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맑은 영혼
언젠가 한 아이가 저희 집에 오자마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게 말하는데,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 알고 보면 무서운 놈이라고요. 그리고 나 이딴 데서 도저히 못 살거니 그리들
아세요."
그런다고 물러설 저희가 아니지요. 최대한 합동작전으로 나갔습니다.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 한번 시작하면 적어도 2~3시간은 계속되는 대화를 통한 '말 고문'등등.
"얘야! '쫄지 말고'(겁먹지 말고) 내 말 한번 들어보렴. 하나도 쫄 것 없어. 우린 널
도와주려고 있는 사람들이야. 네 과거야 어떻든 우리는 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네가
살레시오집에 온 이상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 식구란다. 네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마. 네가 얼마나 멋있는 놈인지 너는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제 말을 듣고 있던 아이는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는 표시로 인상을 구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얼마 뒤 일입니다. 놀이동산으로 단체소풍을 가게 됐지요. 그날 우연히 그 아이는 제가
운전하는 승합차에 타게 되었는데, 백미러를 통해 아이 얼굴을 훔쳐본 저는 얼마나
마음이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몇 주 전 '삭은'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이 특유의 해맑고 뽀얀 얼굴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 얼굴에서 '이제 나는 이 집 식구다', '나는 이제 받아들여졌
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받아들여졌다'는 말처럼 기분 좋은 말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거절당했
다' '왕따 당했다'는 말처럼 섭섭하고 슬픈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왕따 당한다는
것은 필설로 표현 못할 서러움과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는 예수님 모습을 묘사
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성장한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서 당한 따돌림과
거절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소외감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 손 안으로 굴러
들어왔음에도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식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들
각자 마음에 존재하고 있던 거짓 메시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유다인들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가짜 메시아를 각자 안에 간직하고 있었기에 참 메시아 예수님께서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몰라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욕구나 하리사욕만을 끊임없이 충족 시켜주는 메시아는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모두들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제 안에도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참 메시아를 몰라보게 시야를 가로막는 거짓 메시아가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서원을 통해 이제 오직 하느님 영광만을 위해 살기로 서약한 수도자이면서도 2000년 전
유다 백성들과 별반 다름없이 나만의 만사형통과 나만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시는 가짜
메시아를 따라가고 있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이웃들 고통 그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비정함을 깊이 반성
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탄생을 통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있지만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법정 스님 말씀처럼 '모든 종교의 핵심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입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 맑은 영혼 상태로 지금 이 시대 어디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지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를 식별하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새 출발하는 갓
출가한 수행자 마음으로 세상 앞에 서는 우리이길 빕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 ♡ ‘아저씨, 신부님 맞아요?’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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