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의 하느님
주님, 내 기도에 대해서 당신과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종종 당신은 내가 기도 중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을
거의 귀담아 들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오니
제발 지금은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오, 주님이신 하느님!
내 기도가 빈약하여
당신의 기대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내가 무엇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지
내 자신조차 모를 정도로
도무지 마음을 쓰지 않으니 말입니다.
흔히 나는 기도를
꼭 해야만 하는 일과나 의무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해치워 버리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것을 곧잘 잊어버리고 맙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문을 이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작 그것이 내 기도입니다.
그 점은 나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나의 하느님
내 기도가 너무 빈약하다고
당신께 사과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어찌 당신과 이야기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저 멀리 계시고 너무나 신비스런 분이십니다.
기도할 때 내 이야기는
마치 어떤 깊고 어두운 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곳은 내 이야기가
당신의 심저에 도달되었음을 보증해 주려는
메아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는 곳입니다.
주님, 내 전 생애를 통해
한마디 대답도 듣지 못하고 기도한 적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거늘 이제 무엇을 더 당신께 여쭙겠습니까?
나는 내게 대답해 주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라고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물들에 몰두하느라고
시시각각 어떻게 당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는지를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응답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아십니다.
더구나 당신은
내가 기도 중에 내게 일어나는 내적 자극과
묵상 중에 받는 우연한 빛이
당신의 말씀이고 당신의 현시라고
내가 말씀드려야만 합니까?
물론 이것은 신심있는 작가들이 피력하는
적절하고 편리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답변에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내가 듣고 싶어하는 것은 당신의 말씀,
당신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체험에서 계속 발견되는 것이라곤
고작 내 자신과 메아리 없는 내 하소연뿐입니다.
비록 내 자신과 내 사상이 당신께 관한 것들이고
또한 뭇 사람들이 심원한 사상으로 여길지라도
그것들은 기껏 남을 위한다는 뜻에서 내게 유익할 따름입니다.
나는 소위 내 자신의 '심원함'에 온 몸이 오싹합니다.
그것은 고작 인간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내심이라는 것도 나를 전율케 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헛된 소동에 말려들어가
방탕하게 되는 것보다 더 공허한 마음이 남는
자신만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나는 나를 잊을 수 있을 때에만
내 자신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로써 자신을 이탈할 수 있고
당신 안에서 생명을 찾을 수 있을 때에만
나를 지탱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당신은 한사코 내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시종일관 멀리 계실진대 내 어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왜 당신은 그다지도 침묵을 지키십니까?
당신은 내 이야기를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으시면서
왜 당신께 이야기하자고 내게 명하십니까?
당신의 침묵이야말로 듣고 계시지 않는다는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까?
아니면, 당신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나의 전부를 송두리째 털어놓을 때까지
당신은 정말 내게 귀기울여 주시며
내 생애 전체에 걸쳐서 귀기울이고 계십니까?
당신은 내게 당신의 말씀,
당신 영원의 말씀을 이야기하시기 위하여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하기에
그다지도 침묵을 지키시는 것입니까?
당신은 영생의 찬란한 말씀으로써
이 세상의 암흑으로 허덕이는
한 가련한 인간의 온 생애에 걸친 독백을
하루 아침에 매듭지어 주실 수 있기에
그다지도 묵묵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영원의 말씀으로써
내 마음 그윽한 곳에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실 생각입니까?
도대체 나의 삶은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염원에 불과합니까?
인간의 언어로 드리는 내 모든 기도라는 것이
그렇게도 염원의 정식에서 동떨어진 것입니까?
영원히 당신을 소유하는 그것이 바로
나의 염원에 대한 당신의 영원한 대답입니까?
내가 무한한 약속으로 채워진 진정한 대화가 되기를 기도할 때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내 좁은 마음에
당신이 이야기하심으로써
당신의 침묵은 실지로 들을 수 있는 말씀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당신의 침묵은
언제 자체가 나처럼 보잘 것 없는
미천하게 되어버리는 말씀보다도
훨씬 더 심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주님, 그건 정말 그렇다고 여깁시다.
하오나 그것이 내 불평에 대한 당신의 대답일 경우에
일단 당신이 내게 대답해 주시기로 결정했을 경우에
나는 여전히 당신께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이 이의는 당신의 침묵에 대한 불평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 번민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오, 아득히 멀리 계신 하느님!
만일 나의 삶이 유일한 기도가 되기로 되어있다면
또한 내 기도가 당신의 면전에서
겸허하게 계속되는 이런 생활의 일부분이 되고자 한다면
나의 삶, 나의 진면모를
당신 앞에 송두리째 드러낼 힘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하오나 이것이 도무지 내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입으로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내가 제대로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내 생각과 의지 그리고 행위는 응당
자기네가 해야 할 역할을
고분고분히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오나 기도의 목적을 설정하는 이는 내 자신입니까?
결곡 나는 나되 말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행위로만 기도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기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 속에 내 자신을 투입시켜야 합니다.
비록 내 의지가
내 영혼의 표면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너무 나약하여 참 '나'가 있는 내 존재의 깊은 지면에 스며들
지 못할지라도
그 곳에서 내 삶이 보이지 않는 조수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따라 부침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나는 그 얼마나 무력한지요!
당신을 사랑하고자 원할 때에
나는 진정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은 자신을 완전히 쏟아서 비우는 것이며
자기 존재의 가장 내밀한 데서부터 전적으로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말할 때는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기도는 심층으로부터
내 마음을 절대적으로 양도하고
영혼의 지성소를 개방하는 것일진대
내 어찌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겐 이러한 지성소의 육중한 몸을
조금도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의 무궁한 신비 앞에
힘없고 맥없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신비야말로 평소의 내 자유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곳에 숨겨져 있어
동요되지도 않고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내 하느님, 나를 좀 더 당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
당신 앞에 숨겨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기에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내 기도가 꼭 열광적이거나
활홍경에 빠져야만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비록 행복과 환희로 또는 자신을 기꺼이 양도하는
찬란한 광휘로 채워져 있지 않는 기도일지라도
참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체내에서 서서히 흐르는 혈액순환과도 같습니다.
그 안에서 비통과 슬픔은 내적 인간의 생혈을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심연으로
면면히 흘러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기도 중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
내 생각이나 느낌, 결의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만을 당신께 드릴 수 있다면
다른 식으로 기도해도 좋겠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내게 힘겨운 힘입니다.
언제나 판에 박힌 천박한 사물에다
내 생명이 내던져져 있기에
나는 내 자신에게까지도 낯선 이방인인 까닭입니다.
오, 멀리 계신 하느님!
자신조차도 발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당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찌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내 하느님,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내가 기도를 회피하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나의 천박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한하심과 거룩하심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영혼의 메마른 장터로부터는 달아나고 싶습니다.
내가 속세를 떠난 이래로 기도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내 공허의 황무지에서 방황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뵐 수 있고 흠숭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인, 내저 자아의 참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아직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거하시는 곳이 차단되어
내가 당신 성당 앞 장터로 쫓겨났을 때, 불행히도
내가 속세의 부산한 소란으로 이 장터를 가득 채우는 것을
당신은 애정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기도하려고 애쓸 때
이러한 혼잡에서 나오는 공허한 소음이
오히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정적보다
훨씬 더 내게 감미로움을
당신의 자비로써 이해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고의로 세상의 소음을 차단한 이래
이 가공할 정적은
내가 기도하려는 변변찮은 노력의 유일한 성과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 침묵의 그 감동적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당신은 기도하라고 내게 명하셨으니
내 어찌 당신이 불가능한 것을
내게 명하셨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기도하라고 명하셨음을 믿으며,
당신 은총으로써 기도가 지속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요구하시는 기도란 결국
내 존재의 핵심에 늘 존재하시는 당신이
안에서 대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면서
그저 끈기 있게 당신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자신 안으로
내 고유한 존재의 내밀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 생애에 적어도 한 번은
내 선혈의 잔을 당신 면전에서 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간은 참으로
내 사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이 평범한 의미를 지닌 기도 중에 올 것인지
내 영혼의 구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다른 시간에 올 것인지
내가 임종할 때에 올 것인지
내 목숨이 끝나는 그 시간처럼
분명히 알 수 있는 시간이 될는지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될는지
아니면 한 순간에 불과할는지
이 모든 것은 당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 생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열어주실 때
나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당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조용히,
알지 못하게 문을 열어 주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과 당신 속으로 들어갈 중대한 기회를 놓치게 될까봐
더 이상 세상사에 골몰하지 않으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모든 능력과 속성이 원초대로 합일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그 무엇인 '내 자신'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여
다시 당신께 사랑의 선물로 되돌려 드릴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내 생애에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그 마지막 기회가
내 죽음의 순간이 될 것임을 알 따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지막 시간,
소름이 끼치는 시간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말씀드리게 하시고
당신은 내 자신을 털어놓도록 하실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그러한 결정적인 시간에 있어서
당신의 침묵을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신비가들입니다.
- 침묵속의 만남 중에서
'칼라너 묵상 및 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펌~) (0) | 2009.06.02 |
---|---|
당신의 기도의 가치를 인식하십시오 (0) | 2009.05.31 |
영적 자유를 위한 기도 (0) | 2009.05.25 |
당신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0) | 2009.05.25 |
우리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0) | 2009.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