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숙고하고 논의한 ‘교회 공의회’였다. 교회를 주제로 삼은「교회헌장」외에서 거의 모든 문서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교회헌장」은 교회를 더 이상 성직계급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면서, 여기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속하고 구성원 모두는 -비록 역할과 직분은 서로 다르지만- 세례성사 덕분에 근본적인 평등성을 지닌다고 선언한다. 또한「사목헌장」은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해하면서 세상과의 대결이 아닌 대화, 세상의 변화를 위한 투신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에 교회에 대한 이해를 두고 긴장과 갈등이 고조된다. 우선 교회의 신원(身元)을 둘러싸고 두 부류의 신자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소위 정통파라고 일컫는 신자대중이 있다. 그들은 교회의 가시적(可視的) 표현인 교계제도, 전례, 신학과 교회법 등에서 그 본질적 구성요소를 찾고자 노력한다. 한편 소수이기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위 ‘반동분자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교회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구체적인 생활여건과 사건에서 출발하여, 소위 ‘기성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혹은 그 교회의 의견을 거의 참조하는 일도 없이. 복음만이 오늘을 사는 지침서로 재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주장을 단순화해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좋다 그러나 (제도)교회는 싫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의견이 대립된다. 한편에서는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투신하여 세상의 변화를 위한 ‘누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섣부르게 세상에 뛰어들어 세파에 휩싸여 ‘누룩’의 정체성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세상을 위한 교회, 또 그 교회가 세상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생각하고, 교회를 정의하려 할 때도 여기에서 시작하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교회를 볼 때 우선적으로,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예수와 성령께 대한 관계에서 보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 있는 누룩을 생각하기 전에 누룩으로서의 교회를 본질적으로 정의하려는 경향을 취한다.” 사실 이런 긴장은 교회가 어느 시대나 결코 피할 수 없는 긴장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 있으나 세상의 것이 아니며, 또한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 세상을 거슬러야 할 그런 삶의 영역들도 있다. 누룩의 역설적은 표상은 언제나 유효하다. 누룩이 무슨 소용이 되려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이 밀가루 반죽 내부에 들어 있어야 한다. 한편 누룩은 밀가루 반죽의 저항 때문에 질식되어 무용지물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모든 힘을 옹골지게 간직하고 누룩으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도 이런 긴장과 갈등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970-80년대에 한국 가톨릭 교회는 대(對)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대표적으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 수는 급증하였고, 대사회적으로 아직도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교회의 민주화 투쟁’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교회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교회의 본연의 임무인 영혼 구령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오늘에게 마찬가지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좋은 이미지를 보고 나름대로 큰 기대를 걸고 입교하였던 이들은 자신이 걸었던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냉담을 하거나, 심지어 일부는 교회에 대한 거친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대 사회적 활동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해서도 긴장과 갈등이 증가하였다. 곧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갈등이다.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을 새롭게 자리매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자극을 받아서 교회 내에서, 그리고 대사회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이 늘어나게 되는 좋은 결실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평신도 지도자들과 일부 성직자들 또는 주교단 사이에 견해 차이로 인해서 긴장과 갈등이 빚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미 10여 년 전에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관계의 현주소가 “성직이라는 카스트의 방어적 태도와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라는 식의 지도적인 지성인 신도들의 냉소적 무관심”으로 양분되어 가고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또한 일부 신자들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교회에 적용하여서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치가나 국회의원들이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하듯이 사제들도 교회의 주인인 평신도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직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이 긴장과 갈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지 못한다면,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고, 교회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걸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많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올바로 알아야 그 관계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에서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고 있어야 건강하게 신앙 생황을 할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인간의 이상, 이념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원천인 성경과 그 계시를 해석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신학의 기준으로 삼는다. 교회론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분명하게 파악될 것이다.
1. 성서적 근거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교회”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교회라고 번역되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그리스어 ek-kalein ‘밖으로 부르다’에 어원을 두고 있다. 세속 그리스어에서 에클레시아는 “전령관(傳令官)의 부름을 받고 모인 사람들(ekkletoi)이다. 에클레시아는 그러므로 ‘불려나온 사람들’이고 이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집회다. 따라서 에클레시아가 직접 의미하는 것은 -아무리 종교적 의미를 가미한다 하더라도 - 정치적 집회이지 신성한 종교의식의 집회는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에클레시아 개념의 척도가 되는 것은 그리스어 어원 분석이 아니라 ‘칠십인 역’이라고 부르는 기원전 2세기경의 그리스어 구약성경(Septuaginta)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앞에서 모이는 집회를 히브리어로는 “카할 야훼”(qahal Yahweh), 곧 “하느님의 집회”라고 하는데, ‘70인 역’은 카할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하였다. 그럼으로써 본래는 세속적인 의미를 지녔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70인 역’에서는 종교적․예배적 개념으로 바뀌었고, 그 후 점점 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개념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에클레시아 투 테우”(ekklesia tou theou), 곧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참된 하느님의 집회요 공동체이며 종말의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을 드러냈다.
세속 그리스어에서 백성의 공개적인 집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가 ‘주님의’ 혹은 ‘야훼의’라는 수식어가 붙게 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집회의 주도권은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모임을 소집한 하느님이시다. “단순히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모이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하느님이 모으시고, 따라서 에클레시아가 하느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수식어 없이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것은 임의(任意)의 사람들이 임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그것은 하느님이 미리 선택한 사람들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그러면 하느님께 불림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1.1. 구원 역사과 교회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공동체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설립되었다고 가르쳐왔다. 전통 신학에서는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이미 교회를 설립했다는 근거로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말씀을 제시한다. 1952년에 발간된 교의신학 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회당과는 분리되는 새로운 종교 공동체를 설립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목적으로 제자들을 자신의 주위에 모았고(마태 4,18-20) 그들 중에서 열둘을 뽑았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역사-비평적인 성서 주석학의 발전과 함께 의문시되었다. 복음서에는 교회를 지칭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두 번(마태 16,18; 18,17)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성서주석학에서는 이 두 구절마저도 부활 이후의 교회 상황에서 형성되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반면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공관복음서에서 백여 곳에 걸쳐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20세기 초반에 신학자 르와지(Alfred Loisy, +1940)는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르와지는 이 말을 통해서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둘 사이의 연계성을 인정하였으니 즉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르와지의 말은 자주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가 마치 대립된다는 듯이 사용되었다. ‘교회는 단지 예수가 약속했지만 도래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대신한 것으로, 또한 난처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다.’ 실상 20세기 초반의 몇몇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런 방향으로 교회를 해석했다.
가톨릭 신앙은 이런 입장을 거부하고 교회가 예수님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물론 오늘날 가톨릭 신학은 예전처럼 마태오 복음 16장 18절 한 구절에 근거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 생애 동안에 분명히 교회를 염두에 두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당신의 설립 의지에 대한 분명한 의도를 추측하게 해주는 일련의 행위들을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건대- 통해 당신 교회의 초석을 놓으셨다.” 예수님의 행동에서 교회 설립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행동은 그분이 속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맥락 안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교회론은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교회의 설립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세사가 전개되는 가운데 충돌이 함께 하는 과정, 혹은 여러 막으로 구성된 드라마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1.1. 구약성경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그를 큰 민족의 조상으로 삼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축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창세 12,1-2 참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사악과 야곱에게도 유효하게 지속되었고, 마침내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져서 이집트 땅을 가득 채웠다(탈출 1,7 참조).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 여정 중에 시나이 산에서 그들을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선별하여(=거룩하게 하여)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그들을 종살이의 땅에서 해방시키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4-5)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의롭고 평화로운 백성이 되어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계약을 체결하면서 그들에게 부과된 계명들을 준수하는 데에 계속 실패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엄하게 꾸짖고 비판하면서, 무엇보다도 세 가지 잘못을 지적하였다. 첫째, 우상숭배로서, 야훼가 아닌 낯선 신을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거짓으로서, 거짓 가르침, 기만적으로 성전과 하느님의 선택에 의지하는 것, 거짓 판결 등을 내용으로 한다. 셋째, 폭력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무죄한 이들을 살해하는 악행을 말한다.
예언자들의 거듭된 경고에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지속적으로 계약을 어김으로써 심판, 곧 무력에 의한 멸망이 예고된다. 실제로 이 심판은 - 예언자들의 확신에 의하면 -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심판을 예고했던 예언자들은 심판이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행동도 예고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행동은 하느님께서 멸망한 백성을 다시 일으키고 불러 모으시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구약성경에는 멸망해서 흩어진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다시 불러 모으신다는 것을 언급하는 대목들이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이 에제키엘 예언서인데,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체험한 인물이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그들이 흩어져 사는 민족들에게서 모아 올 때, 나는 겨레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 안에 내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집안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짓고 포도밭을 가꾸면서 그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사방에서 그들을 비웃는 모든 민족들에게 내가 벌을 내리면 그들은 평안히 살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 그들의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28, 25-26)
이 예언에 따르면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은 망해서 흩어져버린 당신 백성을 다시 모으면서 자신이 ‘주님이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계시는 어떤 진리의 내용적 전달 그 이상의 것이다. 즉 계시에는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그러나 유배 이후의 실제 역사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게 소집되고 그들에게 영이 내릴 것이라는 예언이 결코 실현되지 않았거나, 기껏해야 매우 미미한 상태로 실현되었을 뿐이다. 비록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한 후에 유배 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였지만(기원 전 538년),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예루살렘은 옹색하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약속한 평화는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 더구나 많은 민족들이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 귀속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자립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유다는 다가오는 수백 년 동안 사실상 (페르시아, 프톨레마이우스, 셀레우코스, 로마가 통치하는) 이방의 강대국들에 귀속된 한 지역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과거의 잘못이 거듭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 때에는 그리스의 종교 예식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외부의 압력과 영향이 거세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유배 이후 예루살렘에서의 새로운 공동체가 특별하게 하느님 영의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가운데 특이한 현상이 생겨난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보다 우월한 그리스- 이방문화와 대결하면서 묵시적 대망사상이 형성되었는데, 이 사상은 무엇보다도 다니엘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서 7장에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형태가 구상되었는데, 거기에는 성전 공동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 세상 전체에서 가장 높으신 분, 왕으로 묘사된다. 점점 더 사악해지는 지상의 왕국들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는 완전히 빛을 잃는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다니 7,18)인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 하느님은 갑자기 이 세상의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국이 생겨나게 하시는데,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의 왕국으로서 하나의 성채(城砦)처럼 솟아올라 온 세상을 비추는 광명의 중심이 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당신 구원계획의 도구로 삼으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선택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선택의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자신 안에 고립된 채로 굳어버리거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주변 강대국의 문화에 동화되고는 하였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공동체의 실마리가 나타난다. 제2 이사야에서는 (개인 혹은 이스라엘 전체로 해석될 수 있는) ‘주님의 종’이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선택된 이로서, 많은 이들 곧 불충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의 죄를 짊어질 사람이다(이사 53,13-54,12 참조).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과 메시지와 관련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니엘서와 연결 짓는다. 또한 예수님은 제2 이사야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과 비슷하게 고난의 운명을 겪는다.
1.1.2. 신약성경
예수님은 핵심적인 메시지는 가까이 다가 온 하느님 나라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런데 그분은 단지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수난과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그의 사명과 그의 신원이 드러난다. 그의 활동은 여러 단계로 구분된 드라마와 같은 과정으로 이해된다.
제1막: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의 선포와 행동의 중심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다.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상태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자신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면서, 그 표징으로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소집과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다. 즉 예수님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흩어진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의로운 자, 경건한 자, 결백한 자들만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예 집단으로부터 도외시된 버려진 자, 못난 자, 가난한 자, 죄인들을 의도적으로 포함하면서 전체 이스라엘을 모으려는 데에 자신의 사명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목적 때문에 그분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인 병자들과 마귀 들인 이들을 고쳐주셨다. 신약성서 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예수의 전(全)활동의 유일한 의미는 마지막 때의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일이다.” 이런 점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의 선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선별하여 사도로 삼으심으로써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다시 모으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인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자주 (혼인)잔치에 비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게 되리라”(마태 8,11; 참조: 마태 22,1-14; 25,1-13). 그리고 예수 스스로 자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자신의 추종자들과만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식사 공동체란 “평화와 신뢰, 형제됨, 그리고 죄의 용서의 초대, 곧 생명의 나눔으로서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또한 유다교에서 식탁의 교제는 하느님 앞에서의 친교를 의미했으며, 연회의 초대자가 빵을 떼며 축복하는 말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교에서 밥상을 함께 하는 일은 하느님의 눈앞에서의 교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밥상 교제는, 식사에 참석한 각 사람이 쪼갠 빵 조각을 먹음으로써 주인이 쪼개지 않는 빵을 향해 말했었던 찬양기도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바로 그 점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유다인들은 식탁에 초대하는 손님들을 매우 세심하게 선택하였고, 경건한 이들이 죄인들을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관습과는 정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의 친교를 나누었다. 죄인들을 식사공동체에 받아들인 것은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풀고, 그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행한 식사공동체는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축제의 식사로서 종말의 식사공동체를 선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모두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잃어버린 이들을 구원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주제, 즉 죄의 용서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라는 주제가 이미 공생활 중의 식사공동체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이 이렇게 죄인들까지도 하느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회개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는 (묵시 문학에서 기대하던 것처럼) 세상이 갑자기 마술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백성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회개의 기본적 형태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나타난 하느님, 즉 예수의 아버지에게로 온전히 돌아서는 것이며,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행동을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자신의 행동의 척도로 삼는 것이다. 회개의 구체적인 내용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바처럼 폭력적인 보복의 법칙에서 떠나고, 악을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며, 원수까지도 포함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마태 5,38-47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으로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었으며, 죄인과의 식사 공동체를 통해서 이미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의 형성을 위해서 각자의 회개를 요구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각자의 회개를 포함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회개의 촉구를 하느님 다스림에 대한 선포와 결부시켰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바빌론 유배 이후 여러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음으로서 드러난다고 선포하였는데(예레 23,3; 에제 28,25-26; 11,17; 20, 34.41; 34,13; 36,24; 37,21),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선포와 백성을 모으는 행동을 통해서 이런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층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백성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에 놀라워하고 병자 치유나 구마와 같은 치유 행동에 감탄하였지만, 정작 그분의 요구대로 회개하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다. 결국 예수님의 선포는 백성 전체로부터 거부된 셈이고, 하느님 백성의 재건을 목표로 한 예수님의 활동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예수님의 한탄에서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 13,34).
제2막: 하느님 나라의 거부와 심판의 말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가 거부된 상황에 직면해서 예수님은 심판의 말씀으로 응답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갈릴레아의 도시들이 심판 때에 띠로나 시돈보다 더 불행해질 것이라고 위협한다(마태 11,20-24). 여러 비유에서도 심판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 임금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 불충실한 종의 비유(마태 24,45-51),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탈란트의 비유(마태 25,14-30) 등이 그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혹한 심판의 말을 하고(마태 23), 종말에 나타날 사람의 아들을 심판자로 선포한다(마태 24,25-44; 25, 31-46).
여기서 심판의 말씀은 단지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에 벌을 받는다는 윤리적 차원이나, 제안이 거부됨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받은 데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라는 개인적 차원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은 구원에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주는 계시의 말씀이다. 즉 심판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것의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무한한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분의 행동 양식을 따르면 구원된 삶이 가능하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은 보복의 원칙이 지배하는 기존의 옛 질서에 머물러 비구원의 상황 속에 자기 스스로를 가두어두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를 밝혀주는 것이 심판의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선포한 심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아무 선행(先行) 조건 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지만, 분명히 이에 대해 뒤따르는 조건을 요구했다. 즉 예수님은 무조건적 용서를 선물로 받은 이에게 이 선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똑 같이 무조건적 용서를 베풀 것을 바랬다. 이런 회개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결과로 이미 받은 선물에 영향을 미쳤다. 마태 18,23-35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이런 관련을 명확하게 확인해 준다. 빚진 종의 애원에 따라서 왕은 아무 조건 없이, 상응하는 업적도 없이 빚을 탕감해주는데, 이는 하느님의 죄인에 대한 전제 조건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종은 동료에게 빚을 탕감해주기를 거부하는데, 이는 죄인이 자신이 받은 전제 조건 없는 용서를 다른 이에게 전제 조건 없이 선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왕의 선물인 무조건적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옛 생각과 행동인 보복과 복수에 머물렀고, 결국 왕에게 불려와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악한 종은 자신이 버리지 못한 보복과 복수의 원칙에 의해서 탕감 받았던 자신의 빚을 다 갚아야만 했다. 그 종은 자신이 고집한 보복의 원칙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고, 이런 의미에서 무조건적 용서인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심판의 말씀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통한 구원 약속의 취소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떠나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비 구원의 상황, 즉 지옥의 상황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다. 무자비한 종은 ‘고문 형리’(마태 18,34)에게 넘겨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바깥 어둠 속’(마태 25,30)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이런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 들이지기를 원치 않았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르 12,1-12)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 나라 소식은 거부당했고, 그 선포자인 예수님은 배척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모으려 했던 백성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집단으로 규합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한 당연한 귀결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의 마지막 구절이 암시하듯이(마르 12,9)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심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이 오는 대신에 심판을 선포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
제3막: 십자가- 속죄의 죽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모여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그를 반대하고 심판하려는 집단으로 변모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심판을 예고한 예수님이 심판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비관적 상황에 직면해서 반대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면서, 다가올 수난과 죽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마르 14,36 참조). 수난 전날 저녁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죽음(마르 14,24 참조)이라고 설명하고, 자신을 기억하여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한다(루카 22,19; 1코린 11,24.25).
여기서 속죄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분의 분노를 풀어드리기 위해서 죄 없는 그분의 아들이 무참하게 죽어야 했다는 의미의 속죄가 아니다. 예수님의 속죄 행동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용서하시도록 하는 보상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어야 했으나, 이것을 거부한 이들을 대신하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 메시지의 핵심적 요구를 견지하였다. 그분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비폭력(마태 5,38-42), 박해하는 이들 위해서 기도하라는 원수사랑(마태 5,43-47)을 요구하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도 이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되기 직전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들고 저항하자 이를 저지하신다. “칼을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 26,52)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주실 것이다.”(마태 26,53) 예수님은 어쩔 수 없는 무력함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에서 비폭력의 길을 가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 이들을 대신해서 혼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실현하셨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죄인들이 겪어야 할 자기 심판의 운명을 대신한다.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 중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무자비한 종은 “고문 형리”(마태 18,34)에게 넘겨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바깥 어둠 속”(마태 25,30)으로 쫓겨난다. 예수님 자신도 형리에게 넘겨지기 전에 제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고” 그의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에 이르며(마르 14,33-34), 십자가 위에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부재(不在)라는 어둠, 지옥의 체험을 겪어야 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했으나 거절한 이들의 처지에서 행동하였고, 그들의 겪어야 할 심판의 운명을 몸소 겪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예수님은 이들과 일치하여 하느님께 간청하고 그들과 하나 되어 죽을 정도로 그들이 당해야 할 곤경을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제4막: 예수 부활 - 하느님의 판결
모든 인간, 즉 유다인과 이방인들에서 배척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이를 하느님 아버지는 부활시켜서 인간들에게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돌려보낸다. 하느님은 위기의 순간에 나약함과 두려움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를 저버린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26 참조)라는 메시지와 함께 부활한 예수님을 돌려보내신 것이다. 하느님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당신 아들을 통해서 다시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선사하신다.
부활하신 분은 - 발현을 통해서 - 당황하여서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신다. 그분은 새로운 모음의 중심이 되고 새 집의 모퉁이돌이 된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사도 4,11; 1베드 2, 4-7 참조)
제5막: 성령 강림과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있었다. 부활 이후의 발현의 시간은 아직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이었고, 이런 요소들은 사실상 모든 부활 사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고”, 두려워하였다(마르 16,8). 마태오복음은 갈릴래아의 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본 열한 제자들 중에서 몇몇이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 전한다. 루카복음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면서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루가 24,37).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요한 20,19,26).
하지만 이런 제자들은 성령 강림 이후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한 예수를 메시아로 용감하게 고백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바로 성령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성령강림은 제자들을 강하게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들 앞에 나서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담대함을 선사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가 가시적이며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
1.1.3. 교회의 설립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단순히 어떤 진리 내용을 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백성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로 인해 겪은 운명에서도 같은 것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인간을 새로 불러 모으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불러 모음’은 -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구분된 드라마와 같은 과정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려는 예수님의 시도는 강력한 반대 세력에 부닥친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의 소집은 처음에는 인간들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반대의 모임, 하느님의 사자(使者)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세력들의 규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의 적대적인 행동에 예수님은 똑같이 적대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이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서 제자들에게 보내셨다.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다시 모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헌신에 대한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종말의 하느님 백성으로 불러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거부하였고,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분리된 공동체인 교회가 출현하게 된다. 이 교회는 부활 또는 성령 강림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구체적인 구조를 서서히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부활 이후에 성령의 힘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활 이전의 예수님의 활동, 곧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것과 함께 시작된 종말론적 하느님 백성의 소집 없이는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에 출현한 교회를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미 지상 생애 동안에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추측하게 해주는 일련의 행위들, 곧 하느님 백성의 재건, ‘열둘의 설립’, ‘성찬례의 설립’ 등을 통해 당신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가운데 초석을 놓은 교회는 성령강림을 통해서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교회는 부활 이전에 예수님이 백성을 불러 모으려고 했던 노력이 다시 받아들인다. 곧 전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열 두 사도 그룹의 결원이 급히 보충되었고(사도 1,15-26 참조), 이스라엘에 대한 복음 선포가 신속하게 재개되었으며(사도 2,38-40 참조), 예수님이 행했던 치유의 기적이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되었다(사도 3,1-10 참조). 또한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교회 입문의 예식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행했던 최후만찬은 교회의 중심 예식인 성찬례(미사)가 되었고 (사도 2,37-47 참조), 신자들은 나눔과 봉사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며(사도 4,32-34 참조),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서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봉사 직무도 형성된다(사도 6,1-6 참조). 이렇게 교회는 그 시작부터 자신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서 그의 사명을 이어간다는 의식을 지니고서, 복음 선포와 성사(세례와 성체성사) 거행, 그리고 나눔과 봉사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였다.
교회는 이스라엘만의 공동체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 발전한다. 예수님은 처음에 단지 이스라엘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거부당하고 그 자신마저도 버려졌기 때문에 - 여기에 이방인(빌라도와 로마병사들)도 참여하였다 -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을 통해서 새롭고 더 근본적이며 확장된 모음이 시작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여 제자들을 온 세상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성령강림 때에는 하나의 메시지를 여러 언어로 이해하도록 하는 성령이 세상에 왔다. 이는 교회가 유다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나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실현되었다.
1.2. 신약성경의 교회 이해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하느님의 ‘에클레시아’, 곧 ‘하느님께 불림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하면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이해를 드러냈다. 신약성경 내의 여러 문서들은 여러 가지 교회 이해를 전해준다.
1.2.1. 바오로 서간: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백성, 성령의 성전
신약성경 안에서 등장하는 가장 초기의 교회 이해는 서기 50년경에 저술된 바오로 서간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을 통해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되었고(사도 9,1-19; 갈라 1,11-24), 그 이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1코린 2,2.8)이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믿은 이들의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고찰하고 판단하였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공동체의 기원과 시작은 복음,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그는 복음 선포를 통해서 공동체가 설립된다는 말을 하는 가운데 하느님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자기 자신과 소명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덕분에 믿음과 세례 안에서 이 복음을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테살 1,5-10; 2,1-12; 필립 1,3-26; 갈라 1,6-2,10; 3,1-5; 1코린 1-4).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들이 이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바오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새로운 사회적 형태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영광에 이른 주님을 통해서 규정된다.
1) 그리스도의 몸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근본적 형태를 “그리스도 안”(en Christo) 혹은 “그리스도의 몸”(soma Christou)이라는 말로 요약하여 표현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1코린 1,30; 갈라 3,28; 2코린 5,17 참조)으로 들어가서 그분이 지닌 생명과 영에 참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생명과 영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로마 6,4-5 참조). 그리고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욱 충만하게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는 신자들 서로 간에도 일치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몸이 된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사람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공동 운명체를 형성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사람들은 역할을 서로 다르지만(1코린 12,12-31 참조), 근본적인 평등성을 누린다(갈라 3,28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제2 바오로 서간(에페소서와 골로새서)은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온 교회가 그분께 귀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2)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콜로 2,10) 머무르고 있다.
몸의 지체들은 머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서로 잘 결합되고 성장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과 통교하는 도구로서, 교회를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현존하신다(에페 1,22-23; 4,7-16; 5,21-33; 골로 1,18; 2,19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현양된 그리스도의 지상적 몸이다.
2) 하느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고, 그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구원 역사 안에서 공동체를 이룩하는 하느님의 활동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로써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의식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현들을 사용하였듯이, 바오로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교회를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즉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로마 9,25-26),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갈라 6,16), “아브라함의 후손”(로마 9,7-8),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로마 9), (가장 빈번하게는) “하느님의 교회”(1코린 15,9; 갈라 1,13; 1코린 10,32; 11,22; 1코린 14 등)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로 불러 모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교회”(1테살 2,14)로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과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속에 있다.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은 하느님은 충실하고 선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데에 그리고 구약의 약속이 지속된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연속성은 많은 사항을 포함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항상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민족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는 참 올리브 나무인 이스라엘에 나중에 접붙여진 가지로서, 그 나무의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영양을 공급받는다(로마 11,17-18). 유다인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백성 중에서 그리스도교로 회개한 “남은 자”들이다(로마 11,1-10). 다른 한편, 이스라엘 자신도 자신이 받은 선택과 약속을 계속 유지한다(로마 11,29). 그들의 일시적인 “완고함”으로 인해서 구원이 이민족들에게 이르게 되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원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다(로마 11,11-12. 23-32).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일부다.
이스라엘과의 불연속성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 특성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분의 결단 촉구에 근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종말론적 의로움이 나타났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 따라서 이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다인과 이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이고,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종말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던 것, 곧 이민족들의 구원이 지금 이미 시작된다. 이런 점에 서 교회는 자신을 통해서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새로운 계약”이 실현되었다고 이해한다(로마 9,24-10,21 참조). 교회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특별히 성찬례를 거행하는 모임으로 존재한다.
3) 성령의 성전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을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하면서 다시 모이게 된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사도 2,36 참조). 이들의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사도 2,41 참조). 이렇게 교회의 시작에 함께 하신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계속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교회에 대해 얘기할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느님의 영과 그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바오로에 따르면 세례 받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영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참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태어나게 하신 성령은 교회 안에 계속 머무르시면서 교회에 생명과 활력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다.
우선 성령은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선사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1코린 12,8-10) 은사와 함께 교회에 필요한 다양한 직분도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1코린 12,28; 에페 4,11 참조) 또한 성령은 교회가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삶을 영위하도록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로마 8,9-10; 1코린 2,10-11; 6,19; 12,1-2; 2코린 3 참조).
성령이 갖가지 은사와 직분을 선물로 주시는 이유는 ‘공동선’을 위하여(1코린 12,7),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고 성장시키는 데에 있다(에페 4,11-16 참조)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지체들이 그분의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랑의 정신 안에서(1코린 13 참조) 서로 보완하고 협조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로마 12,5-8 참조)고 강조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1코린 12,4)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은사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교회를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여럿일지라도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1코린 10,17 참조). 그래서 에페소서의 저자는 이렇게 권고한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3)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은 다양한 은사로써 교회에 생명과 활력을 주시고, 아울러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도록 해주신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멀리해야 한다(1테살 5,20-22 참조). 신자들 각자는 “육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갈라 5,16) 살아가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이들은 모두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성령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요한 15,5.8.16 참조).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백성”, “성령의 성전”로 교회를 규정하였는데, 이 표현들은 서로 연관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이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찬례에 참여한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함께 참여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동시에 그들 자신은 서로 밀접하게 결속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다. 성령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체되어 가는 것을 실현시켜 주시고, 신자들 안에 계시면서 그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형성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은사로 도와주신다.
1.2.2. 사목서간: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집
소아시아의 교회 공동체가 1세기 말에 처한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교회 이해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목서간(티모테오 1,2서, 티토서)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서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새롭게 해석한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이방인 가운데에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더 이상 종말이 곧 다가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사도들 이후 2세대와 3세대의 위치에서 사도들의 증언을 회고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므로 시간의 변화 속에서 복음의 연속성에 대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었고, 게다가 그릇된 가르침이 교회 공동체들에 혼란을 가져왔다. 또한 그들이 몸담고 사는 이방인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도 필요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의 제도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사목서간에서도 전체 교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개별 공동체(1티모 3,5; 5,16)는 복음 선포에 그 근거를 둔다(2티모 1,6-14). 그러나 이 복음 선포는 이제 구체적으로 ‘가르침’(이 말이 16번 나온다)을, 사도들의 가르침의 전승으로부터 ‘위탁된 것’(1티모 6,20; 2티모 1,12.14 참조)을 전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초대 교회의 여러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질서를 돌보는 직무가 빠른 시간 내에 형성되었다. 유다 계통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회당 공동체를 본 따서 ‘원로들’(presbyteroi)의 단체를 지도 위원회로 삼았던 것(사도 11,30; 14,23; 15,2-6. 22-23; 16,4; 21,18 참조)과는 달리 이방인 가운데 있는 교회에서는 세속의 도시 행정으로부터 ‘감독’(episkopos)의 직무를 도입하였다. 추측컨대 감독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필립 1,1 참조), 나중에는 사목서간에서처럼 단독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 외에도 ‘봉사자’(diakonos)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필립 1,1; 티모 3,8-13 참조).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의 ‘일곱’과 비슷하게) 사회․봉사적 직무를 담당하였고, 필립피서 1장 1절에 언급된 것처럼 감독과 함께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사목서간에서 바오로의 제자 티모테오와 티토는 공동체의 감독(주교)으로서 원로들에 대해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1티모 5,17.22; 디도 1,5 참조), 이들의 사명은 잘못된 교설의 위험에 직면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이었다(1티모 4,1-5; 6,2-10; 2티모 2,14-4,8; 디도 1,10-16; 3,9-11 참조). 교회직무에 임명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주어서 파견하는 것은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1티모 4,14; 사도 6,6; 13,1-3; 14,23; 1티모 5,22; 2티모 1,6 참조).
사목서간에서 감독은 단독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는데, 이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과도 유사한다. 이렇게 교회가 제도화된 것은 내적, 외적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복음을 올바로 보존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사목서간 외에도 베드로의 첫째 서간의 증언하듯이, 질서와 체계를 갖춘 교회는 신자들에게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즉 세상에 흩어져서(1베드 1,1; 야고 1,1) 이방인들 안에서 머물러서 나그네살이를 하는(1베드 2,11) 그리스도 신자들은 가정 교회 또는 지역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통해서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영적 집”(1베드 2,5), “하느님의 집”(1베드 4,17)으로 간주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 이방인들 앞에서 그분의 위업을 선포해야 한다(1베드 2,9).
사목서간은 당시 고대 사회의 가부장적인 가정을 본보기로 해서 교회는 마치 체계를 갖춘 하느님의 가정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집(1티모 3,15)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교회 이해에 상응해서 교회의 지도자는 하느님의 가정을 맡아서 충실하게 다스리는 가장이나 관리인으로 이해되었다(티토 1,7).
이렇게 교회가 당시 사회의 가부장적 가정 형태를 닮아가면서 여성은 점차로 교회의 직무에서 제외되었다(1티모 2,3-15; 2티모 3,6-9 참조). 사도들의 세대에만 해도 여자들이 교회의 여러 봉사직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필립보의 네 딸들은 예언자였고(사도 21,9), 켕크레아 교회의 포이베는 봉사자였으며(로마 16,1-2), 바오로는 안드로니고의 아내라고 추정되는 유니아를 “뛰어난 사도”라고 칭하였다(로마 16,7). 하지만 사목서간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1.2.3 복음서: 교회는 형제적 제자 공동체
1세기 말에 교회가 처한 새로운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은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격 증인들과의 시간적 간격이 점점 더 멀어지고, 전통이 다양해지는 가운데에 잘못된 가르침도 생겨나고,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말미암은 열광주의로 흐르는 경향과 싸우고, 또한 교회가 제도화되는 가운데 자신이 마치 독립적인 존재인 듯이 행세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을 분명하게 부각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전승을 역사적 서술 형태로 새롭게 제시하면서 현재의 상황과 비판적으로 연결 짓는다.
예수님은 종말의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으려고 했고, 그런 의지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의 선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그분을 따르는 제자단은 미래의 교회를 예비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고 기술한다(마태 28,16.19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단과 현재의 교회는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심지어 마태오 복음에서 “교회(ekklesia)”라는 말이 제자단의 대표 베드로(마태 16,17-28 참조) 또는 제자들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등장하기까지 한다(마태 18,17-18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현재의 교회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 안에는 세상처럼 서열다툼, 경쟁심, 분쟁이 있지만 교회는 세속의 엄격한 계급 체계가 통용되지 않는 공동체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승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형제로서(마태 23,8-12 참조),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마태 23,11; 20,26 참조),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마태 20,27)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아서 세상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상하의 지배 관계가 아니라 상호봉사, 일방적 소유가 아니라 서로 간의 나눔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기도와 성찬 모임을 갖으면서 바로 이런 형제적 제자 공동체를 실현하였다(사도 2,42-47; 4,32-35 참조). 그래서 루이 부이예(Louis Bouyer)는 이렇게 말한다. “애당초 교회는 세계적인 예배 기구, 세계적인 복음화 조직체, 세계적인 자선기구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 교회는 분명히, 성체성사를 거행하려고 모여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지역 단위의 공동체 모임이었다.”
제자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파견된 제자들, 특별히 “열 두 사도”(마태 10; 26,20-21; 28,16-17 참조)가 선포한 복음과 그들이 베푼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교회가 형제적 제자 공동체로서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현양된 그리스도가 주님으로서, 스승으로서, 세상의 심판자로서 세상 끝 날까지 교회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마태 28,18-19 참조).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교회는 한 분의 착한 목자와 함께 할 때(요한 10,1-30 참조),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머물 때 형제적 제자 공동체로 유지될 수 있다(요한 15,1-8 참조). 교회가 제자 공동체로서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교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1.2.4 히브리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
히브리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제로서(7,3) 구약에서처럼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7,27; 9,11-28; 10,10.14).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 흘림으로써가 아니라 기도(5,7), 순종(5,8), 자기 봉헌(9,12-14)을 통하여 제사를 드렸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자신을 봉헌하는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써 “휘장 안으로”(6,19), “더 완전한 성막으로”(9,11), 즉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열어놓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따라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다.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게는 자신들을 위한 영원한 도성을 지상에서 발견할 수가 없고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랄 뿐이다(히브 13,14). 영원한 도성에 이르게 되면 구원의 매체로서의 교회는 사라진다. 그래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묵시 21,1)에는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고,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 되신다(묵시 21,22). 거기서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과 어린 양)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묵시 22,4)이며, 다시는 죽음이나 슬픔, 울부짖음과 괴로움도 겪지 않을 것이다(묵시 21,4 참조).
이렇게 영원한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의 여정에서 교회는 과거에 믿음으로 인정받은 “많은 증인들”(히브 12,1)과 함께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야한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영도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12,2)을 바라보면서 인내로써 시련을 견디어 내야 한다. 아울러 형제애를 실천하고 불륜과 탐욕을 피하는 참된 공동체를 이루면서(13,1-6),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13,17).
1.2.5. 요약
신약성경은 교회에 관한 근본적인 관점, 곧 교회의 형성과 본질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을 전해준다. 하지만 교회를 체계적으로 고찰하여 완성된 교회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자신 처한 다양한 상황에서 교회에 대해 숙고하면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런 숙고 과정은 교회 역사 안에서도 계속되면서 서서히 교회에 관한 신학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체계적인 교회론을 위해서는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교회사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2. 교의사적 전개
2.1. 고대 교회: 신앙의 신비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 역사의 초기 몇 백 년 동안에는 아직 독자적인 교회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현재 온 세상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신자들의 관심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사건에 집중되었고, 그래서 이런 하느님의 구원 신비가 교회를 통해 전달되는 것도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일부로서, 한마디로 신앙의 신비로서 이해되었다. 그런 가운데 서서히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련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1.1. 고대교회의 상황
그리스도교가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몇몇 지역에서는 전체 주민의 과반수가 그리스도 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초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회에서 아직 소수로 (아마도 12-15 퍼센트 정도)에 머물렀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낯선 집단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생활 실천과 신앙체계의 많은 원칙들이 그리스적-로마적 사회의 원칙들과 직접적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모든 이를 포괄하는 교회의 보편적 개방성은 당시 사회의 계층적 특성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였다. 또한 절대적인 진리를 지니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화의 혼합주의적 태도와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 그리스도교 세계가 그리스도교 보다는 더 우세한 동안에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잠재적 혹은 실제적인 거부와 박해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아직 하나의 체계를 이룬 교회론을 형성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자신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2.1.2. 고대교회의 특성
1) 성사적 실재
신약성경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종속해 있으며,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을 나타내는 도구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초세기 교회도 복음 선포와 성사(세례성사와 성찬례) 거행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성사거행을 통해서 역사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는 구체적이며 사회적인 표징으로서 자신을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현양된 그리스도를 가시적으로 세상에 전하는 표지로서 마치 성사(聖事)와 같다.
초세기의 교부들은 교회의 이런 성사성을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 밖에서 찾아낸 다양한 표상들로 표현하였다. 후고 라너(Hugo Rahner, +1968)는 이런 표상들 중에서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고대의 교부들이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큰 성사이며, 생명을 선사하면서 목숨을 잃는 어머니이고, 태양이신 그리스도에 다가가면서 작아지는 달이며,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구원된 하느님의 가족을 자신에게서 떠나보내는 방주이다.” 치프리아노(Cyprianus, +258)는 교회의 성사성을 표상이 아니라 개념으로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교회를 “불가분의 일치의 성사(inseparabile unitatis sacramentum)”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아우구스티노를 포함한 중요한 교부들은 성사적인 전체 구원 경륜을 서술하는 가운데 교회를 성사 혹은 신비라고 표현하였다.
2) 종말의 구원 공동체
초세기 교회는 왕성하게 선교활동을 펼쳤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거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할 때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전례나 교회체계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진 새로운 구원의 상황이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구원에 참여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삶, 세상과는 대조되는 수준 높은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그리스도 신앙에로 초대하였다.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종말의 구원 공동체로서 세상과는 대조(對照)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온 세상에 흩어져 살면서 하늘에 본래의 고향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 살기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는 다르게 살 수 있었다.
2세기경의 저술로 추정되는『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점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희랍이든 외국이든 각자의 운명이 정해 준 곳이면 어느 곳이건 상관없이 살아가며, 의복, 식사 그리고 다른 관습에 있어서도 그 지역의 관습에 순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과 같이 모범적이고 놀라운 생활양식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에서 살아도 외국인처럼 삽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른 시민들과 같이 하지만 외국인으로서의 힘든 일도 당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조국도 외국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만 갓난아이들을 내다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식사는 함께하면서도 잠자리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 안에 살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살면서도 그들의 시민권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규정된 법률에 순종하지만 자신의 개인 생활에서는 법률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박해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잘 모르고 있지만 그들은 사람들한테 항상 단죄 받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겪으나 즉시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가난해도 모든 이를 부요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풍성히 지니고 있습니다. 수치를 당하지만 바로 그 수치 안에서 드높은 영광을 찾습니다. 비방을 당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옹호를 받습니다. 그들은 비방을 축복으로 능욕을 영예로 돌립니다. 선을 행해도 악행을 하는 자로 벌을 받고, 벌을 받을 때 상을 받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신앙에 근거한 대조적인 삶은 주변의 이교인들에게 주목과 경탄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놀랍고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행하는’ 품행(『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5,4)이 이교인 동료 시민들에게도 알려지는 동시에 제3계급으로 경멸받던 그리스도인 무리는 매혹의 대상이 되었다.”
3) 교회 제도와 체계의 강화
처음 3세기 동안의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혹독한 박해를 잘 견뎌냈지만, 사실상의 심각한 위기는 내부로부터, 즉 영지(靈知)주의로부터 왔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유다적, 그리스적, 그리스도교적 그리고 - 아마도- 아시아적 요소들을 하나로 합친 혼합주의적 사조(思潮)로서, 그 기본 정서는 염세주의적이다. 고대 후기의 영지주의자들은 세상과 인간 존재를 완전히 부정적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인간들이 고향인 플레로마(영의 세계 또한 충만함의 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떨어져 망상, 꿈, 오류에 빠진 육체와 물질의 어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런 육체와 물질의 어둠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인데, 인간은 자신의 참된 결정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즉 구원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라 직관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인식, 곧 영지(gnosis)다.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에, 해방은 인간의 참된 유래와 운명에 대한 영지의 통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계적으로 이런 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악한 물질세계와 거기서의 활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지주의 계통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도들의 비밀 교리와 전승 -40개가 넘는 위경(僞經) 복음, 20개 이상의 사도들의 문서, 편지, 묵시록- 을 내세웠다. 영지주의와 투쟁하였던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스무 개 이상의 영지주의 집단에 대해 언급한다. 그 당시에 과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영지주의에 속하였거나 친근한 입장에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 교회는 이런 치명적인 위험을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대응 방식으로 극복하였다.
(1) 올바른 가르침을 지켜야 하는 직무의 강조와 ‘군주제적(君主制的) 주교직’의 형성: 1세기 말 경에 영지주의와의 투쟁 과정에서 이른바 ‘군주제적 주교직’, 즉 단 한 사람의 감독(주교)이 공동체 전체를 다스리고 그의 산하에 원로(신부)들이 종속되는 제도가 형성되었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모든 공동체에 퍼져나갔다. 참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주교가 주변의 주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공동체이다. 그렇지 않은 공동체는 이단으로 규정하여 제외시켰다.
(2)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사도들의 비밀 전승에 반대해서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에게 기원을 두는 교회들이 전하는 공개적 전승을 강조하였다. 이 교회들 중에는 무엇보다도 로마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활동했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정경(正經) 확정: 영지주의자 마르치온은 루카 복음과 바오로 서간 10편만을 성경으로 확정하였다. 마르치온의 주장에 대처하면서 교회는 어떤 기록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어떤 것을 거짓 사도전승 -위경(僞經)- 으로 제외시킬 것인지를 분명하게 강조하게 되었다. 마르치온으로 인한 혼란은 그리스도교가 신약성경의 경정 목록을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지주의로 인해서 교회는 여러 소집단과 분파로 갈라지게 될 위기에 처하였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구조적 요소들, 즉 ‘군주제적 주교직’, 전승의 원칙, 신약성경의 정경을 좀 더 분명하게 내세움으로써, 이런 조처를 통해서 갈라져 나가려는 공동체를 새롭게 모아들임으로써 위기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쩔 수 없이 일부를 제외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불러 모음’의 운동이 계속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를 제외시키는 길로 나가게 되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교회의 거룩함을 둘러싼 싸움에서도 재연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자신을 새롭게 선별된 백성, 성도들의 공동체(에페소서 5장의 그리스도의 배필, 천상 예루살렘, 새로운 하와, 참된 교회)로 이해하였다. 이런 모든 표현과 표상들과 함께 초세기의 신자들은 교회의 완전성과 거룩함에 대한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인들은 죄인으로 머물고, 그들 가운데 큰 죄인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교회는 이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즉시 긴장이 조성되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은 교회에서 제외되고 축출되어 마땅하다고 믿는 집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몬타누스파와 엔크라트파, 노바시아누스에 의한 분열, 사해질 수 없는 죄에 대한 논쟁, 도나투스파의 분열 등이다.
교회는 거룩함의 문제에서 항상 중도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즉 한편으로 교회는 거룩하게 되는 것과 죄스러운 세상에서 돌아서는 것(이와 함께 아주 큰 죄인을 제외시킴)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강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과도한 엄격주의에 거부하고 죄인들에게도 참회를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주기를 원했다. 이에 반발한 모든 엄격주의자들은 조만간 분파(分派)를 형성하였고 결국에는 교회에서 갈라져 나갔다.
4) 요약
초세기에 교회는 일차적으로 신학적 숙고의 산물이나 법적 질서에 근거한 조직체가 아니라 신앙의 신비로 여겨졌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환으로 생겨났다고 이해하였다. 즉 하느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종말의 구원 공동체로 만드시고, 이 공동체를 세상에 파견하여 모든 사람들을 당신과의 일치 속에 살도록 불러 모으는 도구로 삼으셨다.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 교회의 제도와 구조도 교회에 대한 이런 종말론적이며 성사적인 관점이 특징을 지닌다. 전체 교회는 친교(親交, communio)의 형태로, 지역교회들 간의 친교로 존재하는데, 각 지역 교회는 교회의 본질 전체를 대표한다. 지역교회의 일치는 그 교회를 (부제와 사제단과 함께) 사목하는 주교에 의해 대표되고 보장되었다. 또한 전체교회는 주교단(主敎團)에 의해 대표되고 보장된다. 또한 초기 몇 세기가 경과되는 가운데 로마의 주교가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 수위권을 지니게 되면서 점점 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2. 중세교회: 영적인 지배
2.2.1. 역사적 상황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는 해방된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소수의 교회가 대중의 교회가 되었고, 곧 이어서 그리스도교적 왕국 또는 그리스도교적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이렇게 세상과 교회는 점점 더 뒤섞이게 되면서 - 초대교회를 지배하였던 -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의식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교회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반적인 승리의 도취감은, 그때까지의 세상과의 거리를 너무나 빨리 세상으로 개방하는 문화 낙관론으로 일변시켰다.”
아울러 교회가 대중의 교회로 변하면서 야기된 문제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제 국가에서 비호하는 교회로 몰려 들어온 군중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내놓았다. 지금까지 확신을 가지고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엘리트의 교회에서 정치적인 야심가,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자, 아직 반은 이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몰려 들어옴으로써 대중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종교의 평범화나 이교적․미신적인 것의 침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의 세속화나 남용이 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에 교회는 국가로부터 더 이상 박해가 아닌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고,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특권을 누리는 국가교회로 변모되었다. 새로운 상황을 맞아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래로 동방에서는 황제가 교회의 일에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비잔틴은 서서히 ‘새로운 로마’로 불리게 되었고, 그 도시에 상주하는 황제 한 사람에게서 교회와 왕국은 동일시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왕국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제정(帝政)일치의 경향은 수도자만을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수도자를 주교로 임명한 것은 본래 교회 권위의 영성적 특성을 확고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수도자들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관할권의 임무가 황제의 권위에로 양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동방에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정치와 종교가 합쳐질수록 총대주교의 지위가 자주성을 잃어갔다.
한편 서방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서로마의 황제권는 점점 더 약화되는 반면에 교황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게 되면서 교회의 지위가 자립적으로 되었다. 451년에 훈족이 로마를 위협했을 때 황제는 무력하였지만, 레오 대교황(440-461)은 훈족의 아틸라 왕을 만나 로마가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고, 455년에는 반달족의 로마 침입 때에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교황직의 지위는 레오 대교황에 의해서 매우 확고해졌으므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어려움 없이 견딜 수 있었다.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590-604)은 이탈리아와 로마 교회가 일방적으로 비잔틴과의 의존관계를 맺었던 것을 지양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는 미래를 위해 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서방지향적인 정책을 전개하면서 프랑크족의 왕가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였다. 서서히 프랑크 인들은 구 로마의 멸망 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럽의 민족 공동체 안에 제시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새 제국의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왕과 황제들은 교회 일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황제와 교황 사이에, 세속적 지배와 교회적 지배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교 황제는 제정일치적인 자기이해에서 교회를 자신과 제국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교회는 이런 흐름에 반대해서 11세기의 그레고리오 개혁 이래로 교황이 그리스도교 백성에 대한 최고통치권을 갖는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일종의 ‘교황군주제’를 관철시킴으로써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였다.
교회 내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분리도 점점 더 분명해졌다. 과거에 있었던 교회와 세상과의 종말론적 긴장이 새로운 조건 하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사제와 수도자는 ‘영적인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교회와 세상 간의 구분이 교회 내로 옮겨와서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구분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교회의 제도와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거의 서방 전체가 카를 대제(768-814)의 하나의 강력한 그리스도교적 제국 이념의 결과로 로마 전례에 편입되었고, 앵글로 색슨족의 유럽 대륙 선교의 결과로 로마의 관리체계에 편입됨으로써, 또한 교황에게 직접 소속된 탁발수도회(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가 성공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사목을 실행함으로써, 서방 교회 전체가 로마 교회에 흡수되었다. 많은 지역교회들의 친교를 통한 교회의 일치가 점점 더 하나의 로마 교회를 통한 교회의 획일적 통합으로 변하였다.
2.2.2. 중세교회의 특성
1) 종교와 정치의 대립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관계가 일상화된 곳에서는 교회 개념 역시 정치적, 사회적으로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한편에서는 정치와 교회의 두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원칙적으로 영적인 권한과 세속적 권한을 구분하려고 거듭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두 영역 간의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전에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284-305)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그 동기는 내적으로 위협을 받는 로마 제국의 개혁에 있었다. 그는 고대의 모든 제국들이 지녔던 이념인 종교의 통일을 통해서 제국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했다. 디오클레시아누스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사실상 종교의 일치를 통해서 제국의 일치를 확고하게 만들려고 했다. 다른 점은 디오클레시아누스처럼 황제숭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312년의 첫 번째 큰 승리 직후 로마의 시노드에 카르타고의 체칠리아누스(도나투스 이단의 시작) 사건을 위임하였고, 교회의 결정을 무력으로 관철하려고 시도하였다. 324년 마지막 공동 황제에 대한 승리를 거둔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325)를 소집하여서 아리우스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번에도 교회의 결정을 국가 권력으로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추정했던 것보다 아리우스파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의 전술만 바꾸었다. 아리우스를 석방하고, 니체아 공의회 지지파에게 양보를 요구하면서 의견의 일치를 압박하였다. 황제는 아타나시오가 자신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자 그를 제국의 변방 트리어(Trier)로 추방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들도 제국의 일치를 위해 종교문제에 대해 간섭하는 제정일치적 ‘황제 교황주의’(Caesarpapism)가 형성된다. 황제들은 종교의 일치를 위협하는 이단자들을 무력으로 위협하고 제거하였다. 황위 찬탈자인 막시무스(383-388)는 스페인과 갈리아에서의 금욕운동 창시자인 스페인의 평신도 프리스킬리아누스를 여섯 동료들과 함께 385년에 트리어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교회의 주요한 대표자들인 투르의 마르티노 주교와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 그리고 로마의 시리치오 교황은 이런 잔학한 행위를 맹렬하게 단죄하였다. 그러나 처형의 편에 든 주교도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국가와 종교의 단일성을 위하여 이교도와 유다인들의 박해가 계속되었다. 313년 이전에는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313년 이후에는 스스로 박해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고 억압하였던 것이다.
“완전한 위상 변화가 이루어졌다. 국가 권력에 의지해서 무엇이 정통 신앙인지를 결정하였다. 주교들과 사제들, 교회와 교구에 특권을 부여하는 반면 이단자들과 이교도들은 불이익과 벌을 받았다. 종교는 바뀌었지만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섰지만, 그러나 다른 구조가 들어서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은 계속해서 종교들과 분파들을 박해하였다. 이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협조에 기대를 걸었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종교-정치적 일치의 이념에 오늘날 교회에 부담을 주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십자군 운동, 종교재판(1252년에 고문을 수단으로 이단자들을 심문할 수 있다는 교황의 허락이 나왔다), 유다인 박해, 종교전쟁, 신대륙 주민들에 대한 강제 개종 정책 그리고 1864년에 이루어진 종교자유에 대한 단죄(DH 2977/2979)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단일성에 대한 고대의 이념은 교회가 신앙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 수단에 의존하고, 반면 국가는 교회를 국가의 일치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교 안에는 과거 로마 제국이 사용했던 같은 수단으로 일치를 이루고 유지하려는 전통이 있었다. 즉 무력으로 반대자를 제거하고 축출함으로써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교와 세상 권력이 뒤섞이는 과정에서도 교회는 항상 영적 권한과 세속적 권한의 분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노(354-430)와 교황 젤라시오 1세(492-496)를 예로 들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라는 두 나라(civitates)를 구분하여 고찰하였는데, 이 입장은 후대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근본원리가 사랑인 ‘하느님 나라’(civitas dei)는 지상의 교회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 나라는 하늘(천사)에서 시작되고, 지상에서는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아벨 이후의 교회)만이 여기에 속한다.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이 지상의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는 밀 이삭 속에 있는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가 암시하듯이 ‘혼합된 교회’(ecclesia mixta)다. 오직 미래의 천상 교회에만 “티나 주름 같은 것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에페 5,27)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이 적용된다. ‘하느님 나라’ 곁에 ‘땅의 나라’(civitas terrena 혹은 diaboli)가 있는데, 이 나라는 자기애라는 원칙에 근거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땅의 나라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땅의 나라’가 지상의 국가와 동일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교황 젤라시오 1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선을 이어가는 동시에 이 노선을 새롭게 하면서 양권설(兩權說)을 주장한다. 젤라시오는 영적권한은 세속의 권한에 예속되지 않고, 각 권력은 그 영역에서 고유한 권한을 갖는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교회의 통치자들은 공공질서의 영역에서 황제의 법률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제왕들도 하느님 앞에 셈을 바쳐야 하는 한에서 영적권한에 중점이 있다. 이렇게 해서 젤라시오 1세는 동로마제국이 세속과 영적 권력을 일원화하는 데 반대하였고, 이후 서구 발전의 기반이 될 영적 권한과 세속 권한의 이원론(二元論)을 정식화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나라’와 ‘땅의 나라’의 구분을 일차적으로는 순수 영적으로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 이해하였고, 비로소 이차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구분과 관련지었다. 하지만 교황 젤라시오 1세는 세상에서의 두 가지 권한(교황/왕) 사이의 직접적 구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제적 권한을 왕의 권한보다 분명하게 위에 두었다.
서방에서는 지속적으로 동방의 ‘황제 교황주의’에 반대해서 세속적 권한과 영적인 권한의 구분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자립성을 수호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황제에 대해서 교회의 자립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들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교황은 황제를 축성하여 - 피핀의 도유식(751/7540), 카를 대제의 대관식(800)과 오토 대제의 왕위 및 황위 대관식(962) - 그리스도교적 왕권으로 인정하고, 반면 그리스도교 황제는 교회의 평화와 신앙을 수호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오토 황제에 이르러서는 황제권이 높은 품위의 그리스도교적인 사제적 왕직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황제권이 종교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면서 모든 것을 능가하는 우위를 차지하게 되어다. 서방에서 황제들은 -동로마 황제처럼- 자신들의 지위를 교회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교회 재산을 양도하고 증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교들도 임명하고 해고하였다. 서방의 특성인 교회와 국가의 이원론은 일방적으로 황제의 위치에 유리하게 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영적 생활이 국가권력의 후견이 되거나 그에 예속되는 상황은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11세기에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이들은 ‘세속인에 의한 성직 서임’과 성직 매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함께 교회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는 1075년 자신이 반포한「교황 훈령」(Dictatus papae)에서 교황이 보편적 권한의 원천이며 전권의 소유자, 곧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새로운 법을 반포하는 것, 주교를 해임하고 다시 임명하는 것, 시노드과 공의회의 적법성을 결정하는 것, 종교적 윤리적 이유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에 황제를 폐위하는 것, 신하들을 충성 서약에서 풀어주는 것에 대해서 전권을 지닌다고 천명한다. 이제는 더 이상 - 젤라시오 1세처럼 - 하느님이 영적, 세속적 두 가지 권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두 칼 -그리스도는 사제인 동시에 왕이시다 -로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루카 복음 22장 38절에서, 그리스도가 두 자루의 칼로써 상징되는(兩劒論) 두 권력을 세계의 통치를 위하여 정해 놓았는데, 그 하나인 세속적인 칼은 황제의 손에, 또 다른 영적인 칼은 교황의 손에 있다고 추론하였다. 반면에 그레고리오 시대의 교회법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이론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관련시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즉 두 자루의 칼은 다만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 영적인 칼은 교회가 행사하고, 세속적인 것은 황제가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의 이름으로 행사하도록 교회가 황제에게 빌려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교회의 파문을 영적인 칼로 간주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 이전에 교황권은 오랜 쇠퇴기를 겪었다. 1054년에 동서로마가 분열되기 전 2백년은 ‘암흑의 세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에 교황권은 경쟁적인 로마의 파당들의 노획물에 불과하였다. 교회의 병폐가 깊어지자 클뤼니 수도원과 같은 강한 개혁 세력들이 등장하여 국간 안에서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였다. 개혁 세력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교회적․영적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정치 세력의 간섭에서 벗어나 교회의 자유를 획득하고(성직 서임권 투쟁), 이렇게 해서 교회가 개혁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이런 개혁 세력에 후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레고리오 7세의 주장은 ‘암흑의 세기’에 잠시 교황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던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니콜라오 1세는 중세 교황직의 최초의 위대한 대표자였다. 그의 목표는 영적인 일에 대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국가의 세속적 일에 개입하는 것은 그에게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적인 우두머리로서, 또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질서의 보호자로서, 비록 군주들일지라도 그들의 윤리생활을 감시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주장은 동로마에서뿐만 아니라 서방의 독일 제국 교회에서도 아주 생소한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래서 황제와 교황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벌어진 성직 서임권 투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사건’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황권은 독일 황제들과의 오랜 투쟁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치하에서 서구 그리스도교계의 승인된 우두머리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고 명백히 교황이었다. 그는 영적 권한의 우선권을 확신하면서 최고의 입법자요 재판관이며 관리자로서 전권을 지니고, 이 최고의 권력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전 교회에 행사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권이 세속의 권한 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교황이 세속에서 무한한 권력을 갖는다든지 속권을 교권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단지 왕들이 죄를 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자신이 나서서 왕들을 견책 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인노첸시오가 세속문제에 개입하였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건들도 하느님에 의하여 제정된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국왕과 제후들도 하느님의 심판에 종속되어 있다는 책임과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위계제도, 다시 말해서 하나의 ‘거룩한 질서’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때에는 순 정치적인 것과 순 영적인 것, 교회와 국가 간의 정밀한 구별은 교차와 ‘침해’가 없었을 정도로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교황은 ‘죄의 이유에서’(ratione peccati), 질서가 도덕적 과실이나 객관적인 불의로 인하여 방해될 때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모든 미해결의 논쟁문제에서 ‘세상의 심판관’(arbiter mundi)이기도 하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세상을 하나의 위계제도, 곧 거룩한 질서로 이해했고, 이 질서가 죄에 얽매인 사람과 죄의 이유로 교란될 때 교회가 언제나 간섭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교황 훈령」에서 요구하였던 것이 인노첸시오 3세에게서 실현된 셈이다. 교황은 황제와 왕들에 대해 우위권을 지니게 되면서 종교와 정치의 일치가 황제들(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이 원하던 것처럼 정치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종교, 특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보편적 통치권의 실현이 일차적으로는 종교적인 목표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이 남용되고 오용될 위험은 명백하였다.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위를 황제 또는 왕의 권력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슬그머니 교회의 영적인 권위가 세속적인 권력에 동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영적인 권위를 세속적인 권력(potestas)으로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는 점점 더 지배라는 개념으로 기울어졌다.
인노첸시오 3세 때에 정점에 이르렀던 교황권은 서서히 하강의 길을 걷는다. 독일의 슈타우펜 제국의 멸망(1268) 이후에 프랑스는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등장하였다. 프랑스의 세계 지배를 추구하던 필리프 미왕(1285-1314)에 반대해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8)는 칙서「우남 상탐」(Unam Sanctam)을 통해서 교회의 보편적 통치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 이후 교황들은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 ‘아비뇽 유배’(1309-1377)의 생활로 들어간다. 교황들은 프랑스 영토 안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프랑스 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적이 예들이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 독일을 반대하는 정치,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의 십자군 운동, 공갈 협박의 재정 체계 등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황권의 약화를 낳았다. 아비뇽의 유배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1370-1378)으로 끝이 났지만, 그 이후에는 여러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서구의 대이교(離敎)’(1378-1417)가 시작되었다. 이 엄청난 혼란은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비로소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극복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의 절대 권리 주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된다.
2) 성직주의와 교회의 법제화
신약성경과 고대교회는 교회를 성체성사와 밀접하게 연결시켜서 이해하였다. 바오로에 따르면 성찬례에 참석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아우구스티노도 성찬례와 연결 지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다. 즉 성찬의 빵은 육체적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중세 초기까지도 ‘그리스도의 참된 몸’(corpus Christi verum)은 교회를 뜻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는 성체를 가리켰다. 신앙인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체성사의 결실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을 부정하는 이들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관심으로 성체에 더 집중되었다. 이런 가운데 명칭이 정 반대로 바뀌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성찬례에서 축성된 성체를 가리키고,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교회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성체성사와 교회와의 연결이 느슨해지면서 공동체적 측면이 희미해진다. 그 결과로 성체성사는 점점 더 ‘제단의 성사’로 국한되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은총을 얻는 데에, 그리고 성광에 성체를 모셔놓고 성체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공경하는 데에 중점이 놓이게 된다. 한마디로 성체신심이 개인화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제의 위치가 점점 더 부각된다.
교회가 성직자 위주로 변하면서 전례에도 변화가 온다. 전례 자체가 점점 더 성직자만의 일이 되었고, 백성은 단지 수동적인 관중으로 머물렀다. 평신도와 성직자와 구분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신자들 없이 사제 혼자 드리는 미사 형태도 나타났다. 이런 개인 미사는 8세기 이래로 수도원 안에서 그리고 곧 이어서 교구 사제들에게서도 일상화되었다. 성찬례가 개인화됨으로 말미암아 경신례 안에서 교회를 공동체로 체험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런 가운데 사제직은 더 이상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성사 집전의 권한(축성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축성권과 교회를 인도하기 위한 법적인 사목권(재치권)으로 분리된 것이다. 고대교회에서는 공동체와 유리되어 서품을 받을 수 없었고, 사목권과 성사권은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사제직은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직책이고, 그래서 사제의 성사권도 사목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세기 이후에는 두 권한이 분리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라는 관점이 퇴색되면서, 성령에 의한 내적-신비적 일치보다는 외적-교계제도적 일치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중세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내적인 일치, 곧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모든 은총은 그분을 통해서 교회의 몸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내적인 일치와 연관 시키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교계제도를 통한 외적인 일치를 강조하였다. 교회는 점점 더 신적인 법에 근거하고, 질서를 위해서 엄격한 법적인 체계를 갖춘 제도로서 간주되고, 교회의 일치는 가시적인 수장, 곧 로마 교황에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면서 교계제도적으로 정돈된 조직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교회 이해는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문(1442년)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주님이며 구원자의 말씀을 통해서 세워진 거룩한 로마 교회는 다음의 사항을 굳건하게 믿고 고백하며 선포한다.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방인’만 아니라 유다인 혹은 불신자와 분열자들은 죽기 전에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마와 악마의 졸개들을 위해 준비된’(마태 25,41) 영원한 불에 떨어진다. 교회의 신비체와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해서, 교회의 성사들은 오직 교회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을 전해주고, 그들에게만 단식과 자선 그 밖의 경건한 업적과 그리스도교적 전쟁 복무가 영원한 보답을 준다. ‘설사 누가 대단히 많은 자선을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흐렸다고 해도, 그가 가톨릭 교회의 품안에서 그와의 일치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구원될 수 없다(Fulgentius)'"(DH 1351).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교회를 친교적이며 성령론적 교회론에 입각해서 서방의 제도적이며 획일적인 교회관을 거부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13-14세기에 서방에서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을 때, 동방은 교황군주제를 비판하고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합의체적인 교회 체제를 강조하면서 이에 저항하였다. 동방교회는 다섯 총대주교(예루살렘좌, 안티오키아좌, 알렉산드리아좌, 콘스탄티노폴리스좌, 로마좌)에게 교회 내에서의 최고 권위를 부여하는 ‘친교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다섯 명의 총대주교 사이의 동의가 보편성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머리이자 스승(caput et magistra omnium ecclesum)’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3) 개혁운동
교회 역사에서 (영적인) 개혁운동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에 교회와 세상의 공생(共生)관계가 시작되자, 은수자들은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둔 금욕생활을 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그 이후에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12세기의 개혁 수도회(클뤼니,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종교적· 금욕적 민중운동과 청빈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중에는 리옹의 부유한 상인 베드로 발두스의 의해 시작된 발두스파, 마니케이즘적인 이원론을 펼쳤던 카타리파 등은 반교회적인 분파로 갈라져나갔다. 또한 15-16세기에는 교회 일각에서 신자들의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신심회와 성직자 수도회가 창립되었다. 이 개혁 단체들의 신앙 부흥 운동은 나중에 트렌토 공의회의 개혁에 원동력이 되었다.
세속화된 교회를 쇄신하려는 움직임에서 새로운 신심 운동이 형성되었다. 네덜란드의 데벤터(Deventer) 시의 부제이며 설교가였던 그로테(G.Groote, 1340-1384)가 1380년경 기초를 놓은 ‘새 신심운동’(Devotio moderna)은 15세기에 온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 운동을 moderna라고 표현한 것은 그때까지의 신심을 ‘옛 신심’(antiqua devotio)라고 하면서 이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재래의 신심은 13-14세기의 스콜라 시대의 신학 논증을 중심적으로 이성적인 사변에 치중했지만, ‘새 신심 운동’은 학문적인 이론 추구를 반대한다. 또한 이 운동은 교회 내부의 개혁을 목표로 개인의 내적 생활 쇄신을 강조하면서 그 힘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과 산상설교의 정신에서 얻어냈다.
그러나 ‘새 신심운동’은 서구의 대이교 등 교회의 혼란과 폐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외적인 것이나 예식은 중요치 않게 생각하면서 내면성과 주관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로 이 운동에서 교회의 전례나 성사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새 신심 운동’에 대해 교회사가 A.프란츤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 운동에서 “성사, 특히 미사는 이미 십자가 희생의 성사적인 재현으로 체험되지 못하고, 다만 사적인 기도를 위한 기회로 평가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성사의 구원 등급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본래 교회 내부의 개혁을 목적으로 하였던 ‘데보시오 모데르나’는 ‘루터의 유심론을 미리 준비한’(Iserloh) 결과가 되었다.” 결국 새로운 신심 운동이 반 교회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성사적, 공동체적인 측면은 약화된 채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심에서 종교적 만족을 찾았다. ‘새 신심 운동’의 창시자인 그로테의 동료이며 제자인 토마스 켐피스(Thomas a Kempis, 1308-1471)가 저술한『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도 개인적인 성서 독서가 중점을 이루었다가 나중에야 제4부는 성체성사에 대한 부분이 첨가되었다.
다른 한편 교회 비판적인 개혁 운동도 전개된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점점 더 제도화, 법제화, 정치화되고, 특히 중세 후기에 교회의 세속화가 정점에 이르게 되자 교회의 개혁에 대한 요청이 전반적으로 유포되었다. 그러나 교회 당국에 의해 필요한 개혁이 지체되거나 방해받는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교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특히 1447년부터 1534년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교황령의 유지와 확대에 치중하면서 시대적 사명인 교회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런 폐단은 제도적인 교회의 중요성을 거부하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1세기 후반부터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순전히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교회를 지향하는 영성 운동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피오레의 요아킴 수도원장(+1202)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역사가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상응하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첫 번째 단계는 회당을 중심으로 한 구약성경의 아버지 시대로서 결혼한 자들과 평신도들이 지배하는 시대다. 그 다음은 성직자 중심의 신약성경의 아들 시대로서 사제들이 지배하는 시대다. 세 번째 단계는 영적 성령의 시대로서 수도자들이 지배하는 시대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성령의 시대가 1260년에 몇 가지 대변동이 일어난 뒤 실제로 도래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이 마지막 시대에는 ‘베드로의 교회’ 곧 성직자 중심의 제도적인 교회 사라지고 ‘성령의 교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제도와 성령을 대립적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13-14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엄격주의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다. 그런 가운데 제도적이며 성직주의적인 기존 교회를 신학적이며 정치적·실천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하는 이들이 등장하였다. 오컴(W. Ockham, +1374), 위클리프(J.Wyclif, +1384), 프라하의 예로니모(Hieronymus von Prag, +1416), 후스(Johannes Hus, +1415)와 다른 이들은 가시적인 교회에 대항하여 비가시적이며 본래적인 교회를 강력하게 내세웠다.
세속화된 교회에 대응하는 영적인 교회상이 서방교회의 (영적인) 개혁운동을 통해서 전승되었다. 본래 교회의 제도적 측면과 영적인 측면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기간 잘못된 상황이 잘못된 선택을 강요하였다. 즉 중세후기에 전반적인 교회개혁이 긴급히 요청되었지만, 교황들은 이런 요청에 소극적이거나 이를 배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운동에게는 숙명적인 양자택일만 남은 것처럼 비추어졌다. 교회를 영성화하고 개인화하는 것 이거나 아니면 성직주의적이고 관료적인 교회를 정면 공격하는 것이다.
3) 요약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에 교회는 정치와 공생관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정치가 종교를 제국의 일치와 안정에 이용하면서 교회 일에 간섭하는 일이 생기면서 교회와의 갈등과 투쟁은 불가피해졌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면서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세 중기의 교황들은 영적인 권한이 세속적인 권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이런 주장은 세상에 대한 ‘영적인 지배’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정치를 구분하였지만, 정치 세력과 투쟁을 벌려가면서 서서히 영적인 권한을 세속의 권력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에 대한 이해도 변화된다.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노 전통에서 교회는 지상의 역사 안에서 순례 중인 천상 교회의 한 부분이었지만, 중세에서는 천국의 ‘승리의 교회’로 향해 나아가는 ‘투쟁의 교회’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거룩한 제도로 여겨졌다. 이 제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고, 그리스도로부터 구원 사명에 필요한 구조와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이렇게 무장된 교회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교회 이해에 대한 변화는 교회 체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직계급과 평신도로 구성된다. 교회의 본래적이며 영적인 차원의 대표자이며 영적인 권한의 소유자인 성직자는 평신도보다 우위에 있다. 때로는 성직자가 교회 자체와 동일시되기까지 한다(‘성직자 교회’). 아울러 교황직은 교회 체제의 중심이 되었고, 라틴 교회는 로마 교회로 흡수되어 가톨릭교회는 로마 교회와 동일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대 교회의 주교 중심, 시노드 중심의 구조 대신에 중앙집권적인 교황 체제가 들어섰다.
‘영적인 지배’라는 표현에는 서방의 중세 교회가 지닌 특수한 문제가 함께 암시되어 있다. 교회의 권위를 세속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교황의 권위를 황제의 권위보다 상위에 놓았는데, 그럼으로써 교회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교회의 권위가 더 높은 단계의 세속적 권위로 변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 중기에 교황들이 내세운 영적 권한의 우선권 요구는 -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중세 후기의 영적 권한의 세속화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는 개혁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개혁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교회의 참된 쇄신을 위해 진력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과격한 방향을 치닫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외적이며 제도적인 측면을 거부하고 내적이며 영적인 교회만이 본래적인 교회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2.3. 근대교회: 종파적인 교회
2.3.1. 역사적 배경
중세를 지배하던 질서 관념, 곧 세상은 하느님의 통일적인 질서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다양한 이유에서 14세기 이래로 위기에 처하게 되어 하나의 통일체였던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후견(後見)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세상의 질서는 전 영역에서 점점 더 큰 자율성을 획득하였다.
특히 1450-1550년 사이의 대변혁의 시기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종교 분야에서 근본적인 구조변화가 이루어졌다. 농촌의 사회구조가 흔들리고, 시장과 산업경제, 화폐경제와 노동 분업 등으로 초기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면서 도시와 시민계층이 위상이 급상승하게 됨에 따라 이미 1500년경에 새로운 계급형성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땅이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진 자가 힘이 있다!) 또한 근대 초기 국가 형성과정에서 의회, 도시 귀족, 제후들 간의 경쟁적인 지배권 다툼에서 기존의 거대 세력들이었던 제국, 황제, 교회의 통합적 지도력이 점점 더 약화되었다. 마침내 1517년에 시작된 이른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종교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사회 통합의 능력을 결정적으로 상실한다. 신앙 문제로 그리스도교 백성들 간에 수 많은 전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그 신빙성에 큰 손상을 입었고, 결국에는 신앙 자체가 공공 사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에 의해서 신앙의 단일성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그 때까지 사회의 단일성을 이루는 기반이 무너진 후에 사회 전체의 질서는 지리멸렬(支離滅裂)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16-17세기의 종교 전쟁이었고, 이 전쟁은 사회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것은 종교가 통합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종교를 제쳐놓고 새로운 기초, 모든 것을 묶어주면서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기반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평화를 위해서 종교는 개인적인 사안으로, 그리고 공생을 위한 새로운 기반으로서 모든 인간을 묶어주는 이성 혹은 이성적으로 인식된 자연 질서를 공표하였는데, 이 자연 질서는 ‘비록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더라도’(그로티우스 H.Grotius)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역할이 없게 되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와 세상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근대에는 그리스도교가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특수한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 채 신앙과 윤리는 인간의 사적(私的)인 영역에 머물게 되었다. 근대교회의 교회론은 이런 근대의 발전과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세속과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논쟁적이며 호교론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2.3.2. 근대교회의 특성
1) 반(反) 종교개혁
종교 개혁 이후에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와의 대립 속에서 누가 참된 교회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되었고, 이 질문은 근대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가톨릭 교회론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경향을 지니면서 전개되었다.
루터는 비가시적인 영적인 교회와 가시적이며 외적인 교회를 구분하고서, 전자를 본래적인 교회로 간주한다. “성경을 따르는 첫째 방법은 그리스도교계란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뜻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나는 성령을 믿으며 성도들의 친교를 믿나이다.’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 공동체 또는 집회는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모든 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교계의 본질과 생명과 본성은 육체적인 집합이 아니라, 바울로가 에페 4장 5절에서 ‘한 세례, 한 믿음, 한 주님’이라고 말하듯이 한 믿음을 가진 마음들의 모임이라는 데에 있다.” 루터에 따르면 교회는 오직 내적 질서에 따르는, 곧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성도(聖徒)들의 모임’(sancta fidelium congregatio)이다. 비록 이 교회는 외적인 기준에 의해 명확히 규정될 수는 없지만, 그 특징이 식별될 수는 있다. “여기서 이 동일한 교회가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보는 표지가 되는 것은 세례와 성찬과 복음이다 - 로마나 이러저러한 장소가 아니다. 세례와 복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성도들이 있음은 아무도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들이 마치 요람 속의 아이와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그대로 성도들임에는 틀림없다 - 로마나 교황의 권력이 세례나 복음처럼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또 다른 곳에서 교회를 식별하는 특징을 더 길게 열거하는데, 1539년 그의 논문 「공의회와 교회」Von den Konziliis und Kirchen에서 참된 하느님 말씀의 설교와 올바른 세례와 성만찬의 집전 외에도 징계권, 직무 수행자에 대한 올바른 서품, 모국어로 드리는 기도와 찬양, 박해를 덧붙여서 모두 7가지를 참된 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이런 특징, 곧 하느님이 주신 일련의 (교회 직무까지도 포함한) 은혜들을 갖춘 교회다. 교회의 여러 특징 중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가장 우위를 차지하며, 그 밖의 특징들은 말씀과 결부되어 규정된다. 세례와 성찬과 같은 성사는 구원을 약속하는 하느님 말씀의 다른 형태이다. 또한 교회 직무는 근본적으로는 설교직으로서, 공개적 설교와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의 집전을 위해 존재한다. 루터는 교회 직무가 교회 내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세례 받은 모두는 누구나 똑같이 사제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집전할 권위와 소명을 받지만, 모두가 다 공동체 전체에게 공적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교회의 이름으로 몇몇 사람에게 공적인 봉사 임무를 위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특별 직무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지만, 다른 신자들과는 단지 기능면, 봉사의 차원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루터는 특별 직무를 맡은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호’와 함께 특별한 사제직이 부여된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였고, 그럼으로써 교계적인 사제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요약하면, 루터는 교회를 가시적인 외적 질서에 따라 규정짓지 않고 믿음, 소망, 사랑 등의 내적인 질서에 따른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그는 비록 하느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사(세례와 성만찬)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관리되는 곳에서 교회를 알아볼 수 있을지라도 교회는 근본적으로 영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다고 보았다. 비록 루터는 교회의 질서를 위한 직무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루터의 동료 멜랑히톤이 1530년에 저술한『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제7항의 내용과도 거의 유사하다.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바이다. 항상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가 존재하고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런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의 모임으로서, 여기에서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거룩한 성사들이 복음에 따라서 건네진다. - 서로 일치해서 복음을 순수하게 이해하여 설교가 이루어지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서 성사들이 건네지는 것으로 그리스도 교회들의 참된 일치를 이루는 데에 충분하다.”
칼뱅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를 구분하면서 전자에 강조점을 두었다. 하지만 칼뱅은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오직 선택된 이들만 속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루터와 차이가 난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뱅은 성사(세례와 성만찬)와 직무를 근본적으로 말씀과 결부시켜서 이해하였다. 그에 따르면 설교 내지 교리가 교회생활의 중심을 이루며, 따라서 기본교리요목이 제대로 보존되어 설교되지 못하는 곳, 거기서는 교회가 멸망하게 된다. 칼뱅은 가톨릭교회가 바로 이런 위협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바야흐로 교황권 산하의 사정이 바로 그러하니, 여기서 우리는 아직도 거기에 교회와 관련하여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능히 알 수가 있다. 거기에는 말씀에 대한 봉사 대신에 거짓들을 모아 진리를 가장하는 변조된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칼뱅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회의 자취로 남아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세례뿐이다.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적극 대처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문제시하고 소홀하게 여겼던 교회의 가시적인 측면을 새롭게 강조하고 활성화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시성과 비가시성, 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의 합일체인 교회의 모습을 균형 있게 제시하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시적인 측면을 다시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마치 시소놀이처럼, 하나의 극단(極端)이 다른 하나의 극단을 불러오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이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에 방어하기 위하여, 혹은 그들과 토론하는데 치우치느라고 거의 불가피하게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반 종교개혁시대의 뛰어난 논쟁 신학자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us, 1542-1621) 추기경이다. 그는 비가시적인 교회와 가시적인 교회가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가시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다음은 우리의 가르침이다.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다. 이 교회, 즉 하나이며 참된 교회는 동일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동일한 성사들로 결합된 사람들, 그리고 합법적인 목자들, 특히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대리자인 로마 교황의 지도하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정의를 근거로 어떤 사람이 교회에 속하고 또 속하지 않는지를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즉 이 정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곧 참된 신앙의 고백, 성사들의 공동체, 합법적 목자인 로마 교황에 대한 복종.
정의의 첫 번째 부분을 근거로 모든 비신앙인, 즉 유다인, 터키인, 이방인과 같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이단자들과 배교자들과 같이 한 때 교회에 속했었지만 거기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제외된다.
두 번째 부분을 근거로 예비 신자들과 파문된 자들이 제외되는데, 예비 신자들은 아직 성사의 공동체에 들어오도록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파문된 자들은 거기서 축출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세 번째 부분을 통해서 열교인(裂敎人)들이 제외되는데, 이들은 신앙과 성사들 보유하지만 합법적인 목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래서 밖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밖에서 성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 비록 단죄 받아 마땅하거나, 흉악하거나, 비양심적이더라도 그들은 교회에 속한다.
우리의 가르침과 다른 모든 가르침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다른 가르침들은 한 사람이 교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덕성들을 요구하고, 참된 교회를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비록 우리는 교회 안에 모든 덕성들(신앙, 희망, 사랑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이 성경이 얘기하는 참된 교회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내적인 덕성이 필요하지 않고, 외적인 신앙 고백과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사들의 공동체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로마 백성의 연합이나 프랑스 왕국 혹은 베네치아 공화국처럼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단체이다.”
벨라르미노는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과 성사만을 교회의 핵심 요소로 규정한 데에 반대해서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계제도도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외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누가 제외되었는지에 역점을 둔다. 이 이론에서 교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교황은 교회의 외적인 일치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동방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로부터 가톨릭 교회를 명백하게 구분하게 해주는 벨라르미노의 교회 정의는 사실 외적인 요소들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당시 교회법학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은 거의 종파적 논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구체적인 (교계제도와 동일시된) 로마-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며, 동시에 하나의 종파가 된다. “가톨릭”(보편적)이라는 표현은 로마-가톨릭 교회를 다른 종파(루터파, 개혁파)와 구별하는 표식이 되었다.
2) 반 근대주의
근대 초기에 발생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종교적 문제들 한가운데서 교회가 대처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이것들은 종파적인 논쟁 못지않게 교회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그리스도 신앙과 근대 세계와의 관계, 중세와는 달리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근대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다.
17세기에, 좀 더 분명하게는 18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인간 유형이 증가하였다. 교양 있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시민 계급이다. 이들에게 종교는 이성에 부합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든지 아니면 엄격히 사적인 사안일 뿐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교회 질서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서 거기서 벗어난다. 이들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의 전형적인 대표자로서 전래되어 온 그리스도교가 근대적 삶에 별로 적합하지도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고 여겼고, 자신들의 시민적 삶에 의미 부여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에 대해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하든 자신들의 구체적인 행동에서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17세기와 18세기에 일어난 얀센주의자들과 예수회원들과의 논쟁은 근대 교회 이해를 위해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예수회원들은 근대적 발전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얀센주의자들은 이런 시도를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으로부터의 이탈로 여겼다. 얀센주의자들은 옛 전통, 특별히 아우구스티노 전통에서 원죄론과 은총론을 과장하여서 하느님과 인간의 격차를 극도로 강조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그분의 파악불가능성과 전능으로 이해하였고, 인간의 죄스러움을 극도로 강조하면서 하느님 은총의 절대성을 과도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회원들을 이른바 이완된 윤리신학자로 비난하면서 그들 자신은 매우 엄격한 성사 실천을 도입하였다.
이런 신학적· 인간학적 보수주의와 극단주의는 교회와 관련해서는 반근대주의적인 보수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얀센주의자들의 보수적 극단주의는 교회의 단죄를 받았고, 결국 예수회가 시도한 문제 해결 방식이 관철되었다. 곧 평신도의 세속 활동의 차원에서는 원칙적으로 근대를 인정하면서 교회의 선포를 새로운 정신에 조심스럽게 적응하고, 교의와 교회 질서의 차원에서는 교계제도의 권위에 무조건적 충성을 보이는 입장이 수용되었다. 확고하게 고정되고 교계적으로 정돈된 교회 제도와 역사성에 좌우되지 않는 불변의 교의가 교회의 신앙이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근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고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이미 계몽주의와의 대결에서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몽중의는 이성의 이름으로 정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고, 낡은 전통과 철저하게 절교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의 이성주의는 계시와 결합된 그리스도교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교화와 근대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크게 바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처음부터 교회에 적대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 궁핍을 메우기 위해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국유화되면서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교회를 로마에서 분리하여 프랑스 국가에 편입시키려는 ‘성직자 공민헌장’을 선포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4만 여명의 사제들이 투옥, 유배되고 또는 처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근대의 역사 전체를 점점 더 적응과 수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교회로부터 이반(離反)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단호하게 반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신스콜라 신학에서는 종교개혁에 대한 원칙적인 단죄에, 교회와 갈등을 빚고 교회에 적대적인 근대의 모든 입장에 대한 원칙적인 배척이 보태졌다.
3) 교황 수위권과 무류권의 선포
근대 사회와의 대립각을 세우면서 교회에 대한 충실은 바로 근대 사회와 정신에 대한 반대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그런 가운데에 19-20세기의 교회론은 호교론적인 특징이 강화되는 가운데 사실상 교황의 권위와 동일시되고 로마의 중앙집권제에 복종하는 가톨릭주의를 복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말미암아 1850년과 1950년 사이에는 교황 지상주의적 교회론이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여기서 교회는 ‘완전한 (=독립적인) 사회’(societas perfecta)로 이해되었다. 교회가 이렇게 자신을 ‘완전한 사회’로 이해하면서 본래 목표로 삼았던 것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회 이해는 반근대주의적 호교론과 연관되어 있어서, 교회 외부에서는 근대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방어와 전근대적 생활양식의 활성화 시도로 여겨졌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근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권위와 교계제도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성직자와 평신도의 괴리가 더 심해졌다. 평신도들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의 사목의 수동적 대상이며 성직자들에게 종속되었다. 교회 구조와 관련해서는 로마의 교회통제와 전례의 단일화를 통해서 교황 지상(至上)주의적이며 중앙집권적인 교회의 획일화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단 하나의 교구처럼 보이게 될 위험이 컸다.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마치 교황에게 종속된 지역관리자로 비추어졌다.
‘완전한 사회’로 이해된 교회론에서는 교황과 교황의 권위가 세속과 정치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하는 보루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교황직이 종교가 정치에 종속되는 현상을(갈리아 주의, 페브로니우스주의등) 장기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힘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교황 지상주의적 교회론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수위권(首位權)과 무류권(無謬權)을 교의로 선포함으로써 정점에 이르게 된다.
(1) 교황 수위권의 근거를 교회의 일치 보존에서 찾는다.
“주교직 자체가 하나요 갈릴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그리고 사제들의 긴밀한 상호간의 일치에 의해서 신자들의 무리 전체가 신앙과 통교의 일치 안에 머물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복된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의 으뜸으로 삼으셨고, 베드로 안에서 이 두 가지 일치의 영원한 원리와 그것의 가시적인 기초를 세우셨다.”(DH 3051/811-812)
(2) 요한복음 1장 42절, 마태복음 16장 16-18절, 요한복음 21장 15-17절 등의 성서 구절을 비추어볼 때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전체 교회에 대한 우위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복된 사도 성 베드로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도들의 으뜸이요 투쟁 중에 있는 전체 교회의 가시적인 수장으로 지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혹은 베드로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받은 수위권은 단지 명예직일 뿐, 참된 본연의 재치권을 가진 수위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 받아야 한다.”(DH 3055/812)
(3) 그리스도께서 설정하신 것은 그분의 안배대로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목자들의 임금이시며 양떼의 대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지속되는 구원과 교회의 영속적인 유익을 위하여 복된 사도 베드로 안에 세우신 수위권은 반석 위에 지어져서 무너지지 않고 세상 종말까지 남아 있게 될 교회 안에 그리스도 자신의 뜻에 따라 필연적으로 영원히 존속되어야 한다.”(DH 3056/813)
(4) 로마의 주교는 (신앙과 윤리, 교회의 질서와 통치에 관해서) 전체 교회에 대한 전적이며 최고의 권한을 지니는데, 즉 “로마 교황의 수위 재치권은 진정한 주교의 권한으로서 직접적인 것이다.”(DH 3060/814).
이 가르침에 따르면 교황은 단지 비상 상황이나 특수 상황만이 아니라 정상 상황에서도 직접적으로 모든 교구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황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모든 주교들을 대신할 수 있고, 지역 교회의 주교들은 단지 교황의 대리인이나 사절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염려와 우려가 나타났다(DH 3112 참조). 그러나 이런 해석은 독일 주교들로부터 -교황 비오 9세의 동의하에 - 배척되었다(DH 3112-3117). 하지만 교황이 지닌 전체 교회에 대한 정규적인 주교의 권한이 지역 교회 주교들의 정규적 권한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만족할만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5) “로마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전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교리를 자신의 사도적 최고 권위를 가지고 선언할 때, 그는 복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무류성을 지닌다. 이 무류성은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규정할 때 향유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의 결정들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마땅히 바뀔 수 없는 것이다.”(DH 3074/816).
① 이 발언의 주요 내용은, 교황이 새로운 계시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 보존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오류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② 무류권은 단지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된다.
③ 교황의 결정은 그 자체로 변경될 수 없다는 발언은 교황 혼자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적인 구속력에만 관련된 것이다. 교황의 결정은 법률상의 유효성을 얻기 위해 어떤 형식에 따른 ‘교회의 동의’(consensus Ecclaesiae)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황의 결정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마땅히 바뀔 수 없다.’는 말은 “교황이 임의로 신조를 제정하여 교회에 명령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일종의 의회(議會) 비준과 같은 일정한 법적 절차에 의해서 비로소 교황의 교리결정이 철회될 수 없는 것으로 확정된다는 견해를 배제할 뿐이다. 이런 견해는 갈리아주의와 공의회주의 신학사조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 존재했다...이런 사도들은 교황 선언의 유효성을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군주나 주교 또는 신도 전체의 직접 동의에 의존하게 하려고 했고, 이런 경향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말썽 많은 표현형식이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글자 그대로 공의회 문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교회와 신앙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새로운 사조들이 소용돌이치는 혼란의 시대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혼란의 와중에서 신앙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던 신자들은 교황의 확고한 권위가 선포됨으로써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는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독립성과 자유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교회와 교황은 근본적으로 교회 밖의 세력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등장하였던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학문들과 창조적이며 생산적으로 대결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더구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자유 추구 운동과의 투쟁을 더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교회 역사에 있었던 가장 큰 재앙의 하나, 자연과학과 신학의 분열, 더 나아가서 교회와 근대 문화 사이의 분열이 도래하였다. 왜냐하면 근대의 자연과학은 근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4) 새로운 교회 이해
19세기에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교 소속 가톨릭 신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튀빙엔 학파는 성경과 특히 교부 신학에 입각해서 새로운 교회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들은 교회를 일차적으로 제도로서가 아니라 성령이 활동하는 하나의 유기체, 하느님 말씀의 지속적인 육화라고 이해하면서, 교부시대 이후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리스도의 몸’ 개념을 새롭게 재발견하였다.
튀빙엔 학파를 대표하는 요한 아담 묄러(Johann Adam Möhler, +1838)의 저서『교회 내의 일치』(Die Einheit in der Kirche, 1838)는 교회론에 관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이었다. 묄러는 직무와 제도를 중심으로 외적인 측면을 강조한 성직주의적 교회론을 극복하고자 더 이상 법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교회의 일치를 그리스도교적 삶에 근거를 두었다. 즉 교회란 성령에 의하여 사랑 안에서 일치된 신앙인 공동체이며, 교회의 모든 직무는 바로 이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외적인 교회는 교회의 내적인 삶의 표현과 묘사로 이해하면서, 과거에 두 분야를 이분법으로 나누던 것이 성사적 사고를 통해서 극복된다.
이런 새로운 교회 이해는 20세기의 교부학 연구, 성서운동, 전례운동, 교회일치운동과 연결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교황 비오 12세가 1943년에 발표한 회칙「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는 가톨릭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참된 이 그리스도의 교회 -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적이고 로마적인 교회 - 를 정의하고 묘사하기 위해 이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부르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좋으며 신적인 표현은 없다. 이는 성경에서 싹이 트고 완전히 개화(開花)된 표현으로서 교부들 가운데서도 자주 회자된 것이다.” 여기서 신비체라는 것은 교회가 신비적인 실재, 곧 초본성적이고 창조되지 않는 원리인 성령에 의해 유지된다는 의미다.
이 회칙은 가톨릭 교회를 신비체로 정의하면서 법률적이고 교계제도적인 교회가 성령의 의한 사랑의 교회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교회에는 본질적으로 가시적인 일치가 속하고, 그래서 성령에 의한 사랑의 교회와 법의 교회 사이가 대치될 수 없다(DH 3801)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양떼를 이끌지만, 재치권은 직접 교황으로부터 받는다(DH 3804).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일루는 모든 지체가 서로, 그리고 그 으뜸이신 머리와 결합하는 것은 숨은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성령의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온전히 그 머리 안에 계시며, 온전히 그 몸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각 지체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DH 3808)
그러나 성령은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안에는 거주하지 않는다(DH 3808). 회칙 21항은, “세례를 받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그리고 이 하나의 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사람 혹은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합법적인 당국에 의해 추방되지 않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교회의 교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이 회칙은 오직 가톨릭 신자들만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신비체의 구성원이라고 단언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서원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향해 질서 지어졌다고 주장한다.
5) 요약
근대 가톨릭 교회는 16세기의 교회 분열 이후에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 속에서 종파적인 특색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근대의 사회와 정신의 세속화, 다원화에 대한 반응으로 점점 더 교회가 강조됨에 따라 신앙은 (교계제도와 동일시된) 교회에 대한 충성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고대 교회 이래로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수위권 선언을 통해서 교회법적이며 교의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 관심사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세력에 대한 교회의 자주성, 자율성, 자유와 권리 행사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염려다. 교황의 주체적인 결정권을 통해서 교회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구원경륜에서 전통을 지키면서 쇄신하려는 자의식이 반영된다면, 서방교회의 교회법적 교회론은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런 교회론이 본래 의도를 잊은 채 절대화된다면, 근세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위험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근대의 교회론은 그 중앙집권적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앙전통 전체, 특히 신학의 원천인 성경과 교부신학을 되돌아보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세상을 향한 개방,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 대한 개방, 모든 신앙인들의 친교를 위한 개방, 역사를 향한 개방 등이다.
근대 교회론의 반 근대주의적 경향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얘기할 수 있다. 종교를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면서 사적인 영역에 가두려는 근대사회의 문제성 있는 견해를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리,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다스림과 그것의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교회의 사명에 근거해서 반대하려는 것이라면, 이런 의도는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로 근대 이전의 교회에로의 복구를 위하여 세상과 사회를 교회에 종속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런 의도는 미래를 위해 보탬이 되지 않는다.
19-20세기에 들어서 근대의 종파적이며 반근대주의적 교회 이해, 법률적이고 교계적인 이해를 능가한 새로운 교회 이해가 튀빙엔 학파를 중심으로 제시되었다. 교회는 다만 가시적인 제도, 그것도 완성품으로서 조직된 제도로 보던 종래의 교회관과는 달리 교회를 비가시적인 성령의 신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의 내적이며 영적인 차원을 복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교계제도에 치우친 경직되고 방어적인 교회상을 서서히 넘어서게 되는 기틀이 마련된다. 이런 움직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이어진다.
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교회헌장」을 통해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내용적으로는 19-20세기에 걸쳐 진행된 쇄신의 움직임, 곧 성경과 교부신학, 전례 운동과 교회 일치 운동 등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근대의 종파적이고, 법적, 교계제도적, 중앙집권적 교회 이해를 넘어선다. 전체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트렌토공의회 이후 전통적 교계제도적 교회관을 지니면서도 ‘그리스도 신비체', '하느님 백성'이라는 성서적 관념을 통해 성사와 친교로서의 교회 개념을 도입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는 교회에 관해서 ‘De ecclesia'라는 제목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초안의 제 1장은 ‘투쟁 중인 교회의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사회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다.’ 이어서 교회의 구성원을 주교로부터 시작해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의 순으로, ‘피라미드 구조’로 다루고 있다. 이런 이해의 배경에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규정하는 가시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투쟁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중세의 전형적인 개념으로서, 적대적인 세상 안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관철하려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초안은 근본적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수위권을 다루고 나서 미처 다루지 못하였던 부분을 계속 이어가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1962년 12월 제1차 회기 말에 초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많은 반대와 수정 요구를 받은 끝에 부결되었다. 그 이후 새로운 초안이 작성되어 제2차 회기에 채택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현재의「교회헌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1962년의 첫 번째 초안과 1965년의 확정안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962년 초안 1965년 확정안
1. 투쟁 중인 교회의 본질 1. 교회의 신비
2. 교회의 구성원과 교회의 구원필요성 2. 하느님 백성
3. 성품성사의 최고 단계로서의 주교직과 사제직 3. 교회의 교계제도, 특히 주교직
4. 정주(定住) 주교 4. 평신도
5. 복음적 완덕의 신분 5.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
6. 평신도 6. 수도자
7. 교도직 7.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8. 교회 안에서의 권위와 순종 그리고 천상교회와의 그 일치
9.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종교적 관용 8.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10. 만백성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
할 필요성
11. 교회일치
12. (부록) 동정녀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
제1장: 교회의 신비
「교회헌장」은 첫 번째 초안에서처럼 가시적인 교회, 지상에서 ‘투쟁 중인 교회’로 시작하지 않는다. 공의회는 제1장의 소제목 “교회의 신비”가 말해주듯이 교회를 일차적으로 신비로 이해한다. 에페소서 3장 9절(“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의 계획”)에 따르면 신비란 하느님 감추어진 구원 계획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경륜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경륜은 인간이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의회가 교회를 일차적으로 신비라고 표현한 것은 “교회의 이미지를 풍요케 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너무도 좁은 인간의 견해에 국한시키려는 잘못을 피하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교회가 신비라고 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비가시적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은 교회헌장 제1장 첫머리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聖事)”라고 정의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다.”(1항) 이는 교회를 더 이상 법적이고 제도적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여정에 있는 성사적 공동체, 다시 말하면 가시적 요소와 비가시적 요소의 복합체로 바라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개념은 다른 개념들과 함께 다음의 목적을 위한 개념적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즉 교회의 승전주의, 성직주의,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가시적인 형태 속에 숨어있으며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교회의 신비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은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고 지속적으로 그와의 관련 속에 있는 한편, 표지와 도구로써 온전히 인간과 세상을 위한 봉사를 위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분명히 한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시적인 구조와 영적 본질 사이의 관련과 구분을 분명히 하는 데에 적합한 개념이다.”
제2-4항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경륜의 일부인 교회가 어떻게 삼위(三位)의 하느님의 활동으로부터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즉 성부의 보편적 구원계획(2항), 성자의 파견(3항), 성령의 성화사업(4항)이 교회가 ‘신비’가 되는 바탕이다. 그 결과 교회는 기원으로부터 준비되고(“아벨로부터의 교회”) 강생하신 말씀으로 모이며(“말씀의 피조물인 교회”), 성령으로 항상 새로운 활력(“성령의 성전인 교회”)을 얻는다. 따라서 교회는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이다. 다시 말해서 치프리아노가 표현한 것처럼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4항)이다.
5항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설립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는 어느 한 순간의 법적인 결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함께 시작되어 그분의 활동, 죽음, 성령 강림에 이르는 포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설립되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교회 역시 그런 긴장을 지니고 있다. 즉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에 불과하며, “조금씩 자라나는 동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분투하며, 온 힘을 다하여 자기 임금님과 영광스럽게 결합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
6항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표상(表象)들, 이를테면 “양 우리”, “양떼”, “하느님의 밭”, “하느님의 집”, “하늘의 예루살렘”이 설명과 함께 열거된다. 7항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다른 표상들과 구분해서 다룸으로써 이 표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해서 세 가지 사항, 곧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간의 일치, 지체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다룬다.
8항은 신비로 가득 찬 비가시적인 교회와 가시적 교회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에 대해서 서술한다.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교회를 인간적, 신적 요소의 복합체로 묘사한 다음에 3가지 중요한 사항이 언급된다.
① 성령-교회의 관계를 하느님의 말씀-그분의 인성(人性)의 관계와 유비적으로 고찰한다.
②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여기서 ‘이다’(esse)가 아니라 ‘존재한다’(subsistere)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오랜 토론 끝에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를 통해서 공의회 교부들은 한 편으로 근본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신 바로 그 교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③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淨化)되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으로 인해서 거룩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 인간적, 지상적 요소로 말미암아 생기는 죄와 잘못으로 말미암아 항상 정화되어야하고 참회와 쇄신이 필요하다. 여기서도 ‘개혁한다’(reformare)가 아니라 ‘정화한다’(purificare)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이는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에 근접하면서도 분명히 그들과 구별을 두기 위해서였다.
제2장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목의 제2장은 교계제도를 다룬 제3장과 평신도를 다룬 제4장 앞에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를 통해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보다 우선해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특성이 묘사되었다. 이제 하느님의 백성이란 개념은 예전처럼 더 이상 교계에 속하지 않는 평신도들만을 아니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모두 포함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벨기에의 수에넨스 추기경은 교회헌장이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비전 안에서 정의하고 있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목적은 세례성사의 우위성을 제일 먼저 부각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근본적인 평등을 부르짖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헌장의 이 같은 비전은 소위 ‘피라미드식’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타파하녀는 데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성직계급은 피라미드식의 계급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심장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음을 천명하게 되었다. 이 같은 비전은 딱딱한 법적인 성격을 털어버리고 보다 복음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위계제도의 역할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9항: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하느님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백성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처럼 교회도 하느님의 백성이고 메시아 백성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다.” 이 백성은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자유”를 지니고, “사랑의 새 계명을 그 법으로”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교회는 이 나라의 표징, 곧 전 인류를 위한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튼튼한 싹”이고 그 자체로서 “모든 사람과 개인의 구원을 이룩하는 일치의 볼 수 있는 성사”다(1항 참조).
10항: 이미 이스라엘이 보여주듯이 하느님 백성은 사제적 백성이다. 신자들 모두는 “보편 사제직”에 참여한다. 하지만 보편 사제직은 직무 사제직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이 대답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따라서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의 위임을 받아서 수행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둘째,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셋째, 두 종류의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 본질적 차이는 기능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인 본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직무사제직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백성을 위해 성찬례를 거행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고, 보편사제직은 주로 이 성찬례와 다른 성사에 참여하면서 기도와 거룩한 삶을 사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11항: 사제적 백성은 무엇보다도 성사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을 나타낸다는 전제 하에 일곱 성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12항: 하느님의 백성은 또한 예언자적 백성이다. 여기서 예언자적 성격은 신앙인 전체가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성령께 도유를 받은 신자 전체는(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그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실제로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 그러므로 무류성은 우선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고유한 특성이고, 그 다음으로 교황직의 고유한 특성이다. 교황은 교회 ‘밖에서’ 그리고 교회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신자들은 교도권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그 인도를 받아야 한다.
13-16항: 하느님의 백성은 보편적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경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일치”를 이루는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은 “세계 평화를 예시하고 증진하므로 모든 사람이 이 일치로 부름을 받고 있다.”(13항) 이 하느님 백성의 가장 핵심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 공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이라고 천명하면서, 그들의 자격 요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다. 그러나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14항)
공의회는 이 정의를 통해서 트렌토 공의회 이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주장한 교회의 세 가지 외적인 요소들 앞뒤에 중요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첨부함으로써 사실상 그 한계를 극복한다. 즉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라는 외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영적인 요소가 첨부된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사랑 안에 교회의 품 안에 몸만 아니라 마음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의 배열 구조를 보면, 외적 요소들이 내적 요소들의 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성령(내적 요소) - 신앙고백, 성사, 교회 통치와의 유대(외적 요소), – 사랑 안에서 몸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교회와 함께 함(내적 요소)이라는 삼중 구조를 지닌다.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교회헌장」14항은 바로 예비신자들이 어떻게 교회에 속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명백한 의지”로 교회에 합체되기를 바라고, 이 소망 자체로 교회에 결합되며, 어머니인 교회는 이들을 “이미” 자기 자녀가 된 이들을 감싸 안는다고 선언한다. 바로 이런 교회 정의에 근거해서 외적으로는 교회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내적으로는 교회와 연관되어있고,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철저히 외적요소에 근거해서 가톨릭 신자들을 정의했던 피렌체 공의회와 트렌토 공의회와 차이가 난다.
공의회는 15-16항에서 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 타 종교인들, 그밖에 모든 인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 백성에 속한다고 천명한다(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주장과는 다르다). 여러 민족들이 하느님 백성에 ‘단계적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생각은「교회헌장」의 배경에 있는 전체 신학의 결정적인 점이다. 하느님 백성에 소속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 신자들 - 다른 그리스도교인들 - 유다인 - 회교도 -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이들’ -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외적으로는 교회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내적으로는 교회와 연관되어있고, 그래서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선교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로마 1,21.25 참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과 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증진하고자,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선교 촉진에 진력하고 있다.”(16항)
제3장: 교회의 위계 조직, 특히 주교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위계 제도가 과거처럼 결코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한가운데에서 교회에 봉사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런 가운데 교회 직무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드러난다. 또한 19세기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교황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기가 마련된다.
18-20항: 교회 직무는 전체적으로 목자의 직무로 이해된다(18항) 그리스도는 열두 사도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목자의 직무를 맡겼다(19항). 그리고 이 직무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세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한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참조)”(20항)
21항: 주교직의 성사성
트렌토 공의회는 사제품을 성품성사의 최고 단계로 간주하였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직에서 성품성사의 충만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가르침은 성품성사를 보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인한다. 중세 스콜라 신학은 물론 트렌토 공의회도 성품성사를 전적으로 미사성제의 관점에서 보았고, 미사성제의 측면에서 사제와 주교는 같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서 주교직의 성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품성사를 포괄적인 관점에서, 즉 목자의 직무 관점에서 보는데, 이 직무와 관련해서 주교는 신부보다 더 크고 높은 권한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천명함으로써 주교직의 성사성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주교 축성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축성권), 가르치는 임무(교도권)와 다스리는 임무(재치권)를 수여하는데, 물론 이 임무는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 이로써 과거에 있었던 축성권과 재치권의 분리는 극복되고, 재치권은 교황으로부터 직접 수여된다는 생각이 공의회에 의해 거부된다.
22-24항: 주교들의 단체성
공의회는 주교직의 성사성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동시에 주교들의 단체성(團體性)이란 주제를 발전시켰다. 즉 주교는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교황을 단장으로 하는 주교단과 교계적인 친교를 갖게 된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주교는 누구나 성사적 축성의 힘으로 또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구성원이 된다.”(22항)
주교들의 단체성은 주교단의 단장인 로마의 주교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동시에 그 단장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든 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온전히 유지된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22항) 마지막 구절은 수위권에 대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단의 단체성을 인정하면서도 제1차 교황의 수위권을 전적으로 옹호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완전한 권한을 지닌 최고 대표자가 둘이 있는데, (교황과 함께 하는) 주교단 그리고 교황이다.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 통치에서 사도단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22항) 교회의 또 다른 최고 대표자인 교황은 항상 무제한의 권한을 지닌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주교단 전체나 혹은 대표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과 공동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교회헌장」제3장에 대한 “사전 설명 주석”(Nota explicativa praevia)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양 떼 전체를 돌보는 일이 교황에게 맡겨져 있으므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변천하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개인적인 방식으로든 합의체적인 방식으로든 이 사목의 실행에 알맞은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교황의 판단에 달려 있다. 교황은 교회의 선익을 고려하여 자기 재량에 따라 합의체적 사목 수행을 조정하고 증진하고 승인하는 것이다. 교황은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자신의 임무가 요구하는 대로 언제나 자기 뜻대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24항은 주교의 직무가 근본적으로 봉사 직무라는 것을 역설하고, 이어서 세 가지 주요 직무, 즉 교도직, 성화직, 통치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5항은 주교의 가르치는 직무에 대해 설명한다. 주교들의 주요 임무들 중의 첫째는 복음 선포로서, 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에게 믿고 살아가야 할 신앙을 선포하고, 계시의 곳간에서 새 것과 옛 것을 꺼내어(마태 13,52 참조) 성령의 빛으로 밝혀 주며, 그 신앙이 열매를 맺게 하고, 자기 양떼를 위협하는 오류를 경계하여 막는다(2티모 4,1-4 참조).” 신자들은 “주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린 신앙과 도덕에 관한 판단”에 대해 “성실한 존경심”으로 응해야 한다.
26항은 주교의 거룩하게 하는 임무에 대해 설명한다. 주교는 “특히 성찬례 안에서 ‘최고 사제직의 은총의 관리자’”가 되며, “자기 권위로 정규적이고 효과적인 분배를 규정한 성사들을 통하여 신자들을 거룩하게”하는 임무를 지닌다. 27항에 따르면 주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지닌다. 그 권한은, 비록 그 행사가 최종적으로는 교황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성품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통상적이며 직접적으로” 받은 것임을 밝힌다. 이로써 지역교회들을 보편교회의 하부 부서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 방지된다.
28항: 신부들
신부는 성품성사를 통해 주교의 사제직과 사명에 참여하게도록 축성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들은 직무의 행사에서 주교들에게 의존해있다. 즉 신부들은 주교의 협조자로서,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일부분 받아들여 일상 사목을 수행한다.
29항 부제들
부제들은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 안수를 받는다. 공의회는 사제직의 전 단계로서의 부제직만이 아니라 “교계의 고유하고 영구적인 품계로서 복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종신 부제직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제4장: 평신도
평신도는 교회에 필수적이다(30항). 그들은 세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되고, 그들에게는 “세속적 성격”이 고유한 점이다(31.36항). 교회의 모든 지체 사이에는 “진정한 동등성”이 있고(32항), 평신도의 사도직은 교회의 구원 사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교계 사도직과 협조 관계에 있으면서 구분된다.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가 오로지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장소와 환경 안에서 교회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33항)
34-36항: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을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제직을 수행한다. 즉 그들은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을 “성령 안에서” 행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 냄으로써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제물이 되고(1베드 2.5 참조), 성찬례 거행 때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34항). 또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하여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복음의 힘이 빛나게”하는 사명을 지니는데, 이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 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곧 “굳건한 믿음과 바람으로 현재의 기회를 잘 살려 나가는” 삶, “세속의 일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을 통한” 복음 선포, 특별히 성사로 거룩하게 된 혼인과 가정생활이 그것이다(35항). 그리고 평신도들은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왕직에도 참여하는데, 이를 통해서 그들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는 데에 동참한다. “세상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들어 정의와 사랑과 평화 속에서 그 목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하게” 하는 데에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의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36항).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 보화에서 특히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들의 도움을 거룩한 목자들에게 풍부히 받을 권리가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들과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에게 맞갖은 자유와 신뢰로, 자기들의 필요와 소원을 목자들에게 표명하여야 한다. 평신도들은 그들이 갖춘 지식과 능력과 덕망에 따라 교회의 선익에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밝힐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까지도 지닌다. 그럴 경우에는 교회가 그 목적으로 설립한 기구들을 통하여 언제나 솔직하고 대담하고 지혜롭게 자기 의견을 밝혀야 하며, 거룩한 임무의 수행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지녀야 한다.”(37항)
제5장: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
이 장은 의도적으로 수도자에 대한 장(제 6장) 앞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교회 내의 특별한 집단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성화 성소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39항: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모든 신앙인들이 성화의 소명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화 성소는 더 이상 성직자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40-41항: 성화 성소의 보편성에 상응해서 산상 수훈은 단지 수도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된다. 하지만 성화 성소의 보편성 안에는 상당히 다양한 은총의 선물, 카리스마가 있다.
42항: 성화의 내적인 본질은 사랑으로서, 그 사랑은 복음 삼덕의 길을 가능케 한다.
제6장: 수도자
43-45항: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중간 신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복음 삼덕과 서원으로 규정된다. 수도자의 삶은 교회에 전적으로 귀속되어 있고, 그들의 특성은 표징의 영역에 놓여 있다. 수도자들은 교회가 현세에 머무르지 않음을 자신들의 실존을 통해 보여준다. 즉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천상 보화를 모든 신자들에게 보여 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며, 미래의 부활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예고”(44항)하여 주는 이들이다. 교계 제도는 수도자의 삶을 인도한다.
46항: 서원과 함께 부여된 포기는 인간의 참된 성장에 배치되지 않는다.
제7장: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그리고 천상 교회와 그 일치
이 장은 특별히 교황 요한 23세가 삽입하기를 원하였던 장인데, 이 장은 지상 교회의 동적인 성격과 - 승전주의적 교회관에 반대해서- 지상 교회의 완성이 미래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48항: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 안에서 이미 세기의 종말이 현존하고, 세상의 쇄신도 결정적으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게나마 참된 성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동시에 “여정(旅程)의” 교회로서 지나갈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탄식과 산고를 겪고 있다.
49-51항: 세상의 종말까지 “여정”의 교회, 단련의 교회, 개선의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일치를 이루는데, 이 일치는 구체적으로 죽은 후에 단련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 그리고 개선한 이들에 대한 공경과 그들의 전구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 하지만 이런 신심에서 남용과 지나침은 피해야 한다.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모친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마지막 장은 마리아에 관한 것인데, 오랜 토론 끝에 첨가되었는데, 이 토론은 마리아가 교회 밖에 위치하느냐 아니면 교회 안에 위치하느냐에 초점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공의회는 마리아를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 보기로 결정하였고, 그래서 마리아에 관한 발언을 교회 헌장의 마지막 장에 첨가하였다.
제 8장의 본문은 우선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몸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강조한다(53항). 이어서 여러 관점에서 마리아에 대해 언급한다.
① 구원 경륜 속에서의 마리아: 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마리아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능동적인 수용의 자세로 하느님 말씀에 동의하였고, 따라서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 이런 신앙과 순종의 자세는 예수님이 공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여러 가지 행동에서도 견지된다(57-59항).
② 마리아와 그리스도: 마리아는 신적인 구세주의 숭고한 모친으로서 모든 신앙인들을 위해 어머니로서의 과제를 지닌다(61-63항).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셨던 마리아는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61항) 공의회는 오랜 토론 끝에 마리아가 “당신의 수 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고 천명하면서 그분에게 중개자라는 칭호를 드리는 데, 이 칭호는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등과 같은 등급으로 사용된다(62항). 동시에 공의회는 마리아의 중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에 종속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③ 마리아와 교회: 마리아는 그녀의 신앙과 사랑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교회의 전형(典型)이고 동정녀와 어머니의 원형이다(63항). 교회 스스로 - 마리아를 통해서 볼 때 - 어머니이며 동정녀이다(64항).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는 아직 여정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완덕의 모범이 되시고, “구원의 역사 속에 깊이 참여하시므로 신앙의 최대 요소(신비)들을 어떤 의미로 자기 안에 종합하여 반영하신다.”(65항)
④ 마리아 공경: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오랜 옛적부터 특별한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66항). 성모 공경에 있어서 “어느 모로든 온갖 거짓 과장이나 지나치게 협착한 마음을” 피해야만 한다(67항).
⑤ 마리아와 지상 여정의 교회: 마리아는 나그네 길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확실한 희망이며 위로의 표지이다(68항).
3 조직신학적 고찰
3.1. 교회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 제1장에서 교회를 신비로 규정하면서 한 가지 개념이 아니라 서로 수정, 보완해주는 다양한 표상과 개념, 곧 성사,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친교 등으로 설명한다.
3.1.1. 삼위일체의 모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공동체’(congregtio fidelium)라는 것은 교회 역사를 전체에 걸쳐서 가장 일반적인 정의다. 교회의 이런 공동체성은 중세 이후에 교계제도적 측면이 강화되면서 다소 희미해졌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다시 전면에 부각되었다.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공의회는 이 공동체성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렇게 온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성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 하느님의 백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고 공의회 이후의 교회론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매우 강조되었다. 이 개념은 우선 교회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연속성을 잘 드러내준다. 구약의 백성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계약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자신을 새 계약에 의한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으며, 차츰차츰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 역사를 통하여 당신과 당신 계획을 드러내시며 그 백성을 당신 것으로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저 새롭고 완전한 계약,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전하여질 더욱 완전한 계시의 준비와 표상이 된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일원이 되는 것은 구약에서처럼 더 이상 육체적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남으로써’(요한 3,3-5), 곧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백성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선별된 사제적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듯이(탈출 19,5-6 참조)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도 하느님의 소유로서 사제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세례 받은 신자들 모두가 사제직을 지닌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와 구분되는 직무 사제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갖는 보편 사제직보다는 직무 사제직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런 경향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서서히 변화된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 자신의 회칙「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세주」(Miserentissimuns Redemptor) 에서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그런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직무 사제직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대두되자 교황 비오 12세는 자신의 회칙「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를 통해 직무 사제직을 고유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킨다. 교황은 “사제는 모든 지체들의 머리이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지만 신자들은 신적인 구세주를 대신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사제적 권한을 누리지 못한다.”고 천명한다(DH 3850). 하지만 교황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가 됨으로써 “그들 방식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DH 3852) 교황은 1954년 11월 2일자 훈화「주님을 찬양하라」에서 다시 한 번 이 주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베드로 1서 2장 5절, 9절에 의거해서 신자들이 그 나름의 존중받을 만한 사제직을 갖는다고 인정하고, 다른 한편 신자들의 사제직은 본래의 사제직과는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이런 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에 분명하게 반영된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히신 대사제 주 그리스도께서는(히브 5,1-5) 새 백성이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셨다’(묵시 1,6; 5,9-10 참조). 세례 받은 사람들은 새로 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신령한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신령한 제사를 바치며 그들을 어두운 데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불러주신 분의 능력을 선포한다(1베드 2,4-1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며(사도 2,42-47 참조),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로마 12,1 참조)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힘차게 증언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주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이렇게 모든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근거로 보편 사제직에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보편 사제직은 성품성사에 근거한 직무적 또는 교계적인 사제직과는 분명히 다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두 사제직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동시에 본질적인 차이를 확인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두 사제직은 “그 하나하나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직무 사제는 참으로 그가 지닌 거룩한 힘으로 사제다운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며, 성찬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행하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다.” 직무사제직의 본질은 성품성사를 통해 받은 거룩한 힘으로 말씀 선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 그들을 위해 성찬례를 거행하는 데에 있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주로 성체성사와 다른 성사에 참여하고 감사와 기도를 드리면서 거룩한 삶과 극기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성원 모두 평등한 관계를 이루었다.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른 그리스도와 세례성사를 통해 친교를 이루는 신자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이며(요한 15,14-1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들이 된다(마르 3,35). 시나이 산에서 모세 홀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백성들은 뒤에 머물러 있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하느님 백성에 속한 이들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께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로마 8,14-15; 2코린 2,12-18 참조).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메시아 백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 그 신분으로서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자유를 지닌다.”고 천명한다. 물론 하느님 백성의 평등성은 교계제도의 중요성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평신도와 교회의 교계제도가 마치 대립관계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그네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교회도 그리스도가 열어놓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다. 즉 성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생겨난 교회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 하느님 백성은 자신이 유래한 근원, 본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히브 11,14 참조) 순례하는 교회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러나 정의가 깃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2베드 3,13 참조), 순례하는 교회는 자신의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이 시대에 딸린 제도 안에서 지나갈 이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아직까지 신음하고 진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로마 8,19-22 참조).” “이 종말론적 특성은 모든 교회적 실재의 잠정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즉 교회는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와 달리 근본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항상 쇄신되고 정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늘나라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그 씨앗의 형태에 불과하고, ‘계시되었으나 십자가로써 가려져 있는 하늘나라’, ‘신비 안에 현존하는’ 하늘나라일 뿐이다(교회헌장 3항). ‘이미’ 받은 선물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모든 것의 약속 사이에 놓여 있는 교회는 지상의 순례 여정을 지속하는 동안에 천상 교회와 나누는 친교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하늘나라의 최종 완성을 향해 성장해 나간다.”
2)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하느님 백성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도 하다. ‘하느님 백성’이란 개념은 교회와 이스라엘과의 연속성, 곧 교회의 구약적인 요소를 가리킨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교회의 신약적인 요소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할 때,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깊은 친교를 부각시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과 깊은 친교를 이루셨다. 그분은 열두 사도를 뽑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당신 사명에 참여시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갖게 하셨다.”(마르 3,14-15). 또한 제자들을 당신의 수난과 영광에도 참여시켜 주신다(루카 22,28-30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비롭고도 실제적인 친교를 예고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예수님은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 종말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마태 28,30 참조), 그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대로(요한 14,18 참조)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요한 20,22; 사도 2,33 참조),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신다. 이로써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제자들과 이루시던 친교가 부활 이후에도 성령을 통해 계속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 신자들 서로 하나가 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교회헌장은 예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불러 모으신 당신 형제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신비로이 당신의 몸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얼마나 뗄 수 없이 밀접한가를 잘 드러낸다.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 주위에 모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 그분 안에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는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이루는 모든 지체 간의 일치,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인 교회다.
① 지체들 간의 일치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실제로 결합”됨으로써 서로 한 몸을 이룬다. 즉 세례성사를 통하여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된(로마 6,4-5 참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모든 차별을 극복하고 한 몸이 된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1코린 12,13 참조) 그리고 세례 받은 이들은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 서로간의 일치가 더욱 견고하게 된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6-17) 세례성사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일치, 한 몸을 이룬 지체들 간의 일치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현하고 강화되는 것이다. “성찬의 빵을 나누어 먹으며 실제로 주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또 우리 사이에 친교를 이루도록 들어 높여진다.” 따라서 성찬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가장 잘 드러난다.
하나의 몸처럼 단일한 교회는 다양성을 없애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도 다양한 지체가 속해 있듯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도 다양한 지체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에도 지체들이 서로 다르고 그 직무가 서로 다른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다. 그 성령께서 당신의 풍요와 직무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선물을 교회에 유익하도록 나누어 주신다(1코린 12,1-11 참조).” “실제로 하느님 백성의 지체들 사이에는 다양성이 있다. 직무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자기 형제들의 선익을 위하여 거룩한 봉사 직무를 수행하며, 신분과 생활양식에 따라 많은 이들은 수도 생활 속에서 더 좁은 길로 성덕을 추구하며 형제들을 자신의 모범으로 격려한다.”
또한 같은 성령께서는 지체들이 다양성으로 인해서 갈등과 분열로 빠지지 않고 일치를 이루도록 인도해주신다. “그 성령께서는 친히 당신의 힘으로 또 지체들의 내적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고 신자들 가운데에서 사랑을 일으키시고 재촉하신다.” 이렇게 교회는 많은 신앙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몸으로서, 이 몸의 지체들은 하나의 영 안에서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위해 있다(로마 12,5; 1코린 12,12-13.27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성령을 통해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닮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동등한 세 위격으로서 서로 구별되지만 상호 관련된 방식 안에서 하나의 구원 사명을 공유하는 사랑의 친교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또한 다양하지만 상호 관련된 방식으로 같은 사명에 참여하는 동등한 인격체들의 친교이다.
②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콜로 1,18)이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으로서, 만물의 으뜸이 되신(콜로 1,15-18 참조) 후에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당신의 통치권을 만물 위에 펼치신다(에페 1,22-23 참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모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자신들 안에 형성될 수 있도록(갈라 4,19) 그분을 닮으려 애써야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지체들도 머리이신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필립 3,21; 2티모 2,11; 에페 2,6; 콜로 2,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지체들이 당신을 향하여 자라나도록 도와주신다. 그분은 자신의 은총을 지체들에게 나누어 주시어 하느님의 뜻대로 성장하도록 돌보신다. “온몸은 이 머리로부터 관절과 인대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잘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라는 것입니다.”(콜로 2,19) 즉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봉사 직무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주셔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서로 돕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그리스도’(Christus touts)가 된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머리와 지체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체인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현존한다(에페 1,22-23; 4,7-16; 5,21-33; 골로 1,18; 2,19). 그러므로 교회는 현양된 그리스도의 지상적 몸이다.
③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인 교회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뗄 수 없는 일치의 관계를 머리와 지체의 관계로 표현한다. 다른 한 편 둘 사이의 구별은 신랑과 신부의 비유로 표현된다.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였다(특히 에제 16; 23; 광의로 예레 2,2; 3,1-2; 이사 62,4-5; 호세 2,4-22; 9,1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이라는 주제는 예언자들에 의해 마련되었고,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선포되었으며(요한 3,29 참조), 마침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신랑”(마르 2,19)이라고 하셨다. 신약성경의 다른 대목에서도 이런 비유는 계속된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와 각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오직 하나가 되기로 ‘약혼한 순결한 처녀’라고 표현한다(1코린 6,15-17; 2코린 11,2 참조). 에페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거룩하게 흠 없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에페 5,25-27). 그러므로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머리와 지체의 비유를 통해서 일치와 친교의 측면을, 신랑과 신부의 비유를 통해서 구별과 순종의 측면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3) 성령의 성전
교회의 시작에 함께 하신 성령은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마치 인체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이 교회의 영적 생명 원리로 작용하신다. 교회는 성령의 작용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일치하고, 지체들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된다. “머리와 지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한 분이신 똑같은 성령께서는 온 몸에 생명을 주시고 온 몸을 일치시키시고 움직이신다. 그래서 거룩한 교부들은 성령의 임무를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인체 안에서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었다.” 또한 성령은 주교를 중심으로 모인 지역교회에도 작용하며 지역 교회들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이렇게 교회의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은 또한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그리고 바로 성전인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1코린 3,16; 6,19 참조),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여 주신다(갈라 4,6; 로마 8,15-16.26 참조).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참조)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에페 4,11-12; 1코린 12,4; 갈라 5,22 참조). 복음의 힘으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신다.”
교회의 제도와 구조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성령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성령에 순종하고 봉사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적 조직도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봉사하며 그 몸을 자라게 한다(에페 4,16 참조).” 성령께서는 “교회의 필요에 매우 적합하고 유익한” 여러 가지 은사(카리스마)들을 통하여 교회를 기르시므로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들도 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은사 사용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평신도들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주신다(1코린 12, 7 참조) ... 아주 단순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은사를 받았으므로 모든 신자들에게는 교회와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과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이 은사를 사용할 권리와 의무가 생긴다. 그러나 이 은사는 ‘불고 싶으신 대로 부시는’(요한 3,8) 성령의 자유로운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특히 자기 목자들과 일치를 이루며 사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사의 순수성과 올바른 사용에 대한 판단은 목자가 할 일이다. 이 판단은 성령의 불을 꺼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보존하려는 것이다(1테살 5,12; 19,21 참조).” 목자들은 모든 은사가 그 다양성을 살리면서 서로 보완하는 가운데 “공동의 이익”(1코린 12,7)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3.1.2. 구원의 성사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유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부의 보편적 구원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생겨나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그분과의 친교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에 파견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할 사명, 세상 구원에 봉사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거짓 그리고 폭력의 세계에로부터 이끌어내어 온 세상의 구원에 봉사하도록 선택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선택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았고, 구원된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느님의 선택에 응답해서 세상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교회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메시아 백성은 비록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지도 못하고 가끔 작은 무리로 보이지만, 온 인류를 위하여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튼튼한 싹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친교를 이루도록 세우신 이 백성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세상의 빛으로서 땅의 소금으로서(마태 5,13-16 참조) 온 세상에 파견하신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계속 수행하는 공동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자기이해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종속해 있으며,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로마서와 고린토 전서는, 지역교회는 여러 지체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일치로 인도된다고 증언한다. 또한 에페소서와 필레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를 이룬다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목자요, 신랑이고, 포도밭 주인, 건축자라는 얘기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살아가는 가시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전달한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자신의 표지와 도구로 만들어서 세상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사용하신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聖事= 비가시적 하느님의 은총의 가시적 표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교회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본 공의회는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하지만 교회가 예수의 구원사업을 계속하는 성사라고 해서 교회가 예수님과 동일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표지와 성사가 된다는 것은 오로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힘에 의한 것이다. 교회가 구원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안에서 교회의 위치는 처음부터 상대적이고 임시적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도구이며, 자신이 이미 받은 것을 계속 전달할 뿐이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인류의 최종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도구로서, 세상을 위한 “구원의 보편 성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원의 성사’라는 자신의 본질을 세 가지 방식으로 실현한다. 말씀 선포, 하느님께 대한 공적인 경신례인 전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은총을 전달하는 성사를 거행하며, 사랑의 봉사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상에 전한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세 가지 교회의 사명들 중에서 전례에 역점을 두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이전에 우선 말씀을 듣고,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기 전에 그에 필요한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례, 특히 성찬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전례헌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어 온다.” 교회는 일곱 성사들 중의 으뜸인 성체성사를 통해서 자신이 이미 받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그 은총의 힘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전하며 실현한다.
3.2. 교회의 본질적 특성
381년의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DH 150)라고 고백하였다. 그 이후로 이 고백에 근거한 단일성(單一性)․성성(聖性)․보편성(普遍性)․사도성(使徒性)은 참 교회를 나타내는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종교개혁’ 시대에 참된 교회의 특징에 대한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된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뚜렷이 고수하였고, 그런 점에서 참 교회의 네 가지 전형적인 속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다른 특성을 더 강조하였다. 즉, 복음이 순수하게 가르쳐지고 성사가 바르게 집전되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530년의 루터파 신앙고백인『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7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바이다. 항상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가 존재하고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런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의 모임으로서, 여기에서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거룩한 성사들이 올바르게 집전된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교회(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3)와 성공회(「영국교회의 종교 강령」제19항, 1562)도 이와 비슷하게 가르쳤다.
가톨릭 신학은 이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성경에 맞는 복음 설교와 올바른 성사 집전 없이 참 교회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두 가지 특징만으로 참 교회를 식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예를 들어서 이 두 기준에 근거해서는 열광주의를 거슬러 대항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열광주의자가 자랑했던 것이 순수한 복음 선포와 올바른 성사 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기준에서는 없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 네 가지 전형적인 교회의 특성을 계속 고수한다. 대표적으로『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분가분의 관계인 이 네 속성들은 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 속성들은 교회가 스스로 지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되도록 해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이 특성들 하나하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네 속성을 지닌 참된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선언을 실제의 교회 모습과 비교해보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나의 교회는 역사가 흐르면서 분열을 거듭하였다. 대표적으로 1054년의 동․서방 교회의 분열,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열이 그것이다. 교회의 단일성만이 아니라 거룩함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죄가 거룩함을 덮고 있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 ‘가톨릭’이란 단어는 본래의 의미대로 ‘보편적’이기보다는 동방교회, 프로테스탄트와 구분되는 하나의 교파적 특징처럼 비추어진다. 사도성이라는 말은 교회의 사도적 근원을 뜻하기 보다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계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는 가톨릭교회가 여전히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2.1. 교회는 하나다.
1) 일치의 기원
교회는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 기원상 하나다. 하나의 교회, 교회 일치의 “최고 표본과 최고 원리는 삼위의 일치, 곧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일치이다.” 또한 교회는 그 설립자인 성자에 근거해서도 하나다. “강생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님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의 ‘영혼’인 성령에 근거해서도 하나다. “믿은 이들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가득 채우시고 다스리시어 신자들의 저 놀라운 친교를 이루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합시키시어,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다.
교회가 하나라고 할 때 이는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고 다양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인 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풍부한 다양성과 더불어”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 다양성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다양성과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다양성에서 동시에 연유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 안에 존재하신다. 한분이신 그리스도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2,12-13; 10,16-17 참조). 한 분이신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선사하신다(1코린 12,2-10. 28 참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 지체로 이루어졌고, 성령께서는 그에 맞게 다양한 은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교회 구조 역시 하나인 가운데 다양성을 지닌다. 초대교회부터 하나의 교회는 다양한 지역교회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또한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교회는 그 기원으로부터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고 있고, 그것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세상과 역사에서는 일치의 이름으로 정치적, 군사적, 기술적 수단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획일화로 흐르거나, 다양성의 이름으로 구심점이 없는 분열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에 기원을 두는 교회는 이런 양 극단을 피하고 각자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를 세상에 등장하게 한 성령 강림사건에서 사도들의 말을 군중들이 각자 자기 말로 알아들은 사건은 이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성령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교회에 선사해주신다.
그러나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성령의 선물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서열 다툼(마태 20,20-24 참조), 할례 문제로 야기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와의 논쟁(갈라 2,11-14 참조), 전교 여행에서 마르코의 동행 문제로 일어난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갈등과 분열(사도 15,37-39 참조), 지역 교회 안에서의 파당과 분쟁(1코린 1,10-17 참조) 등이 단적인 예다. 이미 예수님은 최후만찬 석상에서 제자들, 즉 교회의 초석이 될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또한 제자들의 말을 믿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 즉 미래의 교회의 구성원들도 하나가 되기를 성부께 간청하셨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 사도 바오로 역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사람의 몸이 하나이면서도 여러 지체를 지니고 있듯이 교회도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1코린 12,12-31 참조). 또한 에페소서의 저자는 평화와 일치를 이룩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에페 2,11-22 참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3)라고 권고한다. 일치를 보존하게 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이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콜로 3,14)이기 때문이다.
2) 일치의 가시적인 끈들
순례하는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가시적이다. 교회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므로 교회의 일치는 사랑과 더불어 “가시적인 친교의 끈들”로 보장되는데, 그것은 세 가지로서,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한 신앙에 대한 고백, 하느님께 대한 예배의 공동 거행, 특히 성사의 공동 거행, 하느님 가족의 형제적 화목을 유지해 주는 성품성사를 통한 사도적 계승”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이다.
여기서 교회 통치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정점이 되는 주교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목을 맡기셨고(요한 21,17 참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교회의 전파와 통치를 위임하셨으며(마태 28,18 이하 참조), 교회를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1티모 3,15 참조). 이 교회(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확인하면서 베드로의 교좌가 교회 일치의 근원과 토대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복된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 앞에 세우시고 베드로 안에 신앙의 일치와 친교의 영속적이고 가시적인 근원과 토대를 마련하셨다.” 또한 공의회는 이 일치가 다양성을 해치는 일치가 아니라는 점도 확인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
3) 단일성의 상처
교회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들의 죄에서 생겨난 분열로 인해서 상처를 입었다.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 후세기에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열을 초래한 이들의 잘못을 분명히 언급한다. 하지만 그 분열로 인해 생겨난 교회들과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형제’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와 그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친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교리나 때로는 규율 문제에서 또는 교회의 조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 완전한 교회 일치에 적지 않은 장애가, 때로는 중대한 장애가 가로 놓여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부분적인 일치가 보존되어 있다. 과거의 분열에서 유래된 “공동체 안에서 지금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안는다.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세례 때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가시적인 울타리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들은 “기록된 하느님 말씀, 은총의 생활, 믿음, 바람, 사랑, 성령의 다른 내적 선물과 가시적 요소들”이다. 따라서 갈라진 교회들과 교회공동체들은 비록 결함은 있지만, 구원에 유익한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데, 그 힘은 그리스도께서 가톨릭 교회에 맡기신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온다. 공의회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게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보편적(가톨릭)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고 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구원의 보편적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수단이 온갖 충만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앞장을 서는 한 사도단에 신약의 모든 보화를 맡기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지상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으며, 어느 모로든 이미 하느님 백성에 소속된 모든 이는 그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야 한다.”
4) 일치의 재건을 위한 노력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가 재건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당신 교회에 주신 일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그 일치가 가톨릭 교회 안에 있다고 우리는 믿으며 세상 종말까지 그 일치가 날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공의회는 “일치 회복은 신자이든 목자이든 온 교회의 관심사”라고 천명하면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일치 활동에 슬기롭게 참여하도록 권고한다.”
일치의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서 교회의 쇄신, 마음의 회개, 공동 기도, 형제적 상호 이해, 신자들과 특히 사제들에 대한 교회 일치 교육, 신학적 대화, 갈라진 형제들과 이루는 협력이 요구된다. 다른 한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려는 평화와 열망과 일치 운동이 아직 모든 곳에 파급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일치의 재건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것임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화해시키려는 이 거룩한 목표는 인간의 힘과 재능을 초월한다는 것을 공의회가 잘 알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성령의 능력에 모든 희망을 둔다.”
3.2.2. 교회는 거룩하다.
1) 거룩하고 죄스러운 교회
교회는 신경에서 자신을 거룩하다고 고백한다. 교회는 “거룩하신 분”(루카 1,35)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함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거룩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으며(에페 5,25-26 참조),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지체인 교회 역시 거룩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그 구성원들은 “성도(聖徒)”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분을 통하여 성화된 교회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성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특별히 성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거룩하게 살아간 이들로서 교회의 거룩함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전반적인 교회의 현실은 교회가 거룩하다는 신경의 고백에 상응하기 보다는 오히려 배치된다는 인상을 준다. 교회 역사를 직시하면, 교회 안에서 많은 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교회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죄와 잘못만이 아니라 교회 직무자들이 공적으로 범한 죄(이를테면 십자군 운동, 이단자 박해, 마녀 사냥, 반 유다주의,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 등)가 수없이 많다. 단테(+1321)는 교회의 죄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을 개선차(凱旋車)에 바빌론의 창부(娼婦)가 타고 있는 환상으로 묘사하였고, 13세기 파리의 주교 기욤 도베르뉴(Guillaume d'Auvergnu)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더는 정배(正配)가 아니요, 흉측하고 야수적인 괴물이다.”
교회는 자신이 거룩하다고 고백하지만, 현실의 교회는 죄 많은 교회다. 이런 불편한 진실 앞에서 교회의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도피책들이 시도되었다. 우선 ‘거룩한’ 신자들에게서 죄스러운 신자들을 배제하려는 시도다. 고대에는 그노시스주의자들, 노바시아누스주의자들, 도나투스주의자들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중세에는 카타르파가, 근세 이후에는 여러 열광주의자들과 종파들이 죄지은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배척하고 죄 없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자들만이 교회 안에 남기를 바랐다. 교회 교도권은 이런 시도를 모두 거부하였다. 사실 거룩한 자만이 교회 안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거룩한’ 교회와 죄 많은 신자들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은 죄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시도는 강력하게 비판을 받는다. 교회를 그 구성원과 분리를 시켜서 교회 자체를 완전히 추상적으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체적 인간과 구분되는 이상적, 실체적 순수 실재가 아니라 믿는 인간들의 공동체다. 또한 이런 시도는 교회의 직무자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저지르는 죄를 간과한다. 교회는 그 구성원을 초월해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구성원들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다면,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자신이 죄스럽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칼 라너(+1984)는 교회의 외적인 모습은 거룩한 동시에 죄스럽다고 규정하지만, 거룩함과 죄스러움은 교회의 본질과 동일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죄는 교회 본질에 어긋나는 반면에 거룩함은 그 본질에 속한다. 교회의 거룩함과 죄악은 결코 동일한 양면이 아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빛이라면 죄스러움은 그늘이다. 죄악은 교회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침입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거와는 달리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은 죄스럽다’는 논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공의회는 거룩한 교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실상 죄스러운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였던 것이다. “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흠이 없으신’(히브 7,26) 그리스도께서 죄를 모르셨지만(2코린 5,21 참조) 오로지 백성들의 죄를 없애러 오셨으므로(히브 2,17 참조),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淨化)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 여기서 교회가 죄스럽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언제나 정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죄스럽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또한「교회 헌장」11항은 ‘신자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교회가 상처를 입었다.’고 말함으로써 교회 구성원들의 죄가 교회 자체에 손상을 입힌다는 것을 인정하였다.「일치 교령」 11항은 교회 분열에 가톨릭 교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 죄스러운 교회에 대한 발언은 “아직도 너무 망설인다고 할 정도”라는 인상을 준다.
가톨릭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교회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제삼천년기」는 교회가 참회하고 짊어져야 할 과거의 책임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교회 분열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일치를 저해한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갈라져 나간 교회만을 일방적으로 탓할 것이 아니라 분열에 대해 가톨릭 교회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 두 번째, 교회가 “특히 어떤 세기들에서, 진리에 봉사한다는 미명 아래 불용과 폭력 사용마저 묵인하였던 부분”을 분명하게 인정하였다. 국제신학위원회가 신앙 교리성의 승인을 얻어 발표된 문서「기억과 화해」에서도 교회의 참회가 필요한 네 가지 역사적 사례들을 열거된다.「제삼천년기」에서 언급된 두 가지 사항, 곧 그리스도인들의 분열과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에 대한 반성에 이어서 유다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편견과 불신, 적대 행위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현시대의 죄악으로서 종교적 무관심, 생명 의식의 결여, 세속주의 풍조, 윤리적 상대주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 등에 대한 그리스도인인 책임 문제가 거론된다. 2000년 대희년 사순 제1주일인 3월 12일 용서의 날 전례 중에 보편지향기도는 총 일곱 개의 항목에 걸쳐서 교회의 잘못이 열거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이 모두 거룩하고 죄 없는 인간들이라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에 거룩하다. 요셉 라칭거(교황 베네딕도 16세)는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한다. 신경에서 ‘거룩한’이라는 낱말은 “인간들의 성덕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인간의 부정(不淨) 한가운데 거룩함을 베푸는 신적 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하느님이 인간의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행사하는 저 성화(聖化)의 힘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일단 베푼 것은 도로 거두어들이지 않는 주님의 헌신으로 인해 교회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성화되는 교회, 그 안에 ‘주님의’ 거룩함이 인간세계에 임재하는 교회다. 그러나 사람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거룩함이고, 바로 이 거룩함이 역설적 사랑으로 해서 인간의 더러운 손을 그릇 삼아 담기는 것이다. 이 거룩함은 교회의 죄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이다.” 주님의 이런 역설적 사랑에 근거해서 교회의 역설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신의(信義)와 인간의 불충의 놀라운 배합이 교회 구조를 특징지으며 이것은 말하자면 은혜의 극적 형상이라 하겠다. 은혜의 현실은 이런 형태로 부당한 자에 대한 총애로서 역사 안에 계속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는 바로 거룩함과 거룩하지 못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신의 이런 역설적 구조로 해서 이 세상에서의 은혜의 형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교부들은 거룩하면서도 죄스러운 교회를 ‘거룩한 창녀’ 혹은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는 역설적인 말로 표현하였다. 후고 라너(H.Rahner)가 표현한대로 교회는 ‘인간의 약점 안에 하느님의 힘’으로서, 이런 교회를 수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신앙인 개개인의 결단에 달려있다.
2) 성화의 소명
교회가 거룩하다는 고백은 인간의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행사하시는 성화 행동에 대한 고백이다.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화되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주님의 성화 행동에 응답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에페 1,4 참조)한 사도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다.”
하느님의 성화 행동은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과 베푸는 성사를 통해 계속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불완전하고 죄스러운 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만, 그분의 능력의 말씀은 인간을 변화시켜 거룩하게 한다. 부당한 인간의 손으로 거행되는 성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은총은 효력을 발휘한다. 성사의 사효성, 곧 성사의 효력은 성사 집전자의 개인적인 성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사 거행 자체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은 죄스러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성사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에는 풍부한 “구원의 수단”들이 위탁되었고, 이것들을 통해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덕을 얻고 유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 안에서 의화되고, 믿음의 세례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살며 이미 받은 성덕을 보존하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 또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주님이 현존하시는 미사성제는 주님의 성화 행동이 탁월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렇게 크고 많은 구원의 수단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름을 받은 거룩함의 핵심은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도록(마르 12,30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도록(요한 13,34; 15,12 참조) 내적으로 그들을 움직이는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이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원수까지도 포함한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하여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분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여전히 유혹을 받고 있다. 교회에 주어진 거룩함은 교회를 자동적으로 죄 없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은 세례나 성체성사와 같은 외적 수단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거듭 새로이 죄스러운 과거를 벗어나 미래를, 즉 거룩함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거룩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선별된 공동체로서 세상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이 구별은 격리를 뜻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에서 선별되어 하느님께 속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다시 세상에 파견되어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일상생활 중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고 순종하면서 자기가 받은 사랑을 행동을 통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런 사명을 탁월하게 수행한 이들이 바로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성화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간 이들이다. 그들의 거룩한 삶은 “역사상의 구체적인 인간에게 이루어진 하느님 은총의 승리를 찬미하자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성화시켜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주는 표지가 된다.
3) 종말론적 전망
이미 본 고향에 이르러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있는 성인들은 지상에서 천상을 향해 나그넷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된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는 미래 도성을 찾으려는 새로운 동기로 자극을 받고(히브 13,14; 11,10 참조) 또한 동시에 현세의 변화 속에서도 각자 고유한 신분과 조건에 따라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 곧 성덕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을 배운다.”
모든 성인들 중에서 성모 마리아는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면서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시는 분, 곧 “교회의 전형”이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순례하는 교회에 성덕의 탁월한 모범이 되신다. “교회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완덕에 이르러 어떠한 티나 주름이 없이 서 있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눈을 들어 뽑힌 이들의 온 공동체에 덕행의 모범으로 빛나고 계시는 마리아를 바라본다.”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는 성모님은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분으로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교회의 영광스러운 미래는 이미 보증되어 있다. 물론 이런 보증은 그 미래를 위해 교회가 거듭 거룩해지려는 노력을 전제로 한다.
지상의 교회는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성인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친교를 이루고 있다. 우선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그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과 친교를 이룬다. 다른 한편, 천상의 성인들은 끊임없이 성부께 전구하여서 지상의 교회가 더욱 확실하게 성덕을 향해 정진하도록 돕는다. “천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더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온 교회를 성덕으로 더욱더 튼튼하게 강화하고,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존귀하게 만들며 교회의 더욱더 광범위한 건설에 여러 가지로 이바지하고 있다(1코린 12,12-27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면서 말씀과 성사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주님으로 인한 교회의 거룩함은 주님의 은총에 응답한 성인들을 통하여 빛난다. 특히 성모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이미 온전히 거룩하다. 이미 본향 이르러 영광을 누리는 성모님과 성인들은 본향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에게 종말론적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된다. 교회는 그들의 전구를 통해서 더욱 거룩해지도록 도움을 받는다. “교회는 하느님에 의하여 거룩한 존재로서 구별되어 있다 -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다. 교회는 항상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 이것은 회개와 쇄신에의 하느님의 요구다. 교회는 또한 항상 구별되어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충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이다.”
3.2.3. 교회는 보편되다
1) 보편된 교회
‘보편적’으로 해석되는 ‘가톨릭’(catholic)이란 낱말은 ‘전체적’ 또는 ‘온전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개념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10)에 의해 처음으로 교회에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는 주교의 개별교회와는 구별되는 온 교회,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 이런 점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167경) 순교록에서도 확인된다. “스미르나에 나그네로 사는 교회가, 필로멜리움에 나그네로 사는 하느님의 교회와 모든 곳에서 나그네로 사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katholikes ekklesias)의 모든 공동체에게.” 여기서도 ‘가톨릭’ 교회는 개별교회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전체 교회를 뜻한다.
개별교회는 주로 교구이며, 사도적 계승으로 서품된 그의 주교들과, 믿음과 성사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바로 이 개별 교회 안에서 보편 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공동체들이 가끔 작고 가난하거나 흩어져 살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며, 그분의 힘으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이루어진다.” 개별 교회가 보편된 교회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온 교회와의 친교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각 지역 교회도 온전히 교회이지만 그것이 온 교회는 아니다. 온 교회는 어디까지나 모든 지방 교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외적으로 집합․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주님․성령 안에서 같은 복음, 같은 세례와 성찬, 같은 신앙에 의해여 내적으로 일치된다. 전체교회는 지방교회들 안에서 발현․표현․실현되는 교회다.” 그러므로 개별 교회들은 “자체 안에 폐쇄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을 서로 개방하고 말씀의 공동 증거와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성찬의 공동성을 통해서 하나인 교회를 이룸으로써만 교회로 머물 수 있다. 신경의 옛 해설들을 보면 ‘보편된 교회’를 ‘제각기 자기 지방에서만’ 따로 존립함으로써 교회의 본성에 어긋나는 ‘교회들’에 대조시키고 있음이 산견(散見)된다.”
근원적으로 ‘보편적’이라는 말은 이단자들과는 달리 자신을 전체 교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 교회와 결합되어 있던 교회를 뜻하였다. 그런데 전체 교회와의 결합과 관련해서 특별히 로마 교회와의 결합이 중요하다. 가톨릭 교회는 이 결합의 결정(結晶)을 로마 주교좌에서 본다. “개별 교회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랑으로 가장 탁월한’ 로마 교회와 일치함으로써 온전히 보편된 교회가 된다.” 일찍이 리옹의 성 이레네오(+200)는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모든 교회가, 곧 모든 신자가 이 교회와 일치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앞선 이 교회의 기원 때문이다.” 또한 증거자 막시무스(+662)는 이렇게 말한다. “실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내려오신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는 여기(로마)에 있는 큰 교회가, 구세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지옥의 문이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는 유일한 기초라고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있다.”
교회가 보편성을 지니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소명과 사명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이고 유일한 이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처음에 인간 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하나로 모으고자 하신 하느님 뜻의 계획을 성취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을 돋보이게 꾸며 주는 이 보편성은 바로 주님의 선물이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는 온 인류가 그 모든 부요와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고 힘껏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갖고 전 인류에게 파견된다. 예수님은 어느 한 민족이나 계층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또한 그분의 “메시지 자체가 실로 보편적이었다(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니요 모세의 약속도 아니며, 신앙이요 회개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랑이다). 이 메시지를 바탕으로 초대교회는 어렵게나마 세계적 보편주의 사상에 이르러 유다인에게는 유다인처럼, 희랍인에게는 희랍인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에 성공했다(1코린 9,19-23 참조).” 이렇게 교회는 기원으로부터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 백성에게 국한된 민족 교회가 될 수 없다. 또한 어떤 특정한 문화(예컨대 비잔틴 문화)나 (상류든 하류든) 계급이나 인종(예컨대 백인종), 어느 한 시대나 시대정신에 종속된 교회가 될 수도 없다. “어떤 한 민족․문화․인종․계급․시대만을 기본으로 삼는 배타성은 결정적으로 보편성에 반하는 표징이다. 교회는 그 기원으로부터 세계적이다. 교회를 지탱하고 교회가 설교하는 메시지는 세계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과 문화, 인종과 계급, 시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온갖 경계를 부인하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극복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다.”
교회의 보편성은 다양성을 거부하지 않고 포함한다. 지역교회들만의 고유한 규율과 전례 예법, 신학적 - 영성적 전통 등의 풍부한 다양성은 “가릴 수 없는 교회의 보편성을 더욱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다양성을 살린다는 미명하에 교회의 본질이 포기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 본질의 불변성, 동일성을 기초로 한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충실히 보존한다는 전제 하에 교회의 세계적 확산, 큰 숫자, 문화적․사회적 다양성, 오랜 전통은 보편성의 증거와 표징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예루살렘의 치릴로 주교(+387)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 합니다. 교회가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교회는 땅 극변에서 극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산재해 있고, 보이는 것들이건 보이지 않는 것들이건, 천상적이건 지상적이건 간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교리를 보편적으로 또 빠짐없이 가르치며 귀족이건 평민이건, 지식 있는 사람이건 지식 없는 사람이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올바른 예배를 바치게 합니다. 또 교회는 육신과 영혼으로 범할 수 있는 온갖 죄악을 보편적으로 치료해 주고 낫게 해주며 또한 말과 행동에서의 온갖 덕행과 모든 종류의 영적 은총의 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이런 보편성은 필연적으로 선교를 요구한다. “ ‘구원의 보편 성사’가 되도록 하느님에게 파견된 교회는 그 고유한 보편성의 내적 요구에서 또 그 창립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
2) 가톨릭 교회와 비 가톨릭 그리스도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도 보편된 교회에로 불림을 받고 있으며, 이 교회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예시하고 증진하므로 모든 사람이 이 일치로 부름 받고 있다. 가톨릭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이든 모든 사람이 다 여러모로 이 일치에 소속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른다.”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합체된 이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이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 이들이다. 물론 이 결합은 몸으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마음도 함께 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와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가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특히 동방 교회들은 1054년 이래로 서방 교회와 분리되어 고유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 교회들과 맺는 친교는 매우 깊어서 “주님의 성찬을 공동으로 거행할 만한 완전성에 도달하기에 큰 부족함이 없다.” 그 교회들은 “참된 성사들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사도 계승의 힘으로 사제직과 성찬례를 지니고 있어 아직도 우리와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므로, 적절한 상황에서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지는 어떤 성사 교류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권장되는 것이다.”
중세 후기에 이른바 ‘종교 개혁’과 그 이후에 생겨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은 그 기원과 교리와 영성 생활의 차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 다를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도 다른 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들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는 일치의 시작이며 출발일 뿐 완성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간에는 세례를 통한 일치의 끈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완전한 신앙의 고백,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구원의 제도로 들어가는 완전한 합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성찬의 친교를 나눌 수가 없다.
3)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천명한다. 우선 공의회는 교회를 유다인들과 “정신적으로 결합시켜 주는 유대”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계약과 약속이 주어졌는데, “인성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서 태어나셨으며(로마 9,4-5 참조), 선택에 따라 보면 그 백성은 조상 덕택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소명을 다시 거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11,28-29 참조)”
공의회는 창조 신앙과 유일신 신앙에서 교회와 이슬람 교인들과의 관련을 인정한다. “구원의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이슬람 교인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그 외의 다른 종교와 교회와의 관련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근거해서 찾는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티모 2,4 참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공의회는 교회 밖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를 복음의 준비로 본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행동 양식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오류와 한계도 있다는 것도 지적한다.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더 섬기며(로마 1,21.25 참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선교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교부들은 교회를 홍수에서 유일하게 구해 주는 노아의 방주(1베드 3,20-21 참조)에 비유하면서, 구원을 위해서 가톨릭 교회에 속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4)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구원받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에 속해야 한다면,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는가?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대답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성경과 교회 전통을 살펴보면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방향이 발견된다. 하나는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라는 철저한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 신약성경 내에서 두 방향 사이의 긴장이 발견된다. 한 편에서는 무조건 “물과 영”(요한 3,5)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구원 가능성을 신앙과 세례와 밀접히 연결 짓는다(마르 16,16 참조). 다른 한편에서는 이방인 관리까지도 포함해서(1티모 2,1-3 참조) 모든 이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대한 언급과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마르 9,38) 사람들을 깎아 내리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가 전해진다. 또한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을 예식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웃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에 두는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 참조)이 언급된다.
교부시대에는 한 편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공리(公理)가 형성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된다. 예를 들어 히폴리투스의『사도전승』은 넓은 의미의 세례를 얘기한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체포되어 처형당한 예비자는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의화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기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유스티노(+ 165년경)는 소크라테스, 헤라클리투스 그리고 로고스에 상응하여 사는 동시대의 이방인들도 “두려움과 불안 없이”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컫는다.
중세에는 세상 전체(=유럽)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고 여겼고, 많은 이들이 ‘착한 비그리스도교인’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피렌체 공의회 (1438-1445)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전면 배제하였다. “거룩한 로마 교회는 다음 사항을 믿고 고백하며 선포한다. 가톨릭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이방인, 유다인, 이단자, 교회분열자 등-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마귀를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 속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DH 1351). 다른 한편, 스콜라 신학은 ‘세례에 대한 원의’(votum baptismi), 다시 말하면 화세(火洗)라는 이론을 근거로 세례 받지 않는 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비록 세례를 받고자하는 원의(화세)도 세례와 마찬가지로 의화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트렌토 공의회는 화세를 인정하지만(DH 1524), “세례 받는 것은 자유이다,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배격하였다(DH 1618).
근세 초기에 다른 대륙의 발견과 함께 유럽 이외에 있는 세례 받지 않은 민족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이는 우선 선교를 위한 엄청난 노력과 집단 세례의 계기가 되었다. 그 바탕에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 모두는 영원히 멸망한다는 확신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례에 대한 원의’(votum baptismi)가 ‘세례에 대한 함축적 원의’(votum implicitum baptismi)로 확장되었다. 1949년 교황 비오 12세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공리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여서 가톨릭 신자와 예비신자들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반대해서, 어떤 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무지 때문에 세례와 교회에 대한 열망을 (예비신자들처럼) 명시적으로가 아니라 ‘함축적’(implicitum)으로 갖고 있어도 구원될 수 있다고 공언하였다(DH 387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편으로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였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이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의 구원 가능성도 인정한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공의회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을 배타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도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는 왜 필요한가? 하느님의 은총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작용하고 있고, 그래서 교회 밖에서도 구원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교회헌장」16항에서 언급된 것처럼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빠지기 쉽고, 악의 세력에 속아서 허황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더 섬길(로마 1,21.25 참조) 가능성이 많다. 반면 교회를 통해서는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 하느님의 진리를 분명하게 보존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보편 성사’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이 교회 안에 들어섬으로써 이미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과 거행되는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그 뜻을 실천할 힘을 얻게 되어 더욱 확실하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한편으로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이가 교회에 입문하도록 선교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3.2.4.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1)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마르 3,13-14; 요한 20,21 참조) 증인들인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 위에 세워졌다. 사도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되고 파견되어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회적이며 반복 불가능하다. “그들은 모두가 어떤 모양으로든 주님을 죽었다가 살아난 분으로 체험했다. 부활한 주님의 직접목격은, 그것이 후대의 교회에서는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발현에 의하여 거듭 확인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의 전승에 의해서 거듭 선포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하나의 일회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사도들의 설교는 어느 시대에나 기준이 되는 본래적․기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그 일회성은 이후의 어떤 증언으로도 대치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교회의 후대 세대들은 항상 ‘사도적’ 초대 세대의 말씀과 증언과 봉사에 의존한다.” 이렇게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사도들의 증언과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지속되는 사도적 사명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것과 교회의 기초라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그들의 사명은 교회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세상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마태 28,19-20 참조).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그 신적 사명은 세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사도들이 전하여야 할 복음은 교회를 위하여 모든 시대에 모든 삶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보존하고 전한다.”
교회가 보존하고 전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유산, 말씀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원천적․기본적인, 따라서 모든 시대의 교회의 척도가 되는, 사도들의 증언이다.” 교회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주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물론 단순히 사도들의 말만을 들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주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이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 교회로서는 사도들을 거치지 않고 주님께 이를 길이 없다. ... 사도들의 본래적․기본적 증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설교하고 믿고 행동하는 교회의 존재의 근원이요 규범이다. 이 증언은 교회 안에서 거듭 재인식되면서 교회생활 전반에 실현되어야 한다.”
교회가 보존하고 전해야 하는 것은 신약성경 안에 담겨있는 사도들의 신앙과 증언이다. 사도적 계승은 성경을 “그저 하나의 책(교리서나 역사서나 법전)으로만 보지 않고, 오늘 여기서의 생생한 증언으로, 인간을 해방하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거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계승은 근본적으로 사도적 신앙과 고백의 전승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경전을 갖고 있지만, -이슬람과는 달리 - 문자에 매이는 ‘책의 종교’가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책에 적힌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책에 담긴 사도들의 신앙과 증언을 통해, 그리고 사도들 위해 세워진 교회의 신앙과 증언을 통해서 후대에 전달, 계승된다.
3) 사도적 직무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들의 사명을 계승한다. 이 사명은 전체 교회가 이어받는다.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선교에 의하여 모인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다. 온 교회가, 사도들의 기초공사에 의하여 지어진 성령의 궁전이다. 온 교회가, 사도들의 봉사에 의하여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들이 불러 모은 교회에 사도들의 전권적(全權的) 사명이 계승되어 있고, 사도들이 봉사한 교회에 사도들의 전권적 봉사가 계승되어 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전체 교회의 사도적 계승에는 주교직을 통한 사도의 직무의 계승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가르친다.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스(+101)는 사도들이 직무의 후계를 위한 분명한 규정을 남겼다고 증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증언에 의거해서 이렇게 선언한다.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자기 사후에도 지속되도록, 자신의 직접 협력자들에게, 일종의 유언 형식으로, 자기들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고 강화할 의무를 맡겼으며, 온 무리를 보살피라고 부탁하였으니, 성령께서는 그들을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은 후계자들을 세웠으며, 또 나중에 그들이 죽으면 다른 훌륭한 사람들이 그 직무를 받아들이도록 법규를 마련하여 주었다.”
가톨릭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바로 주교들이며, 이들을 통해서 사도의 직무가 전승된다고 가르친다. “이레네오 성인의 증언대로, 사도들이 주교로 세운 이들과 우리에게까지 이르는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사도전승이 온 세상에 천명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면,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에게 특별히 맡기시어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는 임무가 영속하듯이, 사도들의 교회 사목 임무도 영속하며 주교들의 거룩한 품계에서 끊임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가톨릭 교회의 이해에 따르면, 주교 직무를 통한 사도계승은 교회의 사도성을 보증한다. “전체 교회가 사도적인 이유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신앙과 생활에서 그 기원과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는 주교 축성을 통해서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함께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는데, “이 임무는 그 본질상 주교단의 단장과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
사도적 사명은 단지 주교만이 아니라 온 교회에 맡겨져 있기에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참여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으로 넓히기 위한 신비체의 모든 활동을 사도직”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전제 하에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사도직에 참여한다고 선언한다. “평신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결합에서 사도직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받는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결합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튼튼해진 평신도들은 바로 주님께 사도직을 받았다. 평신도들은 모든 활동을 통하여 영적 제물을 봉헌하며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왕다운 사제로, 거룩한 겨레로(1베드 2,4-10 참조) 축성되었다. 모든 사도직의 생명인 사랑은 성사 특히 성체성사로 전달되고 자라난다.”
교회의 단일성․성성․보편성․사도성은 교회가 스스로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의 교회가 그런 특성들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잘못과 죄로 인해서 이 특성들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심지어는 교회 내부에서도 참 교회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특성들은 “비단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교회에 주어진 은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교회의 책임수행에 의존하고 있는 교회의 중대한 과업이기도 하다.”
참 교회를 나타내는 네 가지 특성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시면서 이 특성들 하나하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고 도와주신다. 특별히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드는” 성찬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되도록 이끌어주신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교회의 네 가지 특성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성찬례는 교회의 일치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성찬례 중에 하나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례는 교회의 거룩함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성찬례 중에 부당한 인간의 손으로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교회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찬례는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성찬례 중에 보편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상징하는 교황을 위해서, 지역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상징하는 주교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 모든 이를 위한 기도가 바쳐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찬례는 교회의 사도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성찬례는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는 주교나 그의 협조자인 사제를 통해 봉헌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가 성찬례를 집전할 때 교회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천명한다. “주교가 자기 사제단과 성직자들과 더불어 주재하는 전례 거행들, 특히 하나인 제대에서 하나의 기도로 거행되는 동일한 성찬례에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전체가 충만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에 교회의 탁월한 현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하지만 성찬례를 통해서 표현된 교회의 특성들이 실제의 삶에서도 실현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찬례는 교회의 특성들을 배신하는 표지가 될 것이다.
3.3. 교회의 직무
1530년 루터파의 신학을 요약한「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제7항은 교회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의 모임으로서, 여기에서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거룩한 성사들이 목음에 따라 건네진다.” 여기서는 교회의 핵심 요소로서 말씀과 성사 두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여기에 교도권을 포함시킨다. 바젤 공의회(1431-1449)의 신학자였던 요한 라구사(Johannes v. Ragusa, +1443) 추기경은 가톨릭의 교회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앙고백 -성체 -순명”(confessio-communio-oboedientia). 그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 외에 세 번째 요소로서 합법적인 교회 직무에 대한 순종을 추가하였는데, 교회 직무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르침 없이 선포되고, 성사가 올바로 거행되도록 보증하고 감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3.3.1. 직무 사제직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닌 공통점의 근거는 세례성사이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그 품위에 있어서 근본적 차이가 없다. “선택된 하느님 백성은 하나뿐이다. ‘주님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뿐이다’(에페 4,5).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지체들의 품위도 같고 자녀 되는 은총도 같고 완덕에 대한 성소도 같다.” 물론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이 있지만, 그들 모두 공통된 품위를 지니고 있고, 활동에 있어서 평등함을 누린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남을 위하여 교사나 신비 관리자나 목자로 세워졌지만,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통된 품위와 활동에서는 참으로 모두 평등하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 구성원 모두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공통된 품위를 지니고 평등하게 활동하게 된다. 즉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품위를 지닌다. 또한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교회의 구원 사명에 참여하는 평신도 사도직에 임명되어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기 몫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참여하고, 교회의 구원 사명에 한 몫을 담당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신약성경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 모두가 사제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 전서 2장 9절은 탈출기 19장 6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요한 묵시록에도 같은 내용의 언급이 나온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묵시 1,6)
이렇게 세례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사제적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게 된다. 하지만 구약에서처럼 사제를 통해서 동물이나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세례 받은 신자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영적 제물”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1베드 2,5)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내용을 수용하여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보편 사제직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세례 받은 사람들을 새로 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신령한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신령한 제사를 바치며 그들을 어두운 데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불러 주신 분의 능력을 선포한다(1베드 2,4-10참조).”
다른 한 편, 세례 받은 이들을 “임금의 사제단”이라고 표현한 베드로 전서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목자의 직무를 인정하였다(1베드 5,2-3 참조). 따라서 모든 백성이 사제라는 사상이 필연적으로 교회 내의 목자의 직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부로부터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는데, 이들에게 맡겨진 직무는 일차적으로 말씀 선포와 교회 공동체의 화해를 위한 봉사이다. 신약성경 후대에는 감독, 장로와 같이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돌보는 지도 직무가 빠른 시간 내에 형성된다. 이 직무는 일차적으로 성찬례 거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르침을 올바로 보존하고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하지만 이 직무를 맡은 사람이 성찬례를 주례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감독(주교)-장로(신부)-봉사자(부제)의 삼 단계 교회 직무 구조는 신약성경 내에서는 아직 분명하게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직무 구조는 2세기에 들어와서 이단과의 투쟁과정에서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면서 정착되고, 기도와 함께 행해지는 안수가 서품식의 중심적 요소였다. 교회 직무의 형성 과정을 볼 때 교회 직무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가 하나인 것은 하나인 말씀과 하나인 빵을 통해서다. 주교제(主敎制)가 바로 이 단일성을 위한 방도로서 배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주교제는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방도(方道)의 차원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을 하기 위해서’라는 말로 정해져야 한다. 주교직은 지방 교회 자체 내의, 그리고 상호 간의 일치를 실현하는 데 이바지한다. 로마 주교의 봉사직은 이런 방도의 차원에서 하나의 이차적인 단계를 가리킨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교회 역사에 근거해서 항상 목자의 직무를 인정해왔다. “신자들 가운데서 성품에 오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교회를 사목하도록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다.” 이렇게 성품성사를 통해 목자의 직무를 맡은 이들은 보편 사제직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사제직, 즉 직무사제직을 부여받는다.
직무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과 우열을 다투거나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자신의 사제직을 충실하고도 완전하게 수행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세례의 은총과 믿음ㆍ바람ㆍ사랑의 삶, 성령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반면, 직무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을 위하여 봉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세례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결국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받은 거룩한 권한 때문에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봉사직으로서의 직무 사제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대신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또한 직무 사제직은 사도 계승에 토대를 두는데, 왜냐하면 이 사제직이 사도들이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그 사명이란 화해의 직무와 하느님의 양떼를 돌보는 직무와 가르치는 직무(사도 20,28; 1베드 5,2 참조)이다. 즉 성품 교역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고 성사를 거행하며, 신자들에 대한 사목 지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건설에 봉사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고, 특별히 성세성사와 고해성사 및 성체 성사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용서의 행위와 구원을 위한 봉헌의 행위들을 되풀이 한다. 또한 양떼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정도로 사랑에 가득 찬 정성을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보여주어, 양떼를 한데 모아 일치를 이루게 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인도해 준다.”
직무 사제직은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권한으로서 사도 계승에 토대를 두고 전적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 즉 하느님 백성이 자신들의 보편 사제직을 충실하고도 완전하게 수행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직책이다. 그러므로 직무 사제직을 맡은 성품 교역자들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원 사명을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모든 이가 나름대로 공동 활동에 한 마음으로 협력하도록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 직무와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빛나는 임무임”을 알아야 한다. 직무 사제직과 신자들과의 관계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세례 받은 신자는 누구나 복음을 선포해야한다. 따라서 성직자만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평신도들도 교리교수나 설교의 사명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주교와 그의 협조자인 신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이름으로 권위 있게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증거가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고 손상하지 않도록 신자들을 인도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직무 담당자들은 말씀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해석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로서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과 주관주의에 대항하는 증인이며 보증인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이며, 이 말씀을 사제들의 입에서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째, 세례 받은 신자들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자신에게 고유한 카리스마를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이 받은 카리스마를 발견하고 개발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카리스마를 지닌 신자들을 한데 모아서 일치와 화합을 이루는 직무가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각자의 카리스마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일깨우고, 약한 이에게 힘을 보태주며 잘못된 점은 경고하면서 공동체 전체를 조정하고 화합하는 직무가 필요하다. 주교와 신부들은 이렇게 공동체를 복음 정신 안에서 일치와 화합으로 이끄는 사명을 지닌 사목자이다. “목자이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자기에게 맡겨진 권위로 수행하는 사제들은 주교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가족을 한 형제애로 모으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한다.”
셋째, 교회 공동체의 일치는 성찬례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고 동시에 견고하게 된다. 교회 공동체의 화합과 일치의 직무를 맡은 사목자가 교회의 중심 전례이며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의 주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주교와 신부는 성찬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면서, “미사의 희생 제사에서 사람들의 성화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특수하게 행동한다.” 즉 사제는 “성찬의 예배 또는 집회에서 자기의 거룩한 임무를 최대한으로 수행한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며, 신자들의 예물을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물과 결합시키고, 신약의 유일한 희생 제사를,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깨끗한 제물로 성부께 단 한 번 바치신 희생 제사(히브 9,11-28 참조)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림 11,26 참조)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재현하고 봉헌한다.” 신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로마 12,1)” 바치지만, 그들의 “신령한 제사는 사제의 교역을 통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결합되며 완성된다.”
성품 성사는 주교직, 신부직, 부제직 세 품계로 이루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교회 직무는 이미 옛날부터 주교, 사제, 부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여러 품계로 수행하고 있다.” 이 세 품계 중에서 직무 사제직을 부여 받는 것은 주교직과 신부직 둘뿐이고 부제직은 해당되지 않는다. “전례와 교도권과 항구한 교회의 관행에 표현된 가톨릭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직무적으로 참여하는 두 가지 품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주교직과 신부직이며, 부제직은 그들을 돕고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와서 사제(司祭)라는 용어는 주교와 신부만을 가리키며, 부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렇게 직무 사제직은 주교와 신부(사제)들이 수행한다.
3.3.2. 주교, 신부, 부제
주교 사제, 부제의 세 직무가 어떻게 연관을 이루고 경계를 짓는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세 직무간의 연관과 경계가 교회사의 모든 단계에서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근거로 아래와 같이 주교, 사제, 부제직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겠다.
1) 주교 서품 -충만한 성품성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주교직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이루진다. “거룩한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가르친다. 이를 교회의 전례 관습과 교부들은 분명히 대사제직,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하였다.”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자신이 맡은 지역 교회의 목자이며 스승, 사제가 된다. “주교들은 공동체의 봉사 직무를 협조자인 신부들과 부제들과 함께 받아들여 하느님의 대리로서 양 떼를 다스리는 그 목자들이 되고, 교리의 스승, 거룩한 예배의 사제, 통치의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주교 축성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함께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도 부여한다.” 주교에게 주어지는 목자의 지팡이는 지역 교회에 대한 지도권을 의미하고, 복음서의 수여는 복음 선포의 과제를 암시하며, 머리에 도유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주교가 맡은 지역 교회와의 결속은 반지의 수여를 통해서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된다.
주교 서품은 여러 동료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서 분명해지는 것은 주교는 주교단의 일원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교구 범위를 넘어선 전체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오늘날 주교가 합법적으로 서품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특별한 개입이 필요한데, 이는 교황이 보편 교회의 일치를 위한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2) 주교의 협력자인 신부의 서품
신부를 서품할 때 주교와 함께 다른 신부들이 안수를 한다. 이는 주교가 주교단을 이루듯이 사제 역시 사제단을 이룬다는 것을 드러낸다. “모든 사제는 서로 친밀한 성사적 형제애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자기 주교 아래에서 한 교구에 봉사하도록 배속된 사제들은 그 교구 안에서 하나의 사제단을 형성한다. [...] 모든 사제는 이 사제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더불어 각기 사도적 사랑과 봉사와 형제애의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 이는 옛적부터 전례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서품식에 참석 사제들이 서품 주교와 함께 새 수품자에게 안수하도록 초대받을 때에, 또 성찬례를 한 마음으로 공동 집전할 때 그렇다.”
신부는 “비록 대사제직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하고 권한의 행사에서 주교들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사제의 영예로는 주교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으며, 성품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히브 5,1-10; 7,24; 9,11-28 참조) 신약의 참 사제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드리도록 축성된다.” 신부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주교의 권한을 나누어 받아 하느님 말씀의 교역자, 성찬례와 성사의 집전자, 하느님 백성의 교육자가 된다. 대부분의 신부들은 주교들보다 비교적 신자들과 특별히 더 근접해 있으면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다.
신부는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을 자신들의 “첫째 직무”로 받아들여 “구원의 말씀을 통해 비신자의 마음에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신자의 마음에 신앙을 키우도록” 이끌어야 한다. 말씀의 교역을 통해서 “신자들이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뿌리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게 하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주님께서 당부하신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도록 하여야 한다.” 신부가 수행하는 말씀의 교역의 내용은 “사목적 설교, 교리, 각종 그리스도교 교육, 그 가운데서도 탁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전례적 설교”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말씀의 교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신자들의 입장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이다. 이는 말씀의 교역 중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사 중의 강론에 특별히 요청되는 사항이라고 하겠다.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흔히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
신부는 성사 집전자로서 세례, 견진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스스로 자기 신앙을 고백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성체성사는 사제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사제 교역의 첫째 직무가 말씀 선포라면, 사제 교역의 목표와 완성은 성찬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부에게 성찬례는 “사제직을 수행할 때나 영성 생활을 할 때나 진정한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문헌들에 따르면, 신부는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점이 될 수 있도록 보살피면서, 다른 성사들 중에서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제는 성찬례가 “그리스도인 공동체 생활 전체의 중심이 되고 정점이 되도록 보살펴야 하며, 신자들이 열심히 자주 성사들을 받고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여 영적 양식으로 자라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또한 [...] 고해성사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진보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하는지를 명심하여, 신자들이 쉽게 고백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혼인성사를 주례함으로써 “가정 교회” 형성에 기여한다.
신부는 하느님 백성의 교육자로서 주교가 자신들에게 맡긴 공동체에서 신자들이 지닌 다양한 은사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육성하고 발전시킬 의무를 지닌다. “사제들은 신앙의 교육자로서 모든 신자 각자가 각기 성령 안에서 복음에 따라 자기 소명을 계발”하도록 이끌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제의 임무는 권위주의적 명령과 맹목적인 힘을 수단으로 해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신부는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 가능한 가장 넓은 범위로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신도들의 말을 기꺼이 듣고, 그들의 소망을 형제애로 숙고하며, 인간 활동의 여러 분야에서 그들의 경험과 역량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제들은 평신도와 함께 시대의 징표를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신부는 신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신자들의 견해와 원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소위 “민주 절대주의”의 유혹에는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 복음 정신에 거스르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신자들이 지닌 은사가 교회의 일치를 위태롭게 할 때는 경고도 해야 한다. “교회를 건설하는 사제는 주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과 더불어 넘치는 인정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리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가장 사랑스러운 자녀처럼 훈계하여야 한다.”
또한 신부는 복음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사목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선포하고 행동하셨던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소외 받고 무력한 사람,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제는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지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사제에게 특별히 맡겨져 있다.”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치와 화합은 흔히 세속의 단체가 그러하듯이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도태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런 사람들에게도 자리와 목소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일치와 화합이다.
3) 부제 서품 - “봉사를 위하여”
부제의 직무도 특별하게 고정되지는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부제의 의무로써 세례식의 거행, 성체분배, 혼인에 입회, 노자성체, 복음 선포, 장례, 말씀 전례나 준성사의 집행과 “자선과 관리의 직무”(교회헌장 29)를 꼽고 있다. 서품 예절서는 봉사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나, 동시에 제단에서의 봉사와 말씀 선포의 봉사 그리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에 대한 보살핌도 내세운다. 이렇게 볼 때 부제는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서 봉사직에 임명되는데, 그는 주교 밑에서 사제와 협조하면 자신의 봉사직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부제는 모든 이를 위한 협조자이고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 가운데서 봉사하는 이’로 사신 그리스도를 특별한 방법으로 본받는다고 하겠다.
3.4. 세상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은 인간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현세 질서의 개선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의 도구가 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 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는” 사명을 지닌다. 이렇게 교회의 사명은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 그리고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화라는 두 가지로 크게 구분이 되는데, 성직자나 평신도 모두 이에 참여하는 사도직을 수행한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의 사명은 “주로 말씀과 성사의 교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특히 성직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평신도들도 ‘진리의 협력자’(3요한 8)가 되기 위하여 수행하여야 할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특히 평신도 사도직과 사목 교역은 서로 보완하여야 한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서 모두가 참여해야 하되, 성직자가 주도하고 평신도는 협력과 보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이 수행하는 말씀의 교역과 성사의 교역을 한도 내에서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생활의 증거와 말씀 선포를 통해 세상에 교회를 존재하게 한다. 즉 평신도들은 “그들을 통해서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장소와 환경 안에서 교회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다른 한편, 교회 사명 중에서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화와 관련해서는 평신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개선을 고유 임무로 받아들이고, 그 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 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확고하게 바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평신도들의 고유 영역은 세속으로서,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고유 임무이다. 즉 평신도들은 일상의 가정생활과 사회 상황 속에서 현세의 일을 하면서 생활의 증거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세속을 평신도의 고유 영역으로 보는 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문헌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사제는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말씀의 교역과 성사 거행을 통해 도움을 주어야 한다. “목자들은 창조 목적과 세계 이용에 관한 원칙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현세 질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세워지도록 도덕적 영성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 교도권은 사제들이 평신도에게 도덕적 영성적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서 직접 정치적 및 사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정치 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임무는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평신도의 소명이다.” 사제는 “교회의 관할권자의 판단에 따라 교회의 권리 수호나 공동선 증진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 아닌 한, “정당이나 노동조합 지도층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제는 “보편 교회의 종으로서, 한 역사적 우연성에 자기 자신을 얽어 맬 수 없으며”, 또한 정치와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적 친교 내에서 분열의 심각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제는 “평신도들의 올바른 양심을 형성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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