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3)

시릴로1004 2009. 8. 8. 08:26
2. 기도의 단계와 유형

1) 기도의 단계
기도 주에 인간의 모든 힘과 능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드러난 요소에 따라 기도의 다양한 단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은둔자 테오파네스는 이 단계들의 전통적인 체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구조와 일치한다.
(1) 몸의 기도 혹은 구송기도
(2) 정신기도
(3) 지성과 마음의 기도 혹은 단지 마음의 기도, 감성의 기도
(4) 영적인 기도 혹은 관상

첫 번째 단계와는 달리 뒤의 세 가지 형태는 ‘내적 기도’라고도 불린다.
몸의 기도는 본문을 읽거나 암송하고 또 부복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스승들은 이런 기도의 형태들을 무엇보다도 보다 더 차원 높은 기도를 위해 필요한 준비, 하나의 단계, 꽃과 열매에 선행하는 잎, 예수의 육신과 첫 접촉, 혹은 하느님의 창조하는 말씀과 세상 안에 작용하는 말씀의 권능에 우리 인간의 말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의 기도는 분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도의 보다 높은 단계들로 올라가기 위한 첫 도구로서 몸의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떤 주의나 정감 없이 행해지는 기도 양식들에 대한 단순한 반복을 혹평한다. 예를 들면 마르티리우스 사도나(Martyrius Sahdônâ)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두려움과 주의 안에서 우주와 주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성무일도와 기도는 헛되고 무익하다.” 반대로 오리게네스는 예수와의 이 육체적인 첫 접촉 자체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암송하는 기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악마는 이해하지 않는가! 그러면 결국 악마는 쫓겨난다고 주장하는 어떤 저자들도 있다.
기도의 두 번째 유형은 추론적인 지성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다. 서방에서 숙고, 성찰, 묵상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동방에서 이런 형태의 정신기도를 몰랐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테오파네스는 이런 수행들의 상대적 가치가 간과되지 않을까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지성적인 숙고는 오로지 마음의 기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암송된 말씀들을 더 잘 맛보기 위해서 그것들을 묵상(되새김질) 한다.
감성이 서서히 마음을 달구기 시작할 때,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탄식’이 될 것이다.
‘마음의 한 상태’가 되는 기도는 이미 참된 기도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택된 이에게는 보다 나은 관상이 유보된다. 이 관상은 영적 요소가 육적 요소를 또 생각들과 인간적 감정들을 지배할 때 실현된다. 또 기도가 성령의 깊이 안에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침묵 안에서, 탈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 실현된다.

2) 전례기도
동방은 공적기도의 교회적 성격에 관한 아름다운 내용들을 남겼다. 은둔자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교회가 예식을 거행하며, 거기에 참석할 때 우리는 교회에 결합되고 교회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다. “외적 예식들을 멀리하는 사람은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며,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는 사람은 주님이 약속하신 큰 상급을 포기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 18,20)”
교회성에서 예식의 성사적 성격이 유래한다. 사실상 성사들은 말하자면 교회생활 전체와 교회전례의 구성요소이다. 불가코프(Bulgakov)는 동방 예식들의 현실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보브린스키(B. Bobrinskij)는 성탄절에 교회들 안에서 예수께서 참으로 탄생하시고 부활절에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런 성체성사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고골(N. Gogol)은 자신의 저서『거룩한 전례에 관한 묵상』에서 공적기도의 교육적 성격을 유효적절한 방식으로 강조하였다. 예식들은 그리스도인의 입맛을 돗우고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일종의 학교 역할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예식들 안에는 형식주의라는 실제적 위험이 숨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식의 복잡성 역시 순수한 기도의 단순성을 방해할 수 있다.

3) 이콘
이콘은 동방 영성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성화벽을 이루고 있으며 또 행렬에도 사용되며 신자들을 축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각 가정에도 ‘아름다운 모퉁이’라고 칭하는 작은 성소가 있으며, ‘가정의 이콘’이 그려진다.
구원경륜에 밀접히 연결된 성상(聖象)은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의 주된 두 측면을 강조하는데, 곧 ‘진리의 선포’와 ‘하느님 은총의 전달’이다.
이콘은 문서전승과 구두전승처럼 교회의 거룩한 전승을 표현한다. 787년 니케아 공의회는 바실리우스를 따르면서 이콘을 신앙 선포에 비유한다. 이콘 예술은 사제직무에 다가갔다. 화가들에게 부과된 전통적 지침들이 여러 작품에 수집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푸르나의 디오니시우스(Dionisius di Furna, +1745)의『Hermêneía tês zôgraphikês』이다. 반면, 러시아에서 이 지침들은 ‘포들린니키’(podlinniki)라고 불려졌다.
거룩한 진리 선포로서의 이콘은 하느님 말씀의 역동적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은총은 성상(聖象)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교회의 전례적이고 성사적인 생활은 표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콘은 더 높은 실재를 표현하고 어느 정도 그 실재를 육화시키고 현존하게 하는 상징이다. 이콘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결과 이콘은 공경되고 관상된다. 따라서 이콘 예술의 목적은 그 가시적 표상으로 하느님 현존을 증거하고 또 볼수 있는 모든 것의 의미를 밝혀내는데 있다. 이콘 예술의 목적은 관상이다. 이콘화가는 자기가 그리는 세계의 거룩하고 신비적인 의미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동기 때문에 이콘의 상징성이 그렇듯 심오한 것이다. 즉 그 구성과 전망, 색깔과 빛, 장식요소 모두 영적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한편, 이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콘이 드러내는 신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순수한 양심으로 합당하게 이콘에 다가가야 한다.

4) 교회-건물의 상징
교회의 상징성은 4세기부터 해석되고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7세기와 8세기에 증거자 막시무스의『미스타고기아』(Mistagogia)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Sofronius),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게르마누스(Germanus) 그리고 후에 테살로니카의 시메온의 작품들 안에서 보다 완전한 신학적 표현을 얻게 된다.
교회-건물은 일차적으로 교회-집회(신자들의)의 상징이다. 그 안에서 영혼들은 단일체를 이루는데, 성령께서 그들을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이 새로운 성전, 그리스도 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전례적 희생을 통하여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성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동방인들은 오히려 다른 본질적 진리, 목적과 결과, 이 희생의 의미 자체, 즉 인간과 가시적인 세계 전체의 변형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다.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예식의 아름다움 안에서 또 건물의 상징성 자체로 인해서 어느 정도 눈에 보이게 된다. 모스코바의 총대주교 알렉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당 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보는 것과는 구별된다. 모든 것이 빛나고, 모든 것이 정신을 들어 올리며, 정신을 이 세상의 통상적인 생각과 느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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