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354-430)
출생에서 개종 전까지(354-386)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리아스)에서 어머니 모니카와 (Monica, 332-387)와 이교도인 아버지 파트리치우스(Patricius) 사이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고향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6세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이듬해 로마니아누스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카르타고에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동거녀와의 사이에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공부를 마친 뒤에는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습니다. 타가스테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그는 치체로(Cicero, BC104-43)의 [우정론](Hortensius)을 읽으면서 지혜의 이상에 매료되었는데, 이는 끊임없이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마침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 그의 긴 여정의 출발정이 되었습니다. 성서에서 그 문학 유형과 하느님을 의인화하는 방식에 실망하고 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Manichaeismus)의 강의를 듣고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9년간 마니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니교에 심취하였지만 마니교의 지도자 파우스트와 대담한 후 실망한 나머지 여러 철학 서적들을 탐독하였으나, 결국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회개에서 사제 수품까지(386-391)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세 가지 요인은 암브로시오(339-397)주교와의 만남, 신플라톤 철학, 바오로 서간에의 매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고 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암브로시오의 강의를 통하여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성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후에 암브로시오에 이어 밀라노의 주교가 된 심플리치아노는 그에게 신플라톤 철학의 창시자인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의 '누스'(nous, 이성) 개념으로 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개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영원한 '로고스-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심플리치아노는 그에게 바오로 서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읽어 보기를 권했습니다. 바오로 서간을 읽고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날 한 친구로부터 안토니오 성인(251-356)과 여러 은수자들의 엄격한 수도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벅찬 감동을 느끼고 정원으로 달려갔는데, "집어서 읽어라"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성서를 펼쳐 읽어 본 것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모든 의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확신의 광명"이 그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386년 8월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 근교 카시치아쿰에 있는 친구의 농장으로 가서 기도와 명상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듬해 사순 시기를 앞두고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가 지도하는 예비 신자 교리반에 등록을 하고 그해 4월 13일 부활 성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로마의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는 사이, 병든 어머니 모니카가 9일 후인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지낸 뒤 10개월간 로마의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습니다. 388년에 타가스테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391년에는 수도 공동체를 친구 알리피오에게 맡기고 히포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사제생활(391-395) 수도자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원에 살면서 일체의 교사직을 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포의 주교인 발레리오(Valerius)가 교구 안에 사제들이 부족함을 호소하는 강론을 듣고 있던 중, 그를 알아본 신자들에 의해 억지로 주교에게 이끌려가 사제 후보자로 추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주교의 청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주교관 옆에 사제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당시 주로 주교가 강론을 하던 아프리카 교회의 전통과는 달리 발레리오 주교는 사제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론하는 임무를 맡겼고, 강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재능은 이내 드러났습니다. 연로한 발레리오 주교는 건강이 악화되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교구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염려하여 395년 그를 자신의 보좌 주교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해 여름 주교품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발레리오 주교가 이듬해 사망하자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히포의 주교로서의 활동(396-430)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주교로서 35년간 사목하는 동안 엄청난 일들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교구장이 된 직후 방문객들을 쉽게 맞이 할 수 있도록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교구 사목에 관련된 방문객들이 몰려들어 명상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각종 주교 회의에 의장직을 맡고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여러 이단 논쟁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동료 주교들을 방문하는 등 많은 여행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엄청난 양의 저술을 하였으며, 426-427년에 [재론고](Retractationes)를 쓰면서 자신의 저서들을 모두 재검토하고 수정 또는 보완했습니다.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율리아누스 반박서]를 다 끝내지 못한 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 [한국가톨릭대사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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