모습이 어떠했었는지 한 단면을 보는 셈이다. 이렇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의 산 증언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고린토 전서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공동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문제들(파벌형성으로 인한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 음행과 이방인 법정에서의 소송, 혼인 문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는 문제, ‘죽은 이들의 부활’, 영의 은사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무질서 등등)을 대면하고 있다. 그는 우선 그 문제들이 그리스도 신앙에서 볼 때 왜 문제가 되는지 조명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방향제시’를 해주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고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회란 무엇이고,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복음전파자들의 신원은 무엇인지?

전체적을 보아 고린토 전서는 바오로 사도가 과연 ‘사목자’였음을 잘 보여주는 서간이다. 이 서간에는 이방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의 한 무역도시에서 갓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가도록 바오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 서간은 ‘복음선포자들의 신원’(3,1-4,1), ‘복음선포의 내용’(15,1-11; 1,18-25) 그리고 ‘복음선포의 자세’(9,19-23)에 관하여 바오로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2.2. 고린토 전서의 서두 인사(1,1-3)의 주요 메시지.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오로”. ‘사도’라는 칭호에 ‘하느님의 뜻으로’라는 수식어와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수식어가 첨가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토 교우들에 대한 바오로의 사도적 권위가 강조되어 있다. 후에 바오로는 논쟁적인 배경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적 귄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1고린 9,1-2; 갈라 1,1.11-12; 2고린 11장). 그러나 여기 고린토 전서 서두에 벌써 이런 논쟁적인 어감이 표현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로마 1,1; 갈라 1,15; 1고린 15,8; 필립 3,4-11 등의 글이 보여주듯이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사도로 불렸다는 의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방금 인용된 구절들이 잘 밝혀 주듯이 바오로가 사도가 된 것은 그의 노력이나 선행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사도’로 선택하신 것이었다(참조: 요한 15,16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사실 바오로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을 치닫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기는커녕, 하느님의 교회를 열정적으로 박해까지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는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없던 사람이었다.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참으로 큰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해하고(특히 1고린 15,10),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라워한다(참조: 갈라 1,15-16).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2절은 바오로 사도의 교회론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은 구절이다. 첫째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 둘째 「교회의 聖性」, 셋째 「하느님으로부터 소집된 ‘하느님의 교회’」라는 점이 모두 이 2절에 표현되어 있다.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보편적인 “하느님의 교회”는 “고린토 공동체”라는 지역교회에서 구체화된다. 칠십인 역(LXX)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참조: 신명 4,10)를 뜻하던 히브리어 「카할」(Qahal)을 에클레시아(ekklesia)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야훼님의 카할’(Qahal Yahweh)이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만 유보시켜 사용해 온 용어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뭇 백성 가운데에서 특별히 자신들을 선택하시어‘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이스라엘이 영예롭게 생각하였던 이 칭호를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야말로 바로 하느님께서 종말론적으로 불러모으시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는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놀랍도록 새로운 주장이다. 갈라 6,16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라는 표현을 교회에 적용시키기까지 한다. 고린토 전서의 수신자들은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린다. 이 표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의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린토인들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것”이지, ‘바오로의 것’도, ‘고린토 신자들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하느님의 교회”.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이해 중의 하나는 ‘하느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참조: 레위 11,44; 19,2; 20,7.26; 22,31-33; 또한 출애 19,6; 이사 6,3). 그리고 인간들이 이 거룩하신 하느님과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제사들은 바로 인간을 ‘거룩하게 변하게’ 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사건을 통해서’ 이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참조: 1고린 1,30; 6,1-2.11; 로마 1,7). 이렇게 교회의 ‘거룩함’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사받은 거룩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간구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라는 표현은 “그들과 우리들의 (장소) 어디에서나”라는 표현과 함께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또는 연대성을 강조한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의 교우들에게 ‘그들만이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간구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 줌으로써 고린토 교우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리스도 신앙은 어느 특정 지역,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위에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바오로는 이제 고린토에 있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부르심을 받은 성도(聖徒)’라고 부르고 있다. 바오로에 의하면 사도들뿐 아니라, 일반 신앙인들까지 그리스도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참조: 1고린 1,9; 로마 8,30; 9,24이하). 오늘날의 교회도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명의식’을 새롭게 가질 필요가 있다.

 

2.3. 고린토 전서 1장-4장에 나타난 복음선포자의 신원

 

1고린 1,10-17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과 갈등의 상황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제일 먼저 그리고 상당히 길게(1,10-4,21) 거론하는 문제는 공동체 내에 형성되어 있던 파당형성의 조짐이었다. 그 만큼 이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아마 고린토의 교우들도 가장 잘 의식하고 있던 문제였을 것이다. ‘파당형성’의 문제점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바오로 사도는 우선 “합심하여 분열(schisma)이 없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12절: 전후 문맥으로 보아, 바오로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파당을 조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16,12는 ‘아폴로’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바오로의 추종자들과 갈등관계를 빚게 했다고 바오로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종하는 지도자들에 따라 파당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폴로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1고린1,12; ; 3,4-6.22; 16,12; 사도 18,24-19,1; 디도 3,13을 종합하여보면 아폴로는 유다인 출신으로 그리이스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성서에 정통하고 언변이 매우 좋던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후 이러한 아폴로가 고린토에서 한동안 활동하였던 것 같은데, 그를 추종하여 하나의 파당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만큼 아폴로는 고린토 교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나는 게파 편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위’를 뜻하는 케파(Kepa’)라는 아람어를 ‘페트로스’로 번역하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시몬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렀는지 여부는 전혀 확인 할 수 없다. 신약성서 전반에 반영되어 있듯이, 초대교회에서 베드로 사도가 차지하였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한다면 그와 그의 권위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산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름으로 파당이 형성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구절이다. 같은 편지인 1고린 3,22-23과 그 문맥을 고려하여 보면 고린토 공동체에 ‘바오로 편’, ‘베드로 편’,‘아폴로 편’외에 또 하나의 편으로서 ‘그리스도 편’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라는 말을 여기 1,12에서 사도 바오로가 기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말은 오히려 다 같이 ‘그리스도의 일꾼들’(4,1)에 불과한 인간들로서 마땅히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어야 할 베드로, 바오로, 아폴로 등을 앞세워 파당을 이루고 있는 고린토 공동체의 어리석은 현실을 꾸짖기 위하여 바오로가 고의적으로 엉뚱하게 삽입해 놓은 말 같다. 사실 3,4-6도 파당형성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는 ‘베드로 추종자들’이나 ‘그리스도 추종자들’이라는 말은 없고, ‘바오로 추종자들’과 ‘아폴로 추종자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13절: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복음선포로 생겨난 그리스도 공동체가 자신이 선포한 복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때 그들의 삶을 바로 잡아주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기시키곤 한다. 1고린 1,13의 경우는 공동체가 분열의 위험을 맞고 있을 때이고, 갈라 3,1의 경우는 공동체가 바오로가 선포한 복음에 계속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떨어져 나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을 때이다. 그리고 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8)라는 말도 문맥 (필립2,1-5와 2,12이하)에서 보면 일치를 호소하기 위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7절ㄱ). 거두절미하고 이 문장만 읽고는 바오로가 ‘세례주는 것’의 가치를 부인하였다거나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간주한다면 이는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이다. 1고린 1,17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의 문맥과 ‘세례’에 관한 바오로의 다른 표현들을 감안해야한다. 바오로는 고린토 공동체 내에 여러 파당이 생겨 서로가 갈라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12) 교우들에게 파당을 종식시키고 서로 일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1,10-17).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인 ‘바오로’, ‘아폴로’, ‘게파’의 이름을 내세워 저마다 파당을 이루려 함을 꾸짖으면서 바오로는 그들이 파당을 이루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바탕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13.17 참고)를 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일치하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몇 사람밖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다행히 생각하는데(14.16절) 그것은 사람들이 ‘나는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며 바오로의 이름을 내세워 파당을 이룰 구실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세례를 베푼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고린토 교우들이 갈라져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보다도 ‘인간’이 더 중요하게 된 셈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그들이 바오로가 선포한 복음을 얼마나 잘못 받아들였는지를 반영한다고 바오로는 보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바오로가 초대교회로부터 ‘세례’예식을 당연한 것으로 물려받았음을 보여준다: 갈라 3,26-28; 1고린 1,13-17; 6,11; 12,13; 로마 6,1-11. 참조: 로마 10,9; 1고린 12,3; 골로 2,11-14. 이 구절들을 보면 바오로 사도도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우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본 것도 분명하다. 사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세례는 복음선포를 들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말의 지혜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17절ㄴ): ‘말의 지혜’라는 말에서 ‘지혜’는 능력 또는 솜씨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 시대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수사학적 기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스 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던 고린토 교우들에게도 ‘인간적 지혜가 담긴 말[언변]’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다. 17절ㄴ은 그 다음 대목들에서 전개되는 내용의 주제, 즉 ‘세상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의 대조를 예시하고 있다. 특히 2,5의 말씀은 바오로가 1,17ㄴ에서 왜 ‘말의 지혜’(‘말솜씨’[말재주]; 또는 ‘인간적 지혜의 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고 말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근거를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두어야 하며, 하느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둘러싼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툼과 갈등의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이미 사도 바오로의 교회에서도 있었다. 지도자들이 드물지 않게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의 구심점이 아니라, 갈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서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당[분파] 형성’의 문제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가 한 말씀은 후대의 교회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그의 말씀은 특히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신중해야 하고, 복음의 근본적인 정신,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깨달음과 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1고린 3,5)

 

1고린3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앙공동체에 관하여 ‘하느님의 밭’(9절), ‘하느님의 건물’(9절),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3가지 은유를 사용한다. 그런데 바오로가 이 은유들을 여기서 사용하는 목적은 신앙 공동체(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있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들인 ‘복음 선포자들’의 본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데 있다. 3,1-4,2에 의하면 바오로와 아폴로와 같은 ‘복음선포자’는 “믿음으로 이끌어주는 봉사자”(3,5), “하느님의 동료 일꾼들”(3,9), “관리인”(4,1)이다. 바오로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덕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5절; 7절; 10절). 아폴로든 바오로든, 그들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며, ‘하느님의 성전’인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신앙공동체’(교회)의 주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시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특정 지도자(‘복음선포자’)가 주인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바오로는 ‘일꾼들’이요 ‘관리자’인 이 사람들에게는 참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요구된다는 점을 말하며 경고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하느님의 건물’인 신앙공동체를 짓는데 부실공사를 할 경우에는 심판 때에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며(12-14절),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마치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16-17절).

육적(肉的) 인간들(3,3): 앞의 맥락을 참고하여 보면, “육적인”이라는 말로 바오로는 “시새움과 싸움이 지배하고 ... 인간적 기준 (세상의 지혜)에 따라서만 살아가려는 삶의 근본태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는 “육에 따라서 살지 말고 영에 따라서 살라”는 권고를 여러 곳에서 한다. (대표적 예로 로마서 8장; 갈라 5,13-25). 3절에는 육적인 삶의 특성으로 “시새움과 싸움”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오로가 갈라 5,19-20에 열거하는 “肉의 일들”의 목록에도 나오는 단어들이다. “영의 열매”에 관해서는 갈라 5,22참조.

9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동료일꾼들”이란 말은, 이 어구만 보면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참조: 1고린 15,10; 2고린 6,1)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하느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문맥에서는 복음선포자들을 둘러싼 ‘경쟁’, ‘파벌형성 조짐’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바오로에 의하면 복음 선포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로서 자기 소유의 밭에서 일하는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밭(건물)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봉사자”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자랑을 해서도 안되고(18절, 21절; 참조: 1,29) 또 이 「하느님의 일꾼들」을 빙자해서 신도들이 파당을 이루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여있는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3,11)의 말씀은 언뜻 보면 에페 2,19-21에 나오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모순이 되지 않음을 즉시 알 수 있다. 에페 2,19-21에 신앙 공동체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즉시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초”라는 단어 대신에 “모퉁이 돌”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1고린 3,11에서 바오로는 복음선포자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공동체의 분열 조짐’ 앞에서 공동체의 참된 기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일치를 찾으려는 것이다.

12-15절: “금, 은, 보석”은 값지고 오래 보존되는 건축재료이고 “나무, 마른 풀, 짚”은 값싸고 타없어지기 쉬운 건축재료들인데, 이런 표현들을 통해 바오로는 「복음선포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까지도 가치있게 남을 수 있는 일을 할 것을 촉구하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지도자 역할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 경고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을 파멸시킬 것입니다(3,16-17). 이 글에서 ‘여러분’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뜻한다. 바오로는 여기서 교회를 ‘하느님의 성전’에 비유하고 있는데, 1고린 12,12-27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다. 신앙인의 ‘몸’을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1고린 6,19도 참조할 것.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17절)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교회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전체적으로 볼 때, 보편교회는 저승 문도 쳐 이길 수 없겠지만(참조 마태 16,18), 지역교회는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 지역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인을 배출시킬 만큼 찬란했던 북아프리카 지역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에집트 지역에 꽃피웠던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자기가 현세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십시오”(3,18).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 말로써 바오로가 사람들이 모든 지성적 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인간 지성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인간적 지식의 한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의 최종적 근원인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지성적인 활동을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가지고 판별해 가는 비판적 ‘신학’ 토론을 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지성활동 자체를 반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3,18의 말씀도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을 두고 자랑하지 말라(3,21)라는 말씀은 ‘공동체 내의 파벌 조성의 위험과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고린토 일서의 첫 단원 즉 1,10-4,21의 결론을 짓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랑을 하거나, 지혜로운 자로 자처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라는 3,18의 말씀,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든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라는 1,29의 말씀, 그리고 4,6-7에 나오는 ‘교만’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같은 생각의 흐름 속에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교만함이야말로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는 주원인이라고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참조: 1고린 8,1; 필립 2,1-4).

1고린 3장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음을 인식하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선임 본당신부와 후임 본당신부’, ‘본당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본당 수녀’, ‘신부와 일반 신자들’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가 많지만, 때로는 심한 ‘갈등’마저 빚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갈등들이 생길 때에,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결코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공동체의 참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은 그 하느님의 은총의 덕분으로 그 분의 ‘밭’에서, 그분을 위해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라는 것을 명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신원의식 속에 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 참다운 ‘사제적 형제애’, ‘동료애’, ‘신앙적 형제애’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경쟁’, ‘파당’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교우들이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께서 하시는 다음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두어야겠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주고, 그들의 업적[일]을 보아 그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존경하시오. 서로 화목하게 지내시오.”(1데살 5,12-13).

 

여기서 필자는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정진석 옮김, 바오로 딸, 1995)라는 ‘최양업 신부의 편지 모음집’의 책 제목을 생각하게 된다.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박해를 피해 조선 8도 가운데 5개 도를 맡아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교우촌들을 찾아 다니시며 사목하시느라, 박해와 추위와 굶주림을 그토록 많이 겪으셨던 최양업 신부님의 체취가 담겨 있는 이 편지 모음집은, 독자가 교우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눈물 없이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 제목이 보여주듯이, 최양업 신부님이 보여주시는 태도는, 우리가 묵상하는 1고린 3장의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긴 듯한 태도이다. 그 엄청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직했던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과 희망, 불쌍한 처지에 있는 교우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 다른 성직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긴 존경과 형제애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고 있으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