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성바오로 사도에 있어서의 화해와 용서

시릴로1004 2010. 4. 24. 09:16

성바오로 사도에 있어서의 화해와 용서

 

 

고린토 후서 5장 18-20절에 따르면 바울로는 특히 '화해의 임무'를 위임받은 것으로 인식한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는 외침은 바울로에게 있어서 하나의 막연한 "선한 의지적 행위'나 일종의 '도덕적 무장'을 뜻하지 않는다.

 

사도의 이 화해의 외침은 '각성' 그 이상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정되고 가능해진 화해로의 부름인 것이다. 화해는 예수의 결정적인 구원행위이다. 예수가 죄인들을 위해서 중재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인간편의 적대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표상적 맥락은 로마서 5장 10절에 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죽음은 화해의 '도구'인 것이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원수들을 위해서 죽음에 임했고, 자신의 삶을 호소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새로운 공동체적인 관계를 그들에게 가능케 해 준 것이다. '원수들'은 하느님을 거스려서 거만하게 맞서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제공된 계약관계로부터 벗어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예수를 따름으로써 즉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르게 될 수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또한 이제부터 신앙인으로써 "하느님과의 평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로마 5,1)


 그러므로 새로운 평화적 관계의 주된 근거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의 효력있는 중재이다. 그러나 예수의 '우리를 위한 중재'는 하느님께 대한 지금까지의 잘못된 우리의 접근을 올바르게 고쳐줄 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관심도 이미 예상케 해준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로마 5,8 참조). 따라서 그분께서는 근본적으로 당신 아들의 속죄죽음에서 용서와 화해를 드러내신 것이다.

화해는 속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화해와 속죄는 분명히 예수와 하느님의 동시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화해와 속죄에 대한 바울로의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의 능동적인 성과와 거기에 대응하는 하느님의 수동적인 자세 곧 하느님께서 속죄를 받아들이시고서 당신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마서 3장 25절이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오히려 하느님 자신이 속죄물을 만들어 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가 효력을 발생토록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속죄(물)로서 공개적으로 내놓으셨다..." 고린토 5장 18절도 또한 하느님의 화해적인 이니셔티브를 중점적으로 강조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 자신과 화해토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화해와 죄의 용서의 맥락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죄를 그들에게 묻지 않으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2고린 5,19). 예수가 순종하여 죽음으로써 불순종을 대신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추궁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이즘과는 달리 율법준수, 곧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성과의 계산이 맞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원칙이 '어긋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계산을 하시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바울로가 그밖에 어느 대목에서도 말하지 않는 '죄의 용서'와 동일한 의미이다. 이런 표현은 의심없이 바울로의 사상에는 보다 적은 편이다.

 

그 대신에 바울로는 죄의 세력으로서 (단수형)에 관해서 예외없이 언급한다.

즉 그리스도는 죽음을 안겨다 주는 그 죄악의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고린토 후서 5장 19절에서 '죄의 용서'와 '화해'가 서로 관련되어 설명되고 있음을 항상 볼 수 있다.

바울로가 화해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제시된 전승에 아무리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바울로는 유다이즘적 내지는 유다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의 표상적 테두리에는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표현방식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강조할 수는 있다. 이런 변화를 바울로는 그밖에 '믿음을 통한 의화'로서의 폭넓은 해석으로 선포한다.


 희랍어 (따르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의 역사적 전 실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이루어진 변화보다는 더 분명하고 강도있게 암시한다. 이 변화는 인간의 구원을 뜻하고 이제 인간의 생활태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여기서 언급된 '변화'는 하느님이나 인간편의 정신적 변화로 제한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의 행위를 통해서 새롭게 규정된 실제적인 삶에 화해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적절하게 묘사해준다. "만일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즉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찬 헌신에 의해 일으켜져서 신앙인이 된다면) 그는 하나의 새로운 창조물이 됩니다. 자, 옛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설정된 화해는 자신의 사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책임감있게 제공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0). '화해의 말'(2고린 5,19)은 사도적 '화해의 임무'(2고린 5,18)를 정립한다. 

 

이 화해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에 대한 말로서뿐 아니라, 화해로의 부름과 화해자체를 매개하는 말로서 행해진 것이다.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적 임무를 그리스도의 화해행위에로 참여를 뜻한다. 바울로는 사도로서 화해행위의 대리자가 되는데,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곧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위임과 그리스도의 일을 이행함으로써인 것이다.  유의해야 할 점은 바울로는 여기서 '교회론적' 복수를 뜻할 수 있는 차원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점이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전체교회와 함께 자신의 임무수행을 하게 된다. 이 전체교회에서 예수는 복음 가운데 화해의 말에 봉사하는 자신의 '대리자'를 항상 다시 만나게 된다.


 바울로는 고린토 공동체에 보낸 자신의 서간에서 자신이 이해한 화해의 임무를 직접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거기서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고린토 공동체에게 "여러분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이다. 고린토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도 화해를 필요로 하고 있어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도의 말을 통해서 당신의 화해를 새롭게 이루어준다는 것을 바울로는 명백히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여기서는 하나의 '두번째 참회'로서 화해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의미를 묻지 않고서 화해로의 부름은 하나의 보다 더 원칙적인 의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부름은 복음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화해의 말로써 특징을 짓고 사도적 선교임무를 화해의 임무나 로마서 5장 1절과 함께 평화의 봉사로서 규정한다. 화해와 평화의 이런 봉사는 언제나 인간의 관계를 서로 에워싸고 그리하여 하나의 본절적으로 교회론적인 구조를 내보인다는 것은 사도 바울로의 의미 속에서 화해의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을 강조할 때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바울로에 관련하여 그리고 그의 '화해론'을 이어받아서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이방인과 유다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그리스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표제아래 에페소서 2장 14-18절의 찬가적인 전체 텍스트는 분리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이미 분리된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룩하는 권세를 찬미한다.


 화해의 교회론적인 특성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사도의 훈계에 걸맞게 자신들의 태도에서 사랑의 계명의 정신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 좋은 사례를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볼 수 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주십시오." 이 명령은 형제적 충고에 관한 훈계에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맥락에 위치해 있다.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리십시오." 여기서 서로 돌보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화해의 임무를 규정하면 할수록 바울로는 다른 대목에서 즉 고린토 전서 5장에서 공동체의 거룩함을 해치는 공공연한 중죄의 경우에 파문을 그만큼이나 요구한다.

 

바울로가 5장 4-5절에서 말하듯이 근친상간자를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은 초대교회의 속죄제도가 뜻하는 바대로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하고서 나중에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어쨌든 영원한 저주는 기대되지 않고 규정된 방식으로 마지막 구원이 기대된다. 만일에 죄인이 사탄에게 넘겨진다면, 공동체에서 단순히 추방만 되는 것이 아니라, E.케세만의 표현대로 하자면 "지금까지보다는 다른 방식으로만 주님의 손에, 즉 하느님의 분노의 영역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죄인)는 그런 방식으로 아마도 구원되리라는 목적에는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심판을 체험한 자는 그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화해할 경우에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모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로는 물론 고린토 전서 5장에서와는 달리 고린토 후서 2장 5-11절에서 공동체(여기서는 사도도 포함됨)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슬프게 되고" 죄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처벌을 받고서" 용서와 위로를 얻게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해준다. 이 대목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보게 된다면, 여기서는 신앙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항구적인 삶의 수행으로서 화해가 더욱 부각된다. 화해는 여기서 형제들 가운데 통교의 필수적인 방식으로서 증명된 것이다.

 

맺는말

 죄의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신학적인 말은 신약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권리로서 죄의 용서에 대한 구약성서적-유다이즘적 표상에서 연유된 하나의 신학적인 배경을 보여준다. 초대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선포는 하느님을 통한 종말론적 죄의 용서를 대망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론적-구원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죄의 용서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서 그의 지상활동에서 전권적으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 대신에 사람을 죄로부터 종말론적 구원으로 방향전환시킨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추종함으로써, 예수가 말과 행위로써 하느님 대신에 죄의 용서를 했듯이, 하느님 대신에 죄의 용서를 계속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전권수행은 제자단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수행할 수 있는 척도와 정당한 근거로서 나타난다.


 교회에 의해서 행해진 죄의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는 특별히 화해와 화해의 사도적 임무에 대해서 바울로적인 이해를 통해서 분명해진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사도의 보편적인 구원소식의 내용이다. 그것은 믿음과 세례 안에 있는 그리스도적인 삶의 기초를 떠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항구한 과제이다. 이 과제는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률적으로  애쓴다면 그때서야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룩할 수 있고 확실하게 구체화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과 나눌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조건만이 아니라 동시에 선취적인 표시이다. 여기서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교회의 평화 곧 고백성사의 형태에 대한 생각이 확실한 방식으로 상기된다.


 참회와 죄의 용서는 교회 내의 구원제도로서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서 예수에 의해서 예견된 것이다. 참회와 죄의 용서가 성사적인 사건으로서 신앙인들의 구원사정을 돌보는 데에 교회를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수의 구원의향의 보편적인 수행은 '구원방법의 관리'에서도 그 수행의 지배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로서의 교회를 통해서 식별되어야만 한다. 죄의 용서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고 당신이 피조물에 대한 취소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Karl Kertelge 저, 이영헌 역, 죄의 용서에 관한 신약성서적 고찰, 신학전망 제89호, 1990년 여름"에서 발췌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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