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시릴로1004 2010. 1. 7. 16:24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오늘 주제는 창세기 3장 9절의 말씀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어,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요즈음 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혼란스럽다는 얘기입니다.주위 환경과 관계와 일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정체성인데 많이 변화하니까 안정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정체성의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으나 현재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하여 얘기합니다.정체성에서 강렬하게 영향을 주는 중심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많이 머물고 누구와 사귀고 또 어떤 일에 많이 매달리고 있는 지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 지를 알려주는 표지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는 우리 삶의 관점이 달라집니다. 피정 때는 의식적으로 보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잊어버릴 수가 많습니다.
신앙이기 전에 사회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자신의 신원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원 의식을 거짓 자아, 참 자아 또는 외적인 인간, 내적인 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거짓 자아는 가짜가 아니고 실재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우리 신원 의식을 거짓 자아라고 합니다. 참 자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나,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서, 하느님 안에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비젼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디쯤 있나? 내가 어디쯤 있는가? 를 인식할 줄 아는 것이 우리 여행의 가장 필수적인 코스입니다. 신원 의식은 자기가 어디쯤 걷고 있는 지의 이정표가 됩니다. 그것을 알면 삶의 안정감이 생깁니다. 그런 것을 잃어 버리면 혼란에 빠집니다. 고통에 빠졌을 때,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 를 반문하는 게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때, 고통이라는 것이 구원적인 의미라는 것의 나타남이라는 것을요. 하느님 앞에 머물게 되면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밑그림, 바탕, 원형, 지표이시기 때문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내적 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앞 현존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체험이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을 때, 모든 기도의 토대가 됩니다. 영향력을 느끼지 못하면 기도는 습관적인 행위로 변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영향을 안 받는 게 큰 문제입니다. 기도는 덕을 쌓는 게 아닙니다. 기도 그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의식할 때 까지 기도로 나아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니면 혼자의 독백이나 의미 없는 시간이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있다는 믿음과 의식입니다. 현존하시는 하느님 그 자체가 능력이십니다. 모든 현존은 영향을 줍니다. 영향은 하나의 능력이라고 할 만큼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거기에서 어떤 체험이 이루어집니다. 그 체험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수용하느냐, 또 하나는 거부하거나, 저항하느냐, 회피하느냐입니다. 자기 현재 모습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집니다. 수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거나 회피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가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저항, 하느님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끙끙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의도가 없습니다. 그것이 더 좋다고 느끼니까! 내적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도 중독되는 것이 있습니다. 느낌, 반응 등 어떤 패턴을 꼭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 불평, 불만을 어떤 탓으로 돌린다 던지) 예를 들어 맏이들에게는 주어진 책임과 몫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과한 몫이 있습니다. 집에서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일만 보이는가?”하는 불평, 불만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익숙해진 태도를 가진 자신에 대해서 프라이드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거짓 자아, 외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공통적인 것은 하느님으로 구원되지 못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현실입니다. 기도하게 되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자신이 드러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까워하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현실에 거품이 빠지고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망가고 숨고 저항합니다.일단 그것부터 식별해야 합니다.저항하는 형태는 합리화, 숨기인데 가장 강력한 저항은 공격입니다.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반응하는 패턴을 알 때, 회개가 시작됩니다.우리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이런 회개는 하느님 현존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입니다.하느님 은총, 그분의 능력을 체험할 때만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흔쾌히 돌아서게 됩니다.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우리 자신을 잘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오늘 복음에서 나왔듯이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루카 21,19)”입니다.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지는 위의 반응을 통해서 체크할 수 있습니다.수용적이고 긍정적일 때, 성령께 열려있을 때 진지해지고 의욕, 열정, 사랑, 이해하는 마음, 삶의 의욕, 온유, 친절함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우리가 저항할 때는 그 반대입니다.피정이나 미사 시간에도 그 반응이 나타납니다.그것은 하나의 영적인 저항입니다.저의 경우, 그 하나의 예가 기도하기만 하면 졸았던 기억입니다. 우리는 압니다.제대로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이루어 질까 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기도하는 것은 겁나는 것입니다.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공존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 하느님과 관련된 체험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잘 보세요. 있는 그대로 우리의 진실과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 5절 말씀, 루카 복음 14장 15절- 24절 말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현존, 그 사랑이 영원히 머물게 도와주십시오

 

-예수 고난회 은인방 카페 자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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