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2대 주교 앵베르의 활동/ 달레신부의 한국천주 교회사/가브리엘요약

시릴로1004 2011. 1. 22. 15:10

제 2대 교구장(第二代敎區長) 앵베르(Imbert) 주교의 활동(活動)

제 2의 갑사(Capsa) 주교(主敎)인 앵베르(Imbert) 주교

① 로랑 ․ 마리 ․ 앵베르(Imbert)(그의 한국명(韓國名)은 범세형(范世亨), 본명은 라우렌시 오(구식은 로렌조)) 는 액스(Aix)에서 2,30리 떨어진 까브리애(Cabries) 읍에 속하 는 깔라(Calas)라는 조그마한 촌락(村落)의 라보리(Labori)의 소유지에서, 1797 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 앵베르(Imbert)와 어머니 스잔 ․ 플로뺑(Flopin)은 매우 가난하 여, 아들에게 아무런 교육(敎育)도 시킬 수가 없었다. 8세 때 어느 날 길에서 1 전을 주운 라우렌시오는, 이내 초보독본(初步讀本)을 살 생각을 하였다. 그는 아 버지에게 이 책을 사다 달래서, 그 조그마한 책을 들고, 이웃에 사는 착한 할머 니를 찾아가, 글자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 훌륭한 부인(婦人)은 서둘러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소년은 귀를 기울여 듣 고 반복하여,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자주 선생을 찾아가고 하여, 오래지 않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 진보(進步)하는 데 따라 그의 야심(野心) 이 커져, 숯덩이를 가지고 그의 책에 있는 글자들을 벽에 베꼈다.

사례금(謝禮金)이라고는 고맙다는 인사밖에는 제자(弟子)에게서 받지 못하던, 마음씨 착한 여선생은 그의 이런 열심을 보고 감동(感動)하여, 펜과 필기체 글자 를 쓴 공책 한 권을 그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라우렌시오는 읽고 쓰는 것 을 배웠다.

② 까브리애(Cabries)의 본당 주임신부(主任神父)는 이 어린이의 훌륭한 소질(素質) 에 마음이 끌려, 그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를 신부 댁(神父宅)에 두고자 했다.

아르망(Armand) 신부는 소년에게 불어문법(佛語文法)의 처음 과정(課程)을 가르 쳐 주고, 얼마동안 시험한 뒤에 어떤 학교(學校)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때는1808년 이었는데, 소년들이 그리스도교 교육(敎育)을 위한 교육기관(敎育機關)의 수가 적고, 자원(資源)도 부족하였다. 라우렌시오는 가난하여 소신학교(小神學校)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라우렌시오에게는 다행한 일로, 액스(Aix) 시에서는 그리스도교 은수(隱修)의 수사(修士)라고 불리우는 수도자(修道者)가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입헌의회(立 憲議會)가 모든 수도회(修道會)의 철폐(撤廢)를 의결한 바로 그시기에, 기도(祈 禱)와 남에게 봉사(奉仕)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 수사(修士)들이 귀양살 이에서 15년간 참다운 수련생활(修練生活)을 한 뒤에, 프랑스로 돌아온 길이 었는데, 액스(Aix)의 드 ․ 씨쎄(De Cice) 대주교(大主敎)는, 성(聖) 요아킴을 주 보(主保)로 모신 집을 하나 주어, 청소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성 (聖) 요아킴 기숙학교(寄宿學校)에 무료로 입학(入學)이 허가되었다. 그는 단지 옷과 일용품(日用品) 값만 내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학생의 아버지 는 이 약소한 비용(費用)마저도 낼만한 처지(處地)도 되지 못했다. 까브리애(Ca bries) 주임신부(主任神父)가 처음에는 그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으나, 그도 오랫 동안 이 부담(負擔)을 감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③ 기쁨과 감사(感謝)의 정을 가슴 가득히 안은 라우렌시오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활동력(活動力)으로 모든 의무(義務)에 전심하였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 (祈禱)하고,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의 동창(同窓)들은 그가 한 번이라도 노는 것 을 봄 기억(記憶)이 없었다.

학교의 수사(修士)들이 묵주(黙珠)를 만들기 위해 철사를 꼬는 것을 보고, 그 도 수사들과 같이 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묵주(黙珠)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때부터는 쉴 사이 없이 이 일을 열심히 했었다. 쉬는 시간이나 자유로운 시간 에도 문법(文法)과 고전작품(古典作品)들을 익히든지 했고, 학교에 가거나 집에 돌아 올 때에도, 그는 언제나 철사를 팔에 감고, 집게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이 묵주(黙珠)들을 팔아 얻은 돈으로 책과 공책과 옷값을 내고 여유를 만들 줄 알았으므로, 나머지는 이미 연세가 높아 거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심(熱心)을 배가(倍加)하여, 기술(技術)을 완 성하였고, 리옹(Lyon)에서 은실과 예쁜 메달을 주문해다가, 값진 묵주(黙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만든 묵주를 보깨르(Beaucaire) 시장(市場)에까지

보냈고, 이리하여 월 15 프랑이라는 자그마한 고정수입(固定收入)을 아버지에게 확보(確保)해 드리는 방법(方法)을 발견하였다.

손으로 하는 이 일도, 앵베르(Imbert) 소년이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신 심행위(信心行爲)에 충실히 하는 것을 방해(妨害)하지는 않았다. 고전학급(古典 學級)을 마친 후 그는 문학부문(文學部門)의 대학 입학자격(入學資格)을 얻었고,

신학(神學)을 공부하기 위하여, 액스(Aix)의 대신학교(大神學校)에 들어갔다. 그 는 마음속에 이미 미신자(未信者)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파(傳播)하러 갈 결심을 굳게 하였었고, 포교지방(布敎地方)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포교활동(布敎活動)에서 오는 피로(疲勞)에 대비해서 몸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 여, 여러 가지 고난(苦難)을 스스로 취하고,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며, 끊임없는 극기(克己)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묵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왜냐하 면 이것이야 말로 자기에게 필요한 비용(費用)을 장만하고, 늙은 아버지를 도와 드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신학(神學)공부를 끝냈을 때에도, 라우렌시오는 아직 부제품(副祭品)을 받는

데 요구되는 나이가 차지 못했었다. 그는 지보로(Givors)의 어떤 부유하고 점잖 은 가정(家庭)에 초빙(招聘)되어 가서, 그 집 어린이들의 가정교사(家庭敎師) 노 릇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신학교(神學校)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았고, 대단히 귀한 추 억(追憶)을 남겨놓은 모양이어서, 일생동안 그의 옛날 제자(弟子)들이 그와 편지 왕래(便紙往來)를 계속하였다.

④ 그러나 포교지방(布敎地方)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성소 (聖召)라고 부르는 신비롭고 힘 있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분명(分 明)하게 들려왔고, 얼마 후에 앵베르(Imbert) 청년(靑年)은 지보를 떠나 몽뗄리 마르(Montelimar) 근처에 있는 애그벨(Aiguebelle)의 트랍피스트 수도원(修道 院)에 가서 피정(避靜)을 하였다.

그는 침묵(沈黙)과 기도(祈禱) 중에, 그리고 자기의 마음속을 전부 털어 보인, 성덕(聖德)있는 원장(院長)과의 오랜 협의(協議) 중에, 천주의 성의(聖意)를 물었 다. 이 존경할만한 지도자(指導者)는 젊은 성직자(聖職者)의 열렬한 소원(所願)에 서, 천주의 부르심을 알아보고, 자신이 직접 그를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 神學校)로 보냈다. 앵베르(Imbert)씨는 1818년 10월 8일에 그곳에 도착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22세가 되지 못했었다.

그는1819년 3월 27일에 차부제품(次副祭品)을 받고, 연령제한(年齡制限)에 대 한 특별 인가를 얻어(만 24세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 해도 저문 12월 18일에 성품(聖品)을 받았다. 사천포교지(四川布敎地)에 임명(任 命)되어 파리를 떠난 것이 1820년 3월 20일, 5월 1일에는 보르도(Bordeaux)항 을 출범(出帆)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事情)으로 그의 여행(旅行)은 굉장히 오랜 시일이 걸렸다. 처 음에는 레위니옹(Reunion) 섬에서, 다음에는 벵갈(Bengale)에서 수개월간을 머 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에, 1821년 3월 19일 에야 겨우 뿔로 ․ 삐낭(Poulo- Pinang)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신학교(神學校)의 교수 무똥(Mouton)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직후라, 새로 온 선교사(宣敎師)는 그를 대신해서 몇 달 동안 라틴 어와 신학(神學)을 가르쳐야 했다.

그해 12월 2일에 영국 배를 타고 마카오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1822년 2월 10일에야 그곳에 도착했다. 그때 중국을 건너질러 사천(四川)으로 가는 도로(道 路)는 완전히 막혀있었으므로, 앵베르(Imbert) 신부는 며칠 동안을 쉰 다음, 코 친차이나로 배를 타고 가서 5,6개월 그곳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통킹으로 건너 갔는데, 거기에서 2년 이상이나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성(熱性)으로 신자들을 돌보며, 중국의 운남성(雲南 省)을 통해 자기가 임명(任命)된 포교지(布敎地)로 들어갈 방법을 늘 찾고 있었 다. 마침내 천주의 도우심으로 그 방법(方法)을 찾아내는데 성공(成功)하여, 1825년 3월에, 당시 사천의 보좌주교(補佐主敎)이던 뻬로쇼(Perrocheau) 주교 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그를 기다린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앵베르(Imbert) 신부는 12년 이상을 이 포교지(布敎地)에 머물렀다. 그 넓은 여러 지방(地方)의 일을 규칙적(規則的)으로 돌아보기 위한 그의 수고, 병과 박 해(迫害)중에 보여준 그의 인내(忍耐), 티벹 국경지대(國境地帶)의 모삥(Mo- ping)에 신학교(神學校)를 세우는 데 나타낸 그의 경험(經驗)있는 열정(熱情), 그 가 끊임없이 남겨 준 성덕(聖德)과 열심(熱心)의 아름다운 모범(模範)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교훈(敎訓)이 되는 이 모든 점은 오히려 중국교회사(中國敎會史)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시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 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⑤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조선포교지(朝鮮布敎地)를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맡기겠다고 한다는 내용(內容)을 가진,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의 편지를 사천(四川)에서 받았을 때, 앵베르(Imbert) 신부는, 그의 동료(同僚)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이 제안(提案)을 수락(受諾)하라고 강력히 호소(呼訴)하는 것 으로 만족(滿足)하지 않고, 만일 허락(許諾)만 한다면 자기가 직접 떠나겠다고 자원(自願)했다.

갑사(Capsa) 주교의 별세가 로마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곧 앵베르(Imbert) 신부를 그 후계자(後繼者)로 생각하게 되었다.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탕 (Chastan) 신부도 그들의 편지(便紙)에서 앵베르(Imbert) 신부를 지명(指名)했었 고, 그의 상사(上司)들도, 성덕(聖德)으로 보나 수완(手腕)으로 보나, 중국의 언어 (言語)와 풍속(風俗)을 오래 체험(體驗)한 것으로 보나, 그가 이 위험(危險)한 직 무(職務)를 맡기에 가장 적합(適合)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황성하(敎皇聖下) 는 그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였다(처음부터 조선교구장으로 추천된 것이 아 니고,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 그의 보좌주교(補佐主敎)로 추천되어 있었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망함에 따 라, 앵베르(Imbert) 주교는 자연적으로 조선교구장직을 승계(承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앵베르(Imbert) 주교가 떠나는 포교지(布敎地)의 교구장(敎區長)인 시니뜨(Sinite) 명의(名義)의 폰따나(Fontana) 주교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 앵베르(Imbert) 주교에 대한 폰따나(Fontana) 주교의 평

교황께서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의 후임(後任)으 로 임명하신 앵베르(Imbert) 주교를 잃음으로써, 우리 포교지(布敎地)는 훌륭한 선교사(宣敎師) 한 분을 잃었습니다. 앵베르(Imbert) 주교는 그의 선출에 관한 교황(敎皇)의 칙서(勅書)를 4월 중에 받았고, 동시에 마카오의 외방전교회(外邦 傳敎會)의 경리(經理) 르그레죠아(Legregeois) 신부의 편지로, 브뤼기에르(Bru -guiere) 주교의 별세(別世)에 대한 확실(確實)한 소식(消息)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황칙서(敎皇勅書)의 명에 따라, 앵베르(Imbert) 주교는 갑사(Cap sa) 주교로 성성(成聖)되었습니다. 성성식(成聖式)은 5월 14일 성령강림축일(聖 靈降臨祝日)에 있었습니다. 뽕소(Ponsot) 신부와 마리엣트(Mariette) 신부가 두 보좌주교(保佐主敎) 노릇을 했고, 내가 성성식(成聖式) 집전주교(執典主敎)가 되 었습니다. 앵베르(Imbert) 주교의 뜻은 곧 길을 떠나서, 금년 안으로 조선국경(朝鮮國境)에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고, 너무 덥고 또 다른 사정(事情)도 있고 해서, 그는 여행(旅行)을 3개월가량 연기(延期)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는 8월 17일 믿을만한 두 사람을 데리고 이곳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은 외 교인(外敎人) 어린이들을 찾아가, 죽을 위험(危險)이 있을 때에는 세(洗)를 주라 고 보내는 회장(會長)이고, 또 한 사람은 30세가량 된 그의 제자(弟子) 중의 하 나인데, 그는 앵베르(Imbert) 주교 밑에서 신학(神學)도 약간 배웠고, 주교를 몹시 따릅니다.

갑사(Capsa) 주교의 의향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을 조선(朝鮮)에 들여보 내서 자기 포교지(布敎地)를 위하여 성품(聖品)을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구 (琉球)섬으로 보내려는 것입니다. 앵베르(Imbert) 주교가 조선으로 향하는 것 이, 이 불쌍한 포교지(布敎地)를 위하여 유익(有益)한 일이겠으므로 우리에게도 기쁜 일이어야 하겠지만, 그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모두들 섭섭해 합니다.

그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고, 매우 유익(有益)한 일을 했으며, 중국말을 잘 하고, 한문(漢文)도 꽤 많이 압니다. 그의 성격은 착하고 부드럽고, 상냥하고 명 랑하고 용맹(勇猛)하며, 이 사천교구(四川敎區)에서 열심히 또한 성공적(成功的) 으로, 12년간을 행한 성직(聖職)의 경험(經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42세이며, 외국어(外國語)를 아주 쉽게 배웁니다.

   여행(旅行)의 피로(疲勞)와 여러 가지 다른 불편(不便)을 견디어 나가기 위해서는 건강(健康)이 썩 좋은 것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건강이 그렇게 좋 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몇 해 동안은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는데, 그는 조 선(朝鮮)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천주께서 그에게 큰 힘을 주셨다고 확신(確信)하 고 있습니다. 방안에 들어앉은 생활이나, 연구(硏究)에 전심하는 것 보다는, 활 동적(活動的)인 생활과 여행(旅行)이 그의 건강에 더욱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를 몸 성히 그의 새로운 포교지(布敎地)로 인도(引導)해주시기를 천주께 기도 합시다.』

⑥ 앵베르(Imbert) 주교는 무사히 중국(中國) 전토를 건너질러, 10월 말경에 달단 (韃단)의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여, 프랑스 라자리스트 수사(修士)들에게로 가

서 15일 동안을 머물렀는데, 그가 머무른 집은 2년 전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와 모방(Maubant) 신부가 아주 친절한 대접(待接)을 받았던 바로 그 집이었 다. 제성첨례(諸聖瞻禮)(11월 1일, 지금은「모든 성인의 날」)후에, 많이 내린 눈으 로 인하여, 그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갔던 광야(廣野)의 길은 너무나 위험(危險) 하리라는 판단(判斷)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만자(西灣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 북쪽으로 150리 밖에 안되 는 곳에 있으므로, 앵베르(Imbert) 주교는 중국으로 되돌아가서, 북경(北京)과 봉천(奉天) 간의 국도(國道)를 따라가기로 결심(決心)을 했다. 한편 그 길로 가 면 3,4일 걸을 만큼 여행거리를 단축(短縮)하게 되는 것이었다.

앵베르(Imbert) 주교의 편지

『㉠ 나는 30량을 주고 힘센 달단(韃단) 말 세 필을 사게 했습니다. 이놈들은 잘

생기지도 못하고 날래지도 못하지만, 안심(安心)할 수 있고, 피로(疲勞)도 잘

견디어냅니다. 이렇게 차비를 차린 후, 11월 13일 새벽에 길을 떠났습니다.

하오 3시 경에 군인(軍人) 2병 밖에 없는 우회로(迂廻路)의 아주 작은 조그마 한 초소(哨所)로 해서, 다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가, 어떤 중국(中國) 읍 내의 교우(敎友) 집에서 잤습니다.

17일 우리 일행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둘째 번 성벽(城壁)을, 북경(北京) 으로 통하는 골짜기 길로 해서 지났습니다. 길이가 50리가 되고, 돌로 막혀 있기 때문에, 거의 다닐 수가 없는 무서운 골짜기인 이 협로(狹路)에는 제 1급 세관(稅關)이 세 군데나 있습니다. 일체의 검사(檢査)와 이 세관의 관리(官吏) 들과의 승강이를 모두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행정고관(行政高官)이나, 재판소(裁判所) 관계 관리(官吏)들의 특권(特權) 입니다.

우리는 달단관리(韃단官吏)들이 쓰는 것 같은 여우가죽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내 수염(鬚髥)과 풍채(風采)가 엉터리 연극(演劇)을 완성시켰습니다. 이 구차스러운 방법이 성공(成功)을 거두었으니, 아무도 우리에게 질문(質問)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 18일 저녁, 우리 일행은 봉천(奉天)으로 가는 국도(國道)로 다시 들어섰습니 다. 그때 우리는 북경(北京)에서 북동쪽으로 겨우 80 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

니다. 지난 3일 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약대(낙타)들을 만났는지를 말한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 약대들은 달단(撻단)으로, 어쩌면 러시아

로도 가는 상품(商品)을 싣고 있었습니다. 약대들을 이끌고 가는 사람들은 우 리 일행을 달단(韃단)의 관리(官吏)라고 생각하여, 공손히 절을 하였습니다. 그 러면 우리는「몽꾸」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편안히 가시오.?라는 뜻입니 다.

우리는 10 리가량 거리를 두고 산을 따라 갔으므로, 멀리서 명나라 황제(皇 帝)들의 무덤에 세운 기념건물(記念建物)을 보았고, 다음에는 이따금씩 황제가 달단(韃단)에 갈 때나, 조상(祖上)의 묘를 보러 갈 때에 머무는 별궁(別宮)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별궁(別宮)들이 있느냐 하면, 천자(天子)는 서양(西洋)의 왕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읍내의 지사관저(知事官邸)에서 머무는 것은 너무나 겁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자(天子)가 여행(旅行)을 할 때에는 허허벌판에 외따로 떨어진, 이런 궁궐(宮闕)에서 그 둘레에 천막을 치고, 지키는 호위병 (護衛兵)에 에워싸여 쉬는 것입니다.

㉢ 25일 토요일에 우리 일행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끝나는 해변(海邊)에 있는 동쪽 세관(稅關)을 지났습니다. 이 경우에는 관리(官吏) 모양으로 말을 탄 채 있는 것은 허용(許容)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어떤 고관(高官)이라도, 심지어 태수(太守)까지도 문 위에 붙은 황제(皇帝)의 휘장(徽章) 앞에 무릎을 꿇고, 여 러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일반 백성을 이러한 예절(禮節)이 면제(免除)되나, 그 대신 한 사람씩 이 초 소(哨所)의 관리(官吏)와 두 명의 보좌관(輔佐官) 앞에 출두하여, 무릎을 꿇고 그들의 질문(質問)에 대답(對答)해야 합니다.

   나는 비록 중국말을 잘 하지만, 사천성(四川省) 사람들의 사투리를 씁니다. 그뿐 아니라, 난관(難關)을 돌파하려면, 중국식 거짓말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도 저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터인데, 서양인(西洋人)이요 주교(主敎)인 내 가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용감(勇敢)한 외교인(外敎人) 밀수업자(密輸業者) 한 사람을 찾아오라 했었는데, 이 사람이 10프랑을 받고 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 야음(夜陰)을 타고, 또 춥기도 하고, 때마침 눈도 내리는 바람에 세관리(稅關 吏)들과 군인(軍人)들이, 초소(哨所) 안으로 들어가 빙 둘러 앉아, 불을 쪼이고 있는 틈을 타서, 이 밀수업자(密輸業者)가 둘러가는 길로 해서, 나를 성이 무 너진 부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성 밖 10 리 거리에 있는 어 떤 교우(敎友)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이튿날 내 말들과 짐들도 읍내 교우들에 끌려 무사히 지나왔습니다. 이 교우(敎友)들은 세관관리(稅關官吏)들과는 아는 사이라, 심문(審問)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북경(北京)으로 가는 행로(行路)에서 17일 우리가 나온 뒤로부터, 산해관(山 海關)이라고 하는 이 마지막 세관(稅關)으로 해서 중국(中國)을 나올 때까지, 우리는 지극히 기름진 가없는 평야(平野)를 지나왔습니다. 이 평야는 산동(山 東)과 하남성(河南省)에까지 펼쳐지고, 삐첼리(Pe-tchely)라고 하는 북경성(北 京省)의 절반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나와서는 5일 동안 해변(海 邊)을 끼고 왔습니다. 그곳은 거의가 불모(不毛)의 황야(荒野)이고, 여기저기 몇몇 야산(野山)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해변을 걸었는데, 평야는 더 넓어지고 더 기름졌습니다. 특히 봉천(奉天) 근방이 더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건륭황제(乾隆皇帝)가 서양에까지 알려진 서사시(敍事詩)를 지어 노래한, 이 유명한 옛 도시를 묘사(描寫)할 것으로 기대(期待)하실 것입 니다만, 나는 그 도시의 고적(古蹟)을 구경할 호기심(好奇心)이 없어, 시내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서문(西門) 바로 가까운 성밖의 달단(韃단) 출신 교우(敎友)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12월 4일에 도착했는데, 우리의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에 바쳐진 날인 8일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이제는 5일 만 걸으면 조선국경(朝鮮國境)에 도착할 것이고, 며칠만 있으면 황제(皇帝)께 하례(賀禮)를 드리러 북경(北京)으로 가는 조선의 사신(使臣) 일행이 지나가는 기회(機會)에 열리는, 연례적(年例的)인 교역시(交易市)가 설 것입니다.』

 

⑦ 앵베르(Imbert) 주교의 예측(豫測)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국경(國境)에 있는 변 문(邊門)에 16일 도착했고, 한 편 조선신자(朝鮮信者)들도 그날 저녁에 도착했 다. 신자 5명이 사신(使臣)의 수행원(隨行員) 중에 끼어 있었는데, 그중 3인은 주교(主敎)를 모셔 들이고, 2인은 사신행차(使臣行次)를 따라 북경(北京)까지 가 기로 되어 있었다(조신철(趙信喆)과 정하상(丁夏祥) 등이 정유(丁酉, 1837)년 11월에, 책문(柵門)에서 주교를 맞아 의주(義州)를 거쳐 서울로 인도하였다).

이들은 서로 쌓인 회포(懷抱)를 푸는 가운데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밤 앵베르 (Imbert) 주교는 길을 떠났다. 그는 이미 모방(Maubant)과 샤스땅(Chastan) 두 신부가 당한 것과 같은 위험(危險)을 겪어야 했고, 천주의 보호(保護)하심을 힘 입어 비슷한 방법으로 위험을 면하였다. 그는 야음(夜陰)을 타서 얼음 위를 걸어 강을 건너, 초라한 주막(酒幕)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귀찮은 질문(質問) 을 피하기 위해 병자(病者) 노릇을 했다.

그로부터 13일 후에 서울에 들어왔다(1837년 12월 30일, 그는 후동(后洞)에 있는 정하상의 집에 모방(Maubant) 신부와 같이 거처했다). 그는 그때 이런 글을 써 보냈 다.

『천주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천주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내 피로(疲勞)가 무 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나의 자녀들 가운데 있으며, 그들을 보는 것에서 느 끼는 행복(幸福)은 그들이 있는 데로 오기 위해 당해야 했던 고생(苦生)을 잊 게 합니다. 나는 1838년 첫 날을 어떤 교우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이날 밤에 나의 도착시기를 예상(豫想)했던 모방(Maubant) 신부가 나 있는 곳으로 왔습 니다. 우리는 형제(兄弟)처럼 포옹(抱擁)했습니다. 나는 조선(朝鮮)의 한 가운 데에서, 외국(外國)의 백성들 사이에서 맞는 이 새해맞이 보다, 프랑스와 우리 네 가정에서 맞는 그 열렬(熱烈)한 축원(祝願)과 아늑한 행복감(幸福感)으로 맞 는 새해맞이가 더 성대(盛大)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자문(自問)해 봅니다.』

샤스땅(Chastan) 신부는 그때 남부지방(南部地方)을 순회(巡廻)하는 중이어서, 5 월에 가서야 주교를 뵐 수 있었다.

⑧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후, 앵베르(Imbert) 주교는 고백(告白)을 들을 수 있 었다. 3백 명 이상의 신자가 부활축일(復活祝日) 준비로, 그에게서 고해성사(告 解聖事)를 받고, 그의 손으로 성체(聖體)를 영하였다. 5월에 모방(Maubant) 신부 와 샤스땅(Chastan) 신부는 지방교우(地方敎友) 집단의 순회(巡廻)를 마치고 올 라와, 몇 주일 동안 서울의 교우들을 돌보게 되었는데, 그때 서울의 신입교우(新 入敎友)의 수는 1천명이 넘었다.

주교(主敎)가 도착한 뒤로 세 선교사(宣敎師)가 11월에 세(洗)를 준 어른은 1,994명이었다. 그때까지는 조선(朝鮮)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죽을 위험(危 險)에 있는 외교인(外敎人) 어린이에게 세(洗)를 주는 운동도 발전하였다. 교우 (敎友)들과 특히 회장(會長)들에게, 이 사업(事業)의 중요성(重要性)을 깨우쳐 주 었다. 처음 8개월 동안에 이렇게 세(洗)를 받은 외교인 어린이 129명 중에서, 54명이 벌써 천국(天國)으로 올라갔었다.

그러니까 조선 성교회(聖敎會)는 오랜 재난(災難)을 겪은 후, 새로 재생(再生) 하는 셈이었다. 천주의 은혜(恩惠)는 점점 더 풍성(豊盛)해지고, 신자의 수는 급 격히 불어났다. 모방(Maubant) 신부가 도착했을 때에 6천명도 채 되지 않던 신자(信者) 수가 1838년말 에는 9천 명이 되었다.

⑨ 위안(慰安)을 주는 이런 결과(結果)는, 힘들고 끊임없는 노력(努力)의 대가로 얻 어지는 것이었다. 앵베르(Imbert) 주교는 이런 말을 썼다.

『나는 몹시 지쳤고, 크나큰 위험(危險)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벽 2

시 반에 일어납니다. 3시에는 집안사람들을 불러 기도(祈禱)를 드리고, 3시 반 에는 예비자가 있는 경우에는 성세(聖洗)를 주고, 혹은 견진(堅振)을 주는 것으 로 성무(聖務)의 집행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는 미사성제(聖祭)가 있고, 감사의 기도(祈禱)가 따릅니다. 성사(聖 事)를 받은 교우 15명 내지 20명이 이렇게 해서, 해가 뜨기 전에 물러갈 수 있 습니다. 낮 동안에는 대략 이만한 숫자가 하나씩 들어와서 고해성사(告解聖事) 를 받고, 이튿날 새벽 성체(聖體)를 영한 다음에야 나갑니다.

나는 한 집에서 이틀밖에 머물지 않으며, 그리로 교우들을 집합(集合)시킵니 다. 그리고는 해가 뜨기 전에 다른 집으로 옮겨갑니다.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 통(苦痛)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2시 반에 일어난 다음, 오정까지 기다려서 야 영양가도 별로 없는, 맛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食事)를 하는데, 춥고 건 조한 기후(氣候)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점심을 먹은 후 조금 쉬고 나서, 어른학생들에게 신학강의(神學講義)를 하고, 그런 다음 밤이 될 때까지 또 몇 사람의 고백(告白)을 듣습니다.

밤 아홉 시에는 흙바닥에 돗자리와 달단(韃단)의 양털로 짠 융단을 깔고 잡니다. 조선(朝鮮)에는 침대(寢臺)도 매트리스도 없습니다. 나는 항상 허약(虛弱) 하고 병든 몸으로, 힘들고 매우 바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상 급(最上級), 즉 이 이상은 할 수 없다는 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끝맺어 줄 칼질을 우리가 그 리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理解)가 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의 건강 (健康)은 꽤 좋은 편입니다. 건조(乾燥)하고 추운 이 나라가 내 체질(體質)에 맞 는가 봅니다.

내게 큰 위안(慰安)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매일 드려지는 미사 중에서, 내가 맨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이것은 조선(朝鮮)의 지리적 위치(地理的位置)로 설명이 됨, 이 나라는 우리 대륙의 가장 동쪽 끝에 있어, 프랑스에서 해뜨는 것을 보 는 시각보다 8시간 20분가량 먼저 해돋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옥영 혼(煉獄靈魂)들에게는 그들이 그날 받은 은혜(恩惠)와 서늘함의 소식(消息)을 전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내 이름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다. 내 이름 이 민족들 가운데서 드높기에, 곳곳에서 내 이름에 향과 정결한 제물이 바쳐 진다.?(말라키아 1,11)』

 

⑩ 앵베르(Imbert) 주교의 두 동료(同僚)도 주교와 열심경쟁(熱心競爭)을 벌였고, 똑같은 피로(疲勞)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교사(宣敎師)들에게 고생(苦生)과 곤궁(困窮)보다도 무한히 더 괴로운 것은, 박해상태(迫害狀態)로 말미암아 신입 교우(新入敎友)들의 신앙(信仰)이 끊임없이 위협(威脅)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천주교 원수들의 적의(敵意)가 비록 제1섭정(第一攝政)의 개인적인 호의(好意) 로 억제(抑制)는 되지만, 그래도 자주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여러 마을에 서 몇 몇 교우(敎友)가 붙잡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지나가는 달이 없었다.

1838년 바로 수난축일(受難祝日) 날, 기도(祈禱)를 드리려고 모였던 부인(婦 人) 5명이 서울 성 밖 어디에서 포졸(捕卒)들에게 체포(逮捕)되었다. 그들은 제 손으로 일해서 입에 풀칠을 하는 가난한 괴부(寡婦)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불행히도 배교(背敎)하고 즉시 석방(釋放)되었다. 나머지 4명은 옥에 갇혀 1개월 이 넘는 동안, 여러 차례 무자비한 고문(拷問)을 당해야 했다. 관리(官吏)는 그들 에게서 배교(背敎)한다는 말을 받아내지 못하겠으므로, 꾀를 내어 모호한 몇 마 디를 해가지고서, 귀찮은 존재를 없이하려고 이내 석방(釋放)시켰다. 그러나 포 졸(捕卒)들이 그들의 초라한 오막살이를 약탈(掠奪)한 뒤인지라, 이 여인들은 빌 어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8월에 꽤 심한 위기(危機)가 반도(半島)의 남쪽에 있는 교우촌(敎友村)을 뒤흔 들어 놓았다. 40명가량의 신자가 붙잡히자, 다른 교우들은 추수할 것을 버려둔 채 도망했다. 수령(守令)은 이 사건(事件)이 예기치 않았던 규모(規模)로 확대(擴 大)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가 내렸던 무모(無謀)한 명령(命令)을 후회하고 서 잡힌 신자들을 거의 다 놓아주었다. 그러나 주민(住民) 1백 명 이상이 다른 도로 이사(移徙)하게 만든 이 사건을 감사(監司)가 알고, 수령(守令)과 포졸(捕 卒)들과 옥에 갇힌 신자 6,7명을 그의 감영(監營)으로 소환(召喚)하였다. 밀고자 (密告者)는 귀양을 가고, 수령(守令)은 꽤 많은 돈을 쓰고서야 무사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신자(信者)들은 옥살이와 배교(背敎) 중에서 택일(擇一)을 하지 않으 면 안 되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이들은 심약(心弱)하게도 배교(背敎)하는 쪽을 골라 잡았다고 한다.

1838년 10월에 인천(仁川)에 사는 정 바오로라고 하는 사람이 천주교를 믿기 위해, 조상(祖上)들의 위패(位牌)를 부쉈다. 위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중국(中 國)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朝鮮)에서도, 외교인(外敎人)들은 이 위패(位牌)를 말 할 수 없이 귀중(貴重)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거나, 더구나 그것 을 부수는 것은, 그들이 볼 때에는 도덕(道德)의 근본원리(根本原理)와 사회(社 會)의 기초(基礎) 자체를 공격(攻擊)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 문(所聞)은 이웃에 자자하게 퍼졌고, 또 우리 주님의 예언(預言)을 성취(成就)하기 위하여, 이 새 교우(敎友)의 가족(家族)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이른바 모독(冒瀆)을 사죄(謝罪)하기를 정 바오로가 거부(拒否)하자, 그의 일가친 척(一哥親戚)들 자신이 그를 부사(府使) 이형원(李衡遠)에게 고발하였다.

정 바오로는 도망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으로 인하여, 신자 50명 이상이 흩어지고, 12명가량이 체포(逮捕)되어 옥에 갇혔다. 붙잡힌 신자들 중에 이원명 베드로를 통해야 주요한 죄인(罪人)을 찾아낼 것으로 생각되었고, 모든 책임(責任)이 그에게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는 포졸(捕卒)들 에게 끌려, 서울로 압송(押送)되었다.

그러나 강나루에 이르러서, 호송(護送)하는 포졸(捕卒)들이 떠밀어서 그랬던지, 장차 받게 될 고문(拷問)이 무서워서 자신이 물에 뛰어들었던지, 그만 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제는 중요한 죄수(罪囚)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부 사(府使)는 사태(事態)를 극한(極限)에까지 몰고 가기 싫고, 또 어쩌면 자신의 처 지(處地)가 위태(危殆)롭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들에게 배교(背敎)하기를 요 구하지 않았다. 신자(信者)들은 얼마 후 집에서 멀리 떠나지 말 것과 지시(指示) 가 내려지기만 하면 곧바로 출두(出頭)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석(保釋)되었다.

⑪ 그때 선교사(宣敎師)들과 충실한 신자(信者)들이 받은 위안(慰安)은, 이 위에서 1836년에 신앙(信仰)을 용감히 증거(證據)하는 것을 본 바가 있는 이호영 베드 로의 모범적(模範的)인 죽음이었다.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후, 옥에 갇힌 이호영 베드로는, 그의 처지(處地)와 분리(分離)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자기 영혼(靈魂)을 깨끗하게 꾸미기를 마지 않았다. 그가 다른 고문(拷問)을 당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흉한 냄새가 나는 감방(監房) 속에서 썩어야 하는 고통(苦痛)외에, 특히 교우(敎友)라는 명칭 때문에, 도둑과 살인자들 보다 더 하치로 다루어질 때에,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 는지는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이 베드로는 낙담(落膽)하지 않았으니, 외부에서 오는 위로(慰勞)가 없 는 대신, 천국(天國)의 은총(恩寵)의 위로(慰勞)를 받는 것이었다. 성 바오로와 같이 그는 누구를 믿는지를 알고 있었고, 괴로움과 병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는 것으로 만족(滿足)하지 않고, 거의 계속적으로 대재(大齋)를 지켰다. 그의 정직, 그의 온화함, 그의 상냥함으로 말미암아, 간수(看守)들의 호감(好感)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끈기 있는 권면(勸勉)으로, 함께 갇혀있던 늙은 죄수(罪囚)중의 한 사람을 회개(悔改)시켜, 영세(永稅)를 준비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여전히 꿋꿋하게 뜻을 굽히지 않는 누님 이 아가타와 서로 위로(慰 勞)하며, 같은 날 순교(殉敎)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기력(氣力)이 완 전히 쇠진(衰盡)해지자, 그는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 숨을 쉬 며 말하였다.

?나는 늘 칼을 맞아 죽기를 원했었지만, 모든 것이 천주의 명으로 되는 것이니,

그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4년 동안의 옥고(獄苦)를 치른 후, 그는 무술(戊戌, 1838)년 10월 18일에 자기 의 영혼(靈魂)을 조용히 천주께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Daveluy, Note, p, 359.『긔해일긔』93장. 그의 누님 이 아가타는 다음해 즉 기해(己亥)년에 순 교).

그해 연말에 앵베르(Imbert) 주교는 신자들과 함께 성탄축일(聖誕祝日)을 지 내고 성사(聖事)를 주려고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수리산(안양시(安養市)에서 남서 편으로 걸어서 약 1시간 거리에 있음)으로 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날 포졸(捕卒)들이 주교(主敎)의 은신처(隱身處) 바로 지척에 있는 이 마을 어떤 신자(信者)의 집을 습격(襲擊)하여,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성경(聖經) 몇 권을 압수(押收)하고, 수령(守令)에게 인도하려고 그 집안 식구들을 붙잡았다.

다행이도 이 집안의 친구인 이웃에 사는 외교인(外敎人)이 이 소식을 듣고 달 려와, 포졸(捕卒)들과 타협(妥協)을 시작하여, 100 프랑의 몸값을 치르고서 신자 (信者)들을 놓아주게 하였다. 압수(押收)된 종교서적(宗敎書籍)과 성물(聖物)들은 서로 합의하여 불태우고 나서, 포졸(捕卒)들은 큰 물건(物件)을 놓친 줄은 꿈에 도 생각을 못하고 물러갔다.

⑫ 이와 같이 마귀(魔鬼)가 그들 앞에 끊임없이 일으켜 놓은 여러 가지 곤란(困難) 에도 불구하고, 주교(主敎)와 두 신부(神父)는 용기(勇氣)와 끈기를 가지고 일을 하였다. 1838년 12월 20일에서 이듬해 1월 30일까지, 앵베르(Imbert) 주교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시골의 신자(信者)들을 순회(巡廻)했었다. 모방(Maubant) 신부는 그때에 이웃 도(道)에 있었고, 샤스땅(Chastan) 신부는 남쪽지방의 신자 들에게 가 있었다.

가장 곤란(困難)한 일의 하나는, 상당수의 배교(背敎)한 신자들에게 대해서 어 떠한 태도(態度)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너무 엄혹(嚴 酷)하게 물리쳐도 안 되겠지만, 그들 자신의 이익(利益)을 위해서나 다른 신자들 의 이익을 위해서나,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할 필요가 있 었다. 그뿐 아니라, 온 나라에 기근(饑饉)이 심해서, 임금이 나라의 쌀 곡간을 열 어, 가장 빈궁(貧窮)한 사람들에게 쌀을 좀 나누어 주게 했는데도, 굶어죽는 사 람이 많았다. 이런 때에는 굶주린 포졸(捕卒)들이 좋아라하며, 모든 구실과 모든 기회를 타서 좀 부유(富裕)한 신자(信者)들을 박해(迫害)하여, 그 재물(財物)을 아무 탈 없이 약탈(掠奪)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모든 빈궁(貧窮)을 구해주고, 이런 모든 괴로움을 위로(慰勞)하고, 꺼져가 는 용기(勇氣)를 다시 북돋아주며, 마음속에 신(信) ․ 망(望) ․ 애덕(愛德)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것, 이런 것이 선교사(宣敎師)들의 사업(事業)이었다. 그리고 조 선(朝鮮)의 요구가 그들의 열심에는 부족하기나 한 것처럼, 그들은 교황청(敎皇 廳)이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에게 맡겨준 일본(日本)의 유구(流寇)섬까지도 돌보 기를 잊지 않았다(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6년 4월 26일자 교서(敎書)를 통해, 유 구포교지(流寇布敎地)를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에게 맡겼다. 그래서 앵베르(Imbert) 주 교는 조선(朝鮮)과 유구(流寇)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앵베르(Imbert) 주교는 사천(四川)의 열심한 회장(會長)을 그리로 보냈다. 한 편 샤스땅(Chastan) 신부는 다른 회장 한 사람을 부산포(釜山浦)에 있는 일본 (日本)사람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관심을 끌어, 할 수 있으면 그 중 몇 사람을 입 교(入敎)시키고, 또 가능하면, 2백 년 동안이나 박해(迫害)가 계속되었는데도 불 구하고, 그들 나라에 아직도 신자(信者)들이 좀 있는지 그들한테서 알아보고자 했다.

⑬ 본방인(本邦人) 성직자 양성(聖職者養成)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關心事)였다는

것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위험(危險)이 그 긴급한 필요성(必要性)을 증명(證 明)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理解)가 되는 일이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방(Maubant) 신부는 조선학생(朝鮮學生) 3명을 중국(中國)에 보내는 것으로, 1836년 말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었다.

이 젊은이들은 요동(遼東)과 달단(韃단)과 중국(中國)을 건너질러, 열심과 착한 뜻을 가득 지니고서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들은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경리부 (經理部)에 머무르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신심(信心)과 교리(敎理)와 라틴어에서

그들이 이룩한 진전(進展)은 매우 만족(滿足)스러운 것이었고, 많은 희망(希望)을 걸게 했었는데, 당신의 의도(意圖)를 알 수가 없는 천주께서는, 재능(才能)과 활 기(活氣) 있는 신앙(信仰)으로, 가장 장래(將來)가 촉망(囑望)되던 젊은이를 데려 가셨다. 1838년에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꼬 ․ 사베리오가 열병(熱病)으로 급작 스럽게 죽은 것이다.

전에는 관직(官職)으로 명예(名譽)를 누린 적이 있었으나, 박해(迫害)로 인하여 빈궁(貧窮)에 빠진 홍주(洪州)의 양반 집에 태어난 그는, 신자들에 의해서 사제 직(司祭職)을 받을 자격(資格)이 가장 많은 소년 중의 하나로, 모방(Maubant) 신 부에게 추천(推薦)되었었다. 이 훌륭한 젊은이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겁 내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는 위험(危險)이 닥쳐오기 시작하자, 성사(聖事)를 청하 여, 정신을 깊이 가다듬고서 성사를 받고, 고상(苦像)에 입을 맞추며,

?착하신 예수여, 착하신 예수여!?

를 뇌며 숨을 거두었다.

⑬ 이 무렵에 앵베르(Imbert) 주교는 다른 세 명의 학생을 준비(準備)시키고 있었는 데, 그들을 1839년에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교(主敎) 자신이 쓴 것과 같이

『모방(Maubant) 신부가 보낸 세 소년과, 나 자신이 보내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 소년은 너무나 먼 장래의 희망입니다. 통킹에 계신 베리뜨(Beryte) 주교(主敎) 와 우리 최초(最初)의 교구장(敎區長)들의 본을 따서, 나도 여기에 도착하자 이 내 성년(成年)에 이른 이들 가운데서 사제직(司祭職)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게 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북경(北京)보행꾼으로, 나이 42세에 이른, 독신(獨 身)이며, 우리들을 모두 조선에 인도(引導)해들인 신자를 찾아내는 은혜(恩惠) 를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1801년 박해(迫害) 때에, 눈을 하늘로 돌리고 참수 (斬首)당하기를 원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殉敎者)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 노의 아들입니다.

나는 또 32세 된 홀아비 한 명과, 또 다른 두 청년에 기대(期待)를 걸고 있 었습니다. 나는 조선말을 배우면서 이들에게 의무적(義務的)으로 하루에 두 시 간씩 강의(講義)를 합니다. 올 여름에 이들은 곧잘 라틴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 고, 그중 두 사람에게는 사천(四川)의 아멜(Hmel) 신부가 중국어(中國語)로 번 역한 신학(神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3년 안으로 성품(聖品) 을 줄 희망(希望)을 품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평화(平和)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천주의 의도(意圖)는 사람의 의도와는 같지 않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는 다르다. 이 아름다운 희망(希望)은 무참(無慘)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 편지(便紙) 날짜에서 몇 달이 지난 뒤에, 앵베르(Imbert) 주교와 그의 두 동료 (同僚)는 함께 순교(殉敎)의 길을 걸었고, 조선(朝鮮)의 교회는 다시 목자(牧者) 를 잃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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