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

장자의 소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비교

시릴로1004 2010. 1. 14. 13:43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 2008학년도 제2학기

• 동양의 생명사상

• 지도교수 ; 이향만 교수님

• 2008. 12. 연구과정 강 금 실

 

? 장자의 소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비교

 

“莊子”에서 ‘逍遙’는 自由한 상태를 의미하는 주제어라 할 수 있다. 이 소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도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언어에서 전달되는 느낌으로 본다면, 그 무엇도 고민하거나, 잡거나 하지 않은, 홀가분한 상태로서, 한가로이, 여유있게 거니는 상태가 떠오른다. 그 거님은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먼거리도 아니고, 광대한 공간도 아니며, 가벼이 잠시동안의 놓아버림 같은 것이다. “장자” ‘제물론’에서 “만세에 한번 그것을 설명할 줄 아는 대성인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침과 저녁 사이에 일어난 일과 같은 것이다”라고 함은 이와 같은 소요로서의 자유상태가 시간적으로 매우 짧은 순간의 일과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소요로서의 자유함이 지극히 소소하면서 짧다고 함은, 그 자체가 어떠한 고정되고 항시적인 완성의 단계나, 영원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이는 장자에서 말하는 자유가 생명현상이 낳음에서 죽음까지, 죽음 그 너머에까지 계속 변화해가는 과정이며 죽음도 그 변화의 일부로서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생명이 시작되는 순환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정이면서 순환이고 결코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 변화로서의 삶을 通察할 수 있다면, 그 변화의 시시각각 逍遙로서의 자유한 상태인 것이지, 산기슭에서부터 정상까지 힘들게 올라가서 마침내 다다라 더 이상 갈 곳 없는 불멸의 상태가 자유는 아닌 것이다.

 

소요로서의 자유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야기가 ‘齊物論’의 나비꿈이다. 여기에서 나비는 몇 가지 중첩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충과 번데기로부터 시작된 존재가 오색찬란한 날개를 피워오르듯 날아다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변화로서의 자유가 ‘質的’인 변신이며, 그 질적인 변신은 지속적인 추구와 지향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치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처럼 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새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이 나비는 생명이 지극히 짧다. 그럼에도 나비가 비극적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며, 스스로도 슬프지 않으며, 나비의 날개짓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과 자유함이 훼손되지 않는다. 자유는 소요이며 시시각각의 변화이며, 거기 그 자리에서 자유로움이기 때문이다. 질적인 변신으로서의 변화는 스스로 깨어나가는 과정이고, 만개한 그 순간 거기에 몰입되어 가벼운 상태가 자유이다.

무엇보다도 나비는 꿈이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꿈 속의 나비는 너무나 황홀하고 생생하고 그 느낌이 절절하다. 그러나 깨어보니 꿈이다. 꿈과 실제가 다른게 있다면, 육체성이다. 꿈 속의 나비는 현실의 육체성이 없기에 훨훨 날아다니는데에서 그치지 흉한 허물로 쓰러져 죽는 죽음은 거기에 없다. 이것은 육체성-욕망과 집착의 저장고-을 지닌 사람이 나비와 같은 상태의 소요를 누리는 것이 ‘꿈 같은 일’, 즉 매우 다다르기 어려운 상태, 자유의 성취가 사람의 꿈이며 쉽지 않은 경지임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장주는 나비꿈을 꾸면서 스스로 나비로 훨훨 날아다니며 즐거워하였다. 깨어보니 꿈이었으나, 현실에서 육체성의 한계에 매이지 않고 꿈인듯 살 수만 있다면, 장주는 현실에서도 꿈속에 나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유로우며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장주는 그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스스로 소요의 상태에 놓일 수 있다면 장주는 현실에서 나비가 될 수 있다(나비처럼 살 수 있다). 이 때 장주인 육체성의 사람은 꿈속의 일이고, 나비가 된 장주는 질적인 변신을 거친 사람으로 서의 현실의 일일 수 있다.

또한 애초부터, 장주가 있기 전부터, 나비가 먼저 있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고, 장주가 다시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른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구분이 있고, 이것을 사물의 변화라고 하나. 한 걸음 더 나가면, 나비는 장주가 될 수 있고, 장주는 나비가 될 수 있다. 여기 이르면 이미 나비는 소요의 자유이면서 다시 생명과정의 순환 속에서 장주로 변화되는 가능성을 갖는 것이고, 나비가 더 아름답다거나, 장주가 더 자유롭다거나 하는 판단조차 없어진다. 순환과 과정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내가 나비인가, 장주인가 분별하지 않고, 항상 거기에 자유한 상태.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소요로서의 자유라고 보여진다.

그 소요는 변화로서의 생명과정과 삶의 진리를 통찰하고 그 본연에서 살고자 하는 그침없는 변신의 노력에서 주어진다.

 

장자는 자유를 ‘逍遙’로 표현하였는데, ‘소요’의 시각적 이미지를 그려보면 성경에서는 ‘소요’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나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살 때이다. 자그마한 동산 안에서, 아무런 시간의 구애도 없다. 거기서 아담은 이브와 함께 과일나무 우거진 동산을 거닌다.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알몸으로도 춥지 않고 덥지 않으며 몸과 마음에 걸림이 없이 가볍고 평온하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21장 8절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난 장면이다. 제자들이 밤새 배를 띄우고 어느덧 새벽, 물안개 피어오른 티베리아스 호숫가, 예수가 소리도 없이 나타나서 거기 서 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는다. 잔잔한 물이 평화롭게 펼쳐진 호숫가. 하얀 햇살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조용히 비추이는 아침. 예수와 제자들은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둘러앉아서 구운 고기와 빵을 나눠먹는다.

 

에덴동산에서 소요하던 아담. 그 소요는 신이 생명을 불어넣은 아담이 신의 영역 속에 분리됨이 없이 결합되어 있었을 때의 상태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나서 자신들의 알몸을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한다. 신이 아담, 너 어디 있느냐고 찾지만 아담은 숨어버린다. 결함없는 상태의 신의 영역으로부터 사람이 분리되는 시원은 금기를 위반한 죄, 그로부터 생긴 자의식이 불러일으키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다.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고 묻는 신에게 아담은 이브가 주었다고 핑계를 댄다. 그리해서 에덴동산에서의 소요는 끝이 나고 追放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담의 이야기에 비춰보면, 그리스도교에서 자유는 생명을 주신 신, 생명의 근원적 실재, 그 안에 일체로서 놓여있음이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삶은 자유로부터의 추방으로 정의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비롯된 이 자유로부터의 타락, 멀어짐은 사람의 역사가 사람의 자의식과 앎-分別智의 능력에 의해 가능해지고 이어져온 것인 반면, 역사의 원동력 자체가 생의 근원적 실재(神)를 배반한 것이라는 점, 원래상태의 자유를 상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삶을 이율배반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인다. 원래 있던 자리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점에서 삶은 不安하다. 사람이 추구해야 할 완전함은 온전히 신의 영역으로 회귀해야 주어지고, 그것은 금기를 위반한 죄에 대한 속죄와 용서, 수치심과 두려움, 인간의 감정, 욕망을 반영하는 자의식을 버리고 동산에서의 소요, 자유로 “回歸”함을 지향한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극복된 결함없는 소요상태로의 회귀는 역사적 존재인 사람의 존재여건상 불가능하고 그래서 딜렘마이다. 그러나 그침없이 이를 포기하지 않고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아담의 이야기는 속죄와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자의식을 버리고 궁극적 실재, 생명의 원래상태로의 회귀, 그 상태에서야말로 소요로서의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요한복음 21장 8절, 일곱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 이야기는 부활 이후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전, 그 얼마 전, 한밤중에, 느닷없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잡혀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모함과 수모 속에 육체가 더렵혀지고 사형의 피가 넘쳐흘렀으며, 제자들의 정신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그 고요한 아침에 호숫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도란도란 아침식사를 함께 한다. 이 장면만을 보면, 예수 돌아가시기 전 최후의 만찬 이후 제자들을 다시 만나 나누는 이 아침식사는, 그 사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분위기이다. 부활 이후 드러냄과 만남이 이렇게 소소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대수롭지 않으며 평온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 부활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참 고요하고 아름다우면서 참 평범하다. 호숫가의 아침식사. 집을 떠나 풍경이 그윽한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제 막 피어나는 아침햇살을 맞으면서 향긋한 바람의 쓰다듬음을 느끼면서 막 구운 신선한 식사를 한다는 것.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소요.

 

아담의 추방 이후 인간에게 낙인된 죄의 흔적. 자유를 상실한 고통스러운 상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대속되었다고 이야기된다. 말하자면, 수난 이후의 부활은 그리스도와의 일체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속죄된 사람이 생명의 근원, 신, 궁국적 실재에의 회귀, 자유를 되찾음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자유는 우선 장자가 이야기하는 자유의 逍遙 상태와 다를 바 없다고 보인다. 자유함은 호숫가의 아침식사와 같이 소소하고 평범하면서 충만함이다. 자유함은 생의 과정을 떠나 존재하는게 아니라 일상성의 회복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수치심, 두려움 모두 내려놓고서 스스로 죄인됨의 겸손함으로 삶을 공경하고 거기에 비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머무는 것이다.

 

장자의 소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공통점은 삶의 질적인 변화, 변신을 통해서 얻어지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내지고 있으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정에 동참함으로써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장자의 소요가 지극히 짧은 것으로 다시 변화의 순환 속에 놓여진다면, 삶이 변화임을 통찰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 소요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면, 요한복음의 호숫가 이야기는 부활이후의 자유로운 삶은 逍遙이며, 삶의 일상 속에서 내면의 질적인 변신이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지금 이 삶을 떠나 다른 삶이 주어지는게 아니라는 것, 스스로 통찰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장자에서 생명의 변화과정과 순환이 강조된다면, 그리스도교에서 삶을 추방으로 파악하여 수난을 건너뛴 부활을 통해서 자유를 회복하는 과정은 일면 자유로부터의 추방과 거듭남, 회복의 순환-돌아감-구조라는 점에서 공통되어 보인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론이 생명의 본질을 변화로 파악하고 본질론(과정적 존재론, becoming)으로서 자유를 언급하는데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분명하게 인간의 역사history-역사관, 시간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장자의 자유론은 “視覺”의 顚覆, “가치관”의 혁명적 역전을 시도하는 비역사, 탈역사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그와 같은 일면도 있는 반면-부활을 통한 자유의 획득이 일상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내면의 전복이라는 점에서-분명하게 인간에 대한 하나의 역사관을 내포하고 있고, 그점에서 훨씬 역사의 현실영역에 개입하는 구체적인 실천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인다.

장자가 후대 중국 禪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반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이후 스스로 현실권력의 중심에 서거나, 20세기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운동에 중요한 이론적 근거와 실천적 개입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들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한다.

 

또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에서의 소요는 스스로의 영적 상승과 통찰을 통해 얻어진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아의 자의식이란 것 자체가 자유로부터 분리되면서 생긴 것이므로, 자기를 버리고 궁극적 실재인 神에게 주체를 내어줌으로써만 그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장주와 나비가 구분되어야 하되 변화이며 자유할 수 있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인은 각자이되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 모두 神안에 구분 없이 일체화될 때에만 자유하다.

 

장자의 생명이 변화과정과 순환이 강조되고, 그것을 통찰하는데 있음이 소요라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생명의 변화와 순환보다는 인간생명이 원죄로서 안게된 한계와 “回歸”, 더 나아가 천국으로의 수직적 상승, 초월이 제시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하겠다.