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학우의 묵상글 모음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 - 이 로사

시릴로1004 2010. 4. 13. 12:19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


성서영성학과 이선미 로사



[하느님의 시선]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6-7.9-10).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호세11,8-9)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세상에서 인간은 이내 죄에 빠지고 타락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배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분노하시다가도 다시 마음을 돌리신다.  

그리고 결국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러나 세상은 포도밭 주인의 아들마저 붙잡아 죽였다(마르 12,1-12 참조).



[예수님의 시선]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0).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제자들의 시선]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마르 14,4-7).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마르 8,17-18)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제자들은 그저 사람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고 기대하고 따를 뿐이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애타게 가르쳐주어도 그들은 여전히 연약한 사람일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율법학자의 시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3,3-5).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교회의 시선]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사목헌장 1항).



[묵 상]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 - 오늘 내 옆에 있는 ‘작은이'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아벨은 누구인가


주님은 우리 곁에 있는 가장 작은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일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라고 하신다. 또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며,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라고 명령하신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여전히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살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는 백 마리 양 가운데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며(마태 18,12-14 참조),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 참조)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요한 7,53-8,11 참조)이고,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마르 7,24-30 참조)이며 자캐오(루카 19,1)이고, 몸과 마음의 병을 앓는 모든 사람이다.

결국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길은 경계가 없는 사랑의 시선이다. 내 가족, 내 민족, 나와 같은 종교나 공동체만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이방인들, 나와 수준이 다른 세상의 사람들, 그 모두를 형제자매로 바라보라는 명령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32-33).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른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행되는 저 율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알려 준다(사목헌장 16항).


비록 양심의 소리가 들리더라도 내 나약한 한계는 자꾸 양심의 소리를 못 들은 척한다. 부자청년처럼 다만 율법에 충실한 것으로 의무를 다할 수 있다는 듯이 그 이상의 요구에는 귀를 막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루카 6,49).


나는 주님 앞에 어떤 존재일까? 주님 보시기에 어떤 자녀일까? 나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주님의 애간장을 끓이는 작은이일 뿐이다. 주님은 자녀인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인지를 가르쳐주신다. 비록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며 주님께 의탁하는 것,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자녀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7-1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고 있다면(마태 6,31),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마르 8,18),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1-16 참조)라며 화를 내고 있다면, 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하며 완고한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다면(루카 6,2) 주님은 여전히 슬퍼하실 수밖에 없다.

 

주님께는 슬픔 또한 역설이다. 사랑이 큰 만큼 슬픔도 크다. 기대가 큰 만큼 슬픔도 크다. 그러므로 그 슬픔은 더욱 자극하고 더욱 채찍질하는 사랑이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우리 삶은 슬픔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처럼 참으로 사랑하기에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닮아가려 애쓴다면 결핍과 한계를 볼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선연한 이 시대의 아픔들을 보며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슬픔이 내 작은 세계 안에 갇힌 완고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깊은 사랑의 슬픔이 될 수 있도록 애써보겠다. 날선 슬픔과 분노를 넘어 간장이 녹는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을 닮아가도록 더 알고, 더 배우고, 변화하도록 애써보겠다. 사실 그것은 생존의 절박한 요구이기도 하다. 사람의 불완전함 때문에 주님은 슬퍼하시지만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신다. 그걸 알면서도,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는 여태 타인과 세상으로 인한 슬픔이 나를 잡아먹도록 방치해왔다. 내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것을 거부해왔다. 나 또한 많은 죄를 용서받고도 다른 이의 잘못은 못 봐주겠다고 그를 고발하는 ‘악한 종'이었다. 용서가 주님의 몫이라는 것을 노상 잊고 살았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3-35 참조).  

주님께서 진실로 바라시는 단 한 가지, 그 말씀을 다시 가슴에 담는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