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원기도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인 기도는 무엇보다도 천상 선물에 대한 겸손한 요청이며 그것을 받는 자세이다.
은둔자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기도는 언제나 모두를 위해서 또 전(全) 교회를 위해서 행해진다. 교부들은 ‘주님의 기도문’을 해설하면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입증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자는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 바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선보다는 차라리 천상적인 선을 청하는 것이 더 완전할지라도 말이다.
영적 스승들은 만일 우리의 기도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적게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조언이 주어진다.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즉시 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그것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려는 당신의 항구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다 큰 선물을 주시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에 빠져드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요한 9,31 참조). 교부들은 죄인들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그 청원이 무지로 표현되었다면 어떻게 신앙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죄로 인해 야기된 이 참된 선에 대한 무지의 어둠은 의인들의 기도에서 역시 자주 남아 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의식에서 오는 청원보다 더 고귀한 청원을 표현하신다. 마음 은밀한 곳에서 우리의 기도이기도한 성령의 기도는 언제나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신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청이 보다 자주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는데, 곧 죄의 용서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고, 그 결과 전례 안에서 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사는 받은 선물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교 찬가 저자들은 70인 역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셈족 언어를 물려받았으니, 곧 호몰로제오(homologéô), 아이네오(ainéô), 독사조(doxázô), 에울로제오(eulogéô)와 같은 동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용어 에우카리스테오(eucharisté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ía)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인 그리스도교적 감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신약성서에 들어오게 된다. 교부들은 성 바울로가 언급한 기도의 네 가지 형태(déêsis, proseuchê, énteuxis, eucharistía: 1디모 2,1)를 설명하면서 에우카리스티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오리게네스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제로 이 네 가지 측면은 청원과 감사의 응답 둘로 감소되며 또 떼어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감사의 응답은 점차 영성생활의 핵심이 되어갔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인 삶 전체는 지속적인 탄원과 감사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5)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상승
이미 고대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고양(高揚)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플라톤은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상승(anábasis)과 높은 곳에서 오는 선(善)에 대한 관상, 즉 이성적인 세계를 향한 영혼의 상승을 묘사한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플라톤적 지성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이 상승의 탁월한 기관인 ‘정신’(noûs)의 개념을 설명하고 적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곧 그것을 ‘마음’(kardía)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두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 안에서 취해져 변화된다는 주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성부이신 하느님을 향해 고양되기 때문에 이 상승은 (플라톤적 의미로) 하나의 순수한 ‘봄’(vision)에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과 정신의 대화”가 된다. “독수도승은 밤낮 하느님과 대화하므로 수도승이라 불린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육체는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이 상승과 그분과의 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였다. 이교 예식의 형식주의를 거슬러 교부들은 자주 육체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성 바울로는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였고 우도는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바실리우스의 다음 권고가 훨씬 더 인상적이다. “영혼의 능력이 어떻게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영혼의 감수성이 어떻게 육체에 의존해 있는가를 생각하라.” 조시프 볼로코람스크는 이 점에 관한 회수도승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육체를 구부리는 것은 내적인 주의를 쉽게 해주며, 내적인 정신집중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와 더불어 외적으로 드러난다. 고독가들 역시 무엇보다도 장궤나 부복의 형태로 ‘몸의 기도’를 실천하였다. 헤시카스트들의 심신상관적(心身相關的) 기법은 육체를 자주 관상의 상승에 연루시키고자 한다.
끝으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가 말하는 바를 외적 예식들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 영혼에 적합한 자질을 자기 몸으로도 표현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인 기도는 무엇보다도 천상 선물에 대한 겸손한 요청이며 그것을 받는 자세이다.
은둔자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기도는 언제나 모두를 위해서 또 전(全) 교회를 위해서 행해진다. 교부들은 ‘주님의 기도문’을 해설하면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입증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자는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 바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선보다는 차라리 천상적인 선을 청하는 것이 더 완전할지라도 말이다.
영적 스승들은 만일 우리의 기도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적게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조언이 주어진다.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즉시 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그것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려는 당신의 항구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다 큰 선물을 주시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에 빠져드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요한 9,31 참조). 교부들은 죄인들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그 청원이 무지로 표현되었다면 어떻게 신앙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죄로 인해 야기된 이 참된 선에 대한 무지의 어둠은 의인들의 기도에서 역시 자주 남아 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의식에서 오는 청원보다 더 고귀한 청원을 표현하신다. 마음 은밀한 곳에서 우리의 기도이기도한 성령의 기도는 언제나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신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청이 보다 자주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는데, 곧 죄의 용서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고, 그 결과 전례 안에서 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사는 받은 선물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교 찬가 저자들은 70인 역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셈족 언어를 물려받았으니, 곧 호몰로제오(homologéô), 아이네오(ainéô), 독사조(doxázô), 에울로제오(eulogéô)와 같은 동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용어 에우카리스테오(eucharisté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ía)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인 그리스도교적 감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신약성서에 들어오게 된다. 교부들은 성 바울로가 언급한 기도의 네 가지 형태(déêsis, proseuchê, énteuxis, eucharistía: 1디모 2,1)를 설명하면서 에우카리스티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오리게네스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제로 이 네 가지 측면은 청원과 감사의 응답 둘로 감소되며 또 떼어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감사의 응답은 점차 영성생활의 핵심이 되어갔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인 삶 전체는 지속적인 탄원과 감사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5)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상승
이미 고대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고양(高揚)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플라톤은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상승(anábasis)과 높은 곳에서 오는 선(善)에 대한 관상, 즉 이성적인 세계를 향한 영혼의 상승을 묘사한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플라톤적 지성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이 상승의 탁월한 기관인 ‘정신’(noûs)의 개념을 설명하고 적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곧 그것을 ‘마음’(kardía)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두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 안에서 취해져 변화된다는 주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성부이신 하느님을 향해 고양되기 때문에 이 상승은 (플라톤적 의미로) 하나의 순수한 ‘봄’(vision)에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과 정신의 대화”가 된다. “독수도승은 밤낮 하느님과 대화하므로 수도승이라 불린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육체는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이 상승과 그분과의 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였다. 이교 예식의 형식주의를 거슬러 교부들은 자주 육체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성 바울로는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였고 우도는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바실리우스의 다음 권고가 훨씬 더 인상적이다. “영혼의 능력이 어떻게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영혼의 감수성이 어떻게 육체에 의존해 있는가를 생각하라.” 조시프 볼로코람스크는 이 점에 관한 회수도승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육체를 구부리는 것은 내적인 주의를 쉽게 해주며, 내적인 정신집중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와 더불어 외적으로 드러난다. 고독가들 역시 무엇보다도 장궤나 부복의 형태로 ‘몸의 기도’를 실천하였다. 헤시카스트들의 심신상관적(心身相關的) 기법은 육체를 자주 관상의 상승에 연루시키고자 한다.
끝으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가 말하는 바를 외적 예식들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 영혼에 적합한 자질을 자기 몸으로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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