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격분을 다스리는 사람은 악마들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격분에 빠진 사람은 영적 생활과
우리 주님의 길에 낯선 자가 될 것이니,
이는 다윗이 말한 대로 “그분께서 온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기”(시편 25,9) 때문이다.
악마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운 까닭은
사람의 마음이 온유한 땅에 둥지를 틀기 때문이다.
온유함만큼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덕목도 없다.
모세는 “매우 온유한 사람,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었다.”(민수 12,3)고 할 만큼
이 덕목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다윗 역시 “주여, 다윗과 그의 온유함을 기억해 주소서.”(시편 132,1)라고
하면서 하느님이 기억하실 만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하시면서
몸소 자신의 온유함을 본받으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이제 어떤 사람이 음식과 음료는 절제하면서도
악한 생각 때문에 화를 낸다면,
그는 악마가 선장인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감시견(監視犬)을 조심스럽게 억제하고
잘 훈련시켜서 이리만을 죽이고 양은 삼키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드러내 보이게 해야 할 것이다.
내면에 주의를...
자신이 약간의 청정심에 이르기라도 하면,
사람은 이내 자만이라는 말을 타고서 즉시 세상으로 내달려,
자신의 명성에 쏟아지는 후한 찬사를 가득 채워 넣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로 부정한 영이 영혼의
마음을 가로막고 그것을 청정심의 우리에 가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침상에 누워 있으라는 것이며,
병이 다 낫지 않았는데도 일어나 걷고 목욕을 하다가
다시 몸져눕고 마는 말썽거리 환자들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분히 앉아 자기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룩함으로 옷 입고 단호히 악덕을 물리쳐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영적인 지식에 눈을 뜨게 되면,
묵상에 잠겨 수많은 일들을 알아차릴 것이고,
더욱 높이 날아올라 우리 구세주의 광휘를 더욱 선명히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양떼를 시내산기슭에 풀어 놓자
선한 목자에게 양을 맡기듯이,
주께서 사람에게 현세(現世)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력을 주셨으니,
이는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법을 두셨다(히브 10:16).”고 기록된 것과 같다.
그분은 사람을 돕기 위하여 분노와 욕망을 주셨는데,
사람은 첫 번째 것을 가지고 이리와 같은 이해력을 쫓아내고,
두 번째 것으로는 비록 자신이 비바람을 맞는
한이 있어도 양을 따뜻하게 보살핀다.
게다가 하느님은 사람이 양을 치도록 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시편 23,2), 수금과 비파, 지팡이와 막대기도 주셨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산에서 꼴을 얻고, 제 양떼에게서 젖과 옷감을 얻었으니,
이는 “누가 양을 치면서 그 젖을 짜먹지 않겠느냐(I고린 9,7)?”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덕자는 양떼(영혼) 가운데 한 마리라도(한 순간) 들짐승에게 잡히거나
도둑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밤낮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혹여 양이 들짐승에게 잡히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얼른 사자나 곰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양이 들짐승에게 잡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떠올리다가 증오심을 키우고,
한 여자를 생각하다가 부끄러운 정욕에 휘둘리고,
금과 은을 생각하다가 탐심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생각하다가 뽐내는 마음이 가득 차는 것을 뜻한다.
이와 동일한 것이 다른 이해력들의 경우에도 일어나는데,
그것들이 정욕에 붙잡힐 때 그러하다.
이 양떼를 낮에만 망볼 것이 아니라 밤에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자칫 부끄럽고 나쁜 녀석들의 곡두(幻影)를 떠올리다가
우리에게 맡겨진 양 가운데 일부를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야곱이 “저는 들짐승에게 잡힌 양을 장인께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저는 그것을 물어주었습니다.
저는 낮의 더위에 허덕였고, 밤의 서리에 떨면서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창세 31,39―40).”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다.
애쓰고 힘쓴 결과로 나른함이 조금이라도 몰려오거든,
영적인 지식의 바위를 약간 타고 올라가 비파를 연주하고,
영적 지식의 기술을 동원하여 수금을 타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의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출애 3장), 이적과 표적의 내적 본질을 말씀하시게
우리의 양떼(영혼)을 시내산 기슭에 풀어놓도록 하자.
'영성에 관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께 걸어갑시다 (0) | 2010.01.27 |
---|---|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0) | 2010.01.24 |
겸손과 용기는 악마를 물리친다 - 에바그리오스 (0) | 2010.01.21 |
한 계 - 까를로 까레또 (0) | 2010.01.19 |
장자의 소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비교 (0) | 201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