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욱신부님의 그리스도의 시선

예수님의 관찰, 판단, 실천에 대한 성경공부

시릴로1004 2010. 3. 8. 09:31

예수님의 관찰, 판단, 실천에 대한 성경공부

 

 

예수님의 관찰 판단 실천

 

1. 마르코 복음서에서

 

마르1,16-20; 1,21-28; 1,29-31; 1,32-34; 1,35-39; 1,40-45; 2,1-12; 2,13-17; 2,23-28; 3,1-6; 3,31-35; 5,1-20; 5,21-43; 6,1-6; 6,30-44; 6,45-52; 7,1-23; 7,24-30; 7,31-37; 8,1-10; 8,11-13; 8,14-21; 8,22-26; 8,27-30; 9,14-29; 9,33-37; 9,38-41; 10,17-27; 10,46-52; 11,15-19;

 

제자들의 관찰, 판단, 실천 

오천 명을 먹이시다 (마르 6,30-44)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제자들의 관찰 판단 실천

관찰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제자들의 시선은 외적인 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그들이 하는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고, 여쭈어 보는 관계인긴 하나, 예수님의 시선과 그 마음이 제자들의 것이 되진 못했다. 군중들의 고단함이나 허기짐이 측은함으로 마음 안에 들어오지 않고, 단지 상황을 바라보는 데 그쳐 있다.

 

판단

제자들은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며 군중들의 빵 해결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생각과, 자기들의 능력 밖의 일로 판단하고 예수님께 의탁할 생각도 안 한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이 질문에는 군중들에게 빵이 필요한 것까지는 판단되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 군중들의 몫이라는 생각과, 자신들이 해결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앞서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안 된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방해가 된다.

 

실천

제자들은 실천은 아직 군중들의 문제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그들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군중들의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을 체험한다.

 

나의 관찰 판단 실천

관찰

매일 아침 집 밖을 나서면서부터 나는 나에게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 지하철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 평화 방송을 통해 전해 듣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구 안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기아문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 자신과 내 가족, 나와 관계 맺어진 사람들 안에 머물렀던 시선이 조금은 밖으로 향해져 관심을 갖고 함께 바라보려는 마음을 주신 것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때로는 애써 외면하려는 마음을 본다.

판단

그들이 내 생각으로 들어오는 것이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판단하려고 한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하고 여쭈지 못한다. 어쩌면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물으실 것을 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실까봐 두려워, 그분께 묻고 전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살피고 내어 놓지 못하고 있다.

 

실천

순간 순간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침마다 천 원짜리를 챙겨서 쉽게 꺼낼 수 있는 주머니에 넣고 나가며 지하철과 길에서 만나는 사람 몫이라 정한다. 어떨 땐 그것마저도 순간적인 유혹에 지나치게 된다. 아직까지도 내가 나서서 찾기보다는 내 시선에 들어오는 곳에서 내 몫이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작은 나눔을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한다. 가정 안에서와 내가 쓰는 소비를 줄이는 것을 함께 하는 나눔으로 옮긴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실행하는 모습이 변화된 모습이다.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태 14,3-12)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관찰]

18; 헤로데는 사람의 바른 길을 말하는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20; 헤로디아는 자신의 죄를 자꾸만 지적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헤로데의 태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3; 헤로데는 요한을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고자 하였으면서 결국 그를 죽이고 말았다.

 

[판단]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결국 그가 요한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맹세'와 ‘면목' 때문이었다. 헤로디아의 술책에 넘어간 결과다.

 

[실천]

■ 헤로데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요한의 말을 두려워하면서도 기꺼이 귀를 기울여 듣곤 하였다. 그럼에도 요한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맹세를 번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 결단코, 무엇이든, 맹세코'라는 단어로 장담하고 맹세하는 일은 때로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한다.

- 내가 경솔하게 한 약속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단호한 맹세 따위를 하면 안 된다. 다만 나의 의지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기를 바라며 청하고 노력하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 헤로디아는 세상의 악한 논리로 사는 여자였다.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오히려 바른 말을 하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결국은 그의 목을 얻어냈다.

- 나는 ‘쓴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타인의 비판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내 잘못이나 죄나 반복되는 실수에 대해서조차 그걸 고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저 듣기 싫어하며 귀를 막지는 않는가? 심지어 그렇게 말한 사람을 보기 싫어하고 미워하지는 않았는가? 나를 부정적으로 지적하는 의견이 대못처럼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비록 수긍하기 어렵다 해도 잘 받아들이고 싶다.

 

■ 요한은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무수한 추종자들을 보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사명이 사자(使者)임을 잘 알고 있었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단단한가.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사명을 배반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시각으로 보면 참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인 바보의 행색이다.

- 나는 이런 ‘바보'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시시각각의 비복음적 사건과 현상들 앞에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요한처럼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요한처럼 내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요한처럼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

 

[수난과 부활]

 

수난과 부활: 큰 ‘관찰, 판단, 실천’. 인간을 찾아오신 강생하신 분은 그동안 무엇을 보셨나? 하느님의 뜻을 어디서 어떻게 찾았나?(겟세마니? 14,32-42), 수난의 길에서 그분의 행동!

 

<수난의 길에서 관찰, 판단, 실천>

* 수난의 길에서 그분의 관찰:

14,3-9; 14,17-21; 14,27-31...; 14,53-64; 14,65; 14,66-72; 15,1-5. 6-15.16-20.21-32...

* 수난의 길에서 그분의 판단:

14,32-42; 14,22-26; 14,43-50;

* 수난의 길에서 그분의 실천

14,33-41.

 

 

<부활에서 관찰, 판단, 실천>

*막달레나를 보시는 예수님

*제자들의 불신을 보시는 예수님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그렇지만 그 제자들을 신뢰하여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2. 루카 복음서에서

풍랑을 가라 앉히시다(루카 8,22-25)

본문(루카 8,22~25)

감동구절

종  합  

22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이르시니, 그들이 출발하였다.  

 23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24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  


24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예수님은 배에 오르면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시곤 이내 잠  이 들어버리셨다. 무척이나 고단 하셨던 것 같다. 그때 돌풍이 호수로 몰아   치면서 배에 물이 차 들어 왔다. 거센 풍랑에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는 가날픈  제자들과 이러한 혼란중에도 잠들어 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우리   에게 내가 바로 네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 많으냐?하시는 것 같다. 우주만  물의 전권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런데도 제자   들의 눈앞에 곧 자연의 재앙이 자신들을 삼키어 버릴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임  을 보면서 이내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잠에서 깨우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런지?  흔들리는 배의 여러 가지 견디기 어  려운 상황이 오늘 나에게 온다면 우주 만물을 움직이시는 오직 한분으로 확신  하면서 메달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결을 가라앉히시고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  에 있느냐?”하신다. 이 물음은 제자들이 믿음이 있긴 하지만, 그 믿음이 아  직 모자라고 약하다고 하시는것 같다. 완전한 믿음이 그들안에 있었다면 근   심,걱정,두려움에 예수님을 깨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  의 항구한 믿음이, 우리가 예수님을 찿을때 언제든지 주무시다가도 일어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다.

 

루카 9,51-56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본문(루카 9,51~56)

감동구절

종합

 

사마리아의 한 마을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라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 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의 시선: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종교 문제로 서로 불목하고 사이가 나빠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힘을 믿고 예수님께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은근히 종용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 계신다.

나의 시선: 십자가상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힘든 길을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다툼을 하고 있다. 그리고 화가 나서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한다. 제자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안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그들은 다툼을 했을까? 아마도 또 다른 이유로 그들은 시끄럽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마리아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다른 마을로 돌아가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성부의 사랑을 본 사마리아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과 사람을 분리 시켜 말은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하여야겠다.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복 음

마음에 닿는 구절

묵 상

루카복음 9, 57 - 62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참조 (마태복음 6, 25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우리는 가끔, 아니 언제나 세상일과 하느님의 소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섬김과 나눔, 사랑과 봉사, 희생과 용서를 위해 나를 투신해야 할 시점에서 언제나 망설이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때문에’라는 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를 들어 망설이거나 스스로를 합리화 하게 된다. 이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성경 말씀 모두가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에 들 수 있는 자에 대한 말씀이니 새삼 거론할 것은 없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리라. 그것은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일 것이고 둘째는 의심 없이 “네”하는 순명일 것이다. “~때문에”하는 사족 없이 순명하는 굳은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이 순명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굳은 결심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의 비판이나 이목, 체면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넷째는 변화된 스스로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쉽지가 않다. 아니, 어렵다. 당면한 가정 경제도 그렇고 나와 혈연으로 얽힌 가족의 문제도 그렇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만심과 오만, 명예욕이 그렇다. 근래에 본당 신부님이 성당 일을 맡기셨을 때 왜 나는 망설였을까? 바로 세속적인 이유에서였다. 복음속의 작별인사하려는 사람, 장례를 지내려는 사람처럼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경제적인 문제로 회피하지 않았는가? 경제적인 도움이 안 되기에 망설인 것이었다. 참고복음인 마태복음 6, 25 - 34 에서와 같이 사는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어 내게 힘을 주신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내게 이 말씀으로 힘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일보다 하느님 일을 1순위에 두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제는 주님이 맡기신 쟁기를 잡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결심해본다. 우리의 보상은 이미 주님이 마련하셨고 일을 맡기실 때에는 응분의 능력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오소서, 성령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성경 구절

마음에 와 닿는 구절

종 합

 

[루카 12,35-3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 행복하여라...깨어 있는 종들

 

 

 

 

 

 

 

• 주인은... 시중을 들 것이다

 

종은 주인의 의지를 좇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밤이든 새벽이든 한낮이든 종은 주인이 불러 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시키기 전에 이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종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는 음식을 먹을 때도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한편으로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바로 바른 길을 비추는 빛이다(시편 119,105 참조). 또한 “계명은 등불이고 가르침은 빛이며 교훈이 담긴 훈계는 생명의 길이다”(잠언 6,23).

등불을 켠다는 것은, 밤늦은 시간에 오실 수도 있는 주인을 기다리는 일일 뿐 아니라 영혼을 밝혀 생명의 길로 이끄는 계명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등을 켜고 신랑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기름이 다 떨어져 좀 나눠달라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한다(마태 25,9).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의 구원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내 삶에 등불을 켤 것인가? 그 등불은 무엇으로 빛을 유지하는가?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가? 어리석은 처녀인가? 내가 기름을 다 써버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인을 기다리는 데 준비가 부족한 나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가? 결국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기쁘게 살지 못하는 일, 불평이나 불만, 무감동한 일상, 슬픔 등이 내 등불을 꺼뜨리는 이유들이다. 순간순간 주님의 도래를 기다리며 설레는 처녀들은 스쳐지날 뿐인 일상의 순간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과 가슴이 온통 신랑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들은 이 세상의 희로애락에 너무 마음 뺏기지 않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유지할 줄 안다. 내 마음의 등불. 주님은 모두에게 똑같은 등불을 주셨다. 다만 그 등불을 켤 수 있는 기름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기름이 넉넉한 처녀들은 조바심내지도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언젠가 오실 분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예수님의 부르심은 즉각적이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첫 제자들을 본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도 세상의 일, 자신의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루카 9,62).

주인의 부르심이 즉각적이듯이 종 역시 주인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문 앞의 상황에 섬세하게 귀 기울여 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문 앞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세상 안에서 고통 받는 이들, 주님께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종은 주인이 바라는 일을 해야 한다. 주인이 사랑하는 이들, 주인이 연민하며 그 때문에 눈물 흘린다면 종 또한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리며 그들을 도와야 한다.

 

주인은 어느 날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주인이 오실 날만이 아니다. 도둑 역시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주인을 기다리기 위해서도 도둑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종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예수님은 당부하신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충실한 종에게는 보상이 따른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 그리고 더 나아가 종은 주인의 시중을 받을 것이다. 충실함에 대한 보상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을 정도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6-47).

 

 

19,1-10 예수님과 자캐오

복 음

마음에 닿는 구절

묵 상

루카복음19, 1-10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8.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 나는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아보려고 애쓰고 있는가? 머리로, 어줍짢은 신학지식으로, 나의 얄팍한 주관적 잣대로만 주님을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 주님을 뵙기 위해 온 몸으로 수고하는 그날의 자캐오의 열성과 마음처럼, 작은 키로 높은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 주님의 부르심이라 느꼈을 때 주저하거나 내 주변을 돌아보며 망설이거나 합리화시키지는 않았는가? 진정 자캐오처럼 재산의 반이라도 선뜻 내어놓을 수 있는 기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는가?


☞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후로 나는 변화했는가? 결심을 실천에 옮겼는가?


☞ 주님은 자캐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시며 축복을 내리신다. 자캐오의 그 재산은 아브라함에게서는 늦게 얻은 아들 이사악같은 귀중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 한마디에 선뜻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 같은 믿음을 자캐오가 재산을 내어놓는 것에서 보신 것이다.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것을 선뜻 내어놓는 주님에 대한 굳은 믿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비유이다. 그 믿음은 입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계명만을 지키고자하는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들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으로는 천대받고 비난받더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 회개를 실천하여 자캐오처럼 변화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리스도를 알아 세례를 받고 수많은 그리스도인 중에 교리신학원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이는 분명 은총일 것이다. 이러한 은총 중에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을 바라겠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때로는 세상의 수없는 비난과 지탄, 무시, 조롱을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기로 하는 것은 오로지 아브라함이 보여준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명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나는 모든 재산을 내어놓으라는 주님의 말에 슬그머니 돌아서는 부자 청년이다. 인간적인 미련이나 세속적인 욕심에 하늘나라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부자청년에서 모든 것을 내어놓고 주님의 축복을 얻는 자캐오로 거듭나기를 기도한다.

 

3. 요한 복음서에서

 

-1,35이하 첫 제자들

 

-4,1이하 사마리아 여인과

 

-5,1이하 벳자타 못 가 병자 치유

 

-6,1이하 빵의 기적

 

-8,1이하 간음하다 잡힌 여자

본 문(요한복음8,1-11)

감동 구절

종 합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에 세워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 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시험하여

 

 

 

 

 

 

 

 

 

 

 

 

죄짓지마라.

성경을 보면 우리들(율법학자,바리사아,지금의 우리)은 예수님께서 여러 군중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신성한곳에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를 해결해 달라며 소란을 피우며 문제를 일으킨다 ①자신들은 깨끗한 사람처럼 자신감있게 간음한 여자를 세우고 예수님을 시험한다 ②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죄 지은이만 생각하고 있다.③자만심만 가득하여 예수님을 떠 보려고 한다.④예수님을 시험해보고 창피하게하며, 고소할 구실을 잡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개입으로 군중은 떠나간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라는 한 말씀에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떠나간다. 삶을 오래 살수록 죄를 지은 것이 많고 빨리 자기 죄를 알아차린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요한1,29)위해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참 그리스도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성경에 그 내용은 나오지 않으나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①너희들의 심보를 나는 다 안다.②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니까 돌을 들고 있는 자들의 죄목을 쓰셨을까③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며 기도 하셨을까.④괴씸하다고 야단치실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고소할 구실을 잡으려 했던 이들이 예수님이 쓰신 글을 보고 하나 둘씩 물러나 자리를 뜬다.자신의 죄를 인정 한 것이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오직 했으면 그런 일을 했을까 힘이 약해서 일까 아니면 생계를 위해 그랬을까

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삶의 매 순간 순간을 판단하고 결심을 해야 한다 그 판단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죄를 짓게 된다. 따라서 항상 겸손해야하고, 욕심도 너무 부려서는 안되고 자존심도 버려야 한다. 진실해야 하고 어린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진정한 회개와 온유한 마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니 항상 죄인일수밖에 없다. "주님 이 불쌍한 죄인을 용서 하소서.

여기서 두 개의 시선이 보인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는 죄인으로 예수님이나 다른 이를 음해하려고 하다가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의 개입과 회개 함으로서 구원을 받게 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9,1이하 태중 소경

 

-11,1이하 죽었던 라자로

 

-12,1이하 마리아의 향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