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 글모음

섣달이면 켜지는 마음의 꽃등

시릴로1004 2010. 12. 12. 13:47



 

 

섣달이면 켜지는 마음의 꽃등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해마다 날아오는 성탄 카드가 몇 년 전부터는 내게도 수백 통이 되다 보니

카드를 보낸 분들의 정성스런 사연을 나도 모르게 놓치지나 않을까 싶어 한번 읽고

모아 둔 것을 후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읽곤 한다.

이 글의 청탁을 받고 나는 작년 12월에 받은 편지 묶음들을 다시 풀어 읽어 보니

대게가 늘 건강하고 좋은 글 많이 쓰라는 내용의 성탄카드였고,내용 없이 이름만 사인된 연하장은

어느 국회의원으로부터 온 것 한 장뿐이었다.

카드의 겉그림들이 모두 아름답고 다양해서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시 이용할 생각을 해본다.

직접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꽃잎과 나뭇잎을 붙여서 만든 카드들은 더욱 눈여겨보게 되는데,
받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겉모양보다는 카드 속에 담겨 있는 글의 내용인 것 같다.

인쇄된 축하의 말끝에 '건강하세요'  '기쁜 성탄, 복된 새해 맞이하세요'라고

극히 간단한 내용과 함께 이름만 쓴 들이 있는가 하면, 카드 안의 흰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촘촘히 정성스런 사연을 적은 것들도 많다.

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애송시를 붓글씨로 적어 카드에 붙이기도 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말보다는 받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구체적이고

진실어린 내용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다.사랑과 겪려, 축원과 기도로

가득한 카드 속의 말들을 나도 몇 개 골라서 읽어본다.

'이모,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그린 이 그림을 받아드시고 잠시나마 기뻐하세요.

성탄과 새해에는 주님의 별빛 같은 축복을 받으세요.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그림은 보너스로 드릴게요'라고 쓴 어린 조카애의 글,

'찌든 마음 가다듬고 조용히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합시다'라고 쓰신 어머니의 글,

'날마다 해가 뜨듯 날마다 반짝이는 은혜의 빛을 주님,
내 누이에게 내려 주소서'라고 한 오라버님의 글에서 깊은 정을 느낀다.

'민들레의 영토에서 바다 가득한 넉넉한 사랑으로 이 한 해를 사신 이여,
다가올 새해에도 당신의 사랑으로 낳은 빛난 언어로 살아가소서'
'넉넉한 가을 들판에 서 계신 해인 수녀님, 새해에도 시 쓰시는 수녀님 두 손과 뜨거운 가슴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이라고 쓴 독자들의 글을 읽으면 짐짓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새로워진다.

또 '늘상 접하는 수녀님의 시 때문에 얼굴 한번 안 보고도 항상 곁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소나기같이 내리쏟는 사랑만을 갈구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몽당연필'같이 닳아지는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다' 라고

어느 교도소에서 날아온 카드와 '기다림이 징역살이인 슬픈 인생은 억누를 담장이 높을 뿐이지만

하늘이 내 집 같은 희망은 분명 사랑의 확신입니다.' 라는

어느 무기수의 고백이 적힌 카드는 나를 참으로 숙연하게 한다.

1년에 한 번 성탄 카드를 쓰는 일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부담스런 의무가 아니라

평소에 못다한 인사까지 더불어 챙길 수 있는 혼연한 사랑의 의무, 즐거운 의무여야 할 것이다.

전화와 팩시밀리가 아무리 신속하고 편리해도 고운 카드 안에 정성껏 쓰는

축하의 말을 대신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나도 어느 해인가는 팔이 아프도록 사인을 해서 수백 통의 성탄카드들을 독자와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으나 분량이 많다 보니 두세 줄의 좋은 말을 써넣기도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다.

좀더 긴 글을 써서 복사를 해 보낼까도 생각했으나 친필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정감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또 몇통의 카드들을 받게 되고 또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보낼 때는 우선

어린이, 장애인, 수인들, 일반 독자, 가족, 친지 등의 순서대로 쓰려고 나름대로 정해 놓고 있다.

내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내가 이웃에게 자신을 더 많이 내어 주어야 할

사랑의 빚쟁이임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수많은 카드와 편지들,

이들 앞에 약간은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새로운 고마움으로 내 마음엔 환한 꽃등이 켜진다.

그리고 카드 속에 쓰여 있는 모든 좋은 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말들이 내 삶의 길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노력하리라 다짐해 본다.
비록 어느 날 내게 더 이상 많은 카드가 오지 않고 내가 보내지 않더라도

                                                    행복하고 충일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1991>

                               「꽃삽」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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