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만교수 묵상집

하느님의 자기 포기

시릴로1004 2010. 4. 3. 11:17

하느님의 자기 포기

 

안녕하신지요? 마음이 아픈 성금요일 아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하루입니다.

주초에 미학적 신학에 관한 논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발견하였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하느님이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심으로써 자기 이외의 것이 존재의 일부에 들어오심을 허용했다고 하였다.

즉 신은 전체로서 존재함을 포기하였으며 창조는 신의 자기-확장이 아니라

자기-축소, 자기-포기, 자기-부정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은혜로운 무상성(gratuitousness)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세례 받는 것을 포기한

시몬느 베이유의 신념과 일치하는 하느님의 창조관입니다.

한편으로 동양철학적인 사고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나 물러서 계신다는 뜻이지요.

당신이 인간이 되심은 바로 그 물러섬이자 비움입니다.

그 자리에 우리 인간이 신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었고

신의 모습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터를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기-포기와 자기-축소, 자기-부정의 자리에 들어와 있으면서

그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삽니다.

한 정원에서 일어나는 유다의 고발로 시작되는 수난기는

나무와 풀들과 꽃들마저 두려워 떨며 시들게 합니다.

창조의 절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철저히 배척됩니다.

하느님은 자기 부정을 통해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나다! 바로 나다!” 이 외침은 예수님이 완전히 홀로 고립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자기 확인은 완전한 자기 포기이자 완전한 비움입니다.

사람들이 찾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찾던 메시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피조물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빈자리에 들어서는데 있습니다.

그 빈자리에 완전히 들어서는 데에는 마찬가지로 자기포기가 요청됩니다.

한 송이의 꽃은 누가 보라고 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완전히 아름답게 피고 집니다.

피조물에게서도 우리는 자기포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비움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성금요일 아침에 테라스에 군자란이 아름답게 피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채우지 못하여 아쉬웠던 나날을 다시 바라보는 아침입니다.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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